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도직입적으로 말하겠다. 나는 신뢰도 자원이라고 본다.
1.
신뢰가 자원이라니 무슨 뚱딴지 같은 소리냐고 물을지 모른다. 하지만 ‘시간’이 자원으로서 널리 받아들여진다는 점을 생각해 보자. 시간은 눈에 보이지도 않고, 너나 할 것 없이 똑같이 소모된다는 점에서도 일반적인 유형의 자원과는 차이가 있다. 하지만 마땅히 귀중하게 관리되어야 할 자원으로 취급된다. 그 이유는 시간은 개인이나 조직이 목표를 달성하는 데 필수적이면서도 일정한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시간은 자원으로서의 자격을 가진다.
신뢰도 마찬가지다. 사람은 신뢰가 없으면 움직이지 않는다. ‘돈 때문에 움직이는 것 아니냐?’ 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돈이라는 것은 결국 구매력에 대한 믿음이다. 사람, 그리고 조직을 움직이게 하는 것은 결국 신뢰다. 비록 눈에 보이지도 않고 정량화되지도 않지만, 가격(혹은 한계)의 개념이 있다는 점에서 신뢰는 돈과 비슷한 면도 있다. 예를 들어서, 대학교 동아리 회장에게 요구되는 신뢰의 크기와 프로페셔널 인력을 끌어들이기 위해 필요한 신뢰의 크기는 흡사 오토바이와 탱크를 움직이는 데 필요한 휘발유만큼이나 차이가 난다.
돈이나 시간이 없다고 해서 조직이 붕괴되지는 않는다. 하지만 신뢰라는 자원이 바닥을 보이기 시작하는 순간, 그 조직은 끝이다. 공중분해는 시간 문제인 것이다. 그런 점에서 신뢰야말로 궁극적인 자원이라고 할 수 있다.
2.
세상에는 집단의 행동과 유지, 혹은 리더쉽에 대한 많은 조언들이 있다. 솔직히 나는 책상에 앉아 공부만 한 탓에 이런 조언들의 깊은 의미를 알지는 못한다. 하지만 나는 이 많은 조언들의 상당수가 ‘신뢰’ 라는 자원을 관리하는 요령으로 환원되어 해석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예를 들어서, 리더는 공정해야 한다는 말[1]이 있다. 사실 온갖 종류의 사람들이 몰려들어서 일을 하다 보면 언제나 공정할 수도 없고, ‘공정함’의 기준 자체가 모호한 경우도 많다. 하지만 왜 이런 조언이 나왔겠는가? 그건 간단한데, 공정하지 못하면 신뢰를 까먹는 것은 순식간이기 때문이다. 단순히 벌을 주기 위해 벌을 내리는 리더를 누가 믿겠는가?
한 벤처 투자사 대표분이 쓰신 글도 마찬가지다. ‘스타트업에서는 독재자 ceo가 있는 것이 다수결보다 낫다.’ 자극적인 단어 선정 때문에 많은 논란이 오갔는데, 솔직히 이 글의 내용에 틀린 것은 하나도 없다고 생각한다. 생각해 보자. 안정적인 직장 다니면서 편안하게 살 수 있는 사람들이 모여서 만든 팀에 “나는 여러분 모두의 의견에 동의할 수 없다. 우리는 이길로 가야 한다.” 라고 결정을 내릴 수 있는 사람[2]이 있다는 게 무슨 의미겠는가?
그 사람은 신뢰받고 있는 것이다. 다른 사람들이 “내 생각하고는 다르지만, 이 사람 결정에 따라야겠군” 이렇게 납득을 할 수 있을 정도의 신뢰를 공급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다수결로 운영되는 조직에서도 조직원들 사이에 강력한 신뢰를 가진 경우는 있을 수 있다. 하지만 그런 드림팀이 어디 흔한가? 그런 의미에서 나는 저 글에서 하고 있는 조언이 결코 “스타트업 대표들아, 구성원들의 의견 무시하고 니 마음대로 해라” 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오히려 이렇게 해석하는 게 맞지 않을까? “너네, 구성원들의 의견에 거스르는 결정을 하고서도 문제 없을 정도의 신뢰는 갖춰 놓고 있냐?”
