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 종류가 있는 프라모델 중에서도 독보적인 위치에 있는 것이 ‘건프라’ 즉 건담 프라모델입니다. 그런데 이 건담 프라모델이라는 거, 여러 회사가 만드냐면 그렇지 않아요. 건담 만화, 애니메이션 등에 대한 모든 저작권은 선라이즈와 소츠 에이전시에 있습니다. 건담을 소재로 한 프라모델 제품은 오직 단 한 곳, 반다이 스피리츠에서만 만들어 판매하고요.
예를 들어 에이브람스 전차 프라모델은 아카데미에서도 나오고 타카라에서도 나오고 타미야에서도 나오고, 스타워즈 밀레니엄 팰콘 모형은 반다이, 디아고스티니 등에서 나오며 심지어 레고 등에서도 해당 제품군이 나오는데 이는 해당 제품의 판권 일부를 제조사가 구매해서 허락을 받고 만들어 파는 케이스입니다.
당장 아이언맨 장난감만 핫토이, 반다이, 타미야, 레고, 하즈브로 등 셀 수 없이 많은 업체가 각자 만들어 판매하는 거 생각해보시면 이해가 쉬우실 겁니다. 디즈니/마블이 직접 제품을 만들지 않고 판권만 판매하는 식이니까요. 그러나 건담은 다릅니다. 건담은 완벽한 독점 콘텐츠예요. 애초에 그런 목적으로 영상, 소설, 코믹스, 프라모델, 완제품들이 만들어진 거고 오직 선라이즈/소츠/반다이 독점으로만 제조, 판매됩니다. 모든 저작권을 완벽하게 소유했으니까요.
또한 너무너무 장사를 잘하고, 기술력이 높고, 양질의 제품을 만들어 온 결과 건담이라는 콘텐츠가 나온 지 수십 년이 지난 지금 건담 관련 프라모델 제품군의 숫자와 그 판매량은 어마어마합니다. 당연히 이런 꿀 빠는 장사를 보고 중국인들이 가만히 있을 리가 없죠? 그래서 소위 ‘짝퉁 건프라’ 문제가 발생합니다. 말로는 짝퉁인데 실제로 몇 가지 유형이 있어요.
- 제품 그 자체를 복제, 판매하는 경우: 즉 이미 제품화된 완제품, 프라모델을 고대로 베껴다가 파는 경우입니다. 변명의 여지가 없는 완벽한 짝퉁인 경우죠.
- 없는 제품을 만들긴 했는데 저작권 침해인 경우: 건담과 그 관련 메카의 수, 종류가 어마어마해 아직 반다이에서 실제 제품화하지 않은 로봇도 많습니다. 언젠간 나와줄 거 같긴 한데 잘 안 내줄 때, 중국 복제업체가 그 빈틈을 파고들어 해당 로봇 디자인을 프라모델 등으로 제품화해서 무단으로 팔아먹습니다. 아래 같은 경우죠.
보시다시피 건담(Gundam)이 아니라 건둠(GunDoom)입니다. 하이뉴 건담의 디자인을 그대로 빌려다 스스로 만들어 냈으니 나름 대단하긴 하죠(…)
이건 그다음에 나온 반다이의 정식 하이뉴 건담 제품입니다. 정식 저작권자 놔두고 중국 복제품이 선수를 치는 바람에 반다이 쪽에서도 열 꽤나 받았는지 HWS라고 하는 추가 확장팩을 발매해 건둠 구매자들을 반대로 엿먹이기도 했는데 뭐 그런 거야 여담이고요…
당연한 말이지만 이런 자신들의 저작권을 직접적으로 침해한 행위에 반다이가 가만있을 리 없죠. 해당 업체들 대다수는 이미 법의 철퇴를 맞고 압수, 폐업된 경우가 적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비슷한 업체들은 지속적으로 생겨서 짝퉁을 만들어 팔고 있는 상태예요. 문제는 국내 소비자 상당수가 이런 중국제 복제품을 꽤 선호한다는 점입니다.
저작권에 대해 인식이 바른 소비자들은 매우 경원시하지만, 그에 아랑곳없이 개중엔 그냥 선호하는 정도가 아니라 반다이가 안 내놓는 제품 만들어 내어주는 고마운 곳이라고 하는 경우도 있고, 싸고 품질도 나쁘지 않아 아주 맘에 들었다는 경우도 있으며, 수십만 원하는 비싼 정품 안 사도 돼서 좋다는 케이스도 적지 않습니다. 저런 중국제 선호 소비자 중 자기 합리화를 하고자 하는 분들의 논지는 대략 다음과 같습니다.
- 복제하고 만드는 놈, 유통하는 놈들은 불법을 저지른 나쁜 놈들이 맞지만 개인 수준에서의 유통, 구매는 불법이 아니다.
- 독점은 나쁜 거고 소비자가 원하는 제품 어떻게든 내어주는 중국 업체들은 고맙기까지 한 존재다.
- 돈은 없지만 프라모델은 즐기고 싶다. 싼 중국제 사는 게 대체 뭐가 문제냐.
