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해철은 금강팀도 아니고 부산팀도 아니다. 전해철은 노무현을 사랑했던 독고다이다.
전해철이 노무현 대통령을 처음 만난 것은 1993년이었다. 이미 5공 청문회 스타 국회의원이었다가 1992년 14대 총선에서 낙선한 노무현은 1993년 가을 ‘해마루가 가장 쎄다’는 말을 듣고 찾아왔다고 한다. 노무현 대통령의 첫인상은 대단히 강렬했고 거침없는 언변과 번뜩이는 아이디어로 얼마 안 가 해마루의 중심이 됐다.
해마루 사무실에는 사건 자료들을 모아두는 창고가 하나 있었다. 의뢰인이 오면 직원이 창고에 가서 일일이 자료를 찾아야 했다. 노무현 변호사는 고객관리 프로그램을 만들자고 제안했다. 하지만 286컴퓨터를 쓰던 시절이고 이게 과연 가능한 일인가 싶어 당시만 해도 아무도 호응해 주지 않았다.
노무현 대통령이 직접 고객관리 프로그램을 만들고 변호사와 사무장에게 프로그램 작동 방법을 설명했다. 당시 노무현 대통령의 컴퓨터에 대한 지식은 전문가 수준이었고 그 아이디어가 발전되어 만들어진 것이 참여정부의 온라인 보고 시스템인 ‘이지원’이었다.
전해철은 당시 해마루 소속 변호사들의 ‘총무’를 맡았다. 고용변호사 월급이 600만 원이었지만 해마루 신입은 120만 원이었다. 어느 날 노무현 변호사가 집으로 찾아왔다. 아파트 베란다에서 빨래를 널다가 있다가 노무현 변호사의 모습을 본 전해철의 아내가 전해철에게 노무현 변호사 온다 라고 소리를 쳤다. 나중에 왜 소리를 쳤냐고 물어보니 노무현 대통령을 보니 마치 연예인을 보는 기분이 들더라고 했다.
집으로 들어온 노무현 변호사는 총무를 맡고 있던 전해철에게 ‘월급 좀 올려 줬으면 좋겠다’고 했다. 월급 인상의 이유는 자신은 중견 변호사이니 신입이 아닌데 왜 신입 변호사의 월급을 주느냐는 취지였다. 전해철은 죄송한 마음에 한마디 했다.
우리 사무소 룰입니다.
룰인가요? 그럼 지켜야지요. 그게 원칙에 맞지요. 내가 잘못된 부탁을 했습니다. 앞으로 열심히 사건 많이 맡을 테니 그때는 잘 챙겨주소.
노무현 변호사는 이렇게 말하고 돌아갔다. 노무현 대통령은 가끔씩 ‘전해철 수석이 독한 면이 있다. 변호사 때 월급 좀 올려달라니 안 올려 주더라’며 그때를 회상했다. 전해철은 ‘대통령 되실 줄 저는 진짜 몰랐습니다. 알았다면 그랬겠습니까?’라며 유머로 넘겼다. 그러자 노무현 대통령은 ‘자네가 그때 원칙을 지켜서 자네를 민정수석에 앉힌 거네’라고 말씀하셨다.
오랜 변호사 활동으로 재충전의 필요성을 절감한 전해철은 2001년 초 미국으로 연수를 떠났다. 변호사들 표현대로 촉이 떨어져 있던 전해철은 법전을 보는 대신 말도 잘 안 통하는 전혀 다른 세상에서 세상을 공부하고 싶었다.
2001년 11월 노무현 변호사가 대통령에 출마한다는 언론 기사를 접했다. 국회의원 선거도 매번 떨어지는 사람이 무슨 대통령에 출마해? 전해철의 눈에는 노무현 변호사가 돈키호테처럼 보였다. 하지만 나태해진 선입견은 노무현 변호사의 출마 선언을 읽은 후 뒤통수를 몽둥이로 맞은 것처럼 정신이 번쩍하게 된다.
노무현 대통령은 탁월한 연설가이기도 하지만 탁월한 문장가이기도 했다. 노무현 대통령은 변호사 시절이건 정치인 시절이건 항상 자신의 연설문 원고를 직접 썼다. 노무현 변호사의 출마 선언문에는 당신이 하고 싶은 이루고자 하는 세상이 선언문 안에 간결하지만 고스란히 들어가 있었다.
