혹시 자신이 누군가와 나누는 대화를 녹음해 들어본 적이 있는가? 나는 자주 들었다. 잡지사에서 일하던 시절 인터뷰 대화를 녹음해 워드 파일로 옮기는 일이 잦았던 탓이다. 에디터들이 인터뷰 중 메모하는 모습을 보고 녹음까지는 안 하는 줄 아는 분들이 있는데 오해다. 메모는 현장에서 대화의 맥락을 잡는 용도일 뿐, 기사 쓸 땐 녹음된 대화를 듣고 정리해야만 한다.
하지만 녹취 시간은 내게 고역이었다. 이어폰 저편에는 어눌한 목소리에 엉망진창으로 대화하는 내가 있었다.
왜 목소리가 이따위지? 나, 말 왜 이렇게 못해?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은 기분이었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자기 목소리를 듣기 싫어하는 사람이 나 혼자는 아니라는 것이다. 얼마 전 영국 가디언지에서 「자신의 목소리를 듣기 민망한 이유」라는 기사가 났다. 많은 사람에게 나타나는 일반적인 현상으로, ‘음성 직면(voice confrontation)’이란 학술 용어마저 있다고 한다.
가디언지에 따르면, 녹음된 목소리를 사람들이 싫어하는 이유는 우선 그 소리가 자신이 원래 생각하던 목소리와 달라서라고 한다. 소리는 뇌가 음파를 해석하는 과정이다. 내 목소리를 내가 들을 땐 공기로 전달되는 음파와 뼈로 전달되는 음파 두 가지를 종합해 듣지만, 남이 들을 땐 공기 전달 음파로만 듣는다. 충격적이게도 당신을 제외한 모든 사람은 녹음 파일 속에 웅얼대는 소리를 당신 목소리로 알고 산다.
더 중요한 이유는 ‘음성 직면’ 현상이다. 인간의 뇌는 끊임없이 자신을 각색한다. 자신이 하는 말과 행동을 실제보다 좋게 해석한다. 긴장해 떨었고, 대화가 뚝뚝 끊어졌더라도 자기 뇌 속엔 유창하게 말하는 자신이 그려질 수도 있다. 그러나 녹음본은 ‘뇌내보정’을 거치지 못한다. 공격적인 대화 혹은 어눌한 대화를 그대로의 직면하고 부끄러워진다는 게 ‘자기 목소리 민망 현상’의 해석이다.
뇌란 녀석도 참. 그동안 보정 열심히 해왔구나.
난 내가 말수가 적어서 그렇지 대화 매너가 중간은 되는 줄 알았다. 하지만 녹음 파일 속에 있는 난 최악의 대화 상대였다. 상대가 관심 없는 티를 역력히 내는데도 주야장천 말해대는 나. 한참 서로 A에 관해 이야기하던 중 갑자기 B를 끄집어내 대화를 산만하게 만드는 나. 중간중간 상대 말을 잘라먹으며 말문을 막히게 하는 나.
대화 방법을 바꾸겠다는 마음을 굳게 먹고 사람들에게 내 대화 단점을 물어보았다. 어떤 비판이 돌아와도 모두 쓴 약이 되어… 는 거짓말이고 심장이 약한 탓에 못 그랬다.
지금까지 니 말, 그냥 참아준 거였어!
비난이라도 들었다간 시름시름 앓다 숨을 거둘 게 분명했다. 대신 소심한 책돌이답게 대화법 책들을 사서 독파했다. 그 후 책이 제시하는 방법을 대화에 적용했다. 처음엔 힘들었다. 자연스럽게 걸어 다니다가도 ‘걷는 법’에 대해 고민하는 순간 발이 엉켜버리는 것처럼 대화가 꼬이고 더 어색했다.
어쩐지 너 더 멍청해진 것 같은데. 기분 탓인가?
그러나 대화는 점점 나아졌다(아마도). 혹시 이 글을 읽는 이 중 나 같은 대화 멍청이들이 있으니 상식적인 대화법 팁 3가지를 소개한다.
