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생 시절 팀 프로젝트를 진행하다 보면 보기 어렵던 노트북이 바로 LG 노트북이었습니다.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던 친구들은 맥북이나 삼성 울트라 슬림 노트북을 들고 나왔고, 가성비를 중요하게 여기는 친구들은 레노버, 아수스 브랜드의 노트북을 들고 왔습니다.
LG 노트북은 그야말로 애매했습니다. 그 가격에 조금 더 보태면 삼성 노트북이나 맥북을 살 수 있고, 예산을 줄이면서 같은 사양의 레노버, 아수스 노트북을 구매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위에 치이고, 아래에 치이는 이른바 ‘샌드위치’ 노트북이 LG 노트북이었습니다.
그랬던 LG 노트북이 2014년부터 확 달라졌습니다. 시작은 바로 울트라 슬림 노트북 ‘그램’ 시리즈를 2014년 1월에 출시하고부터입니다. 출시 첫해에 12만 5,000대를 판매했습니다.
매해 새로운 그램 노트북을 출시했고 2017년에는 35만대를 팔았습니다. 그리고 2018년, 누적 판매 100만대를 기록하며 단일 브랜드 최초 ‘밀리언셀러’ 노트북이 되었습니다. 2013년까지만 해도 국내 울트라 슬림 노트북 시장은 삼성이 주도권을 잡고 있었습니다. 이를 LG전자가 ‘그램’ 시리즈로 역전하게 된 것입니다.
소비자의 정성 반응도 좋습니다. LG 노트북 ‘그램’은 소비자가 직접 선정한 2018 퍼스트 브랜드 대상을 수상하기도 했고, 미국 컨슈머리포트 평가에서는 노트북 가운데 가장 높은 점수를 받으며 경쟁력을 입증받았습니다. 그리고 smartPC사랑에서 진행한 ‘2018년 상반기 베스트 하드웨어 어워드’에서 타 노트북을 모두 제치고 노트북 분야 1위에 선정되는 영광을 누리기도 했습니다. (LG전자 33.8%, 삼성전자 24.8%, 애플 17.2%)
제가 다니는 회사에서도 직접적으로 변화를 느낍니다. 제가 입사할 때만 해도 LG 노트북을 업무 기기로 쓰는 분은 많지 않았습니다. 좋은 성과를 만들기 위해서는 최고의 퍼포먼스를 낼 수 있는 장비를 갖추는 것도 중요한데요, 그 선택에서 LG 노트북은 늘 제외되었던 셈입니다.
하지만 최근 들어 미팅을 하거나 주변 동료의 노트북을 보면 삼성 노트북보다 LG 노트북 ‘그램’을 가지고 있는 분이 꽤 많이 늘었습니다. 반응도 달라졌습니다. 예전이라면, ‘LG 노트북을 업무 기기로 신청했다고?’ 했겠지만 이제는 ‘요즘 그램 쓰는 사람 많더라고요’로 말이죠.
LG 노트북 사업은 2000년대 후반부터 2010년대 초반까지 매각설에 휩싸였습니다. 하이엔드 노트북에 치이고, 가성비 넘치는 노트북에 치이며 부진을 면치 못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점차 노트북 시장에서 포션을 키워 갔던 울트라 슬림 노트북 시장을 ‘그램’ 시리즈로 차지했습니다. 그리고 점점 삼성과의 전체 노트북 시장 점유율 간격을 줄여나가고 있습니다.
매각설에 휩싸였던 LG 노트북이 어떻게 다시 살아나게 되었는지 제 기준에서 살펴보고자 합니다.
‘GRAM(그램)’ 네이밍의 승부
2014년 당시에 출시된 노트북 사양을 살펴보면 대부분이 1kg이 넘었습니다. 가볍다고 알려진 맥북 에어 조차도 1.2kg의 무게를 가졌고, 경쟁사인 삼성 노트북 중 가장 가벼웠던 아티브북9의 무게가 1.13kg 이었습니다. 2kg대 노트북에서 1kg대 노트북을 많이 내려왔지만 울트라 슬림 노트북이더라도 그 안에 필수 사양을 담기 위해서는 기본 1kg이 넘을 수밖에 없다는 의견이 지배적이었습니다.
그러던 인식 상황 속에서 LG전자가 ‘GRAM(그램)’을 들고 나왔습니다. 그 전까지의 LG 노트북 브랜드였던 X-NOTE (엑스노트)를 과감히 버리고 ‘그램’을 선택한 것입니다. 980g짜리 13인치 울트라 슬림북을 들고나오면서 말이죠.