특히 전해철의 심장을 흔든 부분은 전해철이 학창시절 절실히 겪었던 지역감정의 폐해를 극복하기 위한 국민통합을 위한 노무현의 호소였다. ‘지역감정 없는 원칙과 상식이 통하는 세상.’ 노무현 평생의 목표인 사람 사는 세상이 출마선언문에 고스란히 담겨있었다.
진정성 하나로 대통령 후보로 뛰어든 노무현 변호사는 이인제 대세론을 꺾고 새천년민주당 대통령 후보가 된다. 미국에서 노무현 변호사의 모습을 지켜보던 전해철은 감탄을 금할 수가 없었다. 진정성과 추진력만 있으면 몸 하나 가지고도 대통령 후보가 될 수 있구나. 과연 노무현이다.
하지만 노무현 후보의 앞길은 가시밭길의 연속이었다. 노무현 후보의 지지율이 바닥을 전전하고 당내에서는 정몽준과의 단일화 협상을 위한 후단협이 생겨났고 연일 노무현 후보를 압박해나갔다. ‘아무것도 가진 것 없는 후보의 한계인가?’ 전해철은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2002년 7월 전해철이 미국에서 귀국한 즈음에는 노무현 후보에 대한 흔들기가 극에 달한 상태였다. 전해철은 귀국 즉시 변호사들을 만나러 다녔다. 전문직 종사자들의 실질적 지지 선언과 후속 지원 활동이 필요하다고 판단한 전해철은 ‘노무현 후보 지지 법률지원단’을 구성하기로 했고 160명의 변호사가 동참하기로 했다. 전해철은 법률지원단을 만드는 일이 노무현 후보에게 실질적 도움이 될 것으로 생각하고 설립에 신명을 다했다. 지원단의 단장인 이재철 변호사 또한 모든 열과 성의를 다해 지원단 활동을 꾸려나갔다.
당 밖에서는 노사모가 고군분투하며 노무현 후보에 대한 지지에 나섰지만 당 안에서는 여전히 노무현 후보를 흔들고 있었다. 노사모는 후원금 모금을 위한 ‘희망돼지’ 저금통을 나눠주고 후원금을 받는 운동이 대대적으로 벌어졌는데 희망돼지 모금행위가 기부금법위반으로 형사 입건되기 시작했다. 법률지원단은 사건을 처리해나갔고 전해철은 법률지원단에서 간사를 맞아 상근을 시작했다.
막상 상근을 시작하고 보니 밖에서만 접하던 노무현 후보 흔들기의 실체를 눈앞에서 목격할 수 있었다. 정치 모리배들의 후보 흔들기는 상상하던 그 이상이었다. 새천년민주당 의원들 몇몇은 노무현 후보를 후보로조차 취급하지 않았다. 선대위는 전혀 가동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노사모를 필두로 한 깨어 있는 시민들의 자발적 지지만이 노무현 후보의 유일한 버팀목이었다.
노무현 후보는 2002년 12월 12일 기적과 같이 대한민국 대통령으로 당선됐다. 노무현 대통령은 전해철에게 청와대 근무를 제안했다. 전해철은 노무현 대통령의 당선으로 자신의 임무는 끝났다는 판단이 들어 청와대 근무 제의를 고사했다. 전해철은 정치인도 아닐뿐더러 정치에 관심도 없었다. 게다가 한자리 받으려고 노무현 대통령을 지원하지도 않았기 때문에 전해철에게 청와대 근무는 어울리지 않는 자리였다.
하지만 전해철은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한번 노무현 대통령과 조우한다. 한나라당의 대선자금 차떼기가 드러나고 노무현 대통령의 대선자금 조사도 자연스럽게 시작됐고 2004년이 되자 노무현 대통령에게 더 큰 위기가 다가왔다. 탄핵. 전해철은 설마 야당이 노무현 대통령을 탄핵할까 생각했다. 하지만 설마가 설마가 아니었다. 2004년 3월 5일 새천년민주당 조순형 대표가 선거중립 위반과 측근비리에 대해 사과하지 않으면 노무현 대통령을 탄핵하겠다는 특별기자회견을 했다.
