들어가며
〈오! 수정〉은 홍상수 감독의 세 번째 장편이다. 영화에서는 ‘시점’이 교차한다. 동일한 상황을 한번은 남성(정보석)의 시점으로, 또 한번은 여성(이은주)의 시점으로 보여준다.
시점에 따른 ‘기억’의 차이는 적나라하다. 남자의 잃어버린 장갑을 여자가 찾아주었다. 남자는 여자가 들고 있던 장갑을 자신이 발견했다고 기억한다. 여자는 남자의 장갑을 자신이 먼저 건넸다고 기억한다. 키스에 대한 기억도 판이하다. 남자의 기억 속에서 여자는 키스가 좋았다며 수줍게 웃는다. 여자가 기억하는 건 첫 키스임을 고백하며 울음을 터뜨리는 스스로의 모습이다. 감독의 말은 인간의 본성을 겨냥한다.
기억은 욕망에 따라 변질된다.
모두가 자신의 욕망에 따라 사고한다. 자기중심적이다. 나는 아닌 것 같다고? 질문 하나. 당신이 찍힌 단체 사진을 볼 때 누구를 제일 먼저 찾는가. 예외는 없다.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이다.
비법
아버지의 서재에서 백종원을 알았다. 2004년이었다. 그의 첫 번째 책이었다. 제목은 『돈 버는 식당, 비법은 있다』. 저자의 투박한 외모만큼이나 내용도 묵직했다. 어떤 기준으로 삼을 만했다. 안나 카레니나의 문장을 빌리자면 ‘돈 버는 식당’은 모두 백종원이 말한 대로 하고 있었다. ‘망하는 식당’은 제각각의 이유가 있었다.
비법은 특별할 게 없었다. 손님의 입장에 섰다. 그뿐이었다. 양질의 음식을 넉넉하게 주었다. 주방에는 “쌈을 아끼면 쌈밥집은 망한다”라는 표어를 붙였다. 가장 자신 있는 단일 메뉴로 승부했다. 알아보기 쉽게 메뉴판을 제작했다. 밝게 인사했다. 식당에 TV를 두지 않았다. 종업원들이 밥 먹는 모습을 손님에게 보이지 않았다.
역지사지였다. 황금률이었다. 백종원 스스로가 대접받고 싶은 대로 대접했다. 그가 보기에 비즈니스는 이게 전부였다. 막상 제대로 실천하는 음식점이 드물었다. 신기한 일이었다. 하나같이 자기중심적이었다. 백종원에게 ‘당연한’ 행동들은 비법이 되어 퍼져나갔다.
2004년에는 백종원을 아는 사람이 주변에 없었다. 지금은 대한민국에서 백종원을 모르는 이가 없다. 1,400개의 음식점에 새겨진 얼굴이 되었다. 자신의 이름을 내건 인기 TV 프로그램을 진행한다. 사업가이자 음식 탐구가다. 컨설턴트이고 방송인이다. 매번 다른 옷을 입지만 백종원 브랜드를 관통하는 키워드는 하나다. 역지사지. 백종원을 국민 브랜드로 만든 ‘비법’이다.
운명
만화 같은 가족이었다. 아버지는 무엇을 먹었는지가 곧 그날의 기분이었다. 가족끼리 외식을 나가면 음식점을 다섯 번 옮겨 다녔다. 입에 딱 맞는 곳을 찾기가 그만큼 어려웠다. 가풍은 장남인 백종원에게 스며들었다. 중학생 때부터 요리책을 탐독했다. 주방은 요리 연구실이었다. 대학에 가서는 수업 대신 맛집을 순례했다.
군 시절은 그 절정이었다. 군 역사상 최초로 식당을 맡은 장교가 되었다. 백종원의 음식을 맛본 장군님의 지시였다. 시내의 음식점들을 돌았다.
아구찜 레시피를 알려주실 수 있을까요? 장군님께 만들어 드리려고요.
일반인이라면 꿈도 꾸지 못할 요청을 주방장은 받아들였다. 기밀 레시피까지 아낌없이 퍼주었다. 군인한테 가르쳐 줘봐야 뭐 어쩌겠어? 착각이었다. 먹어 보기만 해도 조리법의 80%를 알아내는 남자였다. 모든 노하우가 백종원의 것이 되었다. 호랑이가 자라났다.
그래도 음식점을 할 생각은 없었다. ‘가방끈 짧은’ 사람이 음식 장사를 하던 때였다. 이래 봬도 명망 있는 교육자 집안의 장남이었다. 연세대 나온 남자였다.
