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사람은 남들에게 관심이 없습니다!
나를 향한 심리카페 상담사의 평가에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이지 정확한걸.” “귀신같이 맞추는데.” 어이어이 잠시만 전 사람한테 관심이 많다고요. 여보세요? 듣고 계세요? 이딴 엉터리 심리카페 누가 오자고 했어.
장소는 강남의 모 심리카페, 회사 동료들과 팀워크 쌓을 겸 방문했다. 가 본 분도 있겠지만 심리카페는 성격 분석을 해주는 카페다. 주문한 음료를 마시며 설문지에 체크하면 상담사 한 분이 나와 에니어그램이란 성격 분석법으로 차례차례 성격을 이야기해준다.
‘슬픈 일은 빨리 잊어버리려 한다.’ ‘밤에 잠들지 못했던 것이 언제였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같은 질문에 체크하면 성격유형을 1번에서 9번까지 나눈다(p.s. 질문은 저작권이 있어 임의로 지어낸 것). 성격 특징을 알게 될 뿐 아니라 어떤 성향이기에 상대가 그렇게 행동하는지 서로 다른 유형 사이를 이해시켜주기에 커플이나 동료들끼리 오면 좋다는데.
는 강이지뿔. “아마 이분을 차갑다고 생각하실 거예요.” “옳거니!” “때론 마음이 상하는 분도 있을 거고요.” “어쩐지 사이코패스 같았어. 장작을 모아라. 불태우자.” 상담가 선생님의 비난과 동료들의 동조가 이어졌다. 분명히 난 설문지에 내 따스한 마음을 듬뿍 적어냈는데 왜 이런 결과가 나왔지.
나는 스스로 ‘내향적이라 겉으로 표현 못 하지만 그 안에 든 인간적임이 드러나는 사람’으로 여겨왔으나, 주변 사람들 의견은 전혀 그렇지 않다는 사실을 최근 알았다. 따뜻한 건 둘째 치고 심지어 내향적이지도 않다고 여기더라. 얼마 전엔 연남동 바에서 후배들과 위스키를 홀짝이다가 쓰기로 한 책 주제로 이야기가 흘렀다.
‘소심한 사람들이 평범하게 살아가기 위한 방법’에 대해 글 쓰고 있다고 말했더니 대뜸 하는 소리가 “선배는 소심하지 않은데 어떻게 소심한 사람들 이야기를 써요?” 후배들에게 내가 얼마나 연약한 정신을 가졌는지 친절히 설명했다. 그러자 “선배, 안 소심한데. 남들 말에 별로 신경 안 쓰잖아요. 선배 컨셉충(자기 콘셉트를 지어내 그것에 맞춰 말하고 행동하는 사람을 낮잡아 이르는 말).” 컨셉충이라니 너무하잖아. 내 소심한 마음이 상처를 입어버렸다.
콘셉트가 아니라 남들 말에 정말 신경을 많이 쓴다. 누가 무심코 던진 말 한마디도 머릿속에 각인돼 무한 반복된다. 30대 초반에, 대화가 재미없다는 말 듣고 충격받아 ‘대화 잘하는 법’ 책을 사서 독파한 나다. 대화의 주제를 끌어내는 법, 대화 전개법 등을 달달 외웠다. 다양한 상황에 대응해 가상 대화를 짜봤다. “대화 스킬 만렙 찍을 때까진 사람과 대화하지 않겠어”라는 유아적 발상을 (무려 30대에)했고, 당연히 통하지 않았다.
딴 이야기지만 예민한 탓에 한국 영화도 못 본다. 영화 속 폭력이 리얼해 고통스럽다. 원빈이 나오는 영화 ‘아저씨’ 보다가 시체를 트렁크에 담는 장면 보고 심장 멎는 줄 알았다. 감정 이입도 너무 잘 되면 힘들다. 그밖에도 어딜 봐도 소심하고 예민한데 사람들이 왜 모를까 고민하던 중 이해가 가기 시작했다.
