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나는 ‘강남좌파’다. 강남에 살고 좌파이념을 지지하므로, 명목상 분명 그렇다. 나는 고소득층 증세, 재벌 개혁, 최저임금 인상, 상속세 강화 따위를 늘 이야기하며, ‘반미자주’나 ‘친일재산환수’도 빼놓지 않는 레파토리다. 술자리에선 가끔 ‘북한찬양’도 한다.
보통 ‘강남좌파’는 위선과 허위의 대명사처럼 일컬어지지만, 적어도 내 경우엔 두 개의 조건이 서로의 부정적 이미지를 상쇄시켜 좋은 것만 남기는 효과가 있는 것 같다. 미국 명문대에서 박사까지 한 사람이 외치는 ‘반미’, 일류대 경제학 교수가 말하는 ‘상류층 증세’, 강남에서 태어나 지금도 강남에서 가장 비싼 아파트에 살면서 던지는 ‘강남 비판’이, 마치 ‘서울대 출신의 서울대비판’처럼 설득력을 배가시키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좌파’로 산다. 내가 좌파(혹은 빨갱이)가 아니라는 걸 알고있는 건 오직 한 사람-나 자신 뿐이다.
2.
나는 1963년 서울에서 출생했다. 아버지는 외과의사이자 병원장이셨고 어머니는 영문학과 교수셨다. 부유한 환경이었다. 재수없게 들리겠지만, 머리도 좋았다. 그 흔한 사춘기조차 없이 탄탄대로를 걸어 서울대에 진학했다.
거기서 첫 시련을 만났다. 때는 전두환이 청와대에 입성한지 얼마되지 않은, 바야흐로 ‘운동권 시대’였던 것이다. 민족, 자주, 통일, 민중, 계급…그리고 광주. 단 한번도 생각해보지 않았던 주제들이 한꺼번에 나를 덮쳤다. 한동안 서클 선배들에 끌려 데모도 하고 ‘빨간책’도 읽었다.
오래는 아니었다. 나는 나와 맞는 것과 맞지 않는 것을 아주 빠르게 구별해 낸다. 당신들의 그 순수한 열정이나 이상주의에는 박수를 보내지만, 저와는 맞지 않는 것 같군요. 곧바로 ‘배반’ ,’변절’같은 언어의 비수가 날아들었다. 웃기는 소리 마시길. 지주가 머슴의 편에 서는 것이야 말로 변절이고 배반입니다. 그리고 미안하지만, 당신들은 결국 실패할 겁니다. 내기해도 좋아요. 자연스러운 선택이었던 미국유학. 공항엔 그들 중 누구도 배웅나오지 않았다.
3.
공부머리는 타고났는지, 박사까지 따는데 5년밖에 걸리지 않았다. 운좋게 학교에 티칭 포지션을 얻어 자리를 잡았고, 유학생이었던 9살연하의 아내를 만나 결혼을 하고 아이도 낳았다. 안정된 생활이었음에도 귀국을 결심한 것은 여든을 바라보는 부모님 때문이었다. 모교는 아니었지만, 두 손가락에 꼽는 사립대학의 정교수 자리를 얻었다.
그런데 15년만에 돌아온 한국은 너무나도 달라져 있었다. 어두컴컴한 골방에서 땟국물에 쩔은 옷을 입고 레닌과 마오와 혁명과 전복을 들먹이던 그 찌질한 선배와 동기들이 세상을 움직이고 있었다. 어설픈 외국의 이념을 이 곳에 무리하게 적용시키려는, ‘그러니까 그렇게 되는’ 게 아니라, ‘그래야 하니까 그렇게 되는’ 논리의 오류가 골수에 박힌 자들이 이제 기자,대학교수, 국회의원이 되어 떵떵거리고 있었다.
