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학교 때, 즉 1994년 즈음에 보던 〈파이브 스타 스토리즈〉(이하 FSS)라는 만화가 있다. 그때 ‘오타쿠’라는 표현은 없었지만 나는 FSS의 오타쿠였다. 물론 당시에는 불법 수입된 뉴 타입으로 말고는 딱히 정보를 얻는 것도 불가능하던 때였기는 하지만. 이 만화에 빠졌던 이유를 생각해봤다.
우선 이 만화는 난해하다
첫 권은 나름대로 소프트하다. 하지만 여전히 페이지 중간중간에 ‘성단력 3647년’ 이런 식으로 정말 뜬금없는 장면이 등장해서는 방금 전 페이지와는 아무 관계도 없는 내용이 갑자기 등장한다거나, 기껏 1권을 재미있게 읽고 2권을 펼치니 앞선 내용과는 완전히 다른 이야기가 시작되거나 완전히 다른 인물 수십 명이 다시 쏟아져 나온다거나.
게다가 당시 뉴타입에 연재되던 이 만화는 한 달에 많아 봐야 꼴랑 4-6장? 적을 때는 2장만(진짜다) 연재된다거나, 아예 휴재되는 경우도 허다했다. 극악 중 극악의 전개속도도 짜증 나지만 A.D 5000년부터 성단력 7777년까지라고 표기된, 장장 1만 3,000년 여에 걸친 이야기라는 설정은 도대체 이 작가가 죽기 전에 이 연재를 끝낼 마음이 있기는 한지 궁금할 정도였다(물론 이 논제는 이후에 마모루 나가노가 “나는 이 만화를 대를 물려 그리게 할 것이다”라고 정답을 알려주었다. 그리고 그는 아직도 자식이 없는 것으로 안다).
그도 그럴 것이 애초에 이 만화는 마모루 나가노가 참여했던 ‘중전기 엘가임’의 외전 격인 존재였다. 항간에는 그냥 심심하면 연재하던 것이었다는 소문도 있다. 별로 추천은 하지 않지만 그 미친 설정이라는 것이 도대체 어느 정도인지 궁금하다면 참고.
만화 내용은 아주 간단하고 뻔하다
우주 저 너머에 존재하는 ‘죠커 성단’에 존재하는 5개의 별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이야기. 어찌 보면 너무 식상하지 않은가. 짧게는 텔레포트라던가 광선 검 같은 〈스타워즈〉의 설정도 좀 떠오르고 『삼국지』나 〈은하영웅전설〉도 떠오른다. 거기에 아마테라스 같은 일본 전설이나 그리스 로마 신화의 잡다구리한 것들을 다 때려 박고 메카물로 근사하게 포장하면 짠!
문제는 작가인 마모루 나가노가 심각한 오타쿠였다는 것이다. 별마다 왕이 있고 왕의 형제나 족보도 있으며 그 왕을 모시는 기사단도 있다. 기사단도 레벨에 따라 여러 종류가 있고 그들이 모는 로봇의 형태도 다 다르다. 심지어 기체마다 고유한 문장도 있고 고유번호 같은 것도 있다.
그런데 아무리 작은 컷에서도 그런 세세한 모든 코드를 표기할 정도니, 그걸 우주급으로 넓혔을 때 도대체 얼마나 복잡해질 것인가. 그 하나하나를 다 해보겠다고 시작한 것이 FSS인 것이다. 즉 이 만화는 처음부터 끝을 절대 낼 수 없는 스케일이었던 것이다.
이 만화 첫 장에는 성단력표가 있다. 그뿐 아니라 단행본과는 별개의 ‘설정집’이 존재한다. 그 설정집은 매년 리뉴얼된다. 즉 이 만화를 읽기 위해서는 최소한 같은 단행본을 최소 10번은 읽을 각오로, 또 앞으로 갔다 뒤로 갔다 하면서 끝없는 모험(혹은 고행?)을 할 각오, 그리고 어떤 일이 있어도 작가인 마모루 나가노를 원망하지는 않을 각오와 머리가 터질 것 같은 난해함을 견뎌낼 끈기가 필요하다. 애초에 진입장벽이 너무 높은 만화인 것이다.
극악의 연재 속도와 작가의 태업
스케일 큰 것으로 유명한 만화가 몇 있고, 오래 연재하는 것으로 유명한 만화도 있으며 진행 속도가 느린 것으로 유명한 만화도 있다. 예를 들면 휴재 많고 안 끝나기로 유명한 〈헌터X헌터〉는 1998년부터 연재를 시작해서 20년째 연재하고 있으며 단행본은 35권까지 나왔다. 그것보다도 한술 더 뜨기로 유명한 베르세르크가 연재를 시작한 것은 1989년이고, 곧 일본에서 40번째 단행본이 나온다고 한다.