대선자금 수사 건과 변호로 정신없이 바쁘던 전해철은 야당의 탄핵 언급을 듣고 조만간 큰일이 발생할 것을 직감했다. 전해철이 아는 노무현 대통령은 불의와 타협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노무현에게 불의와의 타협은 영혼과 신념의 사망을 고하는 것이었다. 전해철의 예상대로 노무현 대통령은 사과를 거부했고 야당은 탄핵소추안을 국회에 제출했다.
문재인 변호사를 필두로 한 대규모의 탄핵 변호인단이 구성됐다. 노무현 대통령의 지시로 두 건의 변호를 맡고 있던 전해철은 대통령 탄핵 건과 관련한 대선 당시의 자료를 취합하는 역할을 맡았다. 대선 캠프 법률자문단을 맡으며 희망돼지 자금 건 등에 대한 법률대응을 한 사람은 전해철이었기 때문에 전해철이 자료를 취합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2004년 5월 14일 헌법재판소가 노무현 대통령에 대한 탄핵을 기각하는 그날까지 전해철은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변호사 일을 이렇게 열심히 했으면 재벌이 됐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 당시 전해철의 몸무게는 7kg이 빠졌다.
대통령 탄핵이 기각되고 노무현 대통령은 업무에 복귀하자마자 전해철을 청와대에 불렀다. 노무현 대통령은 전해철에게 민정비서관을 제안하며 아무 소리 말고 시키는 대로 하라고 한다. 이번만큼은 대통령의 제의를 거절할 수 없었다. 전해철도 모르는 사이에 이미 노무현 대통령과 전해철은 끊을 수 없는 사이가 돼버린 것이다. 전해철은 운명처럼 민정비서관직을 받아들였다. 대통령에게 인사하러 집무실로 들어가니,
자네 청와대는 신입이니 기본급만 받아야 하는 것 아닌가?
해마루 시절의 일화를 기억하며 농담하시던 기억이 전해철에겐 지금도 생생하다. 과거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지만 민정비서관은 청와대의 국정원과 같아서 음지에서 일하며 양지를 지향하는 보직이라 언론에 얼굴 드러낼 일 없이 일만 죽어라고 하는 생색 안 나는 업무였다. 게다가 직속 상관이 문재인 수석으로 바뀌자 전해철의 인생은 더더욱 고난의 연속이었다.
철두철미하고 꼼꼼한 원칙주의자이자 워커홀릭이었던 문재인 당시 민정수석은 전해철에게 같이 죽자는 식으로 상상을 초월하는 민정 업무를 분담했고 전해철은 왜 사나 싶은 정도의 살인적인 업무를 감당해야 했다. 전해철은 과중한 업무로 인해 이러다 제명에 못 죽을 것 같아 생존을 위해 청와대 탈출할 구실을 호시탐탐 찾았는데 문재인 민정수석이 먼저 탈출을 한다.
나 조금 쉬어야겠다. 전 비서관이 맡아 줘.
문재인 당시 민정수석은 수석 자리를 전해철에게 양보하고 청와대를 잠시 나간다. 노 대통령은 문재인 민정수석이 격무로 인한 과로 누적으로 도저히 업무를 수행하지 못할 상황이 되어 민정수석 비서관을 물러나자 전해철을 최연소 민정수석으로 임명했다.
민정수석이란 자리는 기본적으로 언론에 노출되는 자리가 아니라 최대한 언론으로부터 숨어야 일을 잘하는 자리인 관계로 전해철은 민정수석 시절 내내 텔레비전 화면에 나올 일이 거의 없었다. 민정수석을 경험해 본 전해철로서는 이명박정부나 박근혜정부의 민정수석이 수시로 텔레비전 화면에 잡히는 것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민정수석이 화면에 자주 잡히면 잡힐수록 좋을 것 하나 없는데 왜 자꾸 화면에 나오는 것일까?
하지만 이번에 경기도지사 선거에서 떨어진 후 생각해 보니 민정수석 시절 텔레비전 화면에 얼굴 좀 디밀 걸 그랬나 하는 후회도 든다. 오죽하면 온라인상에서 전해철의 별명이 듣보 전해철이었을까? 정치인에게 민정수석이란 역할은 결코 지명도 확보에 도움이 되지 않는 자리라는 생각이 든다. 잘해야 본전이고 못하면 감옥행. 몇몇 정권 민정수석 출신의 감옥행을 보며 드는 생각이다.
