솔직히 짜증이 났다
아침에 출근해 메일을 보고는 인상부터 찌푸려졌다. 기획부서에 시스템으로 올렸던 매출 계획과 손익 예상 프로세스가 반려되어 있었다. 한두 번이면 모르겠는데 벌써 네 번째. 반려 사유는 그저 손익이 자신의 부서에서 관리하는 수치와 다르다는 것이었다.
아니, 그러면 차라리 자신들이 관리하는 기준 파일을 나에게 주어서 내가 그것에 맞추어 올리면 될 것을. 시스템을 열고 템플릿을 다운로드하여, 매출 목표와 손익 그리고 거래선 마진을 넣고 파일을 저장하여 올리기를 다섯 번째 해야 하는 상황. 이마저도 마지막이란 보장은 없는 것이다.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싸우지 않고 이기는 것이 제일이다. 하지만 싸워야 한다면, 잘 싸워야 한다.
손자병법에 나오는 유명한 말이지만 직장에서 갈등을 아예 만들지 않을 수는 없다. 이번엔 전후 관계를 따져 이와 같은 프로세스를 개선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싸우지 않는 것이 최선이지만, 싸워야 한다면 잘 싸워야 한다.
순도 100% 실화
반려를 반복한 기획부서 부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나: 안녕하세요. ○○부서 □□□입니다.
부장: 무슨 일이시죠?
반응부터 피곤하다. 상대방의 소개는 아랑곳 않고 무슨 일인지부터 따져 묻는 스타일은 대부분 매우 공격적이거나 방어적인 경우가 많다. 자기가 귀찮아지는 일은 절대 협조하려 들지 않는다.
나: 제가 몇 번을 올린 매출/수익성 시스템이 반려되었던데요.
부장: 그걸 왜 나에게 물으시죠? 해당 제품 리더에게 문의하세요.
나: 아니, 반려는 거기서 했는데요? 자꾸 반려만 하지 말고 그 수익성 시트를 주세요.
부장: 그걸 내가 왜 줍니까?
나: 그러면 사전에 수치를 맞추고, 이렇게 다섯 번씩 시스템 업무를 반복할 일이 없잖아요.
부장: 그럼, 그 제품 론칭하지 마세요.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그 부장은 유명한 사람이었다. 글로벌로 업무를 맡다 보니 전화를 여기저기서 많이 받는 모양인데, 그렇다 보니 전화 받는 것 자체를 싫어했다. 그저 그럼 하지 말라는 엄포를 놓으며 해당 이슈를 회피하는 사람. 우리 부서에서도 몇몇이 이미 당했다고 한다. 이런 사람의 경우는 갈등을 일부러 사용해야 한다.
여기서 그대로 전화를 끊거나 감정적이든 논리적으로든 간에 설득하지 못하면 나는 내내 이 사람과 일할 때 마음이 무겁거나, 눈치를 봐야 한다. 때로는 갈등을 유발하여 최고조에 이르게 한 뒤 숨을 고르며 협의점을 찾는 것이 좋다. 그렇게 되면 한껏 흥분했던 자신의 모습에 멋쩍어하며 다음에 연락하게 되면 서로 조심하고 존중하게 된다.
나: 아니, 하지 말라뇨? 사업을 이렇게 해도 되는 겁니까? 기획을 그딴 식으로 합니까?
의도적으로 사업이라는 대의명분을 내세웠고, 갈등을 고조하기 위해 그딴 식이란 표현을 썼다.
부장: 그딴 식? 이봐, 당신! 너 여기서 더 나가면 내 입에서 욕 나간다!
반말이 나왔다. 욕이 나오기 직전. 당황은 되지만 기분 나빠서 똑같이 하면 안 된다. 언성은 높이되 끝까지 존대는 해야 한다. 회사에서는 반말하거나 욕을 하면 그것을 한 사람이 문제가 된다. 흥분이 가라앉았을 땐, 후회하기 일쑤다. 바로 그 마음의 부채감을 노려야 한다.
나: 다시 말씀드립니다. 반려하셨던 파일을 저에게 주세요.
부장: 못 준다! 왜 아침부터 소리를 지르고 난리야?
나: 언성은 같이 높아졌고요. 론칭을 하지 말라고 한 대목에서 화가 났습니다.
부장: 하여튼 못 줍니다.
계속해서 존대하니, 자신도 멋쩍었는지 다시 존대한다.