킬로그램 무게 단위가 익숙하던 노트북 시장과 소비자는 모두 놀랄 수밖에 없었습니다. 노트북이 1kg 미만이 될 수도 있다는 사실에 첫 번째로, 무게 단위를 노트북 브랜드명으로 삼았다는 사실에 두 번째로 말이죠.
그전까지는 대부분의 노트북 브랜드명은 숨겨진 의미가 담긴 단어를 지향했습니다. 삼성전자는 삼성전자 노트북 시스템(Samsung Electronics Notebook System)의 약칭을 활용해 센스(SENS) 라는 브랜드명을 사용했습니다. 이후 노트북 브랜드인 아티브(ATIV)는 삶(Lift)이라는 뜻의 라틴어 Vita를 역순 배열해 만든 이름입니다.
LG는 IT분야에서 신제품 개발 코드명으로 가장 많이 쓰는 문자인 X를 활용해 ‘최신의 노트북’을 의미하는 X-NOTE(엑스노트)를 브랜드로 사용했죠. 소비자가 브랜드명에서 해당 노트북의 고유 특징을 알아차리는 것은 쉽지 않았습니다. 브랜드 명의 의미를 전달하는 것보다는 ‘멋지게’ 불릴만한 브랜드명을 들고 나왔습니다.
하지만 LG전자는 ‘멋지게’ 불릴만한 브랜드명을 포기했습니다. 대신 노트북의 최대 장점인 ‘가벼움’을 브랜드명에 담았습니다. 노트북 시장에 존재하지 않던 무게 단위를 브랜드명으로 사용하고 이를 통해 ‘가볍다’는 이미지를 브랜드 자체에 심었습니다.
그 결과, ‘그램’이라는 브랜드명만 듣고도 LG전자 노트북의 혁신이 와 닿았습니다. 소비자는 자연스럽게 ‘가벼움’을 떠올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노트북의 여러 세일즈 포인트 중 ‘휴대성’ 자체를 브랜드명에 담아 가벼움의 대명사가 될 수 있었습니다.
노트북 제조회사가 컨트롤 가능한 ‘휴대성’을 공략
초기 노트북 광고를 살펴보면 가장 어필했던 건 ‘성능’이었습니다. 인텔 몇 세대 CPU가 장착되고 램 몇 기가가 장착되어 이전보다 몇 배 빨라진 퍼포먼스가 주요 세일즈 포인트였습니다. 그 다음 단계는 가성비였습니다. 중국과 대만 등에 위치한 레노버, 아수스 등의 노트북 브랜드가 국내 사업을 시작하면서 국내 노트북 브랜드와 같은 사양임에도 더 저렴한 가격에 살 수 있다는 점을 적극적으로 알렸습니다.
중간에 끼어있던 LG 노트북 역시 세일즈 포인트를 고민했습니다. 성능이 첫 번째 고려 대상. 하지만 이내 접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부품 회사에 대한 의존도가 높은 노트북 산업 특성상 높은 성능을 어필하는 것은 인텔 같은 메모리 회사나 엔디비아 같은 그래픽 카드 회사를 홍보하는 것과 같기 때문입니다. 성능을 홍보하면 이들 부품회사의 퍼포먼스를 홍보하는 것에 지나지 않던 것입니다. 또한 이들의 퍼포먼스에 의해 브랜드 파워가 결정되는 것도 걸렸던 부분입니다.
성능 다음의 대세 포인트였던 ‘가성비’ 역시 내세울 수 없었습니다. LG전자는 삼성과 함께 고객 센터를 운영하면서 AS를 제공하는 것을 큰 장점으로 가지고 있었습니다. 중저가 브랜드와 차별화될 수 있던 포인트였습니다. 다른 가전도 판매하기에 그곳에서 노트북까지 함께 수리하는 것은 고정비를 줄일 수 있는 방법이기도 했습니다.
또한 국내 노트북의 경우 운영체제까지 함께 포함해서 판매하는 것이 관습입니다. 이에 반해 레노버나 아수스 같은 브랜드의 노트북은 OS Free 제품을 주로 판매했습니다. OS 가격을 줄여 제품을 저렴하게 판매했습니다. 중저가 브랜드의 이런 전략을 따라 하고자 했으나 전 연령대를 커버하는 국민 브랜드로서 기존의 OS 설치 관습을 깨고 OS Free 제품을 판매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던 중 LG 노트북 떠올린 것은 ‘휴대성’ 이었습니다. 이는 노트북을 처음으로 사용하고 구매하는 20대를 관찰하면서 나오게 되었습니다. 대학 생활의 큰 부분을 차지하는 팀플에서 노트북을 들고 다녀야 하는 일이 많습니다. 그 때 가지던 노트북에 대한 불만은 ‘휴대성’이었습니다. 이곳저곳 휴대하고 다니면서 사용해야 하는데 무거워서 불편했기 때문입니다.
