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이런 사례를 보며 늘 초등학교부터 대학교까지의 학교 교육을 탓한다. 그 교육시스템이 천재적인 학생들의 재능을 키워주지 못한다는 지적이다. 그런데 정말 그게 문제의 전부일까? 천재(天才)는 이미 그 말 자체에서 “체계적으로 키울 수 없다”는 뜻을 어느 정도 감추었다. 체계적으로 많이 양성할 수 있다면 “하늘이 내렸다”는 말을 굳이 쓸 이유가 없다. 천재를 키우지 못하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이야기다.
모든 사람에게 재능별 맞춤 교육을 한다는 말은 이상적이긴 해도, 조금만 생각해봐도 교수법이나 비용 측면에서 어려움이 아주 많을 것임을 쉽게 예상할 수 있다. 천재는 그 정의상 분명 일반인의 예측을 벗어날 것이기에 어떤 교육을 해야 그에게 도움이 될지 미리 알기도 어렵다. 따라서 제도권 교육이 천재에게 맞지 않는, 어떤 정해진 틀을 가지는 건 그리 이상한 일만은 아니다.
천재를 만들 수 있다면 그것은 학교가 아니라 그 외 세상의 “규모”에 있다고 본다. 만약 미술가로 성공할 방법이 좋은 대학 진학 말고도 많았다면 기사에 나왔던 학생은 입시 미술에 그렇게까지 압박을 받지 않았을 것이다.
즉 “천재를 알아볼” 미술애호가층이 두껍고, 그들이 미술에 충분한 관심을 가지고 돈을 지불한다면 굳이 강단 교육자의 인정을 받거나 좋은 대학 졸업장이 없어도 성공할 가능성이 더 많이 생기지 않았을까? 개인적으로 사사받을 선생을 찾아다니기도 더 여유 있었을 것이고, 개인전 등을 통해 바로 미술계의 인정을 받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천재가 아닌 이런 애호가층도 마찬가지로 교육이 만들어낸다. 하지만 한국 사회는 여전히 “특출난 개인”을 키우지 못한다는 점에만 문제를 제기한다. 심지어 그 “특출함”의 인정을 외부(외국)에서만 찾으려 한다. 이러면 인재를 양성하는 과정과 평가 사이의 간극이 너무 멀어서 쉽게 달성하기 어려운 목표가 될 수밖에 없다. 위 기사도 학생이 중간에 적절한 평가를 받지 못해 힘들어함을 암시한다.
교육에 대한 생각을 전환하자. 천재는 가끔 태어날 뿐이다.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범재들이 준비한 “체계적”인 교육이라기보단 천재를 알아볼 지음(知音)이다. 지음이 많으면 많을수록 우연히 태어난 천재가 실패할 확률도 줄어들고, 범재가 천재로 탈바꿈할 가능성도 많아질 것이다. 그렇게 세상(분야)의 “규모”를 늘려 천재에 근접한 사람이 많으면 많아질수록 다음 세대의 천재를 교육할 가능성도 더 높아질 것이다.
이 문제는 예술뿐 아니라 스포츠, 과학 등 다른 모든 분야에도 마찬가지라 생각한다. 비록 세계 최고의 재능이 없어도 즐길 줄 아는 사람들이 많이 필요하다. 그들이 해외의 인정을 받지 못해도, 1등을 하지 못해도, 그런 사람들이 있어야만 천재가 천재일 수 있는 것이다.
원문: cfr0g ; 괴골 [개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