43세라는 젊은 나이에 민정수석에 임명되자 여기저기서 말이 나왔다. 고시 기수로도 한참 어린 친구가 무슨 민정수석을 하냐며 전해철을 무시하려는 태도를 보였다. 하지만 노무현 대통령은 이런 수군거림에 전혀 미동도 하지 않았다.
능력 있고 일 잘하면 되는 거지 나이가 무슨 상관이고?
강금실 장관을 참여정부 초대 법무부 장관으로 기용할 때부터 노무현 대통령은 능력 위주의 인사를 선호했고 사법고시 기수 등은 인선의 고려대상이 아니었다.
눈에 띄지는 않았지만 눈코 뜰 새 없이 바쁘게 민정수석을 지내던 2007년 가을 무렵 전해철은 박남춘 윤승용 수석과 내년 총선에 출마할 것을 결심한다. 지금 상태로 노무현 대통령이 퇴임하면 지켜줄 사람이 거의 없으니 우리라도 출마를 해서 지켜주자는 심정이었다. 계란으로 바위 치기와 같은 셋의 출마는 두 사람은 당내 경선 탈락, 전해철은 안산 낙선으로 끝났다.
선거의 선 자도 모르는 전해철이 두 달 동안 선거운동을 해 본들 무슨 수로 승리를 할 수가 있겠는가. 후보가 되고 안산 지역구에서 명함을 돌리며 저 전해철입니다 라고 말하기도 어색했다. 정치 초짜에게 당선은 언감생심이었다. 총선에서 낙선 후 급격한 피로가 몰려왔다. 전해철은 몇 달간 국 내외에서 머무르며 몸과 마음을 추스르고 싶었다. 2008년 전해철은 미국으로 갔다. 2008년 12월 28일 노무현 대통령이 전화했다.
자네 봉하에 좀 내려오시게.
매년 1월 1일 노무현 대통령께 인사를 드리기고 참모들과 약속했는데 마침 미국에 있던 전해철은 이번 1월 1일에 찾아뵙고 인사를 드려야 하나 나중에 찾아뵐까 생각 중이었는데 노무현 대통령의 호출에 즉시 귀국행 비행기를 탔고 한국에 도착하자마자 봉하로 내려갔다.
수심 가득한 얼굴로 전해철을 바라보던 노무현 대통령은 전해철에게 “ 언론에서 별별 이야기가 흘러나오는데 내가 혼자 감당하기는 힘드니 자네가 나 좀 도와줘야 할 것 같네. 나 좀 도와주시게”라고 어렵게 말을 꺼낸다.
네. 제가 챙겨 보겠습니다.
전해철은 다음날부터 이명박 정권의 노무현 대통령에 대한 정치적 탄압에 대해 각종 자료를 취합하고 대통령 주변인들의 진술 등을 받으며 이명박 정권의 정치적 탄압에 대한 대응에 들어갔다.
노무현 대통령 비리라며 검찰과 언론이 합작해 연일 피의사실 공표를 하고 봉하에 자리를 잡고 노무현 대통령의 일거수일투족을 24시간 감시하는 언론들의 집요한 취재 공세에 봉하를 찾던 정치인들과 지인들 대통령을 찾던 관광객의 발걸음은 점점 뜸해졌고 봉하는 적막강산으로 변해갔다.
2009년 1월 이후 모든 언론들이 노무현 대통령과 관련한 각종 의혹을 경마장식 중계를 하며 노무현 대통령에 대한 총공격에 나섰다. 자존심이 쎈 대통령은 정말 많이 힘들어했다. 자신도 모르는 내용들이 언론을 통해 흘러나오고 일일이 사실관계 확인을 하기도 힘들었던 대통령은 매일 저녁 터져 나오는 뉴스를 보며 도저히 그냥 넘어가기 힘든 부분에 전해철이나 문재인 실장에게 전화했다.
전해철과 문재인 실장이 사실관계를 확인하고 언론의 보도가 틀렸음을 주장해도 어느 언론사도 전해철과 문재인 실장의 주장을 기사화하지 않았다. 고립무원과도 같은 봉하마을. 정말이지 속수무책이었고 전해철 스스로 자신의 한계를 절감할 수밖에 없었다.