나: (차분한 목소리로) 부장님, 아침부터 언성을 높여 죄송합니다. 글로벌로 전화를 받다 보니 힘드시죠? 하지만 론칭을 하지 말라고 말하시니, 열심히 사업을 만들어보려는 제 의도를 너무 폄하하신 것 같습니다. 다시 한번 더 언성을 높인 부분은 사과드립니다. 하지만, 이런 일이 지속되면 안 된다고 생각해서 드리는 말씀입니다.
부장: (잠시 정적) 아 네, 저도 미안합니다. 갑자기 전화해서 따지듯이 말해서 저도 언성이 높아졌네요.
갑작스러운 사과, 지속적인 존대, 사업이라는 대의명분과 상대방의 어려움을 헤아리는 발언에 태도가 변한다.
나: 다시 말씀드리지만, 서로 바쁜데 계속해서 이렇게 올리고 반려하는 것보다, 해당 자료를 주시고 제가 그것을 참고하여 원하시는 숫자를 만드는 게 어떨까요? 제 선에서 해결이 안 되면 원가관리팀으로 연락해 재료비 등의 다른 항목도 살펴봐야 할 것 같습니다. 아무리 어려워도 사업은 되게 해야죠.
서로 무언가 대의명분을 위한 개선점을 찾아냈다는 공동체 의식을 심어준다. 마주 보며 으르렁대던 시선을 저 멀리 같은 방향으로 모으는 것과 같다.
부장: 아, 네. 알겠습니다. 메일로 드리겠습니다.
나: 네, 감사합니다!
전화는 이렇게 마무리되었다. 그리고 나는 다시 메일을 보냈다. 아침부터 죄송했다는 말과, 하지만 사업은 진행되어야 하니 갖고 계신 검토 파일을 달라는 요청이었다. 그저 보통의 회신이 올 줄만 알았는데, 예상치 못한 답변이 왔다.
화창한 금요일 아침부터 기분을 언짢게 해드렸다면 죄송합니다. 요청하신 파일입니다.
그 메일에 모든 팀원이 동요했다.
팀원들: 아니, 그 이상한 분한테 어떻게 이런 사과를 받아내신 거예요?
나: 어, 내가 먼저 사과했어!
때로는 갈등이 필요하다! 갈등 활용법
다시 말하지만 갈등이나 싸움은 안 하는 것이 상책이다. 하지만 꼭 필요할 때가 있다. 위와 같은 방법들은 경험을 통해 쌓은 결과다. 심리학을 전공해서 상대방을 배려하는 커뮤니케이션이 주특기인 나의 특성도 있겠다. 어렸을 땐 그저 감정만 앞세워서 일을 그르치기도 했지만, 위와 같이 상대방의 어려움을 헤아리며 먼저 사과하며 이끌어내는 협의는 아주 바람직하다.
모든 사람에게 통하진 않는다. 위와 같은 방법을 사용해도 안 통하는 사람도 분명 있다. 내가 먼저 사과해도, 받아들이지 않거나 그것을 재물 삼아 더 자가발전하는 사람도 있다. 그렇다면 그 사람과는 계속 불편하게 지내면 된다. 나만 불편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지금까지의 경험상, 10명 중 9명은 내 의도대로 되었고 끝까지 불편하게 지내는 경우는 그중 한 명꼴이다.
그래서 갈등은 가끔 필요하다. 싸우고 난 뒤에 더 친해지는 경우라 말할 수 있겠다. 그러고 나서 실제로 얼굴을 보고 만나면 십중팔구 웃게 되어있다. 술자리에서 술 한잔을 따라주며 그땐 미안했다고 다가가면 마다할 사람이 없다. 불편한 마음의 부채감을 털면서, 각자는 서로를 더 잘 이해한다. 다음 업무를 진행할 때도 가능한 좀 더 조심하고 각별하게 신경 쓴다.
상대방으로부터 사과를 받아내는 아주 쉬운 방법
이미 이야기를 했지만, 상대방으로부터 사과를 받는 아주 쉬운 방법은 바로 내가 먼저 사과하는 것이다. 갈등이 필요하다면 때론 싸우기도 해야 한다. 그 와중에 사과를 먼저 건네며 다가가면 변하지 않을 것 같은 사람들도 놀랍도록 변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아래 내용을 유념해야 한다.
첫째, 선을 넘으면 안 된다.
