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량세
맥주의 주세 제도가 기존의 ‘종가세’에서 ‘종량세’로 바뀔 수도 있다는 소식에 언론이 들끓는다. 정확하게는 정부에서 관계자들과 업계 사람들을 불러서 공청회를 한 것이 계기가 된 것 같다. 여론은 ‘종량세로 전환되는 것=세금을 올리는 것’이므로 문재인 정부의 세금인상을 위한 꼼수라는 시각이 꽤 많고, 무엇보다 소비자은 ‘4캔 만원’이 사라질 가능성에 분노하는 분위기다.
이런 여론이 많다는 사실이 알려진 이후로 업계 사람들은 쉬쉬하면서 종량세 전환에 대한 본인의 의견을 내는 것 자체를 무서워한다. 하지만 본질적으로 종량세 전환의 문제는 4캔 만원의 문제와는 별개다(일부 보수 언론이 문재인 정부의 정책을 사사건건 시비 거는 것은 이해하지만, 그래도 본질을 호도하지는 않았으면 한다).
정확하게 입장을 밝히자면 나는 종량세를 지지한다. 대다수 수제맥주(크래프트맥주) 업계에 몸담은 사람들은 자칫 종량세를 주장하는 것이 집단 이기주의로 여겨질까 봐 걱정한다. 그럼에도 내가 종량세를 지지하는 이유는 종량세가 대다수 나라에서 사용되는 세금 제도이기도 하지만, 다른 여러 가지 이유에서 합리적이라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이 문제는 명백히 4캔 만원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도대체 왜 이게 4캔 만원이랑 연관이 되는지 모르겠다.
투자
종량세는 좋은 품질의 맥주를 만들 수 있도록 투자할 여지를 열어준다. 기존의 종‘가’세는 말 그대로 ‘가치(價値)’에 세금을 매긴다. 여기서 ‘가치’는 정확하게는 ‘출고가’이며, 이는 “과세표준”이라는 원가개념에 가까운 무엇인가에 세금을 매기도록 되어 있다. 그럼 맥주의 원가는 무엇일까? 현재의 세법에서는 원재료, 인건비, 설비에 대한 감가상각, 그리고 자가 건물이 아닌 경우 임차료까지 포함된다. 즉,
- 좋은 원재료를 써서 원재료비가 비싸지면 세금을 많이 낸다.
- 사람을 많이 쓰거나 좋은 사람을 써서 인건비가 늘면 세금을 많이 낸다.
- 비싼 기계를 사면 감가상각이 커져서 세금을 많이 낸다.
- 자기 건물이 없어서 임차로 사업을 하면 (건물주로 자기 건물에서 제조하는 것보다) 세금을 많이 낸다.
우리 모두가 알다시피, 한국의 맥주 대기업은 위의 논리를 정확하게 반대로 이용했다. 값싼 재료, 적은 인력, 오래되고 노후된 설비를 사용하는 것이 세금을 적게 내는 방법인 것. 72%라는 높은 주세율을 고려하면, 세금을 줄이는 것이 중요하고, 맥주의 품질이 낮아질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종량세의 전환이 좋은 원재료, 좋은 설비, 좋은 인력에 대한 투자가 될 것이라는 보장할 수는 없지만 최소한 그런 투자가 불가능하게 했던 장애물을 없애주고, 가능하도록 문을 열어주기는 할 것이다.
고용
위에서 설명한 대로 종가세의 ‘가’는 원가의 개념이고, 거기에는 인건비가 포함된다. 인력을 적게 쓰는 것이 제조원가를 낮추는 것뿐 아니라 세금을 낮추는 효과가 있게 된다. 72%라는 고세율을 고려하면 다른 산업대비 거의 2배 이상의 효과가 나오는 것이다. ‘맥주를 만드는 인력을 어떻게 하면 줄이는가’에 집중할 수밖에 없는 구조를 만드는 것이다.
