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 그대로 염천(炎天)이었다. 하늘은 불타고 땅은 익는 듯했다. 한낮엔 40도를 오르내렸다. ‘대프리카’ 얘기가 아니다. 전국이 다 그랬다. 거리에 사람이 없다. 여름 한 철 장사인 해수욕장도 마찬가지다. 전에 없던 일이다. 예사 자연재해가 아닌 것 같았다.
그 폭염에 그가 떠났다. 진보 정치인의 대명사 노회찬이 떠났다. 올해 예순둘이니 평균수명으로 쳐도 20년은 더 살 나이다. 그런 노회찬이 불귀의 객이 되었다. 털털한 모습, 촌철살인의 재담, 이젠 모두 그림의 떡이다. 다시는 그의 모습을 볼 수 없다.
7월 마지막 주는 노회찬의 한 주였다. 신문도 방송도 모두 노회찬 얘기뿐이었다. 추모행렬엔 여야, 남녀노소가 따로 없었다. 전국에서 7만 명이 조문했단다. 다들 그의 죽음을 서러워하고 또 억울해했다. 또 그의 죽음 앞에 많이 미안해했다. 노무현 대통령 서거 이후 처음 있는 일이다. 다시는 보기 어려울 장면이다.
7월 23일 월요일, 속보로 전한 비보는 쉬 믿기 어려웠다. 최근 드루킹 특검이 그의 이름을 몇 번 거론하긴 했지만 다들 설마 했다. ‘아무려면 노회찬이 그럴 리야’ ‘설마 그렇다고 죽기까지야’ 했다. 그러나 설마는 결국 비극을 낳고 말았다.
노회찬은 한 마디로 ‘인물’이었다. 그는 경기고 재학 시절부터 유신 반대운동을 했다. 모르긴 해도 노회찬이 유일무이한 기록이지 싶다. 그는 용기와 정의감으로 똘똘 뭉쳐진 정의한(正義漢)이었다. 또 국회면 국회 토론회면 토론회, 가는 곳마다 그는 화제를 몰고 다녔다. 이는 그의 당당한 삶과 탄탄한 경륜에서 나온 것이다.
그가 떠난 후 많은 이야기가 나왔다. 궁핍과 절제의 그의 60 평생, 진보적 삶의 가치, 과도한 진보진영의 염결주의(廉潔主義), 정의당의 미래, 정치자금법 개정 문제 등등. 모두 그가 떠난 뒤 폭포처럼 쏟아져 나왔다. 그러나 이런 얘기들은 그리 오래가지 않는다. 마치 제사가 끝난 뒤 음복 자리에서 나누는 한담과도 같다.
장례를 치른 지 한참 지났지만 아직은 그의 부재가 실감 나지 않는다. 사람들은 또 금세 잊어버린다. ‘지못미’를 말하던 사람들조차도. 일상에 묻혀 사는 생활인이니 탓할 일도 아니다. 인지상정이요, 세상사가 그렇다.
그 무더위에도 그의 묘소를 찾는 발길이 적지 않다고 했다. 우선은 남은 자들의 그리움 때문일 게다. 그다음은 빚진 자들의 아프고 미안한 마음에서일 게다. 추모(追慕)요, 추념(追念)이다. 그러나 다들 말하듯 이걸로 여기서 끝내선 안 된다. 노회찬의 부재에 대한 각성과 그의 빈자리를 메꾸는 일이 시급하다.
크게 보면 두 가지, 유지 계승과 사람 키우기가 아닐까 싶다. 그 시작은 ‘국회 특수활동비 폐지’부터다. 지난 5월 대법원은 국회 특활비 내역을 공개하라는 판결을 내렸다. 그러나 국회는 오불관언이다. 오만으로 똘똘 뭉쳐 있다. 이번에 국회의 못된 관행을 반드시 청산해야 한다. 그가 마지막까지 힘을 쏟았던 일이어서 더욱 그렇다.
다음은 생전에 그가 발의했던 법안들을 살려내는 일이다. 그가 대표발의 한 법안은 총 43건으로 대부분은 사회적 약자, 노동자, 서민을 위한 것들이다. 그가 씨를 뿌렸으니 이제는 살아남은 자가 잘 키워서 결실을 거둬야 한다. 그게 살아남은 자들의 도리요, 의무다. 비단 국회의원들만의 얘기가 아니다. 우리 국민 모두의 숙제다.
원내 5석인 정의당의 지지율이 15%를 돌파했다. 지난 3일 한국갤럽의 여론조사 결과다. 2012년 10월 창당 이래 최고치다. 지지율로는 제1야당이다. 노회찬의 목숨값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 만큼 이에 만족지 말고 지지율 20%, 30%, 40%에 도전해야 한다. 노회찬이 키운 정당이라면 못해낼 것도 없다.
끝으로 그의 빈자리를 채워야 한다. 유시민이 추모사에서 말한 ‘완벽하기보다는 좋은 사람’, 그런 사람으로 채워야 한다. 당 안팎에서 널리 찾아야 한다. 당장 없으면 이제라도 키워야 한다. 진보는 분열로 망한다는 속설도 이젠 깨부숴야 한다. 제2, 제3의 노회찬이 나타난다면 노회찬이 하늘에서 춤을 출 게다. 선물 받은 새 구두 신고서.
원문: 보림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