성격은 사람이 태어나면서부터 가진 ‘기질’에서 시작해, 그 기질을 바탕으로 세상 자극에 대해 반응하는 ‘패턴’으로 완성된다. 자극에 예민한 기질, 둔감한 기질을 가진 사람도 있다. 어릴 적 엄마가 눈앞에서 사라져도 뭐 어때라며 여기저기 쏘다니는 아이가 있는 반면, 엄마가 사라지는 순간 얼어붙는 아이도 있다. 아빠가 고릴라 탈을 쓰고 짠 등장했을 때 어떤 아이는 꺄르르 웃는 한편, 예민한 아이는 으아앙 울음보를 터뜨린다. 나야 물론 고릴라 탈 보고 넋을 잃는 아이였다.
예민한 기질을 주변 사람들이 이해하고 보듬어주면, 예민하면서도 적극적 어른으로 크겠지만, 대부분 경우 그렇지 않다. “얘가 겁이 많아서, 낯을 가려서”라며 비하되기 마련. 남자의 경우 남자답지 못하다는 비난까지 들으며 생채기가 더 커진다. 자연히 자극을 피하는 회피 성향으로 이어진다.
소심이들의 순두부 같은 멘탈은 사소한 상처 하나 놓치지 않고 다 받는다. 누군가의 사소한 모욕, 앞에선 나와 친한 척했지만 뒤에서 나눈 험담. 그것을 피하려고 나만의 동굴로 파묻힐 수도 있지만 쉽지 않다. 사회생활을 해내려면 사람들과 소통해야만 하니까. 소심이마다 대처법이 있겠으나 어떤 소심이는 세상만사에 ‘심리적인 막’을 친다. 일종의 불투명한 안경이라 봐도 좋다.
벌어지는 사건을 생생히 마주하긴 힘들다는 마음에서 나온 그 ‘막’은 인위적으로 눈앞에 벌어지는 사건에 둔감해지는 것이다. 공포영화 볼 때 너무 무서우면 굳이 “칼에 찔린 저 사람은 배우! 철철 흐르는 건 가짜 피!” 이렇게 되뇌며 장면에 이입하지 않는 것처럼.
상담사분이 알려준 내 성격 유형은 ‘5번 사색가’였다. 번호별 특징에 따르면 ‘이성적이고 객관적인 사고력을 가졌으며 관찰력이 탁월하다. 하지만 스트레스 상태가 되면 혼자 스스로 고립되어 심각하게 고민한다.’ 에니어그램은 성격별로 정신이 건강할 때와 불건강할 때의 태도를 나눠 보여주는데 5번 사색가는 불건강할 때,
- 소심해지고
- 무정하고 돌직구성 발언이 강해지며
- 비판적 사고가 강해지며 부정적 시나리오를 쓴다.
그게 지금의 나와 닮아 있었다. 상처받는 순간마다 난 이렇게 되뇌었다.
눈앞에 선 사람들은 광물이다. 말은 말일 뿐이고, 행동은 행동일 뿐이다. 아무것도 중요하지 않다.
사람이 광물일 리 없고, 그들의 말과 행동은 아무것도 아니지 않다. 하지만 사람을 돌처럼 보자는 자기기만은 자기최면으로 이어졌고, 결국은 세상사를 대하는 내 모습 자체가 약간은 무감각한 사이코패스와 비슷해졌던 것 같다. 막이 워낙 두꺼워지다니 누굴 만나도 그냥 무덤덤히 반응해 무례해 보였을지도 모른다. 상대도 상처받았겠지. 반성했다.
하지만, 이분은 진짜 사람에 관심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관심 대상이 매우 좁을 뿐이지요.
흠, 그래요?
겉으론 봐선 모르겠지만 스트레스를 잘 받는 성격이세요.
그럴 리가 없는데…
심리카페 상담사의 뜻밖의 설명이 이어졌다. 동료들은 고개를 갸웃대며 안 믿었지만 어쩌랴 다시 이해시켜 가야지. 저, 소심한 것 맞습니다. 믿어주세요.
오늘의 교훈
- 소심함에서 비롯한 당신의 방어막이 누군가에겐 무심함으로 상처가 될 수 있습니다.
- 주변의 누군가 무심해 보인다면 그 사람은 상처 많은 소심이일 수도 있습니다.
- 심리카페가 영 엉터리는 아니더군요. 에니어그램도 나름 재밌습니다.
원문: 주간 개복치의 브런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