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The Economist의 「80 years of summits in seven charts」를 번역한 글입니다.
한국전쟁 휴전협정이 체결된 1953년 이후 북한과 미국의 정상은 단 한 번도 만난 적이 없습니다. 지난 12일 김정은 국무위원장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싱가포르에서 만나 정상회담을 하고 공동 합의문을 발표한 것이 더욱 역사적인 이유입니다.
이처럼 “역사적”이라는 수식어를 붙일 만한 정상회담은 세계사에 종종 있었습니다. 다만 회담의 결과가 끝내 세계대전을 비롯해 인류사의 재앙을 막지 못한 것으로 판명된 경우도 더러 있었습니다. 즉, 회담 당시에는 많은 이들의 기대 속에 찬사를 받던 회담이 정작 역사책에는 손꼽을 만한 실수나 재앙으로 기록되기도 한다는 겁니다.
《이코노미스트》가 지난 80년간 세계사를 수놓은 굵직굵직한 회담 일곱 개를 뽑아 그 성과를 간략히 정리했습니다. 회담에 나선 양국의 영향력을 가늠하는 잣대로 당시 경제력과 군사력을 대입했고, 당시 이 회담을 다룬 기사를 찾아 구글 클라우드의 정서 분석 기법을 활용해 문장을 분석했습니다. 분석 결과 당시 여론이 회담에 회의적이었는지 낙관적이었는지를 평균 점수로 표시했습니다.
1. 뮌헨 회담
- 네빌 체임벌린 영국 총리 – 아돌프 히틀러 독일 총통 (1938)
1938년 영국의 체임벌린 총리는 독일 뮌헨으로 날아가 독일과의 임박한 전쟁을 막아보기 위한 마지막 유화책을 펼칩니다. 히틀러 총통은 민주적으로 선출된 의회를 해산하고 나치스의 일당 독재를 확립했으며, 당시 이미 군대를 빠른 속도로 키우고 유대인들을 핍박하기 시작했습니다.
뮌헨 회담에서 돌아온 체임벌린 총리는 체코슬로바키아를 침략하지 않겠다는 히틀러의 약속을 철석같이 믿었고, 런던에 내리자마자 히틀러가 서명한 협정문을 흔들어 보인 일화는 유명합니다. 1938년 《이코노미스트》의 기사는 훨씬 더 조심스럽습니다.
안심할 수 있는 부분, 희망적인 내용이 거의 없다. 여전히 유럽이 위기에 빠지리라는 전망이 훨씬 우세하고, (이번 회담으로) 숨을 돌릴 수 있게 됐다고 해봤자 그 시간은 길어야 2년, 짧으면 6개월도 채 되지 않을 것이다. 우리의 운명이 여전히 독재자의 손에 달렸다는 점은 변함이 없다. 낙관적인 구석도, 믿을 만한 약속도 전혀 없다.
이듬해인 1939년, 우리 모두 알다시피 독일의 폴란드 침공과 함께 세계 2차대전이 발발합니다.
2. 얄타 회담
- 윈스턴 처칠 영국 총리와 프랭클린 루즈벨트 미국 대통령 – 이오시프 스탈린 소련 공산당 서기장 (1945)
크리미아반도 얄타에서 2차 세계대전 종전 이후 세계질서를 새로 그리는 회담이 열립니다. 승전국 가운데 강대국인 미국, 소련, 영국의 지도자들이 머리를 맞댄 회담이었죠. 회담 이후 《이코노미스트》 기사는 대체로 희망 섞인 전망을 내놓았습니다.
강대국들이 우호를 돈독히 쌓고, 작은 나라들이 이러한 강대국들에 의한 평화에 크게 반발하지 않는 한, 또다시 분쟁이 발생할 가능성은 상당히 작아질 것이다. 이는 국제 관계에서 강대국이 좌지우지하는 헤게모니의 속성이기도 하다.
하지만 얄타 회담이 끝난 뒤 이어진 냉전 시기 여전히 제국주의 세력의 식민 지배를 받거나 그 여파로 고통받은 사람들, 혹은 소련의 위성국가로 전락해 자유를 억압받는 사람들이 수십억 명을 헤아렸습니다.
3. 빈 회담
- 니키타 후르쇼프 소련 공산당 서기장 – 존 F. 케네디 미국 대통령 (1961)
스탈린의 뒤를 이어 소련 최고지도자가 된 후르쇼프 공산당 서기장은 집권 9년 차에 오스트리아 빈에서 이제 막 대통령에 뽑힌 케네디 대통령을 만납니다. 소련과 미국이 풀어야 할 문제는 한둘이 아니었습니다. 미국은 쿠바에서 일어난 민중 혁명을 진압하고자 쿠바를 침공했다가 패퇴했고, 소련은 혁명으로 수립한 카스트로 정부와 동맹 관계를 맺고 있었습니다.
두 나라는 라오스에서도 사실상의 대리전을 치르고 있었습니다. 당시 《이코노미스트》 기사를 보면 무엇보다 미소 정상의 만남이 높아진 긴장을 완화하는 데 도움 될 것으로 전망한 논조가 눈에 띕니다.
언제 깨질지 모른다고 하지만 어쨌든 양국(미국과 소련)의 신뢰와 균형이 지금처럼 유지되는 한 어느 쪽도 먼저 나서 상대방의 인내심을 시험하는 도발적인 행위를 섣불리 하지는 못할 것이다.
하지만 언제 깨질지 모르던 균형은 실제로 겨우 1년 정도 유지됐습니다. 후르쇼프는 1962년 미국의 바로 앞마당이나 다름없는 쿠바에 핵무기를 배치했고, 이른바 쿠바 미사일 위기가 발발, 핵전쟁 위기가 고조됩니다.