또 카페에서 공부하는 ‘카공족’이 늘어나면서 휴대성은 점점 노트북 선택의 중요한 기준이 되고 있었습니다. 예전처럼 정해진 장소에서 거치를 해두고 사용하는 것보다 여러 곳을 이동하면서 함께 사용하는 ‘디지털 노마드 족’의 필수 물품으로 노트북이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점점 초경량이면서 날씬한 노트북인 ‘울트라 슬림북’을 찾는 소비자가 많아졌고 시장 규모는 커지고 있었습니다.
‘휴대성’은 노트북 제조회사가 어느 정도 주도적으로 결정할 수 있는 사양이라는 점도 유효했습니다. 휴대성과 직결되는 노트북의 외관 소재와 노트북 내부 설계는 노트북 제조 회사가 직접 결정하고 제품에 적용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그룹사와의 협업을 통해 결과물을 만들어낼 수 있다는 점도 중요한 이유였습니다. 모니터(디스플레이)를 납품받는 LG 디스플레이, 배터리를 납품받는 LG 화학 등과 함께 힘을 모아 경량화를 이룰 수 있었습니다.
LG디스플레이와 LG화학 입장에서도 아쉬울 것이 없는 협업이었습니다. 휴대성을 무기로 한 LG 노트북이 인기를 얻어 많이 팔리면 팔릴수록 납품하는 부품 수량은 늘어나고 이는 결국 회사의 수익으로 돌아오기 때문입니다. 또한 다른 노트북 제조 회사에도 경쟁력 있는 부품을 제공할 수 있는 원천이 되므로 기술 발전을 위해서도 해 볼만한 시도였습니다.
휴대성을 원하던 노트북 사용자, 노트북 제조 회사가 직접 컨트롤 할 수 있고 그룹사와의 협업으로 만들어 낼 수 있는 결과물이 라는 점에 LG 노트북은 경량화와 휴대성을 메인 경쟁력으로 내세웠고 그 전략은 유효했습니다.
혁신에 혁신을 더하는 전략
13인치 노트북이 1kg이 안 된다는 사실은 출시 당시 큰 혁신이었습니다. 그러나 LG전자는 여기서 멈추지 않고 해마다 혁신을 추가해 갔습니다. 2015년도에는 1kg이 안 되는 14인치 노트북을 선보였고, 2016년에는 15인치 노트북으로 확대했습니다. 디스플레이가 커지고 노트북 몸집이 커지게 되면 당연히 무거워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럼에도 1kg이 안 되는 무게를 연속 3년 동안 선보였습니다.
1kg가 안되는 15인치 노트북을 만들기 위해서 노트북 뒤에 있는 0.2g짜리 스티커도 아까워 직접 각인을 했다는 비하인드 스토리는 그들이 얼마나 무게를 줄이는 일에 집착했는지를 보여줍니다. 하지만 이 노력이 있었기에 매해 소비자와 시장은 LG 그램의 신제품을 보고 놀랐고 노트북 시장의 ‘핫 아이템’이 되었습니다.
이 과정에서 문제도 있었습니다. 급격한 경량화를 시도하면서 배터리 사용 시간과 관련한 문제가 발생한 것입니다. 경량화를 위해 어쩔 수 없이 배터리 용량을 줄이다 보니 충전기를 꼽지 않은 채 사용 가능한 시간이 다른 노트북과 비교했을 때 많이 줄어들게 되었습니다. 이에 대한 사용자 불만을 놓치지 않고 경량화와 함께 배터리를 늘리는 혁신을 시도했습니다.
그 결과 2017년에는 최대 24시간 사용 가능한 ‘올데이 그램’을 선보였습니다. 그리고 올해(2018년)에는 SSD와 RAM을 추가 할 수 있는 슬롯을 적용하고 한 번 충전으로 최대 31시간 동안 사용할 수 있는 그램 신제품을 선보였습니다. 그럼에도 노트북 무게는 여전히 1kg 이내였습니다.
▲ 이전 시리즈에서 부각되었던 배터리 문제를 개선하여 새롭게 내놓은 2017년 그램 시리즈
▲ 배터리 사용 시간을 늘리고 확장이 가능한 추가 슬롯을 만들었음에도 1kg 미만인 2018 그램 시리즈
2014년부터 2018년까지 LG전자는 매해 입 벌리게 하는 놀라운 스펙의 그램을 내놓았습니다. 원 히트(one hit, 한번 터지고 마는 일회성 인기)에 그치지 않고 매해 연속적으로 혁신을 선보이며 노트북 시장을 흔들었습니다.
