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박정희의 ‘1962년 봄’
박정희의 권력욕(權力慾)은 그 뿌리가 깊다. 당시로선 그만하면 선망의 대상이었던 보통학교(현 초등학교) 교사를 때려치우고 만주로 간 것부터가 그 시작이다. 나이가 많아서 군관학교 입교가 거부당하자 혈서를 써서 보내면서 일제에 충성을 맹세했다. 비록 군인 기질을 타고났다고는 해도 군관학교 수석 졸업은 쉽지 않은 것이었다. 수석 졸업 특전으로 일본 육사로 유학을 가게 된 그의 앞에는 탄탄대로가 펼쳐졌다.
해방 당시 그는 만주군 중위였다. 이듬해 5월, 중국 톈진에서 미군 함정 LST에 몸을 실었는데 만주로 향한 지 6년 만의 귀향이었다. 군도(軍刀) 하나를 달랑 찬 패잔병 몰골이었다. 한동안 고향에서 뒹굴던 그는 서울로 올라왔다. 그 또래의 만주군관학교 출신이나 일본육사 출신 선후배들은 전부 미 군정이 세운 군사영어학교에 들어가 이미 장교로 임관해 있었다. 뒤늦게 그는 조선경비사관학교(육사 전신) 2기로 입교했다.
1948년 소위 ‘여순사건’ 직후 군 내의 좌익색출, 즉 숙군(肅軍) 파동에 걸려 인생 자체를 종 칠 뻔했지만 그는 용케도 살아남았다. 살기 위해 좌익 동지들을 판 데다 황군(皇軍) 선배들의 구명운동 덕분이었다. 그는 다시 군에 복귀했고, 얼마 뒤에 6.25를 맞게 됐다. 전쟁은 그에게 반전의 기회를 주었다. 우선 좌익 딱지를 뗄 수 있었고, 군인(특히 작전장교)으로서의 능력을 십분 발휘할 수 있는 좋은 기회이기도 했다.
휴전협정 체결(1953.7.27.) 넉 달 뒤 그는 장군으로 진급했다. 그는 군인으로서의 능력은 출중했다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그러나 ‘전향자’인 그를 감시하는 눈초리는 끊이지 않았다. 소장 진급 후 육본 작전참모부장으로 있던 그는 ‘레프트(좌익)’라는 이유로 갑자기 한직인 2군 부사령관으로 좌천됐다. 부질없는 가정을 해보건대 우리 현대사의 비극은 이 인사 하나에서 비롯됐는지도 모른다.
때는 장면 내각 시절이었다. 4·19 혁명, 즉 학생들의 피의 대가로 그저 정권을 잡은 민주당은 미처 준비되지 않은 정권이었다. 게다가 신·구파 갈등에다 민중들의 민주화 열기와 요구는 뜨겁고 치열했다. 나라가 혼란한 것은 당연했다. 민주주의는 혼란스러운 것인지도 모른다. 이 틈을 노린 것은 북이 아니라 한 무리의 정치군인이었다. 박정희 소장 일당은 ‘혁명’ 운운하며 결국 군사쿠데타를 일으켰다.
결론은 ‘식은 죽 먹기’였다. 1961년 5월 16일 새벽 한강 다리를 건넌 쿠데타군은 총 한 방 제대로 쏘지 않고 서울을, 아니 대한민국을 접수하였다. 장면 총리는 이날 새벽 쿠데타 발발 소식을 듣고 은신하였으며, 윤보선 대통령은 ‘올 것이 왔다’는 알 듯 말 듯 한 얘기로 쿠데타를 기정사실화했다. 미국은 결국 승자 편을 들어줬고, 진압에 나서려던 원주 야전군 사령관으로 있던 이한림만 혼자 애를 태웠다.