1993년, 우연히 찾은 부동산에서 망해가는 쌈밥집을 덜컥 인수했다. 전 재산 50만 원을 털었다. 그렇게 음식 장사의 길로 들어섰다. 집안의 거센 반대를 감내했다. 최고로 좋아하는 일이자, 최고로 잘할 수 있는 일이었다. 요리를 위해 태어난 남자는 운명에 순응했다.
배달사고
부모님이 나를 사랑한다고 생각하나요?
이 나라 청소년들에게 질문을 던졌다. 20%만이 그렇다고 답했다. 같은 질문을 부모에게 던졌을 때는 100%가 자식을 사랑한다고 답했다.
20% vs. 100%. 부모는 자식에 대한 사랑이 넘친다. 정작 자식은 부모로부터 사랑받지 못한다고 느낀다. 엇갈린 사랑이다. 커뮤니케이션의 실패다. 배달사고다. 사랑하니까 잔소리하고, 사랑하니까 간섭한 건데 자녀는 엉뚱한 소리를 한다. 그게 사랑이었나요? 저는 그렇게 느끼지 못했는데. 대한민국의 음식점에서도 비슷한 상황이 벌어진다.
〈백종원의 골목식당〉을 시청하는 건 괴로운 일이다. 보고 있으면 속이 터진다 하여 ‘암 유발’ 프로그램으로 불린다. 대책 없는 음식점 사장님들 때문이다. 이분들은 대개 나름의 확신이 있다. 이 정도면 충분히 맛있지. 이 정도면 저렴하지. 이 정도면 서비스가 괜찮지. 이 정도면 손님들이 만족할 만하지.
백종원의 얼굴은 사색이 된다. 말을 잃는다. 어렵게 말을 꺼낸다. “사장님이 손님이라면 이 가게 오시겠어요?” 재미있는 건 백종원의 피드백을 받은 이들의 반응이다. 자기방어 기제가 발동한다. “분명 손님들은 맛있다고 했는데요.” “우리 가게는 음식보다는 분위기가 중요하거든요.” 여전히 자신이 보고 싶은 것만 본다. 믿고 싶은 대로 믿어버린다. 자기 중심성의 틀을 깨기가 그만큼 어렵다.
프로그램의 제작진이 최악의 가게를 뽑고자 한 게 아니다. 우리 주변에 있는 평범한 식당을 임의로 선정한 것이다. 즉 대부분의 식당이 딱 저 수준, ‘암 유발’ 식당이라는 결론이 나온다. 백종원의 말마따나 고객은 절대 사장의 의도대로 움직여주지 않는다. 고객과 눈높이를 맞추어야 한다. 하루아침에 되는 일은 아니다. 역지사지도 훈련이 필요하다.
여기서는 백종원을 관찰하며 얻은 ‘역지사지 훈련법’을 소개한다. 나를 알고, 고객을 아는 것. 그리고 경험을 쌓는 것.
나를 알기
역지사지에 관한 가장 큰 오해는 무턱대고 상대방에 맞추어야 한다는 강박이다. 그건 나중의 일이다. 스스로를 파악하는 게 먼저다. 나를 알아야 상대방을 만족시킬 수 있다. 성경에도 쓰여있다.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내 몸을 사랑하는 법을 아는 것이 먼저다. 그대로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다.
백종원이 메뉴 개발을 할 때의 기준도 본인이다. 자기가 먹고 싶은 음식이어야 한다. 그래야 남들한테도 자신 있게 권할 수 있을 테니까. 스스로의 입맛을 객관적으로 파악하는 건 기본이다. 백종원이 창시한(?) 마름모 차트는 이러한 노력의 일환이다.
그는 차트 위에 자신의 입맛의 위치를 정확하게 찍는다. 대중의 평균 수준에 아슬아슬하게 걸쳐 있단다. 여기에서 출발한다. 실제 메뉴는 이 지점보다 살짝 짜게 만든다. 그게 대중이 원하는 맛이니까. 그러면 거의 틀리는 법이 없다. 백종원이 음식점 사장들에게 스스로의 입맛부터 파악하라고 하는 이유이다. 자신을 알지 못하면 대중을 만족시킬 수 없다.
자기 요리에 대한 입장도 명확하다. 맛 칼럼니스트 황교익과의 일화가 잘 보여준다. 황교익은 한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말했다.
백종원은 전형적인 외식 사업가다. 그가 보여주는 음식은 모두 외식 업소 레시피를 따른 것이다. 맛있는 음식은 아니다.