위 대화에서 보았듯이, 상대방이 반말이나 욕을 한다고 해서 내가 똑같이 하면 안 된다. 선은 넘지 말라고 그어진 것이다. 상대방이 넘었더라도 나는 넘으면 안 된다. 상대방이 넘었다고 해서 나도 넘으면, 그것은 이전투구가 된다. 그렇게 되면 승자는 없고, 문제 해결을 위한 대의명분도 사라진다.
결국 이도 저도 해결 안 되고 서로 마음의 앙금만 지닌 채 회사 생활을 해야 한다. 적을 만들어 좋을 건 없다. 회사 내에서 적을 만들지 말란 진리는 확고하다. 오히려 상대방 마음의 부채감을 활용하자. 선을 넘은 것에 대한 자기 후회나 반성은 흥분이 가라앉으면 따라오게 마련이다.
둘째, 대의명분을 제시해야 한다.
서로 흥분한 상태에서, 상대방이 원하는 것이 자기 자존심을 보호하기 위한 것이라고 판단되면 절대 그 싸움을 양보할 일이 없다. 져선 안 되는 싸움이 된다. 내 잘못도 인정하면 안 된다. 하지만 대의명분으로 그것을 환기하면 승산은 높아진다. 즉 내가 이렇게 화내는 것이 내 자존심을 위한 것이 아니라 우리 사업을 위한 것이라는 것.
누가 봐도 맞는 말이라면 그것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이 이상한 것이다. 대의명분을 내세워 이야기하는데, 상대방이 거부한다면 상대방은 뭔가 잘못되어져 감을 느끼게 된다. 위 상황에서도 보았듯이, 차분한 말투로 “우리 사업은 되게 해야 하잖아요”라고 말했을 때 상대방은 바로 반응했다.
셋째, 상대방의 입장을 헤아려야 한다.
전화 받을 때부터 까칠한 사람들의 공통점은 세상 혼자 힘들다는 것이다. 직장인들은 다 고달프고 각자의 애환이 있다. 하지만, 그런 스트레스를 전화 받는 상대방에게 푸는 사람이 있다. 누군가 무엇을 요청하면, 그 요청한 것을 빌미로 까칠하게 대함으로써 스스로의 지위를 높이려 하거나 남을 괴롭힘으로써 자신의 위안을 삼는 경우다. 물론, 그 효과는 좋지 않다. 자기 스스로를 함정에 빠뜨리는 꼴.
이러한 사람이라면 자신의 어려운 처지를 알아주는 사람에겐 다르게 행동한다. “요즘 많이 힘드시죠?”, “글로벌로 여기저기서 전화를 받으니 얼마나 힘드시겠어요”라는 한 마디만 해줘도 상대방의 마음은 어느 정도 열린다. 더더군다나 갈등이 고조되어 있을 때 이런 말을 해주게 되면, 그간의 설움을 토로해내며 마음 문을 활짝 여는 경우를 여럿 봐왔다.
마지막으로, 먼저 사과를 한다.
상대방이 먼저 사과를 했는데, 거기다 대고 계속 화를 내는 사람은 별로 없다. 별로 없다는 말은 그런 사람도 있다는 것. 그런 사람은 상종하지 않으면 된다. 내지는 다음 기회를 노리면 된다. 사과의 힘은 상상 이상이다. 먼저 사과하면 지는 것 같지만, 위와 같이 대의명분과 상대방에 대한 배려와 위로를 고려하고 난 뒤의 사과는 아주 강력하다.
더불어 내 마음도 편해진다. 상대방을 배려하고 먼저 사과한 내 마음은 편해지면서 여유도 생긴다. 선택의 공은 상대방에게 넘어간 것이다. 그 사과를 받아들일지 아닐지, 당황한 상대방은 사과를 받아들이고 자신도 사과를 자연스레 하게 된다. 다시 말하지만,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은 사람과는 상종하지 않으면 되지만 그 사람의 마음은 불편함으로 가득 차 있을 것이 뻔하다.
일상생활에서도
먼저 사과하는 것의 마법은 비단 직장생활에 국한된 것이 아니다. 가족이나 연인, 친구 사이에서도 물론 통한다. 말이 쉽지 정말 어려운 일이다. 이성적으로는 이해가 돼도 마음은 그렇지 못한 것이 바로 사과다. 직장에서는 이런 일이 더 쉽게 일어나니 직장에서 연습한 후에, 다른 곳에 활용해보는 것은 어떨까? 아, 물론 싸우지 않고 이기는 것이 제일이라는 것은 잊지 말아야 한다.
원문: 스테르담의 브런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