- 유통한 것도 아니고 장사한 것도 아니고 그냥 개인이 잘 만들어서 자랑하는데 어디가 불법이냐.
음… 글쎄요. 사실 프라모델이라는 게 만드는 사람의 실력, 개성에 따라 큰 차이가 나는 좀 특별한 카테고리의 제품이긴 합니다. 그러나 저작권이라는 틀에서 볼 때 불법제품의 유통, 선호는 그리 바람직하기만 한 건 아니라고 생각해요. 이해가 쉽도록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루이뷔통 핸드백은 루이뷔통에서만 만들어 판매할 수 있습니다. 루이뷔통이라는 상표에 대한 모든 권리가 루이뷔통에게 있으니 당연한 일이죠. 근데 거기에 대고 “루이뷔통 독점은 나쁜 거고 싸게 루이뷔통 마크 단 핸드백을 다른 데서 만들어 팔길래 샀다”고 하는 격입니다. 아니, 루이뷔통이라는 브랜드를 만들고 키우는데 든 노력은 개무시하고 그냥 자기가 싼값에 갖고 싶으니 짝퉁을 산다는 걸 정당화할 수 있을까요?
당연한 말이지만 루이뷔통도 반다이도 자신들의 상표권과 제품에 정식 권리를 신청해 보유했습니다. 2015년 시행된 관세법 시행 개정안에 따르면 이러한 지식재산권 침해 물품은 용도와 수량에 상관없이 수출입 자체가 전면 금지되어 있어요. 그런데도 국내에서 거래가 이뤄진다면 밀수품이란 소립니다. 만드는 놈과 유통하는 놈은 당연히 관세법 위반인 거고, 정말 엄밀하게 따지면 구입자·주문자도 밀수에 해당해요. 심지어 중고로 재판매한다? 짝퉁은 개인 간의 중고 거래도 밀수에 해당, 압수 및 처벌 대상이 될 수 있습니다.
저작권이라는 것에 대한 인식이 개판이었던 수십 년 전이랑 지금은 다릅니다. 아카데미나 뽀빠이과학이 건담이나 마크로스 프라모델 베껴서 싸게 팔아먹던 시절이 낭만인 듯 각색해서 이야기할 필요조차 없어요. 그냥 부끄러운 과거일 뿐입니다. 개인이 중국제 짝퉁 구매해서 자랑하는 게 어디가 나쁘냐고들 하시는데… 글쎄요. 저는 루이뷔통 짝퉁 핸드백 싸게 샀다고 자랑하는 그 자체가 너무너무 부끄러운 짓 같은데 본인은 안 그러신가 봐요.
프라모델 라이센스 위법성 여부 정리
프라모델 본 제품 말고도 라이센스가 관계되는 부분이 적지 않은데 각각의 위법성 여부에 대해서도 좀 짚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1. 일부 부품의 복제 및 금속화 판매
합법. 튜닝용 자동차 부품을 2차 업체들이 판매하는 거 생각하면 이해가 쉬움. 프라모델은 법적 해석상 처음부터 개조 등을 염두에 둔 공산품이므로 개별 부품에 대해서까지 저작권이 인정되지 않음. 부품의 손실 등으로 인한 복제는 물론이거니와 이를 별도 판매하는 행위도 법에 전혀 저촉되지 않음. 프라모델이라는 제품 특성상 가능. 단, 만약 특허가 걸린 특수한 부품이라면 복제 불가. 뭐 그런 사례는 일단 없겠지만.
2. 사제 데칼(스티커)
기본적으로 합법이지만, 로고, 폰트, 문장 등 저작권이 별도로 존재하는 부분은 불법일 수 있음. 예를 들어 지온군 마크, 연방군 마크, 솔레스탈 비잉 마크, 비스트재단 마크 등이 들어간 경우 따지고 보면 불법. 따라서 이거 디자인이나 문구를 약간 바꿔버리면 합법. 코션 데칼등 일반 데칼의 경우엔 항공, 전차에 사용하는 문양으로 저작권이 인정되기 어렵고 결과적으로 자유로운 제작 판매 가능.
그러나 사제 데칼의 디자인이 저작권이 위배되는 건 맞는데… 반다이는 이런 “본 제품에 추가로 뭔가를 행하는” 제품군에 대해서는 일절 저작권을 행사하지 않아요. 저작권법은 친고죄에 해당합니다. 반다이 스스로가 신고하기 전에는 위법이 아니에요.
반다이는 중국 및 한국 내 이런 사제 스티커 제조 업체들에 대해서는 완벽하게 노코멘트 노터치 상태예요. 오히려 이런 스티커가 정품 판매에 큰 도움이 된다 판단하고 은근슬쩍 장려할 정도죠. 반다이 주최 건담 프라모델 월드컵에도 사제 데칼은 금지 대상에서 벗어나 있다는 게 이를 방증합니다.
3. 건프라를 완성 후 웃돈 받고 개별적으로 판매하는 행위
기본적으로는 합법. 다만 업으로 할 거라면 사업자 등록해서 세금 내는 게 좋음.
