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다. 이 글은 내가 악마와 거래까지 해서라도 가고 싶다고 했던 다국적 기업의 최종 면접에서 떨어지고 쓰는 글이다. 우울한 글이 될 것이니 미리 알아두시기를. 어젯밤에 남자친구랑 통화하다가 ‘친구 문제’로 울다 잠들었는데, 사실 어제 울 일이 아니고. 그 눈물 아껴뒀다가 오늘 울었어야 했다. 그래서 그런지 눈물이 안 난다.
나는 이 세상에 좋아하는 것보다 싫어하는 게 더 많은 사람이다. 둥글둥글 잘 웃는 성격이지만 사실 마음속에 좋고 싫음이 굉장히 분명하다. 그래서 한번 꽂히면 좋아하는 음식이나 음료수, 사람은 미친 듯이 계속 가까이 두지만 웬만한 건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나도 단점투성이면서. 그런 내게. 싱가포르에 와서 싫어하는 게 하나 더 추가되었다. 아는 사람은 안다. 바로 악명 높은, 그 이름 싱가포르 취업 에이전시.
그 사람들의 비즈니스 모델과 영업 방식 하나는 기가 막히게 칭찬하고 싶다. 일 잘한다. 진짜로. 그렇지만 사람 얼굴을 하고 너무하지 않나 싶은 짓거리를 너무 많이 들어서, 그 행태는 꼭 짚고 넘어가고자 한다. 잘 걸렸다. 오늘 기분도 최악인데. 에이전시를 통해 입싱한 내 친구들의 진짜 경험담을 소개하고자 한다. 가명을 쓸 것이니 이해를 부탁드리며. 벌써부터 스트레스를 받아서 인상이 찌푸려진다.
입싱한 친구들의 진짜 경험담
1. ㄱ은 23살에 해외에서 대학을 졸업했다
ㄱ은 한국에서 취업하고 싶지는 않고, 언어를 잘하는 능력을 살려 싱가포르로 취업하고자 했다. 아무 커넥션도 없고, 경험이나 경력도 딱히 없었기 때문에 에이전시를 이용하여 오기로 했다(무경력자·무경험자의 경우 에이전시를 통해 많이들 건너온다. 일면 이해 가는 부분도 있고). 싱가포르 취업을 약속하고 거액의 돈을 지불했는데, 아뿔싸. 싱가포르 비자가 나오지 않는다고.
이미 인터뷰까지 다 마치고 일을 시작하기 직전이었는데, 정부에서 비자를 내주지 않아 싱가포르에서 일할 수 없다고 통보가 왔다. 당황한 ㄱ은 그런 게 어디 있느냐며 이런 상황까지 책임져야 하는 게 아니냐고 강하게 따졌다. 이미 싱가포르에 체류 중인 상황이었기 때문에 한순간에 낙동강 오리알이 된 셈. 미리 경고해준 것도 아니고 마냥 장밋빛 미래만 비추다 최악의 상황인 비자 리젝의 경우는 언급을 안 하고 책임을 피하려는 모습에 충격받은 ㄱ은 발만 동동 구를 수밖에 없었다.
결국 그녀가 원하지 않던 다른 제3국 동남아시아 나라의 취업을 주선해주었고, 울며 겨자 먹기로 그 나라에서 일을 시작했다. 돈은 매우 박봉이었고, 살 집을 책임지고 구해준다는 에이전시의 감언이설과 달리 10명이 넘는! 여자들과 한집에서 억지로 살던 시절을 생각하면 아직도 악몽 같다고 한다. 이직 두 번을 거쳐 지금은 매우 잘 지낸다.
2. ㄴ은 우리나라 대학교와 에이전시가 합작한 프로젝트에 합격했다
ㄴ은 졸업하자마자 싱가포르로 건너와, 세일즈로 커리어를 시작했다. 그러나 3개월의 수습 기간에는 겨우 100만 원 정도밖에 지급을 해주지 않는다는 독소 조항을 가볍게 여기고 갖은 고생을 한다. 에이전시는 당연히 월급과 물가 등등에 대해 나 몰라라.
싱가폴에서 지내려면 최소한 월급 200만 원은 무조건 받아야 그래도 사람답게 지낼 수 있다. 집값 50만 원을 제하면 수중에는 50만 원 정도밖에 남지 않는데, 하루에 한 끼만 사 먹는다고 해도 30만 원은 금방이다. 나머지 20만 원은 교통비와 핸드폰비… 그러나 사람이 어떻게 하루에 한 끼만 사 먹을 수 있겠는가. 나도 남 일 같지 않아 눈물이 그렁그렁해졌다. 현재는 이직을 앞두었으며 2년 전에 비해 연봉도 많이 올랐다고 한다.
3. ㄷ은 2년 정도의 경력이 있는 경력직이었다
ㄷ은 한국에서의 경력을 기반으로 싱가포르로 건너와 구직을 했고, 싱가포르 내 구직에 실패해 한국에 돌아가 에이전시를 이용한 케이스. 다행히 에이전시를 통해서 얻은 회사는 생각보다 월급이 짜지 않아 괜찮다고 생각했다. 원래 싱가포르 취업을 알선해주는 에이전시들은 대부분 최저임금도 맞춰주지 않거나 정말 상태가 좋지 않은 회사들로만 알선해준다.
그러나 막상 들어간 회사는 한국과 다를 것 없이 사내 문화, 사내 복지, 야근이나 수직적 문화가 한국과 동일했다. 이럴 거면 대체 한국을 떠나서 더 낮은 월급을 받으며 지내는 의미가 뭘까, 하고 생각한다고 한다.