오라클 본사 매니저 분이 쓴 이야기 역시 비슷하게 해석이 가능하다고 본다. 뭔가 만들어 일을 시작하고, 결과가 아주 멋질 것임을 지속적으로 보여주는 행위가 동기 부여에 큰 도움을 주는 이유는 무엇일까? 보는 것이 곧 믿는 거라고, 조금이라도 만들어진 결과물을 보여 주는 행위 자체가 신뢰를 주기 때문[3]이다. 그런 점에서 나는 조직운영에 있어서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조언이 있다는 사실 자체가 신뢰라는 자원의 중요성을 반증한다고 생각한다. 신뢰라는 자원은 매우 중요하고 또 마땅히 신경 써서 관리되어야 한다 이 말이다.
3.
나는 무엇을 하든 간에, 조직 구성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일은 신뢰라는 자원을 조달하고 관리할 방안을 세우는 것이라 믿는다. 흡사 군대가 진군하기 전에 보급 계획을 세우는 것과 마찬가지로 말이다. 아마 스타크래프트를 해본 사람이라면, 게임 시작하기 전에 어떤 자원을 얼마나 캐서 어떻게 사용할지에 대해서 미리 생각을 해볼 것이다. 시급히 유닛을 뽑아야 하는 상황에서 ‘자원이 모자랍니다.’ 하는 소리가 나오는 걸 바라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이 경우도 비슷하다. 둘의 차이점이라면, 게임에서 ‘자원이 모자랍니다.’ 라는 소리가 나오는 상황과는 달리 현실에서 ‘신뢰가 모자랍니다.’ 라는 소리가 나오는 건 유혈 사태급 재앙이라는 점이다.
의견이 충돌했을 때 누구의 결정을 따를 것인가? 각 사안에 대한 최종 결정권자는 누구인가? 신뢰라는 자원을 소모시킬 문제에는 어떠한 것이 있으며 이럴 때 어떤 기준에 따라서 대처할 것인가? 의견이 갈라졌을 때 그걸 해결할 원칙과 프로세스에 대해 어느 정도 합의가 되어 있어야 한다 이 말이다. “기술은 니가 맡아라, 경영 쪽은 내가 맡을께.” 이런 식으로 안일하게 접근하는 건 지금 당장 직면한 문제에서 도망치는 것이나 다를 바가 없다. 돈이나 시간, 목표와 같은 공통의 문제에 있어 의견이 갈라지는 순간 재앙이 닥치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이런 문제들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 보지 않거나 일정한 원칙도 정하지 않고 일부터 저지르는 데 대해 극도로 부정적이다. 이건 흡사 낙하산 점검도 없이 비행기에서 뛰어내리겠다는 것과 동급이다. 그게 바보짓인 거, 누구나 다 잘 알고 있지 않은가.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누군가 이런 중요한 자원을 책임지고 공급할 사람을 마련하는 것이다. 흔히들 리더는 돈이나 기술 같은 자원을 관리하는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하기 쉽다. 나는 그런 생각에 동의하지 않는다. 리더 또한 자원을 다루고 공급하는 사람이다. 다만 그가 다루는 자원은 신뢰라는 이름의, 상당히 특별한 형태의 자원일 뿐이다. 뒤집어 말하면, 신뢰를 충분히 공급할 수 없는 사람은 리더 자리에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게 내 생각이다.[4]
4.
바쁜 와중에 틈틈이 시간을 내어 아는 사람들을 만나고 다녔는데, 잠시 미국에 다녀온 사이 온 사방에 싸우고 깨진 소리가 가득하다. 작은 동인팀 비슷한 팀에서부터 이미 거액의 투자를 유치한 팀까지, 몇 개나 깨졌다. 솔직히 나는 그저 제 3자로서 한두 마디 이야기를 들은 것 뿐이니 뭐가 문제였는지, 어떻게 하는 게 좋았었는지 왈가왈부할 처지에 있지 않다. 하지만 상대를 안주삼아 서로에 대해 가시 돋친 비방이 오가는 자리를 몇 번이나 거치다 보니, 한 가지 짚이는 것은 있었다:
결론적으로 이들은 돈이나 시간이 모자라서, 혹은 하던 일이 실패해서 깨진 게 아니다. 신뢰라는 자원이 고갈되서 깨진 것이다. 비록 서로 간의 증언은 조금씩 차이가 있었지만 이들에게는 신뢰라는 자원을 책임지고 조달할 수 있는 사람도, 이 자원의 사용과 손실을 관리하는 방법에 대한 방침이나 사전 협의 같은 게 전혀 없었다는 점에서만은 일치했다.