4월 7일 정상문 비서관이 박연차로부터 금품을 수수한 혐의로 체포됐다. 노무현 대통령은 홈페이지에 사과문을 발표하며 당시 상황에 대해 소상히 해명했으나 그 어떤 언론도 노무현 대통령의 발표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4얼12일에는 대통령의 아들인 노건호가 검찰에 소환됐다. 노무현 대통령의 검찰소환은 기정사실이 됐고 전해철은 검찰 소환에 대비한 자료를 만드는데 전력을 기울였다.
민정비서관과 민정수석의 업무 중 하나는 대통령을 비롯한 고위공직자와 친인척의 비리파악이었고 전해철은 노 대통령의 요청 전 이미 민정수석 시절 당시를 하나하나 떠올리며 노 대통령 변호를 위한 준비를 하고 있었다. 검찰의 피의사실 흘리기로 나왔던 대통령의 금품 수수건 논두렁 시계건 등 각종 노 대통령 관련 혐의가 사실인지 아닌지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던 전해철은 몇 날 며칠 밤을 새워가며 변론 준비를 한다.
전해철의 입장에선 변론 준비를 하면 할수록 열이 받는다. 이명박의 노 대통령 탄압을 위한 수사 지시로 검찰이 박연차를 타깃으로 삼아 어떻게든 노 대통령을 엮으려 한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던 전해철은 노 대통령에 대한 이명박의 탄압을 어떻게 하면 바로잡고 노 대통령의 무죄를 입증해 낼까 하는 생각에 몰두하면서도 끓어오르는 분노를 참을 수 없었다.
참여정부 시절 민정수석인 전해철만큼 이명박과 검찰의 노 대통령 공격이 허위라는 사실을 잘 아는 사람은 없었다. 그런 측면에서 노 대통령도 전해철을 변호인으로 임명했다. 전해철은 노 대통령을 변호하기로 한 후 일주일에 하루 이틀 봉하로 내려가기를 수개월 동안 반복했다. 변론 준비도 준비지만 적적해하고 힘들어하는 노 대통령 곁을 지켜주기 위한 자발적 행동이었다.
자네가 내 옆에 있으니 든든하네.
전해철은 대통령의 이 말에 눈물을 흘린다. 무뚝뚝한 경상도 양반이 얼마나 힘드셨으면 저런 말씀을 다 하실까. 전해철은 이명박의 악랄함에 새삼 분노하며 내가 대통령을 위해 무엇을 해야 할지 다짐하고 또 다짐한다. 그리고 4월 30일, 노무현 대통령이 검찰에 출두했다.
헬기까지 띄우며 검찰행을 중계방송 하는 가운데 전해철은 검찰청으로 가는 버스 안에서 대통령께 말했다.
제가 무슨 수를 써서라도 대통령님의 무죄를 입증하겠습니다. 대통령님께서 죄가 없음은 제가 누구보다 잘 알잖습니까. 걱정하지 마십시오.
잘 대처해주시게.
검찰청 앞 포토라인에 선 대통령을 바라보며 전해철은 분노를 참을 수 없었다. 하지만 이럴 때일수록 냉정해져야겠다는 생각에 머릿속으로 검찰에 대응할 자료들을 하나하나 복기하며 평정심을 유지하려 애를 썼다. 검찰의 조사가 시작됐다. 노 대통령은 조목조목 검찰의 심문을 반박했고 전해철과 문재인 실장은 대통령을 보좌하며 검찰의 공세를 방어했다. 그렇게 12시간이 흐르고 노 대통령 망신 주기 검찰 출두는 끝이 났다.
5월 12일 딸 정연 씨 부부가 검찰에 소환되고 검찰은 정연 씨가 40만 불을 수수했다고 발표했다. 이게 내가 반박한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로구나. 정권 차원의 보복임을 절감한 노무현 대통령은 점점 말을 잃어갔다. 5월 18일 전해철은 봉하로 내려가 대통령을 만났다.
자네가 고생이 많네.
처연해 보이는 대통령의 모습을 보며 전해철은 불안한 생각이 들었다.