기타 등등
영어 하나도 못 하는 21살 어린 친구들 데려다가 사업장과 그 학생들은 욕은 욕대로 먹게 하고, 의사소통에 문제가 있으니 일을 배우는 진척은 더디고, 구박은 구박대로 받게 하고. 대신 에이전시만 중간에서 알선료를 받으며 잘 먹고 잘 지낸다. 혹은 한인 청년을 한인 식당으로 알선해 삼겹살을 굽거나 식당 부엌에서 설거지하는 일을 맡게 하고 또 거액의 알선료를 챙긴다.
이 월급에도 잘 지낼 수 있다.
1-2년 버티고 이직하면 나중에 돈이 많이 오른다.
이 월급이 결코 낮은 것이 아니다. 다들 이렇게 잘 버텼다. 어차피 혼자 싱가포르 가서 이직하려고 하면 못할 것이다.
상담을 받고자 오는 어린 학생들이나 경험이 없는 사람들을 꼬드겨 이런 말로 겁을 줘가며 현혹한다. 그럼 가장 피해를 보는 것은 언어도 준비가 안 되고 경력도 없지만 열정과 꿈 하나로 싱가포르로 오는 학생들과, 그 학생들을 위해 거액의 돈을 지불하는 우리네 부모님들이다. 진짜 욕을 안 할 수가 없다. 이러니 내가 욕을 못 끊지. 마음이 너무 안 좋다.
싱가포르 한인 커뮤니티인 한국촌에도 사실 지속적으로 싱가포르 취업 에이전시를 규탄하고 규제가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올라온다. 자꾸만 저임금 일자리에 한인 청년들이 영어도 잘 못 하면서 몰려들기 때문에 계속 한인 사회와 전체적인 이민자 사회 및 싱가포르 자체에도 악영향을 끼친다는 것.
양심적인 에이전시도 물론 있겠지만, 열정페이 중의 열정페이를 강요하며 달콤한 말로 현혹하는 상당한 수의 취업 알선 회사는 정말 제정신인가를 묻고 싶다. 그렇게까지 하고 싶은지. 돈이 뭐라고. 에라이 진짜.
싱가포르 취업을 하겠다면
나도 아직 취업에 성공하지 못했지만. 이러고 실패해서 미국으로 긴 여행을 떠날지도 모르지만. 에이전시를 이용하는 것에 대해서는 이렇게 말해주고 싶다. 공개적인 브런치라 자세히 쓰진 않았지만 내가 직접 싱가포르로 와서 듣고 경험한 것만 상상 그 이상이다.
1. 내가 왜 에이전시까지 이용해야 하는지에 대한 당위성을 체크하세요
그냥 해외 취업이 하고 싶어서? 해외에서 일하고 싶은데 언어가 안 되지만, 에이전시는 그런 거 걱정 없이 알선해준다고 하니까? 마땅한 경력이나 어필할 만한 스킬, 경험이 없어서?
마지막 이유가 아닌 이상 그냥 한국에서 영어 공부 먼저 하세요. 마지막 이유는 충분히 이해 가능하고 납득 가능합니다. 사실 마지막 이유도 한국에서 경력을 1년이라도 쌓고 영어 공부를 하고 오는 게 제일 좋긴 합니다만… 아니면 아르바이트나 인턴이라도… 실제로 인턴 경험만 있고 정직원 경력은 없는 지인은 싱가포르 오자마자 한 달도 되지 않아 취업했습니다. 자력으로.
2. 에이전시의 말만 듣지 말고 다른 정보도 꼭 알아보세요
에이전시가 하는 말은 다 똑같습니다. 견뎌라, 버틸 수 있다, 다 해왔다, 어차피 에이전시 안 끼고 혼자 가서 도전하면 결과는 안 봐도 훤하다, 혼자 고생할 필요 없이 우리가 돕겠다, 위험하고 어리석게 해외에서 사서 고생하고 그럴 필요 없지 않느냐(집, 비자, 구직 과정이 간결해짐).
네이버만 검색하는 건 그만. 네이버 블로그, 포스트, 지식인 다 어차피 그들 마켓이고. 진짜 정보는 다른 데 있습니다. 정말 다녀온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는 것도 좋겠고, 실제로 해외 취업을 자력으로 성공한 사람의 케이스를 참고하는 것이 큰 도움이 되겠지요.
네트워크에도 정기적으로 참여해보고, 링크드인이나 페이스북을 통해 알게 된 사람에게 대체 어떻게 해낸 것인지 직접 물어보세요. 옷 사거나 컴퓨터 사양 고를 때는 여기저기 알아보고 엄마가 말릴 만큼 철저하면서 왜 가장 중요한 커리어의 시작점에서는 에이전시들 말만 들으시는지요…
굳이 에이전시를 통해 싱가포르 취업을 하겠다면
- 경험이 정말 하나도 없는 대학생이거나 고등학교 졸업생, 혹은 사회초년생
- 영어도 중국어도 잘하지 못해 언어 장벽이 상당히 큰 사람
- 해외 생활이 처음이라 모든 게 낯설고 무섭지만 동시에 집에 돈은 좀 있어 서포트 걱정은 할 필요 없는 사람
만약 세 가지 중 하나에 해당한다면 어쩔 수 없다. 모든 선택에는 마땅한 존중이 따라야 한다. 당신의 결정에 침을 뱉을 생각은 전혀 없다. 버티고 이직할 수, 있다! 단지 부당하게 이익을 취하면서 동시에 어리고 젊은 한국인들을 울리는 못된 에이전시가 역겨울 뿐. 천민자본주의란 이런 것일까. 인간성은 어디로 휘휘, 날아가고 무심한 돈 위에 재만 남은 것일까. (모든 에이전시가 그런 것은 아닙니다 ^^)
원문: 가름의 브런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