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많은 드라마 중 내가 가장 좋아하는 작품은 단연 〈여인천하〉다. 지위고하를 가리지 않고 “뭬야!”를 외쳐대던 경빈은 내 마음속의 영원한 1픽이다. 그런 그녀가 사약을 얼굴에 뒤집어쓰고 죽는 장면은 어린 내게 충격과 공포를 남겼다. 세상에는 마셔선 안 되는 음료도 있구나.
‘마실 수 있는 모든 것’을 마시겠다는 마시즘에 종종 제보가 날아온다. 가끔은 만년설이나 녹조라떼를 마셔보라는 짓궂은 장난을 하는 분도 계신다. 그중 가장 흥미로운 것은 ‘사약(賜藥)’이다. 드라마로만 보았던 그 음료. 나는 사약에 대한 이런저런 자료를 찾으며 상상을 해본다. 그러다 잠을 자면 항상 이런 식이다.
죄인 마시즘은 사약을 받들라!
나를 찾는 소리에 눈을 뜬다. 잠옷이 아닌 고운 한복 핏. 비록 초가집에 살고 있지만, 입은 옷을 보아선 꽤 귀한 집에서 태어나서 자란 것이 분명하다. 문제는 내가 대역죄인이라는 것. 그리고 방금 한양에서 만들어진 따끈따끈한 사약이 집 앞에 택배처럼 날아온 것이다. 시작하자마자 부귀영화도 못 누리고 이렇게 가는구나.
나이키 조던 대신 가죽신을 신으며 밖으로 나왔다. 의금부에서 날아온 사약셔틀… 아니 금부도사는 예를 갖춘다. 원래 사약은 왕실 가족이나 정부 고위 관료만 받을 수 있는 특혜(?)다. 애초에 사약의 사자는 죽을 사(死)가 아닌 하사할 사(賜)다. 당신도 사약을 맛보고 싶다고? 그렇다면 금수저로 태어나길 바란다.
임금이 하사한 약. 사약을 마시기 전에는 임금을 향해 4번 절을 해야 한다. 꿈이지만 막상 죽을 생각을 하니 다리가 후들후들 떨린다. 내가 무슨 죄를 지었다고 이걸 마셔야 하고, 죽는데 임금이고 당나귀고 무슨 소용이람! 심지어 나는 초콜릿이 없으면 한약을 먹지 않는다고!
사약 앞에서 머뭇거리는 내게 금부도사는 체통을 지키라 툴툴댄다. 퇴근하고 싶어 그러는 것이 분명하다. 누구는 지금 인생을 퇴근하게 생겼는데 말이야. 속이 안 좋으니 사약 대신 다른 선택지는 없냐고 물어봤다. 안타깝게도 조선 시대에 전신마취 같은 것은 없었다. 다른 선택지로 때리고, 자르고, 찌르고… 하는 것들을 가져왔다는데. 으으.
이 말인즉슨 사약은 고맙게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사약은 신체를 훼손하지 않고 죽을 수 있는 최상급(?)의 형벌이었다. 그렇다면 설탕 같은 거는 없니? 이거… 왠지 너무 쓸 것 같아.
사약의 죽이는 맛, 달고 맵고 뜨겁구나
하지만 이대로 마실 것을 피하거나, 단순하게 마시고 죽어버리면(?) 마시즘이 아니다. 적어도 사약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무슨 맛과 효능을 내야 하는지를 말해야. 내 뒤의 대역죄인들이 맛을 가늠하지 않겠는가? 안타깝게도 사약의 제조방법은 공식적인 기록은 없지만 추정을 해보면 이런 트렌드를 지나왔다.
고대 중국에서는 짐새의 깃털을 사용했다. 짐새는 독사를 먹고 사는 하드코어 한 조류다. 덕분에 온몸에 독사의 독이 퍼져있는데, 그들은 짐새의 깃털을 술에 담가 독주를 만드는 것이다. 나중에는 ‘비소’라는 재료를 사용했다고 한다. 흔히 우리가 농약에 사용하는 물질이다.
