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사결정과 책임성에 관련한 논문을 읽다가 발견한 흥미로운 글. 2008년 2월 10일, 숭례문이 불탔다. 화재 5시간 만에 국보 1호가 전소한 대참극이다. 아이러니한 것은 소방대가 현장에 도착한 시간이 화재 직후 3분 만이라는 점이다. 가히 빛의 속도라고 부를 만하다. 그런데 왜 소방관이 다 출동했음에도 숭례문이 전소한 걸까? 이 아이러니를 주목해보고자 한다.
현대 사회의 대부분 조직은 전문화를 통해 기능의 분화를 꾀하고, 조직단위와의 협력을 통해 문제해결과 효과적 대응방안을 추구한다. 그러나 이상과 달리, 실제로는 업무의 기능적 분화가 제도적 분화를 만들어내면서 문제해결의 복잡성이 증가했다.
숭례문 화재 사건은 기능의 분산이 재난과 같은 위기상황에서 얼마나 무력한지 극명히 보여주는 사례이다. 숭례문 화재 사건을 시간별로 요약하면 어처구니가 없게도 이렇다.
- 화재 발생 직후, 택시기사에 의한 신고.
- 화재 시작 3분 만에 소방대 현장 도착.
- 5시간 뒤 전소.
숭례문 화재 사건은 ‘늑장’의 문제라기보다 의사결정에서의 책임성에 대한 문제였다. 그리고 아이러니하게도 분권화를 통한 자율성과 전문성이 참사를 방치한 이유 중 하나였다.
숭례문의 관리 주체는 문화재청이 아닌 서울시 중구청이다. 문화재청은 문화재보호법 제16조에 의해 서울시 중구청을 관리단체로 지정했다. 정확히는 문화재청이 서울시를 관리·감독의 주체로 임명했고, 서울시는 다시 기초자치단체인 중구청에 권한을 넘긴 식이었다.
즉 문화재 관리 주체의 책임은 문화재청, 서울시, 서울시 중구청으로 분리되어 있었다. 숭례문 개방사업은 서울시가 담당하고, 숭례문에 대한 관리와 경비는 서울시 중구청에, 문화재 방재에 대한 총괄적인 책임은 문화재청에 있었다.
숭례문에 화재가 발생한 직후. 근방을 지나가던 택시기사의 신고로 3분 만에 출동한 119는 화재 진압을 실시했다. 그러나 숭례문 화재는 ‘외관-천장’에 불이 붙은 게 아니라 숭례문의 내부 천장에서 화염이 발생했다. 내부에 잔불이 남은 관계로 당시 불을 끄려면 숭례문 일부를 파손해 소방관이 들어가 화재를 진압해야 했다.
소방당국은 문화재보호법 제 34조(보존 관련)에 의해 임의로 숭례문을 파괴를 결정할 수 없었다. 따라서 서울시 중구 소방서 지휘관은 문화재청 관계자와 연락을 시도했으나 연락이 닿지 않았다. 결국 문화재청에 ‘진압 허가 승인 관련 결재 팩스’를 보냈다.
선발대 도착 이후 5분 이내에 숭례문 보안을 담당하던 KT텔레캅 출동대원들도 현장에 도착했으나 그 누구도 숭례문을 부수고 들어갈 수 없었다. 숭례문은 국보 1호기 때문이다. 현장 관계자는 적극적인 진압을 요구했으나 소방재청은 독자적으로 판단한 진압결과에 따라 조직의 운명이 달려 걱정이 많았다. 그뿐 아니라 숭례문의 설계도면조차 보유하지 못한 상황이었으므로 문화재청 및 유관기관과의 협조는 필수적이었다.
화재 발생 18분. 서울시 중구 도시관리국장과 과장, 문화재청 공무원이 도착해 숭례문의 설계도를 제공했다. 검토 결과, 숭례문의 기와를 뜯어 물을 넣어야 했다. 그러나 문화재청은 숭례문이 ‘국보 1호’임을 강조하며, 신중해달라고 요청했으며, 당시 우선 출동한 과장은 “손상과 관계없이 진압”할 것을 주장했으나, 본인이 기와를 뜯으라고 결재할 수 없다며 국장께도 보고해야 한다고 했다.
어느 정도 기다려 국장의 의견을 듣게 되었다. “불이 더이상 번지지 않으면 파괴하지 말고, 계속 번지면 그때 돼서 파괴”하라고 언급했으며 아마 문화재청장의 결재를 기다렸던 것 같다. 그러나 문화재청장은 전화를 받지 않았다. 당시 문화재청장은 유홍준이었으며 숭례문 화재 당시 왜 연락이 닿지 않았는가 많은 얘기가 있으나, 이에 대해서는 생략하겠다.
이후 완벽한 합의가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소방당국은 화재비상 2호와 3호를 발령해 소방차 95대와 360여 명의 소방대원을 출동시켰다. 그러나 오후 10시 20분이 지나자 바람이 강해지며 연기가 치솟았고 진압을 위해 뿌려둔 물이 의사결정의 지연으로 그사이 얼음덩어리로 변해 더 이상 기와를 뜯지 못하게 되었다.
화재 5시간 만에 숭례문은 전소되었다. 이미 너무 늦었던 것이다. 그렇게 국보 1호는 완전히 불타버렸다.
당시 서울시장 이명박은 ‘국민들이 심려할까 어쩌냐’며 얘기했고 아마도 책임의식을 느끼지 못했을 것 같다. 문화재청장 유홍준은 사퇴하면서 ‘책임지고 물러난다’고 얘기한 뒤로 숭례문 얘기를 사석에서조차 꺼내는 것을 싫어한다는 후문. 결국 비난의 최소화, 조직의 생존과 평판만 염려한 부처 간의 떠넘기기로 숭례문 화재 사건은 종결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