탱크로 정권을 탈취한 군사정권 앞에는 걸거치는 것이 하나도 없었다. 그야말로 독무대였다. 얼마 뒤에는 쿠데타 당시 얼굴마담으로 내세웠던 장도영(당시 육군참모총장)마저 반혁명사건으로 몰아 토사구팽 함으로써 마지막 돌 하나까지 말끔하게 제거하였다. 쿠데타 당시 육군 소장이었던 박정희는 시간이 지나면서 제 손으로 별 셋, 별 넷 계급장을 달았다. 당시 최고 권력자인 최고회의 의장 신분이었으니 ‘별’이 별 의미가 없기도 했다.
그럭저럭 ‘군정(軍政) 2년’ 가운데 1년이 지나고 2년 차(1962년)로 접어들었다. ‘혁명공약’ 6항에서 내건 ‘원대복귀’가 서서히 화제로 대두되기 시작했다. 사회 혼란을 수습한 후 원대복귀 하겠다고 철석같이 약속을 했던 그들이었다. ‘혁명 주체’ 가운데 몇몇은 박정희를 찾아가 혁명공약대로 할 것을 주장했다. 그러나 한번 잡은 권력을 내놓기란 쉽지 않은 법이다. 이미 권력의 꿀맛을 본 그들이었다. 이 상황에서 박정희 일당은 과연 어떻게 처신했을까? 그 답을 듣기 전에 먼저 아래의 기사를 읽어보시기 바란다.
5.16 이듬해인 62년 봄 박정희(朴正熙)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은 군정(軍政) 연장 명분을 찾기 위해 전방 사단장에게 친위 쿠데타를 제의했으나 상대의 거부로 무산됐다고 당사자가 임종 전 증언한 사실이 밝혀졌다. 증언자는 朴대통령의 만주군관학교 1년 후배이자 5.16 주체세력의 일원으로 지난 3월 작고한 최주종(崔周鍾) 예비역 육군소장. 崔장군은 세상을 떠나기 며칠 전 만주군관학교 후배인 김광식 (金光植·71·여주대 학장) 씨를 불러 “마지막 증언을 남기겠다” 며 이같은 사실을 털어놓았다.
崔장군은 “62년 혁명군에 대한 원대복귀와 민정이양 요구가 나라 안팎에서 거세게 일자 朴의장이 군정연장 명분을 축적하기 위해 당시 8사단장 (의정부 주둔) 인 나에게 친위 쿠데타를 일으켜 달라고 극비 제의했었다”는 증언을 남겼다고 金씨는 전했다. 친위쿠데타 계획은 崔 장군의 반대에 부닥쳐 수포로 돌아갔는데, 최고위원을 겸했던 崔 장군은 63년 3월 5관구사령관으로 사실상 좌천됐다가 반혁명사건에 연루돼 구속되기도 했다.
이후 65년 군수기지사령관을 거쳐 68년 예편조치 됐었다. 崔장군을 아끼는 朴대통령은 그러나 70년대 들어 그를 주택공사사장에 7년간 재임토록 배려했다.
- 「[5·16 발굴비화 2제] 박정희, 친위쿠데타 극비 추진」, 중앙일보, 1998.5.16
군정 2년 차인 1962년 봄, 박정희는 군정을 연장하기 위해 나름의 묘수(?)를 짜냈다. 바로 ‘친위쿠데타’였다. 박정희는 후배 가운데 믿을만한 최주종 당시 8사단장(당시 경기도 의정부 주둔)에게 쿠데타를 제안했다. 그때 최 장군이 이 제안을 받아들여 쿠데타를 일으키면 이들을 제압한다는 명분을 내세워 군정을 연장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이 계획은 결국 무산되었다. 최 장군이 박정희의 쿠데타 제안을 거부하였기 때문이었다.
