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들의 일상은 소소하고 평범했으며 행복해 보였다. 자식들과 대화하고 손주들과 놀아주며 고양이에게 밥을 주는 소박한 삶이었다. 하지만 ‘그 이야기’만 꺼내면 할머니들의 주름진 얼굴은 금세 어두워졌다. 처음에는 말을 피하다가 화를 내기도 했고 눈물을 보이면서 고통스러워했다. 70년 전 새겨진 몸과 마음의 상처는 여전히 그들의 삶을 옥죄었다.
한중 합작 다큐멘터리 영화 ‘22’는 중국에 남아 있는 위안부 피해자들의 이야기를 담아냈다. 2014년 촬영 당시 생존자 22명이 작품의 제목이 됐다. 대부분 90세를 넘긴 고령의 할머니들은 삶의 끝자락에 서 있었고, 2018년 현재 남아 있는 이들은 단 7명뿐이다. ‘22’는 할머니들이 한 분씩 눈을 감지만, 이들이 다 돌아가신다 해도 역사적 사실은 결코 변하지 않음을 보여준다.
전쟁에 눈이 먼 일본군이 온갖 악행을 저지르던 1940년대, 중국 지역 내 위안부는 약 20만 명에 달했다. ‘22’에 나오는 할머니들은 고작 16~19살 어린 나이에 위안소로 끌려가 고초를 겪었다. 영화는 할머니들의 고통을 파헤치기보다는 참혹한 기억과 끔찍한 고통을 안고서도 주어진 생을 묵묵히 이어가는 이들의 용기 있는 삶을 담담하게 그려낸다.
여기에는 전북 전주에서 태어났지만 18세가 되던 1941년 중국 한커우 위안소로 끌려간 한국인 故박차순(1922~2017) 할머니도 있다. ‘일본인이 한커우에 세운 큰 공장에 가면 큰돈을 벌 수 있다’는 말에 속아 위안부가 돼 수모를 겪었다. 전쟁이 끝난 뒤에도 한국에 돌아가지 못하고 중국에 남아 가난하게 사는 동안 한국어를 다 잊었다. 그런 할머니가 서툰 발음으로 ‘아리랑’의 노랫가락을 읊는 장면은 깊고 묵직한 울림을 남긴다.
당초 ‘22’는 상업성이 높지 않고 일본군 위안부 피해 문제에 대한 중국인들의 인식이 한국에 비해 상대적으로 낮아 개봉이 불투명했던 작품이었다. 궈커 감독은 제작비가 부족해 어려움을 겪던 중 같은 소재를 다룬 한국 영화 ‘귀향’에서 아이디어를 얻었다. 궈커 감독은 ‘귀향’의 조정래 감독을 만나 크라우드펀딩으로 사회적 관심을 끌어내 개봉까지 했던 사례에 대해 들었다.
이후 중국에서 ‘22’ 제작 및 홍보비 마련을 위한 크라우드펀딩을 시작했다. 초반에 부진했던 펀딩은 중국 공영방송인 CCTV에서 관련 소식이 보도되면서 하루 만에 목표 금액인 100만 위안(약 1억 6,000만 원)을 달성해 개봉을 이끌었다. 참여자는 3만 2,099명으로 중국에서 영화 상영 시 엔딩크레딧에 모든 후원자의 이름이 길게 늘어서 관객들에게 감동을 안기기도 했다.
지난해 8월 중국에서 개봉한 ‘22’는 첫날 손익분기점을 넘겼으며, 3주 만에 수익 1억 7000만 위안(약 290억 원)을 돌파하며 흥행에 성공했다. 누적 관객 수 550만 명을 기록해 제작비의 60배가 넘는 수익성과를 거두며 중국 영화계에서 화제의 작품으로 조명됐다.
‘22’를 통해 중국이 보여준 위안부 할머니들에 대한 관심이 한국으로 이어져 ‘세계 위안부 기림일’인 14일 개봉했다. 1991년 8월 14일은 위안부 피해자인 故 김학순 할머니(1921~1997)가 생존자 중 최초로 피해 사실을 공개 증언한 날로, 국제적 관심을 모으는 계기가 됐다. 이후 2012년 ‘일본군 위안부 해결을 위한 아시아연대회의’에서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가 8월 14일을 ‘세계 위안부 기림일’로 지정했다.
2013년부터 중국 각지에 흩어진 위안부 피해 생존자 22명을 찾아 직접 증언을 들고 기록한 궈커 감독은 “지금이 할머니들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는 마지막 기회라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역사 그 자체인 할머니들이 한 분씩 눈을 감는다. 쿼거 감독의 말처럼 자신의 마지막 생을 묵묵히 이어가는 할머니들의 모습에서 역사의 지혜와 인생의 의미를 배울 수 있을 것이다.
원문: 이로운넷 / 글: 양승희 / 사진: ㈜아시아홈엔터테인먼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