1. 입에서 나오는 대로 말하면 안 된다
이번에 제주도 갔다 왔는데 말야. 《어라운드》 잡지에서 봤던 조천리를 갔다 왔거든.
(갑자기 그 잡지가 떠오름) 아, 《어라운드》 나도 재밌게 보는데.
조천리에 유명한 제주도식 빵집이 있는데 거기서 파는 게…
(불현듯 빵이 떠오름) 신사동에 일본식 빵집 생겼더라.
대화할수록 내용이 산만해지는 사람이 있다. 머릿속에서 떠오르는 대로 말해서 그렇다. 그러면 안 된다. 양쪽 모두 대화에 집중을 못 하게 된다. 하나의 주제를 마무리 지은 다음 다른 주제로 건너가라. 무엇보다 의식적으로 대화의 흐름을 잡아나가야 한다. 대화 흐름에서 벗어난 것을 직감하면 슬쩍 ‘하던 이야기로 돌아와서’라고 말할 수도 있다.
2. 자기 이야기만 하지 않도록 경계하자
내 친구 ○○○이 있는데, 걔가 어떻냐 하면~
지난달에 나 다낭 다녀왔잖아~
자기 이야기를 퍼붓는 친구가 주변에 한 명쯤은 있을 테다. 아시다시피 참 괴로운 일이다. 그런데 소심한 당신이라고 안 그렇다고 자신할 수 없다. 자기 이야기를 하고픈 건 사람의 본능이다. 예민 보스인 당신은 낯선 사람에겐 이런 행동을 경계할 것이다. 하지만 마음을 이해해주는 친구에겐 그동안 억누른 자기 이야기 신공을 터뜨리는 소심이도 적지 않다. 친한 친구가 있다면 “혹시, 내가 가끔 내 이야기만 해?” 물어봐라.
3. 상대의 관심사에서 대화 소재를 찾자
일본의 영화감독 기타노 다케시는 우리나라로 치면 박찬욱과 안성기를 합쳐놓은 정도로 유명한 인물이다. 그런 기타노 다케시가 자신의 대화법을 밝혔다.
저는 대화를 할 때 상대에게서 소재를 찾아냅니다. 요리사라면 요리에 대해, 운전사라면 운전에 대해. 재미도 있고 배울 것도 있습니다.
소심한 이들은 대체 뭘 이야기할지 모르는 경우가 많다. 그러다가 소재를 가져왔다고 생각하면 상대가 얼마나 관심이 있든 없든 그 이야기만 한다. 두 문제 다 극복하려면 처음부터 상대의 소재에서 함께 이야기할 거리를 찾아내는 게 좋다. 영화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영화, 스타일이 좋은 사람이라면 패션. 상대의 소재와 내 관심사의 중간 지대를 찾아보는 것이다. 의외로 제법 화젯거리가 있고, 자꾸 해봐서 버릇 들면 이것도 익숙해진다.
내가 안 해봐서 아는데, 소심이들은 사람들과의 대화 경험이 적다. 내가 해봐서 아는데, 소심이들은 대화 잘하고 말고와는 무관하게 ‘진짜 내 사람’들과는 마음으로 통한다고 여긴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 엉망인 대화법을 알아차린 후 와이프에게 물어봤다. 처음 사귈 때 나와 대화하는 게 즐거웠느냐고. 별로였단다. 그럼 왜 사귀었냐고 물었다.
얼굴이 잘생겨서, 그냥 얼굴만 봤지.
…
대화가 힘듦에도 다른 장점 덕에 곁에 있어 주는 것뿐이니 소심한 분들도 대화 스킬을 익혀 놓도록. 하물며 수영도 배우고, 자전거도 배우는데 사람과 소통하는 방법을 안 배워야 되겠는가. 그럼 지금까지 얼굴 파먹고 살던 와이프랑 사는 소심이가 전해드렸습니다. 나이 들어 얼굴이 망가졌으니 큰일이군요.
원문: 주간 개복치의 브런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