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화 <보이후드>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내 삶을 위해 공부를 하고, 그래서 교수가 되고, 치열하게 살면서 너희를 키우고, 대학을 보내고… 그러고 나면 또 무언가 있을 줄 알았어. 그런데 이제는 내 장례식만 기다려야 하는 거야?
삶에는 적어도 하나의 물리법칙이 있다. 그 법칙은 구름에 수분이 가득해지면 비가 쏟아지고, 다시 지상에 물이 흘러넘치면 하늘로 오르는 순환의 법칙과 같다. 나만을 지나치게 찾는 삶은 서서히 그 이면의 삶으로 눈을 돌리게 된다. 정다운 이웃이 있고, 가족이 있으며, 공동의 것 속으로 스며드는 일로 옮겨가고자 한다.
반대로, 공동의 것 속에서 서로를 응시하는 사랑과 서로를 붙잡아주는 그물 속에 너무 오래 갇힌 삶은 자기만의 것을 찾는 여정으로 이동하려 한다. 마치 구름 속에서 서로 뒤엉켜 있던 물방울들의 연대가 지겹다는 듯이, 그렇게 ‘나’를 찾는 물방울들은 저 허공을 향해 뛰어들고, 이윽고 자기를 찾아버린 그 외로운 빗방울들이 다시 구름을 꿈꾸는 여정을 시작하는 것처럼 말이다.
<보이후드Boyhood, 2014>는 한 가족의 12년간의 이야기를 담담하게 담아냈다. 그 주된 이야기는 그중에서도 소년에서 청년으로 성장해가는 메이슨 주니어(이하 주니어)에게 맞추어져 있다. 하지만 그의 누나인 사만다의 성장 과정, 또 엄마인 올리비아, 아빠인 메이슨 시니어(이하 시니어)가 거쳐 가는 삶의 여정 역시 결코 소홀하지 않게 다룬다.
특히 영화에서 초점을 올리비아와 메이슨 시니어의 서사에 맞추어보면, 두 사람의 은은하면서도 명확한 삶의 과정이 대비를 이루며 하나의 ‘삶의 물리법칙’처럼 드러난다. 시니어는 아이와 아내를 두고 알래스카로 떠나 있다. 그는 일 년 반째 아이들을 보러 돌아오지 않았다. 뮤지션을 꿈꾸었던 그는 ‘실수’로 지나치게 일찍 아이를 가졌다. 스물셋의 나이에 생겨난 아이, 그리고 시작된 결혼 생활은 그의 청춘의 꿈이랄 것을 실현되지 못한 채 마음 한쪽에 남겨두었다.
아이는 둘이 되었고, 가족은 넷이 되었지만, 그는 여전히 그 실현해야 할 ‘자기 안’의 무언가를 찾고 있었다. 그러한 자기의 내면, 자기만의 영혼, 자기와 세계와의 관계만이 가장 중요했던 그는, 결국 자신의 그 무언가를 찾기 위해 알래스카로 떠났을 것이다. 그 결과는 이혼, 가족의 분열, 분리된 삶의 시작이었다.
반면, 올리비아는 아이들과 지극히 밀착하며 삶을 이루고 있었다. 아이들을 양쪽에 하나씩 끼고 책을 읽어주고, 아이들의 마음과 삶에 관심을 기울이며, 아이들을 위한 삶을 살고자 했다. 그러나 남편이 떠나고, 자기에게 주어진 그 무거운 존재들과 밀착하면 할수록 그녀는 다시 ‘자기만’의 무언가를 찾고자 했다. 물론 그 시작은 사회적으로 보다 좋은 위치에 올라, 보다 나은 환경에서 아이들과 살고자 했던 것이었다. 하지만 아이들을 할머니에게 맡기고, 자신은 대학교에 입학하고서부터 그녀는 점점 더 공부에 열의를 느꼈고, 강단에 서는 것을 꿈꾸게 되었다.
이후 그녀의 삶은 점점 ‘자기 자신’이랄 것을 찾는 여정으로 향하게 되었다. 주말에도 아이들과 함께하기보다는 혼자만의 공부에 파묻히고, 사랑을 찾아 교수인 새 남편을 만나고, 그렇게 그녀는 미모를 유지한 중년의 교수로 자리 잡게 된다. 그녀로서는 끊임없이 아이들을 책임지는 것과 자기 자신을 찾는 삶 사이에서 고민하며 치열하게 살았을 것이다. 그 가운데서의 조화를 꿈꾸며, 책임과 욕망을 훌륭하게 컨트롤했다고 믿으며 나아갔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가 간과한 것은, 결국 삶이란 객관적으로 보기에 조화롭게 완성되는 무엇이라기보다 자신의 시간을 써서 마음을 기울여 사랑한 것으로 정의된다는 사실이다. 그녀는 어떻게 보면 절망적이고도 열악한 상황 속에서, 그 모든 걸 이겨낸 훌륭하고 멋진 싱글 여성이자 위대한 어머니다. 하지만 ‘자기 자신’으로 점점 축소되어가고 수렴되어가는 삶의 끝에서, 아이들을 모두 독립시켜 대학에 보내는 날, 그녀는 울음을 터뜨리며 절규한다.