몇 달 전에 미국산 카스가 출시되어서 업계는 엄청난 파장이 일었다. 해외에서 생산하는 카스가 국내에서 생산하는 카스보다 저렴하다는 것은 생산직에 일하는 많은 분에게 자괴감과 함께 자신들의 고용 안정성에 대한 불안감마저 느끼게 하기에 충분했을 것이다.
한국수제맥주협회의 추산자료에 따르면 불과 몇 년 만에 한국의 수제맥주 산업은 약 5,000명 정도의 고용을 만들어 냈다고 한다. 그중에서는 예전 하우스맥주 시절부터 맥주업에 종사하던 분들이 있었을 수도 있고 배송이나 판매 등에 종사하는 사람들도 있을 테니 전체를 모두 생산에 종사하는 신규 일자리로 보기에는 어려울 수도 있다.
하지만 OB맥주와 하이트진로의 전체 직원이 3,000명 수준임을 고려해볼 때, 확실히 다수의 중소기업의 성장이 고용 창출에는 더 큰 효과가 있는 것 같다. 종량세로 전환이 된다면 이러한 효과는 조금 더 커지지 않을까…
공정한 경쟁
종가세에서는 위에서 언급한 것과 같은 이유로 더욱 싸게 만드는 회사가 세금을 더욱 적게 내는 효과가 있다. 그런데 맥주라는 산업은 워낙 스케일, 규모의 싸움이기 때문에 규모가 클수록 저렴하게 생산할 수 있다. 한마디로 회사 몸집이 클수록 유리하다는 것이다.
이것이 2014년에 롯데맥주가 시장에 들어오기까지 일제강점기에 만들어진 다이닛폰 조선맥주(하이트맥주)와 기린의 쇼와기린맥주(OB맥주)가 회사명과 브랜드명만 바꿔가면서 시장을 양분한 채 90여 년간 장기 집권할 수 있었던 이유다(그런데 하필이면 새로 들어온 3위 업체도 일본계…).
그나마 국내회사들이 양분할 수 있었던 것은 다행이었을지도 모른다. 이제는 국제무역이 발달하고, WTA, FTA 등의 발전으로 이제는 해외 수입 맥주에 대한 관세조차도 (국가별로 다르긴 하지만) 거의 사라졌다. 주류(맥주)산업은 강력한 규제산업이기도 하지만, 규제가 강하고 면허를 획득하기 쉽다는 것은 반대로 굉장히 보호 산업이라는 뜻.
80여 년간 국가의 보호를 받아온 한국의 맥주 산업은 잘못된 주세 제도 때문에 품질경쟁력도 잃어 갔고, 해외맥주와의 경쟁에 노출되는 순간 추풍낙엽이 되어 버렸다. 그래서 아이러니하게도 국내의 대기업 맥주 브랜드들도 종량세로의 전환을 환영하는 눈치다. 대기업들도 안방 시장을 수입 맥주에게 내주는 것보다는 어떻게든 내수시장을 지키고 싶은 것이다.
하지만 지금의 종가세 주세 제도로는 한국의 대기업 맥주회사들도 좋은 품질의 맥주에 투자해야 할 매력을 못 느낀다.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의 논리일 수도 있겠다. 주세 제도 때문에 질이 좋지 못했던 것인지, 질이 좋지 못하니 경쟁에서 소비자에게 외면당했고 그래서 거꾸로 주세 제도를 고치자는 것으로 들릴 수도 있다.
이런 주장이 국내 대기업의 변명처럼 들릴 수도 있다. 그럼에도 주세 제도를 종량세로 변경하는 것이 조금 더 공평한 경쟁의 길로 가는 터전을 마련해 주는 것임은 분명하다.
