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하루키 잘 모른다
하루키의 작품 중에 내가 읽어본 거라곤 『노르웨이의 숲』 정도다. 그마저도 학창시절에 읽었다. 이후로 하루키는 이름 정도만 아는, 최근에는 노벨상 시즌이 올 때마다 이름이 오르내리는 작가 정도로 인식하고 있다.
『수리부엉이는 황혼에 날아오른다』를 받아든 뒤엔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뭐야, 그냥 인터뷰 내용이네. 제목만 보면 완전 소설 같았는데. 안도감이 들었다. 금방 읽고 써버려야지, 정도의 마음가짐으로 읽기 시작했다. 그러다 다섯 시간 정도를 내리 읽었다.
무라카미 / 저절로 나오지 않을 때는 비유를 쓰지 않아요. 억지로 만들려면 말에서 힘이 빠져버리니까.
특히 이 부분을 몇 번이나 반복해 읽었다. 드문 일이었다. 참고서 아닌 책을 메모하며 읽은 것도 처음이었다. 아무리 좋은 부분인들 밑줄을 치고 메모를 하는 건 멋없다. 책은 읽고 느끼는 것이 아닌가. 그런데 내가 메모를 왜 하고 있지. 뭐, 서평에 적당히 인용도 해야 할 테니까…
변명이다. 사실은 와닿는 게 많아서 그랬다.
‘이건 나한테 던지는 이야기인가?’ 싶은 글이 있다.
이런 느낌이 오면, 그대로 멈춰서 한참동안 그 문장을 쳐다보는 습관이 있다. 좋은 작품일수록 이런 느낌의 빈도가 잦아진다. 생각해보면 지금까지 그런 느낌들은 ‘지금 내가 필요로 했던 말’ 혹은 ‘내가 스스로 질문하던 것에 대한 답’ 일 때가 많았다.
최근에 나는 글 쓰는 일에 더욱 몰두하기로 가닥을 잡았다. 이때 만난 책 『수리부엉이는 황혼에 날아오른다』는 두 작가가 글 쓰는 일에 대해 나누는 대담이다. 생각해보면 당연히 ‘느낌’이 오는 책일 수밖에 없었다.
무라카미 / …그래서 저는 장편소설을 전작으로만 씁니다. 잡지 연재는 절대 불가능해요. 혹시 한다면 이미 다 쓴 완성 원고를 나눠서 싣는 거죠. 그러다보니 다 쓸 때까지 몇 년 씩 걸리기도 하고, 고독한 작업이니 말 그대로 기진맥진해요.
일단 잡지에 실어놓고 나중에 고치면 되지 않느냐는 사람도 있는데, 저는 그게 안 돼요. 한번 활자화되어 다른 이의 눈에 닿았던 글은 더이상 순수하게 자신만의 것이라 할 수 없습니다. 어둠 속에서 작업하기가 불가능해져요. 그러니 어쨌거나 마음에 들 때까지 시간을 들여 고쳐 쓰고, 그다음에 비로소 활자화합니다.
진지한 마음으로 글을 써봤던 사람이라면 책 곳곳에서 속이 울릴 것이다. 당장 나처럼 변변찮은 글쟁이에게도 확, 하고 오는 부분이 많았다. 하루키도 이런 고민을 거치는구나, 어떤 어려움을 어떻게 다루는구나. 아마추어와 세계적인 작가 사이에도 모종의 공감대가 형성된다는 것이 놀랍고, 한편으로는 안심이 됐다.
물론 고뇌의 깊이에는 차이가 있겠지만. 요컨대 르브론 제임스가 ‘왼손 드리블이 어렵다’고 말하는 것을 보고 드는 생각과 비슷하다. 맞아, 왼손 드리블은 어렵지, 나도 항상 안 되더라고, 연습을 더 하면 나아질까?(웃음)
개인적으로는 대화의 형태가 좋다
소회를 서술하는 방식보다 더 효과적으로 다가오는 것 같다. 왜, 소설에서도 직접 묘사보다는 대화부분이 더 쉽게 읽히지 않던가.
『수리부엉이는 황혼에 날아오른다』가 좋은 대화로 남을 수 있었던 것에는 ‘가와카미라는 인터뷰어가 상당한 역할을 했다. 가와카미는 작가이면서 하루키의 팬(소위 ‘하루키스트’라고 하는)으로 유명하다. 세대와 성별이 다름에도 불구하고, 업의 본질과 작품에 대한 공감대로 말미암아 이토록 깊은 대화를 할 수 있다는 것이 새삼 감탄스럽다. 보통은 둘 중 하나만 달라도 대화가 잘… 안 되지 않나. 요즘 우리나라에서는 특히나 말이다.
다음은 가와카미라는 인터뷰어의 매력이 가장 잘 드러난 대목.
가와카미 / 『MONKEY』 인터뷰에서도 ‘3인칭을 획득함으로써 잃게 된 건 없는가’라는 질문에 그렇게 말씀하신 기억이 있어요. 지난 작품은 다시 읽지 않는다고……
무라카미 / 맞아요. 안 읽습니다.
가와카미 / 사실 조금은 읽지 않으실지(웃음)? ‘난 역시 잘 쓰는군, 대단해’ 할 때 없으세요(웃음)?
무라카미 / 전혀 없어요. …짧은 글을 어쩔 수 없이 읽고, 낭독하기 쉽도록 손보는 경우는 있습니다만, 그외에는 전혀 들여다보지 않아요. 창피해서요.
