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파가 가득한 지하철에 서 있다. 서 있다고 불편하지도, 다리가 아프지도 않다. 하지만 자리에 앉은 초딩은 내게 자리를 양보한다. 자리에 앉은 남자는 ‘나 아저씨 아닌데…’라며 헛기침을 한다. 함께 지하철에 탔던 친구는 외친다. 그는 엄마도 인정한 마성의 노안. 마시즘이다.
요즘 복고가 유행이라며? 내 얼굴이 복고야…
‘애늙은이’라는 별명을 명찰처럼 달았던 때가 있다. 엄마는 내게 나중에 나이가 들어도 그 얼굴이 똑같을 거라며 이득이 아니냐고 말했다. 그렇게 ‘애’자만 떨어지고 ‘늙은이’가 별명으로 남았다지…
위로할 필요는 없다. 이제는 물건도 사람도 ‘레트로’, 복고가 대세기 때문이다. 노래도 옛날 노래가 좋고, 패션도 구제가 대세다. 그렇다. 연식에 비해 얼굴이 빈티지인 내가 당당해질 수 있는 시대가 온 것이다. 힙하고 싶은데 안된다고? 당신의 도시적인 외모를 한탄하라 에헴.
레트로에 대한 열풍은 이미 단종된 음료수를 세상에 내놓게 했다. 오늘 마시즘은 당신의 힙함을 살려줄 마지막 단추. 레트로 음료수를 소개한다.
돌아온 축배사이다, 갈배사이다
사이다를 이야기할 때, 빠지지 않는 전설의 음료가 있다. 해태음료에서 만든 ‘축배사이다’다. 천편일률 같던 사이다 시장에 등장한 배 맛 사이다. 하지만 말하는 순간 나이와 낡은 취향이 드러났기에 추억은 하되, 입 밖으로는 내놓을 수 없는 볼드모트 같은 음료수였다.
그런 축배사이다가 돌아왔다. 해태htb에서 ‘갈배사이다’로 축배사이다의 계보를 이은 것이다. 배맛 음료수의 또 하나의 레전드 ‘갈아만든 배’를 사이다 버전으로 출시하다니! 축배사이다를 아는 사람들은 이 사진이 합성이라고 생각하겠지.
갈배사이다를 구했다. 가까이 편의점에는 없고 동네슈퍼나 대형마트를 뒤져야 한다(편의점에 파는 축배사이다는 상상할 수 없으니까). 모름지기 힘들게 구한 음료가 더 시원한 법. 갈배사이다를 마셨다. 갈아만든 배의 알갱이가 탄산으로 변한 기분이다. 축배사이다와 맛과 분위기가 닮았지만 갈배사이다 쪽이 배향이 더욱 짙다.
페트를 사 오지 않고 캔을 사 온 것이 아쉬울 정도였다. 갈배사이다… 이 녀석은 축배사이다를 그리워했던 것이 틀리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1990년대 엄지 척의 주인공, 따봉 감귤 주스
한국 음료 역사에서 가장 임팩트 있는 한 단어가 무엇일까? 바로 ‘따봉’이다. 따봉은 델몬트 오렌지 주스 광고에 사용되며 알려졌다. “브라질에서는 정말 좋은 오렌지를 찾았을 때 델몬트는 이렇게 말합니다. 따봉” 이 한 줄의 문구 덕분에 전국 마트에서는 손님들이 따봉을 찾았다.
문제는 그런 음료는 없다는 거… 델몬트를 광고하랬더니 따봉충만 만들어낸 희대의 촌극이었다. 물론 그 후에 델몬트는 델몬트 주스 대신 따봉 주스를 출시했다. 이제 마트에서 따봉을 외치면 주스를 구매할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유행어가 사라짐과 동시에 따봉 주스도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그런 따봉 주스가 돌아왔다. CU 편의점 음료 코너에 보이는 저 엄지 척 덕분에 구제 샵에 온 기분이 들 정도였다. 신나는 마음에 따봉 주스를 마셨다. 그리고 마시자마자 추억의 한켠으로 빠져들어 갔다. 엄마 손 잡고 오렌지 주스를 사 왔는데 마시고 보니 감귤 주스였던 그때로.
그때는 많이 울었는데 지금은 반갑다. 아, 그 따봉이 브라질 오렌지에서 제주 감귤까지 온 것이구나. 조심히 엄지를 들어본다.
사이다 고조할아버지, 럭키사이다
이쯤 되면 마시즘의 독자들은 눈치챌 것이다. 레트로란 모름지기 절판이 될수록 그리고 오래될수록 멋진 것이다. 친구가 빈티지 시계를 차고 왔으면 나는 손목에 모래시계, 아니 해시계라도 달아야 이길 수 있는 것이다(아니다).
지금의 레트로는 1990년대의 문화로 시간 이동을 한 것에 가깝다. 하지만 GS25는 계기판을 잘못 돌린 게 분명하다. 너무 옛날로 가서 1860년대의 사이다를 재현해버렸다. 바로 ‘럭키사이다’다(실제 한국전쟁 때 사라진 럭키사이다와는 이름만 같다).
럭키사이다에서는 칠성사이다, 스프라이트만을 마셔온 우리에게 추억이 아닌 낯선 맛이다. 밀키스의 상위 호환의 맛이 나기 때문이다. 조금 더 확실한 비유는 뽕따 아이스크림 녹인 맛. 더 정확한 것은 라무네 사이다의 맛이 난다. 아시아에 처음 들어온 사이다의 맛은 이토록 달콤했구나.
음료의 시간은 거꾸로 흐른다
옛날에는 흔하게 마셨던 것이 이제는 귀한 음료가 되었다. 이런 현상은 수십 년간 경제적 성장에 바빠서 취향과 문화를 돌보지 못한 우리의 뒤늦은 성찰이 아닐까?
럭키사이다를 마저 마시면서 이런 말을 뱉으니 시간여행이라도 다녀온 기분이다. 단순히 재미있는 시도를 넘어, 오랫동안 사랑받는 음료수를 지켜갔으면 좋겠다. 가만히 듣고 있던 친구는 고개를 끄덕이며 생각한다.
저 자식 아무리 봐도 나이 속이고 다니는 거 아냐?
원문: 마시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