브랜드
한국의 맥주 브랜드는 국제 경쟁력이 떨어진다. 그렇다 보니 해외에서 유명 브랜드가 들어와서 안방 시장을 점령했다. 게다가 ‘4캔 만원’이라는 프로모션까지 더해지니, 수입 맥주가 우세하는 현상은 당연. 여기까지는 이해가 쉽게 된다. 그런데 그다음부터 이해가 안 되는 현상도 벌어진다.
독일이나 벨기에, 덴마크 등은 맥주산업이 오랜 기간에 걸쳐서 발전했기에 저렴한 맥주의 대량생산이 가능한 OEM 브루어리가 꽤 있다. 이들은 자신들의 자체 브랜드를 고집하지 않고 누가 와서 만들어달라고 하면 만들어 준다. 한편 2010년 정도부터 한국의 마트와 편의점은 소셜커머스와 오픈마켓 등과 무한 경쟁을 하던 중이었다.
스마트폰 보급률도 엄청 높은 이 나라에서, 사람들은 굳이 마트나 편의점에 가서 장을 보기보다는 출퇴근길 혹은 잠자기 전에 소셜커머스나 오픈마켓에서 물이나 휴지, 기저귀 심지어 야채/과일 등을 주문했다. 그런데 한국에서는 인터넷으로 구매를 할 수 없는 아이템이 두 가지 있으니 바로 술과 담배. 그중에서도 마트와 편의점은 술, 그리고 급속도로 성장하는 수입 맥주 시장에 집중한 것이다.
일본보다 값싼 아사히 맥주가 나오고, 4캔 만원이라는 직관적인 프로모션도 실행하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맥주를 사러 마트에 갔다가 기저귀를 사기도 했고, 맥주를 사러 편의점에 갔다가 과자를 집어 오기도 했다. 아무튼 인터넷이 아니라 오프라인으로 사람들을 불러내는 도구 중 하나로 유통업체는 맥주를 택했다. 매출 규모에 비해서 상대적으로 큰 매대들은 유통업의 특성이 매대 임대업에 가깝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대단한 투자라고 볼 수 있다.
(여기서부터는 약간의 상상력이 가미되었다.) 급기야 마트/편의점은 위에서 말했던 OEM브루어리들을 찾아가서 자신들만을 위한 특별히 저렴함 맥주를 만들어 달라고 한다. 혹은 OEM브루어리에서 예전에 만들어 놓은 브랜드 중에서 쓰지 않는 브랜드가 있다면 자신들에게 달라고 한다. 그래서 나타난 것이 초저가 수입 맥주다.
독일에 살았던 사람들도 처음 보는 독일 맥주, 벨기에에 살았던 사람들도 생전 못 보던 벨기에 맥주가 우리나라 마트/편의점에서는 자랑스럽게 원산지 마케팅으로 대량 유통되기 시작했다. 한국 시장만을 위한 기획상품인 경우도 있는데 소비자들은 벨기에/독일의 유명 맥주를 값싸게 사는 줄 알고 구매하는 경우가 부지기수로 나타났다.
나는 초저가 노브랜드 맥주가 계속해서 선택을 받는 것은 맥주 시장 자체를 위해서도 건강하지 않다는 생각이다. 다른 한편으로는 이번 종량세 개편으로 인해서 이제는 어쩌면 한국에서도 세계적인 맥주 브랜드가 나올 수도 있다는 희망을 걸어볼 수 있게 된다.
‘악마는 72%에 있다’
사실 모든 국내산 제품에는 어떤 명목으로든 (부가가치세와 같은) 소비세가 붙고, 거의 모든 수입품에는 관세가 붙고 또 소비세가 붙기도 한다. 즉 대다수 카테고리에서 국내 제조원가에 비해서 수입제품이 약간 더 저렴해도 비슷한 종목의 세금이 비슷한 세율로 붙기에 소비자의 구매에 큰 차이를 만들지 못한다.
사치품의 경우에는 해외에서 들어오는 것이 저렴하면 소비가 집중될 수도 있어서, 소비세가 더 붙기도 한다. 그렇게 해서 밸런스를 유지하게 마련이다. 그런데 왜 유독 맥주만 이렇게 수입 맥주에게 유리한 운동장이 되어버린 것일까?