조선 시대 사약은 ‘비소’를 가공한 ‘비상’을 썼을 것으로 추정된다. 강한 독성을 가진 비상은 비상을 제작하는 인부의 재직기간을 2년으로 단축시킨다. 그 이상 작업을 하면 머리카락과 수염이 빠지기 때문이다. ‘젠장 이런 걸 왜 만드는 거야!’라고 묻는다면… 비상은 소량씩 약재로 사용된다고 한다.
여기에 ‘부자’라는 약재를 합친다. 둘 다 소량씩 넣으면 약재인데 와장창 쏟으면 사약이 된다. 사약의 맛은 어떨까. 아마 쌍화탕의 곱빼기 같은 맛이 날 것이다. 맵고, 달고, 뜨거운 맛. 사약의 원리 자체가 양의 기운을 폭발시켜 죽이게 만드는 것이기 때문이다.
나의 마지막 입담을 나눌 동무. 금부도사에게 물었다. 마시면 바로 피를 흘리며 죽는 거냐고. 그의 말에 따르면 마시자마자 피를 토하는 것은 아니고, 약발이 돌 때까지 30분은 걸린다고 한다. 원한다면 방을 데워서 더 빠르게 돌게 만들어 주겠다고. 이 퇴근 앞에 잔인한 놈이 내 마지막 대화 상대라니!
사약을 마시고도 살 수 있지 않을까?
틀렸다. 이놈들은 퇴근을 기다리는 야구심판처럼 나를 재촉한다. 대학교 때 코카콜라 빨리 마시는 벌칙은 받아봤는데 사약이라니. 혹시나 하는 마음에 ‘사약을 마시고 살 수도 있지 않을까?’라는 상상을 한다. 이렇게 사약을 마시고 끄떡없으면 임금님도 대견하다며 인생의 보너스 타임 같은 것을 줄 수도 있는 거 아닌가.
나는 조상님들, 대역죄인 선배들의 이름을 줄줄이 읊으며 시간을 끌어본다. 실제로 조광조나 송시열 같은 인물은 사약을 마시고도 끄떡없었다. 예송논쟁으로 유명한 송시열은 프로건강러로 알려짐과 동시에 비상을 이용한 처방을 받은 적이 있어서 사약에 내성이 있었다. 그가 사약을 2잔이나 마셨는데 죽지 않자 금부도사가 애원할 정도였다고 하지. 하지만 송시열은 3잔을 마시고 생을 마감했다.
하지만 임형수라는 인물 앞에서 송시열은 쉽게 취하는 애송이다. 그는 ‘한반도 역사상 가장 사약을 많이 마신 사람’이다. 그는 서울에서 나주까지 배달 온 사약 16잔을 모두 마셨다. 하지만 이상 징후가 없었다. 결국 급하게 구해온 독주 2잔을 더 마시기로 한다. 임형수는 “술을 주거니 받거니 할 상대가 없구나”라고 한탄하자 노비가 울면서 안주를 챙겨 온 전대미문의 해프닝을 남겼다.
결국 사약도, 독주도 임형수의 금강불괴를 막을 수 없었다. 이 정도 노력이면 솔직히 사는 게 낫지 않은가? 하지만 임형수는 목을 졸라 죽는 방법을 선택한다. 그는 방에 들어가 목을 매달았다. 장정 2, 3명이 줄을 당겼다. 곧이어 쿵 하는 소리가 났다. 금부도사가 방에 들어가니 줄에 매달린 것은 목침이라고. 임형수는 깔깔 웃으며 “평생 즐긴 해학을 마지막으로 해봤다”라고 전한다. 그리고 제대로 목을 메어 죽음을 맞이한다.