처음으로 내 판단력을 회의했다-내가 시대를 잘못 읽었던 것일까? 그리고 얼마 후, 그들이 지지하고 그들을 지지하는, ‘단 한번도 역사를 배신하지 않은’ 남자가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크리스마스 트리 대신 광화문 촛불이 세상을 밝히던 2002년의 겨울이었다.
4.
독자를 상정하지 않은 고백문의 형식을 띈 이 글에서 굳이 위선을 떨 필요는 없을 것이다. 대학때 그 이념서클을 떠나던 순간부터 미국생활을 정리하고 한국에 귀국할 때까지 내가 좌파적 이념에 경도되었던 적은 단 한 순간도 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귀국 후 내가 사석에서 좌파적 발언을 하고, 신문에 진보성향 칼럼을 쓰고, 트위터 상에서 진보적 지식인의 한 사람으로 이름을 얻게 만든 그 모든 게 단지 대세에 영합하려는 정치적 계산만이었던건 아니다. 일종의 부채감도 있었다. 의사 아버지와 교수 어머니를 두지 못한, 그래서 제대로 교육을 받지 못한, 그래서 명문대를 가지 못한, 그래서 강남 주상복합에 살지 못하고 그래서 그 자식들도 대단히 높은 확룰로 비슷한 인생을 살게 될 이들에 대한 미안한 마음 말이다.
그 부채감은 보수세력과 부자와 미국과 조중동을 깔수록 줄어갔고, 그럴수록 내 명성은 높아져갔다. 그렇게 나는 진짜 좌파가 되었을까.
5.
미안하지만 내가 표를 던지는 곳은 내가 신문칼럼과 트위터에서 추상같이 비판하는 바로 그 보수당이다. 한번은 그 당을 개처럼 몰아붙이는 칼럼을 퇴고하자마자 택시를 타고 투표소로 달려가 그 당을 찍은 적도 있다. 부모님에게 물려받은 상가건물과 공장부지 등에서 월 임대료가 9천만원 정도 나오는데, 늘 서민을 위한 찬가를 부르는 나지만 세입자들을 대할 때는 얼음장같은 비즈니스마인드로 임한다.
사업이 망했건 뭐건 월세가 밀리면 보증금을 까고 다 떨어지면 명도소송을 걸어 쫓아낸다. 어떤 눈물의 읍소를 해도 예외는 없다. 아들은 명문가 자제들이 다니는 초등학교에 입학 시켰고, 중학교때 쯤 미국유학을 보낼 예정이다. 나는 그 애에게 어떤 것도 강요할 생각이 없다. 만화가,댄서가 되고 싶으면 그러라 할것이다. 이미 선대가 이루어 놓은 것 만으로 어떤 경우에도 그 애의 삶은 중간 이하로 떨어지지 않는다.
아내와는 갈수록 금슬이 좋다. 우리 부부는 벌써 40여개국을 여행했고 더 자주 다닐 것이다. 영문학을 전공한 아내의 수필집이 곧 출판된다. 우리는 좋은 사람들을 만나고, 좋은 얘기를 나누며, 좋은 음식을 먹고, 좋은 집으로 돌아와, 기분 좋게 잠이 든다.
6.
좌파놀이-그건 내 가장 큰 유희이다. 나의 우파적 삶과 좌파적 관념은 완벽하게 분리되어 내 안에서 조금도 충돌하지 않는다. 나는 스스로의 인생을 특정 이념에 종속시키지 않는다. 대신 이념을 내 삶에 복무시킨다. 그걸 거꾸로 하는 자들이 불행한 삶을 살며, 남의 인생도 불행하게 만든다.
나는 마치 배트맨과 같다. 악당이 나타나면 검은 박쥐옷을 입고 출동해 약한 이들을 도운 후 홀연히 사라지는 그는, 배트카를 타고 집사가 기다리는 커다란 저택으로 돌아와, 아무도 없는 방에서 홀로 박쥐가면을 벗고 다시 원래의 자신으로 돌아온다
그리고 와인병을 딴다.
원문: 장주원의 <초단편소설> / 편집: 리승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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