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의 영향력이란 실로 무섭다. 그 언저리에서 밥벌이를 하는 사람 중 하나이기에 늘 두려웠고, 늘 조심했다. 하지만 방심은 한순간이었다. 모 영화의 명대사처럼 6·25 전쟁의 발발 원인 ‘방심’이 내 안에서 ‘간장게장 전쟁’을 일으켰다.
당시 나는 프로젝트를 끝내고 몸은 한없이 퍼져 있었고, 마음은 몸보다 더 느슨해져 있었다. 역대급 무더위에 밖에 나갈 생각조차 하지 않고, 에어컨을 틀어 놓은 거실에 널브러져 초점 없는 눈으로 리모컨을 누르며 손가락 운동에 열중했다. 쉴 새 없이 재방을 돌리는 프로그램 중 〈밥블레스유〉와 〈나 혼자 산다〉가 결정타였다. 두 프로그램의 연이은 간장게장 공격에 결국 나는 장안에 소문난 간장게장집 위치를 검색하고야 말았다.
평소 그다지 비린 음식을 즐기는 편이 아니다. 게다가 날것은 더더욱 가까이하지 않는다. 굳이 따지자면 짭짤한 간장게장보다는 매콤한 양념게장파다. 그럼에도 간장게장에 꽂힌 이유는, 오직 노오란 알이 가득 들어찬 간장게장을 손가락 쪽쪽 빨며 먹어대는 TV 속 그녀들 덕분이었다. 홈쇼핑 시식 모델 뺨을 후려칠 기세였다. ‘간장게장 먹는 법’의 교과서 같은 먹성이었다. 만약 ‘간장게장 맛있게 먹기 대회’가 있다면 호날두+메시급의 먹방이었다.
긴 고민을 하지 않고 〈밥블레스유〉의 그녀들이 찾았던 전문점을 가야겠다 마음을 먹었다. 평소에도 몇 번을 지나치던 길에 있던 식당이었음에도 굳이 찾아가진 않았다. 원래도 유명했던 곳이지만 방송이 나간 후 간장게장 대란이 일어 예약 없이는 못 먹는 곳이 됐다 하여, 평일을 공략했다. 이것이 바로 프리랜서가 가진 몇 안 되는 눈물겨운 특권이겠지…(씁쓸)
간장게장님을 얕잡아 본 오만한 생각은 몇 분 지나지 않아 와장창 무너지고 말았다. 예약 문의를 위해 걸었던 전화 속 목소린 “제발 그만훼 이것들아”라고는 말하지 않았지만 지쳐 쓰러지기 일보 직전의 목소리로 말했다. “오늘 게가 다 떨어졌습니다. 예약은 2주 후에나 가능해요”. 난 2주 후까지 기다릴 자신이 없었다. 과연 2주 후까지 간장게장을 향한 열망이 지금과 같을지는 의문이었다. 나는 나를 잘 안다. 변덕스러운 내가 그럴 리 없는 게 분명했다.
근방의 다른 게장집을 다시 서치 했다. 그리 멀지 않은 거리에 비슷한 구성으로 조금 더 저렴한 가격에 간장게장을 판매하는 곳이 있었다. 앞선 곳보다 명성은 덜하지만 마니아들 사이에서 입소문이 자자한 곳이다. 하지만 이곳은 100% 예약제란다. 예약한 인원수의 음식만 준비하기 때문에 이곳 역시 오늘 먹을 수 있을 거란 확신은 없다.
조심스러운 마음으로 전화를 했더니 역시나 “제발 그만해 이것들아”라고는 말하지 않았지만 지쳐 쓰러지기 일보 직전의 목소리가 들린다. 나 같은 인간이 한둘이 아닐 것이다. 다행히 저녁 장사는 6시 오픈인데 7시 예약 전에 딱 한 자리가 남았다고 한다. 대신 1시간 안에 식사를 끝내야 한다는 조건부 허락이 떨어졌다. 간장게장느님을 영접하는 데 그 정도 조건은 아무 문제가 되지 않았다.
흔쾌히 예약하고 예약 시간에 맞춰 마포의 간장게장집으로 향했다. 사회생활 꼬꼬마 시절 마포 근방에서 일한 적이 있다. 그래서 그 동네의 이름난 곳들은 거의 다녀봤다고 자부했는데, 그곳만큼은 처음이었다. 유명한 먹자골목 뒤편 작은 식당이었다. 저녁때가 아직 아니었는데 식당 안은 사람들로 붐볐다.
빈자리에도 빼곡하게 밑반찬들이 차려진 걸 보면 분명 예약이 꽉 차 있는 것이었다. 우리 일행이 앉자마자 예약 손님들은 쉴 새 없이 밀려들어 자기 자리를 찾아갔다. 준비성이 덜했던 현장 박치기족들은 속절없이 퇴짜를 맞았다. 그 혼돈의 카오스에서 오롯이 테이블을 차지하노라니 묘한 쾌감이 밀려들었다.