내부에서는 이런 혁신을 만들기 위해 엄청난 노력을 하고 있을 것입니다. 대내외적으로 받는 압박도 강할 테고요. 그럼에도 이들의 노력이 있었기에 LG 노트북 ‘그램’ 시리즈는 100만대 판매라는 기록을 달성하고 국내외 노트북 회사를 제치고 울트라 슬림 노트북 분야 1위에 오를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스펙 스토리’를 활용한 참신한 마케팅
LG전자 마케팅은 일 안 하기로(!) 소문나 있습니다. 언뜻 들으면 부정적으로 들리는 말일 수도 있는데요. 제품의 진짜 강점을 적극적으로 홍보하지 않고 제품에 ‘살며시’ 담겨 둔 것에 네티즌들이 답답해하며 만든 말입니다. 오죽했으면 트위터는 ‘LG전자 대신 홍보해드립니다’ 채널이 있을 정도입니다. 이곳에서 LG전자 제품이 갖는 강점을 소비자들이 직접 알리고 홍보를 해주고 있습니다.
그 와중에 LG전자 마케팅 부서가 드디어 일하기 시작했다고 알려진 때는 바로 ‘그램’ 마케팅을 시작하고부터입니다. 그램 노트북이 매해 혁신과 도전을 통해 내놓는 제품이기에 LG전자는 ‘그램’ 마케팅에도 실험과 도전을 담았습니다. 늘 무언가와 비교하고 새로운 미션을 도전하면서 노트북의 특징을 보여주는 마케팅으로 화제가 되었습니다. 이른바 ‘스펙 스토리’로 불리는 마케팅입니다. 제품의 스펙을 단순히 스펙으로 언급하지 않고 이를 스토리로 만들어 스펙을 강조하는 방식입니다.
그 중 대표적인 것이 바로 ‘페이퍼 그램’과의 비교입니다. 페이퍼 아니티스트가 15인치 그램 노트북의 설계 그대로를 종이로 만들어 실제 노트북과 무게를 비교하는 실험이었습니다. 승자는 LG 그램 15의 승리. 종이로 만든 것보다 실제 노트북이 더 가볍다는 것을 알리며 그램의 ‘경량성’을 다시 한번 강조했습니다.
배터리의 혁신을 시도했던 2017년형 LG그램 마케팅도 신선했습니다. 아티스트 4명이 24시간 동안 1대의 LG 그램 노트북을 통해 디지털아트 릴레이를 시도한 내용을 담았습니다. 이를 통해 한 번 충전으로 24시간 사용이 가능하다는 점을 명확하면서도 색다르게 알리는 ‘스펙 스토리’를 만들었습니다. 이 광고 영상을 두고 ‘엘지 마케팅부가 일하기 시작했다!!’ ‘LG마케팅부 직원분들 연봉 올라가는 소리 들린다’ 같은 댓글이 달리며 소비자의 긍정적인 반응을 이끌었습니다.
마치며
LG 노트북 ‘그램’ 프로젝트가 시작된 건 2012년 말이었습니다. 1년 조금 넘는 시간 동안 ‘세상에서 가장 가벼운 노트북을 만들자’는 의지로 여러 그룹사가 협업했고 결국 1kg 미만의 울트라 슬림북을 만들어 냈습니다. 기존 울트라 슬림북 시장을 꽉 잡고 있던 삼성을 제치고 1위 자리에 올라서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매해 기존의 단점을 보완하고 더 놀랄 만한 혁신 거리를 더해 ‘가벼운 노트북 = LG 그램’ 공식을 만들어갔습니다. 거기에 소비자의 불만을 적극적으로 수렴해 매해 더 나은 ‘제품’을 만들고 있습니다. 그리고 스펙을 스토리로 연결시키는 참신한 마케팅으로 소비자의 눈길을 사로잡았습니다.
매각설에 휩싸이며 노트북 사업을 철수하는 것이 낫지 않겠냐는 핀잔을 이겨내고 혁신적인 제품과 얼라인을 맞춘 마케팅/홍보로 5년 만에 100만대를 판매하며 국내 울트라 슬림 노트북 시장 1위가 될 수 있었습니다. 2014년부터 매년 이어진 혁신의 연속에서 내년의 혁신은 무엇일지 정말 기대가 됩니다.
※ 해당 포스트는 LG전자로부터 어떠한 부탁이나 청탁을 받지 않은 순수한 목적의 포스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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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 생각노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