4. 중국제 짝퉁의 보유, 재판매
저작권 신고 등으로 인해 정상적인 통관, 유통이 불가능한 제품을 유통, 재판매하면 구입/판매한 본인이 몰랐더라도 밀수법 위반의 가능성 있음.
판매자가 국내 사업자 등록 없이 해외 구매품, 짝퉁들을 들여와 판매한 경우 구매자도 밀수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알고도 물품을 구매했다면 경우에 따라서는 구매자도 밀수에 가담한 것으로 처리, 돈을 돌려받지 못하고 물건도 압수당하는 등 구제를 받지 못할 수 있다.
- 관세청 답변
개인이 한두 개 정상 통관받고 중고 판매한다면 밀수법과는 관계없지만 여전히 저작권 상표권 위반. 이 부분은 사안이 좀 중요하다 생각해 아는 변호사분께 문의까지 해봤는데 이런 답변을 받았어요.
2015년 2월 시행 시작된 관세법 시행령 개정안 제 243조에 따라 ‘지식재산권 침해물품’은 여행자 휴대품목 제외하고 용도와 수량에 상관없이 수출입 전면 금지되었다. 중국제 복제 건프라는 반다이, 그리고 국내 총판역할을 하는 아카데미에 의해 지식재산권 침해물품 목록에 올라가 있으며 정말 엄밀하게 따질 시 정상적인 유통경로로는 국내에서 구입, 거래가 될 수 없는 품목인 만큼 이것의 유통은 통관단계에서 관세법 시행령에 따라 반송 혹은 폐기되며 개인이라도 본인이 여행에서 들고 온 게 아닌 구매대행 및 출처가 불분명하고 반복적 반입을 계속하는 업자로부터 구매했을 시 이를 되팔 경우 관세청은 밀수로 간주, 압수 및 처벌할 수 있다는 법리해석이 가능하다. 비슷한 예시로 짝퉁 고급 핸드백 등의 개인 거래 중 신고에 의해 밀수품으로 몰수당한 예를 들 수 있다.
이 부분은 영화나 음악 불법 다운로드하고도 비슷한 면이 있습니다. 영화나 음악 업로드한 놈, 웹하드 운영하는 놈, P2P 프로그램 만든 놈이 나쁘고 개인이 다운받는 건 과연 불법 아닐까요? 당연히 다운로더도 법 위반한 거 맞아요. 너무 많고 현실적으로 일일이 증명이 어려우니 놔두는 거지. 나 하나쯤은 괜찮겠지… 괜찮을 수도 있습니다. 사실 일일이 어떻게 가려내겠어요. 근데 그걸 자랑하니 문제인 겁니다. 그거 보고 사람들이 이렇게 되거든요.
우와 님 그거 끝내주네요 어디서 사셨어요?
얼마예요? 정품보다 싸요?
저도 하나 사고 싶은데 어디 가면 되나요?
결과적으로 아주 훌륭한 저작권 브레이커가 됩니다. 이게 과연 취미니까 용인되고 너무너무 바람직하기만 할까요? 전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5. 옵션 파츠
택티컬암즈나 더블체인건 등 MG사이즈업해서 복제, PG용으로 만들어 판다든가 이런 거 다 당연히 불법이며 국내거래 시 밀수법 위반. 금속 에칭 파츠, 버니어 디테일 업, 그 외 어지간한 디테일 업 파츠의 개발·판매 등은 저작권과 무관하며 합법.
정리
대략 이렇게 정리할 수 있을 것 같네요. 당장은 정품보다 싸게, 아직 정품 나오지 않은 레어 제품을 구매해서 만들 수 있으니 좋게 느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가뜩이나 위축되어가는 서브컬처시장에서 불법복제의 범람은 결국 정식제품의 축소로 이어질 수밖에 없어요. 최소한 티는 내지 말던가, 짝퉁 홍보대사 같은 역할은 하지 않았으면 하는 게 개인적 생각입니다.
근데 어쩜 그리들 짝퉁 잘 만든 걸 자랑하고 싶어 안달이신지(…) 아니 뭐 사람인 이상 실수도 할 수 있고 유혹에 좀 빠져볼 수도 있고 경험 삼아 일부러 시도해볼 수도 있기는 해요. 그런 것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걸 자랑하고 홍보하고 전파하는 건 이야기가 좀 다르죠.
오바마 대통령도 젊어서는 마약도 해보고 좀 삐뚤어져 보기도 하고 그랬대요. 그러나 그가 마약 한 거 자랑하고, 마약을 홍보하고, 마약을 팔고 다니고 하진 않았습니다. 경험에서 그쳤으니 사람들도 그 정도야 뭐, 하면서 대통령으로 뽑아주기도 하고 그런 거잖아요?
중국제라고 해서 무조건 배척하고 무조건 죄인 취급하고 그러는 게 아닙니다. 불법을 저지른 자기를 합리화하면서 한발 더 나아가 자처해서 중국제 홍보대사 역할을 하는 건 좀 지양하자는 거예요. 가급적 합법적이고 떳떳하며 양심에 거리낄 것 없는, 그런 취미생활 하셨으면 좋겠어요. 제 생각은 그렇습니다.
원문: 마루토스의 사진과 행복이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