이곳은 손님에게 메뉴판을 주지 않는다. 다만 벽에 거대하게 붙은 간장게장 정식 상차림 사진이 이 식당의 아이덴티티를 말해준다. 물론 추가 메뉴도 있긴 하다. 하지만 이 역시 간장게장 정식을 주문해야 맛볼 수 있는 자격이 주어진다. 어찌 보면 불친절하고 또 어찌 보면 호쾌한 주문방식에 어안이 벙벙했다. 식당 안에는 특별한 대화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각자 자신 앞에 주어진 간장게장의 다리를 쪽쪽 빠는 소리와, 게딱지에 밥 비비는 소리만 식당을 가득 채웠다.
나와 일행 역시 1인 1마리의 게를 기준으로 가지런하게 잘린 간장게장 접시가 앞에 놓이자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앞의 손님들과 같은 상태가 되었다. 주황색 알이 그득 찬 간장게장은 얇게 썰린 진 초록색 청양고추와 선명한 대비를 이루었다. 꽉 찬 살은 탱글탱글하게 존재감을 뽐냈고, 먹기 좋은 크기로 다듬어진 게들은 찰랑이는 짙은 갈색의 양념간장에 발목을 담근 상태였다.
간장게장 앞에서 대화는 사치다. 젓가락 역시 거추장스러운 문명의 도구일 뿐이다. 앞선 손님들처럼 우리도 젓가락 대신 손가락을 이용해 맛보기 시작했다. 기대감에 차 게의 몸통을 입안 가득 넣고 있는 힘껏 쭉 짜 들이마셨다. 신선한 살과 양념간장의 맛이 어우러져 입안에서 간장게장 파티가 펼쳐졌다. 녹진한 알은 게의 풍미를 더했고, 맛의 끝에는 매콤한 청양고추의 맛이 퍼지며 게 특유의 비린 맛를 잡아 주었다.
쉴 틈 없이 다시 갓 지은 밥을 게딱지에 넣고 비볐다. 게딱지 구석에 숨은 알과 내장들까지 싹싹 긁어 섞었다. 그리고는 감태 위에 한 숟갈을 올려 싸 먹었다. 게장의 감칠맛은 기본, 감태 덕분인지 고소함이 배가 되었다. 다만 짠맛이라면 몸서리를 치는 부모님 밑에서 자란 탓인지 평균치보다는 덜 짜지만 내 입맛에는 짭짤하게 느껴졌다. 그래서 심심한 달걀찜으로 짠맛을 중화시켜야 했다.
간장게장 마니아들과 비교하면 하찮지만 나름 간장게장을 먹어왔던 세월이 무상했다. 그간 먹어왔던 간장게장이 간장에 절인 연세 지긋한 게였다면 이것은 양념간장 샤워를 한 청순한 게를 맛본 기분이다. 잠자던 미각을 깨운 궁극의 맛이라거나 자다가도 먹고 싶어 눈이 번쩍하고 떠질 맛은 아니다. 그저 ‘1인당 3만 2,000원의 행복이 이런 거구나! 이래서 돈을 벌어야 하는구나!’ 물론 더 비싸고 고급진 게장이야 널렸겠지만 나는 자본주의의 냉혹한 현실을 3만 2,000원짜리 간장게장을 통해 깨달았을 뿐이다.
간장게장이란 한국인에게 어떤 존재일까? 언젠가 세네갈에서 간장게장을 맛본 적 있다. 현지에서 근무하시는 손맛 좋은 분께서 고향의 맛이 그리워 현지 수산시장에서 싱싱한 블루크랩을 사다가 담근 거라고 했다. 나중에 알았지만 타국의 땅에 사는 많은 동포가 꽃게의 일종인 이 블루크랩으로 게장을 담가 먹는다고 한다.
나야 며칠 후면 한국으로 돌아가지만 몇 해는 더 그곳에 머물러야 하는 그분에게 이보다 귀한 음식이 없었을 것이다. 아프리카 땅에도 한식집이 심심치 않게 생겨날 때였지만 간장게장만큼은 쉽게 맛볼 수 없는 존재였기 때문이다. 간장게장을 향한 간절함이 낯선 땅에서도 간장게장을 담그게 하는 기적을 만들었을지 모를 일이다.
쉽게 접근할 수 없지만, 만나면 빠져들고, 또 즐기게 되는 마성의 음식, 간. 장. 게. 장. 언제가 될지 모르지만 내 인생에 또다시 간장게장 바람이 불면 생각날 그곳에서의 한 끼는 짧지만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혹시 나처럼 무더위에 지쳐 입맛이 가출했다면 마포 ‘서산 꽃게’의 문을 두드려 보자. 물론 사전 예약은 필수.
원문: 호사의 브런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