가와카미 / 『태엽 감는 새』를 책장에서 무심코 꺼내들고 넘겨보다가 ‘오오, 이 다이너미즘…… 역시 돌파력 있어’ 할 때도 없으세요?
무라카미 / 정말 안 읽어요. 거짓말 아니라고요(웃음).
가와카미 / ‘피부 벗기는 장면, 이건 세계 제일인걸’, 이럴 때(웃음).
무라카미 / 없어요, 없어. 다만 가끔 무슨 글을 읽다가 ‘음, 이거 꽤 좋은걸’ 했더니 내 소설 인용이더라 할 때는 있어요.
가와카미 / 잠깐, 잠깐만요(웃음), 네? 뭔가를 읽다가 이거 좋은데 했던 부분이 알고 보니 자기 글이었다고요?(웃음)
나는 작가로서의 가와카미는 잘 모르지만, 핵심을 찌르는 질문의 깊이나, 자연스럽게 대화주제를 이어붙이는 능수능란함이 있는 것을 잘 알겠다. 인터뷰를 하기 전에 꼼꼼히 공부해오는 태도도 멋있었다. 하루키 본인이 하루키스트인 가와카미보다 모르는 상황도 자주 나온다. 되레 하루키가 본인 작품에 나오는 인물 이름을 물어보는 경우도 있다!
사람에 따라선 가와카미가 던지는 질문의 깊이 혹은 길이가 과하다고 느낄 만도 하다. 실제로 가와카미는 하루키의 관점에 대해 챌린지를 자주 하는 편이고, 자신의 의견을 스스럼없이 출력한다. 확실히 고전적인 개념보다 에고가 강한 인터뷰어인데, 그래도 불편함을 느낄 만한 대화 흐름으로 이어지는 법은 없다. 가와카미가 던지는 모든 질문과 의견은 하루키에 대한 무한한 존중을 바탕으로 이뤄지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솔직히, 가와카미 같은 인터뷰어가 자기 작품에 대해 그 정도 깊이로 질문해오는 것을 싫어할 작가는 없을 거라 생각한다. 심지어 로망이라고까지 말할 수 있다. 나 역시도 독자와 내 글에 대해 대화한 기억들은 늘 즐거운 이미지로 남아 있다.
‘하루키’를 더 알고 읽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인터뷰에서 드러나는 하루키의 캐릭터는, 개인적인 평가로 몹시 매력적이었다. 특히 악의 이중삼중성이라든지, 소설가가 사회적 발언을 하는 방식이라든지. 이런 의견을 피력할 때에도 매우 조심스럽고 섬세하다는 점도 좋았다.
특히 삶의 방향성과 일에 대한 관점에서는 많이 배웠다. 하루키의 글을 좋아하는 사람도, 싫어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하루키가 글을 대하는 태도와 자세는 누구에게라도 존경받을만하다. 정말로.
무라카미 / 영화는 종합예술입니다. 배우, 감독, 시나리오작가, 카메라, 예산 등 여러 사람의 힘이 모여 완성되는 예술이죠. 저는 아무래도 그런 데 맞지 않아요. 소설은 처음부터 끝까지 혼자서 할 수 있으니 이렇게 즐거운 일도 없죠.
가와카미 / 그렇죠. 아주 조심스럽게 말해서, 최고죠(웃음).
무라카미 / 네. 어쨌거나 책상과 종이, 펜만 있으면 할 수 있으니 이렇게 편한 일도 없죠. 누가 불평할 일도 없고, 뭐든 마음대로 쓸 수 있고. 결과물을 두고 누가 비난하거나 칭찬하더라도 혼자 떠안으면 그만이에요. 깔끔해서 좋죠. 저는 그런 게 좋습니다.
작가로서의 하루키에게 가장 인상적이었던 부분은 본인이 쓴 내용을 잘 기억하지 못한다는 점이었다. 과거의 자신을 마주하는 것이 원래 힘든 일이기도 하거니와, 이미 지나간 것들은 과정이며 앞으로 써내려갈 내용이 더 중요하니까.
『수리부엉이는 황혼에 날아오른다』에서 드러나는 하루키는 장인보다도 ‘글 오타쿠’의 면모가 강하다. ‘나는 X나 대단한 작가가 되겠어’하고 시작한 것이 아니라, 글을 너무 좋아해서 계속했고, 어느 순간 경지에 오르는. 영화감독으로 치면 쿠엔틴 타란티노와 비슷한 느낌이다.
다 읽고 의문이 하나 있다면, 이렇게 흥미로운 내용이라 푹 빠져 읽었는데도 엄청 길게 느껴졌다는 것이다. 왜 그랬지 하고보니 실제로 엄청나게 길었다. 두 사람 다 말 겁나 많다. 시쳇말로 투머치토커다.
덕분에, 그만큼 좋은 이야기를 질리도록 오래 봤다. 좋은 이야기에 대해 쓰는 일은 마찬가지로 즐겁다. 보고 듣고 익히고, 나는 이제 더 많은 이야기를 하고 싶어졌다. 자, 이제 끝을 어떻게 내는 게 좋을까? 옳지. 두 작가님 말씀 잘 들었습니다. 이제 제 얘기를 좀 하자면, 제가 LA에 있을 때……
※ 해당 기사는 문학동네의 후원으로 제작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