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미스 함무라비 8화, 부모와 자식 간에 가장 필요한 것을 보여주다
요즘 드라마 <미스 함무라비>를 매회 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소설 <미스 함무라비>에서 다룬 이야기만 아니라 “캬! 정말 사이다다!”라는 말이 어울리는 장면도 드라마의 재미를 더해주는 멋진 요소다. 오로지 직진으로 나아가는 박차오름의 멋진 모습을 고아라가 멋진 연기로 감칠맛을 더해주고 있다.
드라마 <미스 함무라비>가 가진 매력은 이게 전부가 아니다. 민사 사건을 소재로 하고 있어 법정이 낯선 사람도 쉽게 공감할 수 있는 사건이 다루어진다는 게 매력 중 하나다. 드라마에서 매회 볼 수 있는 사건들은 우리가 살면서 한 번은 겪었을 혹은 뉴스를 통해서 봤을 수도 있는 사건들이 많았다.
지난 드라마 <미스 함무라비 8화>에서는 대기업에서 신입사원으로 일하던 한 인물이 직장 내에서 적응하지 못한 채 자살을 기도한 사건이 다루어졌다. 이 신입사원의 부모님은 당연히 멀쩡한 자식을 이 지경으로 몰았다고 회사를 향해 화를 냈고, 회사 측은 신입 사원의 내성적인 성격을 문제로 삼았다.
처음 사건 내용을 자세히 알기 전에 나는 오로지 부모님의 입장, 즉, 피해자의 입장에서 보면서 ‘성격이 내성적인 피해자가 문제다.’라고 말하는 회사 측에 불쾌감을 감출 수 없었다. 왜냐하면, ‘성격이 내성적이라서 사람들과 잘 어울리지 못한 피해자가 문제다.’라는 건 가해자의 흔한 변명이기 때문이다.
직장 내 폭력의 출발선에 있는 학교 폭력 또한 가해자들과 가해자 부모, 책임을 방관하는 교사들은 모두 하나 같이 피해 학생이 내성적이고 남과 잘 어울리지 못하는 성격을 탓한다. 나도 과거에 그러한 이유로 폭행을 당했던 터라 이렇게 어처구니없는 변명으로 폭력의 책임을 돌리는 걸 보면 화가 난다. 그래서 화를 삼키지 못한 상태로 씩씩거리는 상태로 드라마 <미스 함무라비 8회>를 시청했다.
사건을 조사하면서 임바른 판사가 알게 된 여러 사실을 피해자의 부모와 와이프, 그리고 회사 측에 추궁하는 장면은 화를 내는 게 아니라 ‘상황’에 대해 깊이 이해하면서 사건을 다시 생각해볼 수 있었다.
피해자의 부모님은 흔히 말해 ‘헬리콥터 맘’이라고 부르는 어머니와 자신의 꿈을 자식을 통해 대신 이루고자 하는 아버지였다. 부모님은 피해자가 어릴 때부터 많은 학원에 보내면서 명문대를 보냈고, ‘투자한 게 얼마인데!?’라는 이유로 피해자가 원하는 과가 아니라 부모 자신이 원하는 과를 보냈다.
더욱이 그것으로도 모자라 대기업에 취업했을 때도 어머니는 자식 근처를 헬리콥터처럼 돌아다녔다. 이 모습을 드라마를 통해 보면서 ‘아, 저 정도면 피해자가 심리적으로 위축될 수밖에 없겠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부모님은 자식을 위한 일이라고 변명하면서 자식을 끊임없이 괴롭히고 있었던 거다.
물론, 그 이전에 피해자는 이미 직장 내에서 따돌림을 당하면서 고립되어 있었고, 일사불란하게 하나의 톱니바퀴가 되어 움직이는 직장은 적응하기 어려웠다. 거기에 어머니가 나서서 사사건건 간섭하고 있으니 피해자의 마음이 무너지는 일은 불 보듯 뻔한 일이었다. 그에게는 기댈 곳이 하나도 없었다.
마지막까지 그의 버팀목이 되어줘야 했던 가정 또한 그를 매몰차게 대했다. 그가 숨 쉬는 구멍을 갖고자 아내 몰래 오피스텔을 빌려 시를 쓰던 공간이 유일하게 자신을 위한 공간이었다. 하지만 숨쉬기 위한 그 공간도 아내에게 들킨 이후 사정을 들으려 하지 않은 상태에서 ‘외도’라며 그를 궁지로 몰았다.
직장과 부모님, 자신의 가정 어디에도 마음 편하게 숨 쉴 곳이 없었던 그는 하루하루를 바싹 피가 마르는 심정으로 보냈을 것이다. 자신의 심정을 털어놓을 수 있는 곳이 짧게 짧게 습작한 시뿐이었던 그는 결국 목을 매고 말았던 것이다.
임바른 판사가 모두를 조정 책상에 앉힌 이후에 하는 이야기는 딱 그런 사람들에게 일침을 가하는 말이었다. 여기서 잠시 그 대사를 읽어보자.
한 오라기의 실도 흐트러지지 않는 게 ‘일사불란’이죠. 어눌한 이영수 씨는 흐트러진 단 하나의 실오라기 아니었습니까? 잘려나가야 될…. 다시 여쭙겠습니다. 회사는 아무 책임이 없습니까? 부모님은요? 단 한 번이라도 이영수 씨를 독립된 한 명의 인간으로 존중해 주신 적이 있습니까? 여기 계신 모든 분이 공범입니다.
이영수 씨는 그저 자기가 태어난 대로 살고 싶었을 뿐입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남들과 같은 모습을 강요했습니다. 안타깝지만 이영수 씨의 본인도 책임이 있습니다. 이영수 씨는 주변 분들이 원하는 대로 순종했을 뿐, 한 번도 거부하지 못했습니다. 그 책임을 스스로 지고 계십니다. 아주 고통스러운 방식으로요…. 가족들도 그 고통을 함께 짊어지게 되겠지요. 이제 여러분도 책임을 지셔야 합니다.
임바른 판사가 말한 “회사는 아무 책임이 없습니까?”, “한 명의 인간으로 존중해 주신 적 있습니까?”라는 두 가지 질문은 책임을 회피하는 사람들에게 일침을 가하는 말이다. 단체 생활이라는 이유로 개인의 희생을 강요하는 사회, 부모라는 이유로 자식의 삶을 멋대로 정하는 모습 말이다.
아직도 우리 한국 사회에서는 아이를 하나의 인격체로 존중해주는 모습이 부족하다. 언제나 아이는 부모가 바라는 대로 살아야 하고, 부모가 정한 삶의 규칙과 꿈을 살아야 한다. 만약 자식이 부모가 바라는 대로 살지 않으면 “이건 배신이야. 내가 너한테 어떻게 했는데!”라며 관계가 틀어지는 게 부지기수다.
어쩌면 이렇게 자식을 한 명의 독립된 인격체로 대해주지 못하는 것이 사회라는 곳에서도 한 명의 독립된 인격체로 대우받고 사는 게 어려워지는 시작점인지도 모른다. 지금 당장 이 문제를 고치는 일이 어려울지는 몰라도, 천천히 우리가 다른 사람을 자신과 같은 독립된 인격체로 대할 수 있어야 한다.
그렇게 해야 ‘존중’이라는 단어를 우리가 말로만 하는 게 아니라 삶에서 실천할 수 있고, 부모와 자식 사이에서도 욕심이 아니라 존중이 생겨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곧, 그것이 우리 사회에서도 나 한 사람이 독립된 한 명의 인간으로서 대우를 받을 수 있는 길이 되지 않을까?
원문: 노지의 소박한 이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