그 이유는 72%라는 높은 주세율 때문이다. 주세도 일종의 소비세인데, 아무리 사치품이라고 해도 붙는 세금은 20% 수준이 거의 최대치. 그런데 72% 라는 말도 안 되는 높은 세율 때문에 술은 세금이 가장 중요한 팩터가 되었다(게다가 여기에 30%의 교육세가 따로 붙는다). 업체들로 하여금 품질, 고용, 브랜드 등을 모두 내팽개치고 세금을 줄이는 데 열중하게 만든 것이다.
따라서 종량세로 굳이 전환하지 않더라도 72%라는 주세를 낮춰주면 많은 문제가 해결된다. 그럼 정부는 왜 72%라는 세금을 낮추려고 하지 않을까? 세수가 줄어드는 것도 문제겠지만 술값이 다 같이 너무 저렴해지면 술의 소비를 더욱 부추길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한국인의 알코올 소비량은 전 세계적으로도 최상위권이고, 위암 발생률은 세계 1위이며, 청소년 음주는 사회 문제다. 여기서 알코올음료 가격을 낮춰서 소비가 더 늘어나는 것은 보건복지부 장관님의 실적에 매우 악영향을 끼치고, 여성가족부 차관님의 분노를 살 일이다.
맥주만 주세를 낮추는 것 또한 문제다. 다른 주류와의 형평성에서도 문제가 생긴다. 사람들이 소주를 덜 마시고 맥주를 더 마시면 소주 회사가 억울해할 것이다. 따라서 결론적으로는 종량세로 전환하는 것이 합리적인 의사결정이다.
그럼 ‘4캔 만원’은요?
내 주변에서도 많은 사람이 당장 ‘4캔 만원이 없어지는 것 아니냐’며 물어본다. 하지만 나는 4캔 만원은 유지될 것이라고 전망한다. 가장 먼저 업계 반응을 보면 안다. 국내 맥주 대기업 3군데 중에서 OB맥주는 AB Inbev라는 브라질 회사의 100% 자회사이고, 롯데주류는 애매하긴 하지만 일본계이며, 하이트진로만이 국내 기업이긴 한데 대기업이다.
재미있는 점은 이들이 맥주 수입 또한 꽤 열심히 한다는 것인데, OB맥주는 AB Inbev의 글로벌한 해외맥주(호가든, 버드와이저, 스텔라 아르투아, 벡스 등), 하이트맥주는 기린 등을 앞세워 1,000억 이상의 매출이 수입 맥주에서 나오는 것으로 알려졌다. 롯데그룹은 이름 자체에 롯데가 들어가는 롯데아사히를 소유했다.
그 외에도 몇몇 대형 외국계 주류 회사에서도 맥주를 수입한다. 그럼에 생각해보면 이미 국내 맥주시장은 외국계 자본에게 70% 이상 점령당했다고 봐도 무방하다. OB맥주 시장점유율만 55%-60%로 추정하는데 수입 맥주가 12% 가 넘는다고 보기 때문이다.
아무튼 이들도 종량세로의 전환을 반기는 분위기다. 이러한 유명 브랜드 맥주들은 아마도 가격이 내려갈 확률이 큰가 보다. 결국 가격이 올라가는 것은 초저가 수입 맥주 일부에 국한될 것으로 보인다. 아마도 6캔 만원이나 4캔 5,000원 같은 파격적인 행사를 했던 수입 맥주는 볼 수 없을 확률이 크지만, 모두가 알만한 유명 브랜드들은 계속 가격 경쟁력을 유지할 것으로 보인다.
첨부
그나마 이번 뉴스에 대해서 가장 객관적으로 다룬 것 같은 뉴스를 찾아서 반가운 마음에 링크를 건다.
원문: EQUALIZ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