극악의 전개로 유명한 베르세르크가 29년 동안 40권이 나왔다. 스케일 큰 것으로는 둘째가라면 서러울 원피스는 1997년부터 연재를 시작해서 89권의 단행본이 나왔다. 자, 이제 FSS를 보자. 〈베르세르크〉보다도 먼저인 1986년에 첫 연재를 시작했다. 32년이 지나는 동안 나온 단행본 수는, 놀라지 마시라. 무려 14권이다. 농담이 아니다. 꼴랑 14권. 무려 32년 동안 고작 14권의 단행본이 나왔을 뿐이고 그나마도 14권이 나온 것이 최근이니, 여기 비하면 〈베르세르크〉는 엄청난 속도 아닌가.
더더욱 FSS가 악명 높은 것은 바로 작가인 마모루 나가노의 성향 때문인데, 이 사람은 어렸을 때부터 일 벌려놓고 수습 안(못) 하기로 유명하다. 밥 먹듯이 하는 휴재는 귀여운 정도고, 지가 설정집까지 만들어놓고 그리다가 앞선 설정을 잘못 보고 그리는 바람에 뒤의 내용이 꼬이는 일도 잦고, 그럴 때마다 설정을 지 맘대로 다 바꿔 전 세계 FSS빠들을 뒷목잡게 한다.
‘버추어 파이터’에 빠져서 연재는 때려치운 채 오락실에서 죽도록 게임만 하다가 잔뜩 생각해놨던 모든 설정을 다 까먹어서 급히 대충 다시 만들어버린다든가 하는 식으로 작가로서의 사명감 따위는 개뿔도 없다. 연재는 더럽게 느려서 독자 속은 터지는데 뜬금없이 다른 작업에 손을 댄다.
이런 식으로 팬들을 엿먹이다 못해 고문에 가까운 행동이 취미인 것은 그나마 봐줄 만하다. 아까 분명히 말했지만 이 만화에 손들 대기 전에 몇 가지 숙지해야 할 일들이 있다. 2004년이었던 것 같은데, 한창 재미있는 시점에서 갑자기 “나 이거 못 해 먹겠어”라며 잠정적으로 연재를 그만두는 선언을 해버린다. 욕이란 욕과 살인 협박까지 견뎌가며.
이제서야 좀 머리에서 지워질까 싶었지만, 9년이 지난 2013년에 또 뜬금없이 “나 인제 다시 그릴래~”라는 선언을 다시 한다. 이쯤 되면 변태다. 심지어는 새로 연재를 시작하면서 한껏 달궈진 팬들에게 핵폭탄을 20개 떨궜다. 설정부터 메카닉 디자인, 용어까지 싹 다 바꿔서 리부트시킨다는 선언을 한다. 이쯤 되면 범죄자다. 몇십 년씩 기다려 준 팬들을 개똥만도 못하게 생각하는 작가 놈.
그럼에도… 진짜 그럼에도 여전히
누군가 내게 “인생 최고의 만화는?”이라고 한다면 〈파이브 스타 스토리즈〉라고 할 만큼 나는 이 세계관에 푹 빠졌다. 아마 감수성 예민하던 시기여서 더 그런 부분도 있겠지만, 그런 것들을 제외하고라도 이 복잡한 설정들이 익숙해지기 시작하면 이미 당신은 노예가 되어 있을 것이다.
치밀하다 못해 지독하다고 하는 것이 더 잘 어울리는 설정, 그런 설정을 극대화하는 작가의 그림체, 우아하고 아름다운 메카닉 디자인과 난해하긴 하지만 아무튼 드럽게 재미는 있는 스토리까지, 진짜 짜증 나기는 하지만 ‘제발 다음을 보여줘’라며 팔딱팔딱 뛰게 만드는 것이 FSS의 최대 매력 아닐까. 덕질하기 좋은 소재야 널리고 널렸지만 FSS는 덕질의 끝을 보여준다.
2013년에 연재를 다시 하겠다고 한 이후로는 이제 나이를 먹어서인지 열심히 진행 중이라고 한다. 드디어 일본에서 14권이 발매되었고, 한국에서도 8월 말에 13권이 정발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다만 FSS는 리부트 이후로 매력이 크게 사라졌다. 팬들도 많이 떠났다고 한다. 기본적으로 성실하지도 못하고 팬들을 우습게 보는 작가 양반의 기행(?)을 더 이상은 못 봐주겠다고 느끼는 것 같다. 애초에 FSS의 팬층은 현재의 40~50대다. 여전히 건담류의 메카닉에 열광하는 이 팬들에게 새로 리부트해서 들고나온 메카닉들은 너무 구리다. 너무 구려서 도저히 봐줄 수가 없을 정도이다. 그래서 사실 딱히 이후의 내용이 기대가 되지는 않는다. 언제 또 독자 엿먹일지 모르는 작가 놈이니까 말이다.
하지만 이미 내 손은, 그동안 관심을 끊어 몰라서 보지 못했던 13권을 구매하기 위해 인터넷 서점을 뒤진다. 마모루 나가노… 나쁜 사람…
원문: 이학림의 페이스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