내 삶을 위해 공부하고, 치열하게 살면서 너희를 키우고 나면, 그다음에는 무언가 더 있을 줄 알았어.
그녀가 잘못한 건 아닐 것이다. 그녀의 말마따나 그녀는 치열하게 살면서 최선을 다했다. 누구도 그녀의 잘못을 묻지는 못할 것이다. 하지만 그녀가 찾았던 ‘인생’이라는 것, 그녀가 얻고자 했던 그 무엇은 어쩌면 어느 순간부터 빗나간 과녁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녀는 심리학을 전공한 교수가 된 것과는 다르게 아이러니하게도, 점점 아이들의 마음에 귀를 기울이는 법, 곁에 있는 사람의 섬세한 내면적 상황을 이해하는 법, 자기가 가장 사랑해야 할 존재의 입장에 서는 법을 잃어간다. 아이들에게 그녀는 점점 멀어져가는 ‘멋진 엄마’가 될 뿐이다.
반면 한 달에 두어 번 아이들을 만나는 친아빠 시니어는 반대의 길을 걷는다. 그는 건성으로 ‘잘 지낸다’고 대답하는 아이들에게, 진심이 담긴 이야기를 해달라고 말한다. 힘든 것, 짜증 나는 것, 고민되는 것을 있는 그대로 자기한테 말하며 칭얼대고 흥분하고 슬퍼하기도 하라고 말이다.
2주에 한 번이지만 시니어는 아이들과 만날 때마다 시간을 대충 때우지 않고 온전히 아이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고 쌓는 데 온 마음을 기울인다. 아이들의 연애와 꿈, 학교생활의 고민도 함께 나누고, 자신의 연애 이야기까지 아들과 할 정도로 친근한 사이로 거듭난다. 가족을 내팽개치고 자기를 찾아 떠났던 청년 시니어는, 점점 아이들과 마음에서 마음으로 이어진 ‘좋은 대디’가 되어간다.
좋은 대디란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접근해가는 것이다. 어쩌면 그는 저 어느 세계의 끝에서, 알래스카와 같은 어느 고독한 자기의 끝에서 삶이란 무엇인지를 깨달았을지도 모른다. 그것은 온 마음을 다해, 자기가 사랑해야 할 존재에 자기의 영혼을 기울이는 것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삶이란 그렇게 시작되어 그렇게 끝난다는 것을 말이다.
삶에는 물리법칙이 있다. 그 법칙은 우리를 고독한 물방울에서 따뜻한 구름으로, 숨 막히는 구름에서 자유로운 물방울로 옮겨간다. 어쩌면 영화는 구름의 정답을 은근히 제시하는 듯하지만, 아마 어느 한쪽의 정답이 있지는 않을 것이다. 단지 어떤 상황, 어떤 맥락이 어느 순간 우리가 속해 있는 삶을 비참하게 느끼게 만들거나, 풍요롭게 누리게 할 것이다.
올리비아는 아이들을 떠나보내고 나서 슬픔과 우울에 젖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녀에게는 여전히 삶이 있다. 그녀는 다시 방학에 돌아온 아이들과 캠핑을 떠나고, 태어난 손주들에게 사랑을 나누어줄지 모른다. 시니어는 새로운 가정에서 새로운 아이를 키워낸 다음, 다시 자기만의 곡을 만들고 기타를 치는 멋진 백발의 노인이 될지도 모른다.
삶이라는 과녁은 언제나 조금은 빗나가기 마련이다. 그것은 적중하여 완성될 수 있는 무엇이 아니다. 한쪽으로 너무 기울었다 싶으면, 다른 쪽으로 서서히 기울어간다. 우리가 할 일이란 그러한 삶의 물리법칙에 몸을 맡긴 채, 이 쏟아지는 감정들을, 의미들을 하나하나 조심스레 받아들이고 주워드는 것이 전부일지도 모른다.
출처: 정지우 문화평론가의 페이스북 / 고대대학원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