필자는 위 기사에 등장하는 최주종, 김광식 두 사람을 모두 만났다. 최주종은 신경군관학교 3기생, 일본육사 58기생으로 두 곳 모두 박정희의 1년 후배였다. 최 장군은 5.16 당시 박정희의 요청으로 쿠데타에 협조했다. 그러나 그는 다른 군인들과는 달리 군정에 참여하지 않은 채 군에 남아 있었다. 박정희로서는 심복과도 같은 후배인 데다 현역 군인이어서 친위쿠데타를 부탁할 적임자로 판단했던 것 같다. 나중에 들은 얘기로는 최 장군이 만약 쿠데타를 일으켜줄 경우 체포하여 몇 년간 해외로 빼돌린 후 나중에 요직에 등용한다는 제안이 있었다고 했다.
박정희의 친위쿠데타 제안을 거부한 죄로 최 장군은 괘씸죄에 걸렸다. 소위 ‘혁명 주체’ 가운데는 김동하·박임항(신경 1기), 이주일·윤태일(신경 2기), 김윤근(신경 6기·일본육사 60기) 등 박정희의 군관학교 선후배들이 더러 포함돼 있었다. 그런데 막상 권력을 잡고 보니 이들이 걸림돌이 되었다. 박정희에게 혁명공약을 지키라고 주장한 사람들도 이들이었다. 결국 박정희는 이들을 반혁명사건으로 몰아 내쳤다. 이들이 주로 함경도 출신이어서 흔히 이를 ‘알래스카 토벌 작전’이라고 부른다.
최 장군도 이들과 함께 얽혔고, 결국 반혁명사건에 연루돼 한동안 감옥살이를 했다. 반혁명사건이라는 것 자체가 혁명동지들을 제거하기 위해 만든 조작사건인 데다 최 장군의 경우 친위쿠데타 강요까지 받았던 몸이었다. 박정희는 그게 미안했던지 얼마 뒤 최 장군을 풀어준 뒤 주택공사 사장에 앉혔다.
최 장군이 주공 사장 시절 강남 구반포에 5층짜리 주공아파트를 건설했다. 그런데 초창기에 분양이 잘 되지 않자 궁리 끝에 사장인 자신이 이 아파트에 입주해 모범을 보였다. 1997년 말에 최 장군을 처음 만난 곳도 바로 이 주공아파트에서였다. 당시 그는 폐암 말기였는데 얼마 뒤인 1998년 3월 3일 사망했다(초창기에는 분양이 되지 않아서 애물단지 취급을 받던 이 아파트가 지금 재개발을 앞두고 수억대를 호가하는 보물이 되었다고 한다).
김광식은 신경군관학교 마지막 기수인 7기생 출신이다. 해방 후 그는 군에 들어가지 않고 서울공대에 진학해 교수가 되었는데 나중에 여주대 총장을 지냈다. 김광식을 처음 만난 1997년 당시 신경군관학교 졸업생 가운데 생존자는 자신을 포함해 이한림(2기), 김윤근·김동훈·육굉수·김세현(이상 6기) 등 6명이라고 했다.
막내인 김광식은 이들 모임의 총무를 맡고 있었는데 최 장군과도 평소 가까이 지냈다. 최 장군이 그에게 친위쿠데타 증언을 남긴 것은 두 사람의 돈독한 신뢰가 있었기 때문으로 보인다(지난해도 우연한 기회에 김광식을 능동 그의 자택에서 만났는데 97세의 나이에도 체력이나 기억력이 그리 나쁘지 않았다).
끝으로, 최주종 장군 얘기가 나온 김에 하나 덧붙여둘 것이 있다. 구반포 아파트로 최 장군을 만나러 갔다가 최 장군의 부인으로부터 재미난 얘기를 하나 들었다. 숙군 당시 박정희와 함께 처벌받았던 김학림(金鶴林)의 부인 강씨가 일본에 살고 있다는 것이었다. 얼마 뒤 나는 강 씨에게 편지를 보냈는데 답장 편지에서 놀라운 사실을 접했다. 박정희가 육영수와 결혼하기 전에 잠시 동거했던 이화여대생 이현란과의 사이에서 아들을 낳았다고 했다.
