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뜬다’는 카페에 가보면 내가 아는 말보다 모르는 말이 더 많다. 스타벅스 짬이 몇 년인데 이렇게 메뉴판이 어려울 수 있나? 플랫 화이트, 롱블랙, 그냥 블랙, 필터 커피, 심하면 피콜로, 리스트레토까지 있다. 서브웨이 주문도 어려워 블로그에 주문법을 찾아보는 이라면 이런 데서 머리가 하얘질 것이다.
그나마 플랫 화이트를 골라 직원에게 물어보니 라떼랑 비슷한 메뉴라고 한다. 똑같이 우유가 들어있으니 그러려니 한다. 그런데 양이 매우 짜다. 맛은 좀 더 진하고, 화려한 아트가 올려져 있어 아 뭔가 다르긴 한 건가 보다, 하고 넘어간다. 카페 분위기에 압도당했기 때문이다. 사실 이것도 몇 달 전 얘기다. 어느새 플랫 화이트가 라떼만큼 익숙해진 사람이 더 많다.
의외로 호주에서 왔어요
지금 전 세계 커피 수도는 어딜까? 커피 하면 떠오르는 이탈리아, 피카의 나라 스웨덴을 제치고, 지금 커피 제3 물결을 이끄는 도시는 호주 멜버른이다. 우리가 요즘 많이 보는 플랫 화이트, 롱블랙, 블랙 같은 커피 용어를 비롯해 심지어 (뉴질랜드와 서로 원조라며 논란이 있긴 하지만) 아보카도 토스트도 멜버른에서 태어났다!
소위 현재 유행하는 전 세계 ‘힙스터 카페’들은 모두 멜버른식 카페를 따라 하고 있다고 봐도 무방하다. 맥도날드 알바생조차 최소 1년 넘은 바리스타라는 이곳. 멜버른을 필두로 한 이런 전 세계 커피 물결을 제3 물결 시대라고 부른다. 이전 제2 물결이 스타벅스를 필두로 한 맛의 평준화를 지향했다면, 제3 물결은 원두 본연의 맛을 추구하는 방향이다.
커피는 마치 차나 와인처럼 세심하게 다루어진다. 예전에는 원두 맛을 설명하기 위해 과테말라, 에티오피아 같은 나라 이름이 오갔다면 지금은 커피 품종, 커피체리 열매에서 씨와 과육을 분리하는 방법, 생산자 이름까지 거론된다. 그래서 제3 물결을 칭하는 다른 이름도 스페셜티(specialty:전문성)이다.
밀라노는 안 마시고 서울은 마시는 것
재밌는 건, 전통 커피 강국이었던 이탈리아가 스페셜티씬에서는 한참 뒤쳐져 굴욕을 겪고 있다는 것이다. 걸림돌은 커피 전통이었다. 이탈리아 소비자들은 오랫동안 묵직하고 찐한 샷을 마셔왔기 때문에, 굳이 웃돈 주고 섬세하고 ‘좋은 원두'(=비싼 값)를 먹을 필요를 느끼지 않는다.
밀라노에 최근 과감히 문을 연 스페셜티 카페 ‘Orsonero coffee’는 처음에, 1유로 하던 에스프레소를 왜 1.2유로나 내고 마셔야 하냐며 묻는 동네 주민들을 설득하기가 가장 어려웠다고 말한다(우리 커피값에 눈물을 훔쳐본다…).
이탈리아보다는 사정이 좀 더 낫지만, 피카(FIKA)국 스웨덴도 마찬가지다. 세계 2위 커피 소비국답게 하루 평균 3.5잔의 커피를 마시는 사람들은 식당가면 물처럼 마실 수 있는 공짜 커피가 익숙하다. 스웨덴 스페셜티씬 사람들은 물처럼 퍼마시던 커피를 굳이 비싼 돈 내고 먹어야 하냐며 묻는 소비자들을 설득하느라 골머리를 앓고 있다.
이 점에서 보면 서울은 상대적으로 이 문제에서 자유로웠다. 아이러니하게 보이지만 커피 전통과 관습이 없고, 오히려 유럽 카페들을 빠르게 따라 하려는 성향이 스페셜티 문화가 빠르게 성장하는 데 밑거름이 되었다. 요즘 커피 업계 종사자분들을 만나면 듣는 얘기가 있다.
서울 커피 수준이 세계적으로도 상당하다.
주말이면 젊은이들은 뜨는 동네 골목길로 향한다. 간판도 없는데도 다들 알음알음 찾아와 꽉 찬다. 벽은 시멘트, 나무 탁자로 된 카페에 앉는다. 카페를 둘러보면 사장님의 안목이 보이는 식물이나 작품이 걸려 있고 테이블 모양과 의자 모양도 제각각이다. 아보카도가 올라간 토스트를 먹고 플랫 화이트를 마신다.
이름도 친숙하지 않은 도시, 멜버른발 카페가 우리의 일상이 되어가고 있다. 재밌는 현상이다.
원문: 김연수의 브런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