더 심각한 건, 이들 중 상당수가 대체 뭐가 문제였는지 모르거나 전혀 관심도 없다는 것이었다. 적어도 내 눈에는, 이들은 사소한 시시비비를 가리며 서로를 비난하는 데 더 큰 에너지를 쏟고 있는 것 같았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나는 이 사안들에 대해 누가 잘했다 잘못했다 말할 생각이 없다. 하지만 이것만은 확실하다: 적어도 신뢰 관리의 측면에 대해서라면, 이 문제에 대해 안이하게 생각했던 이들 모두에게 똑같이 책임이 있다. 그걸 깨닫지 못한다면, 여기서 잘못을 저지르지 않은 사람들을 서로 모아 놓는다고 해도 똑같은 일이 벌어질 거라는 게 내 솔직한 생각이다.
5.
“자네는 리더쉽이 뭐라고 생각하나?”
몇달 전, 모 대기업 임원분과 면담을 할 기회가 생겼다. 이런저런 대화가 오가던 도중 마지막으로 질문 하나가 주어졌다. “리더, 그리고 리더쉽이란 무엇인가?” 그 순간, 내 머릿속에는 옛날에 보았던 드라마의 한 장면이 떠올랐다. 드라마의 실제 주인공과 그 손녀가 나누었다는 대화였다: “할아버지, 할아버지는 전쟁영웅이셨어요?” “그렇지 않단다. 하지만 나는 전쟁영웅들과 같은 중대에서 싸웠지.” 드라마를 보면서, 나는 어느 새 노인이 되어 수십 년 전을 회상하는 실제 주인공들을 만날 수 있었다. 이미 60여년이 지났지만, 그들의 눈빛 속에 어린 서로에 대한 신뢰감은 절대적인 것으로 보였다.
언젠가 친한 형 하나가 나한테 해준 말이 있다: “야구팀 감독은 착할 필요도, 나쁠 필요도 없다. 모든 걸 떠나 선수들에게 존경 받아야 한다.”[5] 동감이다. 존경을 받는다는 건 달리 표현하면 신뢰라는 자원을 대규모로 조달하는 데 문제가 없다는 얘기도 된다. 그리고 드라마의 실제 주인공들은 수십 년간 서로를 존경해 왔음에 틀림이 없어 보였다.
대체 무엇이 생판 남남이던 그들을 이렇게 만들었을까. 비록 주어진 질문에는 답하였지만[6], 또다른 궁금증이 머릿속에 또아리를 틀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내내, 머리위에 인 커다란 물음표의 묵직함이 느껴졌다.
- 이런 조언의 대표적인 예로는 공정한 신상필벌을 강조하고 있는 손자병법 제 9장 행군편(行軍編)이 있다. 비슷한 구절로 제 1장 시계편(始計篇)에는 “장수는 지신인용엄(智信仁勇嚴)을 갖춰야 한다”는 구절이 나온다 – 여기서도 신뢰가 두 번째 항목을 차지하고 있다. ↩
- 이는 로버츠 게이츠 前 미 국방장관의 말이다. 자세한 것은 이 글 참조. ↩
- 사실 나는 아주 옛날에 비슷한 조언을 아마추어 게임 개발팀 팀장으로부터 직접 들은 적이 있다: 돈도 안 나오고 강제력도 없는 프로젝트에 팀원들을 붙잡아 놓으려면, 팀장이 “나 이거 이만큼 만들었다!!” 라는 걸 자주 보여 줄 필요가 있다는 것. 이는 팀원들의 의욕을 북돋음과 동시에 ‘우리가 만들고 싶은 게임이 반드시 완성될 것이다’ 라는 믿음을 준다고. ↩
- 과거의 직장동료가 가장 좋은 창업 동료로 꼽히는 것 역시 마찬가지 이유에서라고 생각한다. 비슷한 경험을 공유하기 때문에 의견이 평행선을 달릴 가능성이 적으며 설령 그런 상황이 벌어지더라도 이를 해결할 원칙과 프로세스가 이미 잡혀 있는 사람들인 것이다. 조직을 유지하는 핵심 자원을 다른 사람들에 비해 훨씬 많이 가지고 있으며(그러니까 함께 창업을 했겠지) 이 귀중한 자원이 손실되거나 누수될 가능성 또한 극도로 낮다는 얘기다. 이런 사람들이면, 최고의 동료가 되지 않는 게 더 이상한 일일 것이다. ↩
- ‘야구란 무엇인가’ 라는 책에 나오는 구절이라고. ↩
- “리더는 신뢰라는 자원을 관리하는 사람이고, 리더쉽은 그 자원을 관리하는 기술(Art)라고 생각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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