2. 박근혜의 ‘2017년 봄’
2016년 말 jtbc에서 보도한 태블릿 PC 하나가 세상을 뒤흔들었다. 이로부터 박근혜 정권의 국정농단 사건이 본격 불거지기 시작했고, 날이 갈수록 여론은 악화되었다. 급기야 그해 12월 9일 국회에서 박근혜 대통령 탄핵안이 가결되었고, 헌법재판소로 공이 넘겨진 채 해가 바뀌었다. 2017년 봄은 그렇게 시작되었고, 박근혜에게 그해 봄은 하늘이 무너지듯 했을 것이다. 하필이면 작년은 그의 부친 박정희 전 대통령의 탄신 100주년이 되는 해였다.
헌재의 최종 결정을 앞두고 대다수 시민은 탄핵 인용을 거의 확신했다. 그러나 놀랍게도 보수진영 일각에서는 이 엄청난 사건을 두고도 ‘탄핵 기각’을 점쳤다(확신 혹은 기대 등도)는 후문이다. 결과적으로 보자면 그들 가운데는 청와대 등 권력 중추들이 포함돼 있었던 셈이다. 당시 헌재 재판관들의 면면으로 볼 때 청와대가 그런 기대를 할만도 했을 것이란 생각도 든다.
청와대와 집권세력 일각에서 ‘탄핵 기각’을 점치고 있던 그 무렵 광화문은 촛불 시민들로 가득 찼다. 2016년 말부터 시작된 촛불시위는 이듬해 3월까지 계속됐으며, 전국에서 연인원 1700만 명이 참가했다고 한다. 그럼에도 작은 불상사 하나도 나지 않아 세계인들로부터 찬사가 쏟아졌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헌재에서 만약 탄핵이 기각된다면 ‘큰일’이 날 것이 분명했다. 급기야 박근혜 정권은 군을 앞세워 대를 이은 ‘친위쿠데타’를 기도했다.
핫이슈가 된 ‘기무사 계엄 검토’ 문건은 실로 가공(可恐)할 만하다. 탄핵 기각에 분노해 거리로 쏟아져 나올 시민들을 마치 폭도나 적군 대하듯 하였다. 평화로운 집회를 벌여온 시민들을 제압하기 위해 탱크 등 중화기와 무장병력을 동원해 서울 한복판 광화문과 여의도 등에 배치하려 했다. 그 숫자가 무려 탱크 200대, 장갑차 55대, 무장병력 4800명, 특전사 1400명… 장비와 병력 규모가 1961년 박정희 일당의 군사쿠데타를 크게 웃돈다.
작년 3월, 만약 헌재에서 탄핵이 기각돼 이 음모가 현실이 됐을 가능성이 크다. 그랬다면 일단 대규모 유혈사태는 피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군이나 경찰은 상부의 지시만 있으면 언제 어디서도 발포하는 로봇 같은 집단이다. 4·19 때도 그랬고, 1980년 광주에서도 그랬다. 여차했으면 우리는 서울서 다시 또 참극을 겪을 뻔했다. 국민의 생명과 재산 보호가 본분인 군이 되레 국민들을 향해 총과 대포를 쏠 궁리를 한 것이다. 오로지 박근혜 정권의 안위를 위하여.
21세기 대명천지에 쿠데타 음모라니. 그것도 대를 이어서. 이는 실정법이나 국민감정 그 어느 것으로도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반역행위다. 일벌백계만이 답이다. 문재인 대통령은 문건 작성자와 배후세력 등을 밝힐 독립수사단 구성을 지시했고, 단장에 공군 법무장교 전익수 대령을 임명했다. ‘1962년 봄’이 그랬듯이 ‘2017년 봄’도 무위로 끝이 났다. 앞에는 한참 군인이 있었다면 뒤에는 의로운 촛불이 있었다. 결국 총칼을 굴복시킨 촛불은 역사의 물줄기를 바꾸고 참극 또한 막은 셈이 됐다. 실로 위대한 촛불이여, 촛불이여!
원문: 보림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