이에 대한 백종원의 답은 쿨했다.
내 음식이 세발자전거라면 셰프는 사이클 선수다. 자전거 박사들이 볼 때는 내가 사기꾼 같을 수 있다. 다만 나는 자전거를 보급화하는 것처럼 요리도 보급화하고 싶을 뿐이다.
애매함이 없었다. 스스로를 객관화한 자만이 내놓을 수 있는 답변이었다. 며칠 뒤 황교익은 자신의 뜻을 알아준 백종원에게 감사하다는 내용을 칼럼에 실었다.
고객을 알기
유튜브용 콘텐츠 〈백종원의 장사이야기〉는 백종원 표 ‘무엇이든 물어보세요’ 다. 음식점 사장님들이 고민을 토로하면 백종원이 즉석에서 답을 준다. 예를 들어 어느 족발집 사장님이 물었다.
주말에 가족손님을 늘리려면 어떤 족발 메뉴를 개발해야 할까요?
백종원이 받았다.
사장님이라면 아이들 데리고 주말에 족발 먹으러 가시겠어요? (결국 돈가스 메뉴를 추가하라는 조언을 해주었다.)
스페니시 펍을 운영한다는 사장님은 물었다.
펍의 오픈 시간을 당길 방법이 있을까요? 가격은 무척 저렴해요. 가장 싼 메뉴가 1만 2,000원, 그다음이 1만 6,000원….
백종원의 말이 바로 나왔다.
그게 싸요?
사장님의 질문은 지극히 자기중심적이다. 고객의 생각은 안중에도 없다. 그러니 사장님들에게 처방책은 하나다. 고객에게 관심을 두는 것. 아마존의 제프 베저스처럼 고객에 집착(customer obsession)할 정도여야 한다. 베저스는 임원 회의 때마다 의자 하나를 가져다 놓는다. 의식이다. 여기에 고객이 앉아 있다고 생각하고 회의합시다.
백종원도 고객에게 집착한다. 고객의 행동은 물론 심리까지 꿰뚫는다. 그의 트레이드마크인 ‘30대 70의 법칙’은 그렇게 탄생했다. 손님이 식당에서 순수하게 입으로 느끼는 맛은 30% 정도이다. 나머지는 시각, 후각, 선입견 등에서 결정난다.
그러므로 식기나 인테리어, 홍보 등을 통해 음식을 더 맛있게 해줄 70%를 찾아야 한다는 것. 고객에 ‘집착하면’ 이런 통찰을 얻는다.
경험이 실력
음반 제작사는 하지 마세요. 아무래도 날 이길 수 없을 테니까.
힐링캠프에 출연한 YG 양현석 대표가 말했다. 대학생을 대상으로 강의를 하면서였다. 근거 없는 자신감은 아니었다. ‘축적된 경험’이 믿는 구석이었다. 중학교 때부터 연예계에 발을 들였다. 30년을 버텼다. 히트작을 낼 수 있는 감이 생겼다. 세월이 가져다준 선물이었다.
백종원도 마찬가지다. 맛과 고객에 대한 경험은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많이 돌아다니고 많이 먹어본다. 패밀리 레스토랑에도 가보고, 일식집도 간다. 잘되는 집도 가고, 안되는 집도 가본다. 손님들이 몰리거나 외면하는 이유를 자기 눈으로 직접 보면서 챙긴다.
메뉴를 개발할 때도 전 세계의 음식점을 섭렵한 경험이 경쟁력이 된다. 구구단처럼 정해져 있는 맛 공식 위에 경험으로 얻은 데이터가 올려진다. 창의적인 레시피가 탄생한다. 단, 데이터는 신중하게 얻는다. 스스로의 감을 과신하는 법이 없다. 날씨에 따라서, 그날의 몸 상태에 따라 전혀 다른 맛이 난다. 같은 음식점이라도 여러 번 찾아가는 것은 그 때문이다.
방송에서도 경험 덕을 본다. 음식점에 들어서자마자 단박에 문제를 알아챈다. 사장님의 처지를 이해한다. 지난 몇십 년간 수도 없이 경험한 일이어서 그렇다. 하루에도 머릿속으로 수십 개의 음식점을 만들고 부수는 게 취미여서 그렇다. 내공 백 단의 조언이 폭포수처럼 쏟아진다. 말 한마디의 무게감이 다르다. 시청자들의 입에서 절로 탄성이 나온다.
옛말이 맞았다. 고기도 먹어본 놈이 맛을 안다. 경험이 실력이다.
원문: 브랜드보이의 브런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