그렇다. 조선 시대에 사약은 피할 수 있어도, 죽음은 피할 수 없다. 나는 정말 큰일 난 것이다. 덜덜 떨리는 손으로 사약을 들었다. 입에 댈 듯 말 듯, 사약이 닿을 듯 말 듯 시간을 끈다. 누군가 와서 나를 구해주기를 기다린다. 이 상황을 멈출 외침을!
NG! 왜 사약을 안 마시는 거야!
군졸들 뒤에서 우렁찬 외침이 들린다. 삼지창이 아닌 슬레이트를 든 남자가 나타난다. 다행이다. 나는 조선 시대가 아니라 드라마 촬영 중이었던 것이다. 이곳은 유배지가 아니라 민속촌이었다. 어쩐지 이 집과 마당 대하드라마에서 많이 본 거였어. 역사 시간에 졸고 드라마만 챙겨본 나의 노력이 꿈에서 결실을 맺었다. 죄송합니다. 감독님 제가 너무 몰입하느라.
아무리 리얼한 사극도 사약을 실제로 사용하진 않는다. 막걸리와 동동주를 아침햇살로 대체하듯, 드라마 속 사약의 주재료는 ‘쌍화탕’이다. 하지만 쓴맛이 너무 나서 배우들의 죽는 연기를 방해할까 봐 김 빠진 콜라를 섞는다고 한다. 취향에 따라 흑설탕이나 간장을 섞을 수도 있다. 이렇게 하나하나 섞으면 진짜 사약 될지도 몰라.
드라마 〈여인천하〉의 사약 레시피는 1.8L짜리 콜라 6병에 75ml 쌍화탕 10병이다. 이 정도 베이스라면 제법 달콤한 죽음을 연기할 수 있다. 하지만 아시다시피 〈여인천하〉는 사약을 얼굴에 붓는 ‘사약샤워’를 했다. 입뿐 아니라 코에도 들어간 가짜 사약에 경빈 역할의 도지원 씨는 촬영 후 엉엉 울었다고 한다.
감독은 다시 군중 속으로 사라졌다. 금부도사는 다시 사약을 마시라고 내게 재촉한다. 다행이다 조선 시대가 아니라 드라마라서. 나는 초탈한 눈빛으로 사약을 든다. “전하 만수무강하시옵소서”. 꿀꺽. 근데 왜 이렇게 쓰지. 아니 덥고, 달고 너무 매운데. 잠깐 감독님… 감독님…?
사약을 마시는 일은 상상으로 충분해
가는 비명과 함께 눈을 떴다. 꿈이었지. 이불은 땀으로 젖었다. 몸이 더운 것은 사약 때문이 아니라 선풍기 타이머가 끝났기 때문이었다. 이럴 때는 음료만이 나를 구해줄 수 있다. 냉장고에는 치킨을 시켰을 때 함께 온 콜라가 있다. 콜라를 따를 잔을 찾았다. 안타깝게도 설거지를 하지 않아 그릇에 콜라를 부어 마실 수밖에 없었다. 그릇에 김빠진 콜라라… 콜라… 그 검은 액체. 아니 이것은!
나는 콜라를 마시지 못하고 자리를 뜬다. 콜라에서 사약 맛이 날 것 같아서… 오늘은 물만 마시고 자려고.
원문: 마시즘
참고문헌
- [죄와 벌의 사회사] 임금이 내려주는 약 사약, 한국역사연구회
- 사극에 등장하는 사약의 성분은, 한겨레
- 극 중 사약 장면은 NG… 왜? 마신 후 10분 만에 안 죽으니까!, 동아일보
- 사약 마시는 죄인에게 안주 권한 기막힌 사연, 프레시안
- [숨은 역사 2cm] ‘사약 약발 천차만별’ 16잔 마시고도 멀쩡했다, 연합뉴스
- 경빈의 최후 ‘여인천하’ 촬영현장, 동아일보
- 음식 캐스팅부터 메이크업까지, 한겨레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