이럴 때일수록 강건해지셔야 합니다. 대통령님 잘못 없으신 건 제가 잘 알지 않습니까. 사필귀정입니다. 대통령님의 죄 없음은 제가 꼭 밝혀낼 테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서울로 올라가기 위해 사저를 나서는 전해철에게 대통령께서 직접 문밖까지 나와 인사를 건네신다.
고맙네.
문밖을 나와 내려가는 동안 대통령은 전해철을 계속 바라보고 계셨다. 전해철은 뒤돌아서서 다시 묵례를 하고 대문밖으로 나왔다. 서울로 올라오는 내내 불안한 마음이 엄습했다. 혹시 무슨 일 생기는 것 아닐까? 문밖에서 전해철을 바라보던 대통령의 눈빛은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5월 23일 새벽 봉하에서 전화가 왔다. 전해철은 전화의 내용을 듣기도 전에 상황을 짐작했다. 봉하 가는 내내 눈물이 앞을 가려 운전을 할 수 없어 길에 차를 대고 대성통곡하기를 몇 번 만에 양산 부산대병원으로 갔다. 대통령께서는 이미 세상을 떠나신 뒤였다.
섬광이 나올 것 같았지만 입을 꾹 다물고 일 처리에 열중하는 문재인 실장과 몇몇 보좌진이 있었다. 이럴 때일수록 정신을 바짝 차리자고 마음 먹고 전해철은 이해찬 총리, 한명숙 총리, 문재인 실장을 필두로 한 장례위원회를 구성하고 회의를 주재하는 간사 역할을 맡았다.
전해철은 미친 듯이 장례준비를 했다. 장례준비에 전념하다 잠시 다른 생각을 하다 보면 쏟아져 나오는 눈물을 주체할 수 없었다. 장례준비 과정에서 냉철한 모습으로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으며 일 처리를 했다. 그러다가 저녁 무렵 업무를 마치고 봉하마을 들판에서 혼자 서서 우는 문재인 실장을 바라보며 나도 울면 안 된다는 생각에 오로지 장례준비에만 몰두했다.
장례식이 끝나자 모두 뿔뿔이 흩어졌다. 장례식 이후 몇 개월 동안 하늘이 노랗게 보이고 아무런 삶의 의욕이 생기지 않았다. 전해철은 안산에 칩거하며 마음을 추스르려 애를 써 봤지만 노무현 대통령의 살아생전 마지막 모습이 떠올라 도저히 마음을 추스를 수가 없었다.
전해철에게 노무현 대통령의 죽음은 부모가 돌아가신 것과 같은, 아니 정신적으론 그 이상의 충격이었다. 전해철은 그때 평생 흘릴 눈물의 절반가량을 흘린 것 같다. 눈물샘이 말라버리는 느낌. 노무현 대통령의 죽음 이후 전해철은 어지간한 충격엔 무덤덤한 성격이 돼버렸다.
내가 제대로 보좌하지 못해 대통령께서 돌아가셨구나.
자책감에 아무 일도 할 수 없었다. 지옥과 같은 시간이 그렇게 흘러갔다.
이대로 주저앉을 것인가? 몇 날 며칠을 번뇌하던 전해철은 결심했다. 노무현 대통령이 꿈꾸던 사람 사는 세상을 제대로 한번 만들어보자. 전해철은 다시 신발 끈을 조여 맸다.
전해철의 이야기를 하면서 노무현 대통령의 이름을 빼고 쓰는 것은 불가능 한 일이다. 전해철의 청춘이 고스란히 녹아있는 노무현이라는 거목의 이끌림으로 지금의 전해철이 존재한다. 지금 전해철이 정치를 하는 가장 큰 이유는 노무현 대통령이 못다 이룬 사람 사는 세상을 전해철의 손으로 이루고 싶기 때문이다. 노무현은 정치인 전해철의 처음과 끝과 같은 존재다.
누군가는 전해철에게 노무현팔이를 그만하라고 한다. 하지만 전해철은 정치를 마치는 그 순간까지 노무현팔이를 할 것이다. 노무현이 꿈꾸던 세상이 아직 미완성인데 왜 노무현팔이를 멈춰야 하나. 전해철의 정치적 목표는 노무현이 꿈꾸는 사람 사는 세상의 완성이고 이 목표를 이룰 때 노무현팔이도 끝이 날 것이다.
원문: 김찬식의 페이스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