4. 베이징 미중 정상회담
- 마오쩌둥 중국 주석 – 리처드 닉슨 미국 대통령 (1972)
1949년 중국의 국공 내전이 끝날 때 공산당 세력이 국민당 세력을 대만 섬에서 완전히 몰아내지 못하도록 지켜준 것은 미국 군함이었습니다. 이어 20여 년간 미국과 중국은 직접 전투를 벌이거나 대립하지는 않았지만, 소원한 관계를 이어갔죠.
하지만 현실정치(realpolitik)를 기반으로 한 닉슨 대통령은 이른바 중소분쟁을 기회로 삼아 공산 진영을 분열하는 데 집중한 외교정책을 폅니다. 닉슨 대통령은 1972년 중국을 전격 방문했고, 7년 뒤 미국과 중국은 상대방을 인정하고 수교를 맺습니다. 닉슨 대통령이 중국을 방문했을 당시 《이코노미스트》 기사의 논조는 희망과 우려가 섞여 있습니다.
닉슨 대통령에겐 얻은 것보다 내준 게 더 많은 회담이다. 다만 이번 회담은 (성사 자체에 상당한 의미가 있기에) 어느 한쪽이 일방적으로 승리하거나 패배했다고 단정 짓기 어려운 회담이다.
5. 레이캬비크 정상회담
- 로널드 레이건 미국 대통령 – 미하일 고르바초프 소련 공산당 서기장 (1986)
레이건 대통령은 집권 1기인 1983년 소련을 ‘악의 제국’으로 지목하는 등 미국의 우월한 국력을 바탕으로 강경 노선을 택해 냉전을 끝내는 전략을 택했습니다. 하지만 1985년 새로 공산당 서기장에 취임한 고르바초프는 기존 소련 정치인들과는 달랐고, 1986년 양 정상이 아이슬란드 레이캬비크에서 만나 군축 문제를 논의합니다.
군축 문제 말고도 여러 의제가 테이블에 올랐는데, 레이건 대통령은 인권 문제를 앞세워 고르바초프 서기장을 집요하게 압박했고, 고르바초프 서기장도 미국이 먼저 미사일방어 체계를 섣불리 확대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해야 한다고 맞섰습니다. 미소 정상은 레이캬비크에서 핵무기를 거의 모두 동시에 폐기하기로 약속하는 등 회담만 놓고 보면 큰 성공을 거둔 것처럼 보였지만, 회담에서 약속한 내용이 실제로 행동으로 옮겨지지 않으며 결과적으로 레이캬비크 회담은 실패한 회담으로 기억됩니다.
당시 《이코노미스트》는 회담의 성과가 나지 않는 상황을 일시적인 문제로 진단하면서도 고르바초프가 서유럽과 미국을 이간질하려는 고도의 전략을 펴고 있을 수도 있다는 우려를 동시에 덧붙였습니다. 회담은 이듬해인 1987년 미국과 소련이 새로운 군축에 합의하면서 계속 모멘텀을 이어갑니다. 냉전 이후 처음으로 핵무기가 줄어든 건 부인할 수 없는 성과였습니다.
6. 남북 정상회담
- 북한 김정일 국방위원장 – 남한 김대중 대통령 (2000)
반세기 넘게 분단국가로 지내온 남북한의 지도자는 2000년 6월 처음으로 두 손을 맞잡았습니다.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아버지인 고(故) 김정일 위원장은 분단 이후 처음으로 북한을 방문한 남한의 고(故) 김대중 대통령을 평양 순안공항까지 나와 직접 반갑게 맞이했습니다.
사흘간 이어진 회담은 방북 일행을 환영하는 60만 인파의 열광적인 환호성 속에 시작부터 순조로웠습니다. 6.15 공동선언 이후 한반도는 빠르게 긴장이 완화됐습니다. 당시 《이코노미스트》는 남북한의 화해 분위기를 반기면서도 경고를 잊지 않았습니다.
이번 남북 정상회담을 통해 한국인들은 남과 북이 과거 동서독보다 분단된 정도가 훨씬 더 크다는 점을 실감했을 것이다. 한국은 독일이 통일하는 과정에서 치렀던 비용보다 재정적으로나 정서적으로나 훨씬 더 큰 비용을 치러야 할지도 모른다.
7. 북미 정상회담
- 북한 김정은 국무위원장 –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2018)
기존 외교 관례에 전혀 얽매이지 않는 트럼프 대통령의 독특한 스타일은 김정은 위원장과 회담을 논의하는 단계에서부터 곳곳에서 영향력을 미쳤습니다. 불과 열 달 전만 해도 “화염과 분노”를 언급하며 북한을 초토화하겠다고 위협하던 트럼프 대통령은 이제 그를 향해 “늙다리 미치광이”라며 독설을 서슴지 않던 독재자와도 얼마든지 평화를 논의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양국은 보통 수교를 맺은 국가들끼리 하는 정상회담 전에 일어나는 실무 회담을 최소화했으며, 대신 양 정상이 통역만 대동한 채 직접 담판을 짓는 식으로 큰 그림을 그립니다(관련 《이코노미스트》 6/7 기사).
12일 회담 이후 트럼프 대통령은 김정은 위원장과의 회담을 성공적이었다고 평가했습니다. “환상적인 만남이었으며, 수많은 분야에서 진전이 있었다”라고 말했죠. 트럼프 대통령의 예의 화법을 동원해 언론에 회담의 성과를 늘어놓았습니다. 다만 정상회담 합의문의 내용은 트럼프 대통령이 크게 만족한다고 했던 것을 고려하면 상징적인 부분이 많고 구체적인 부분은 부족해 보입니다.
트럼프 대통령은 북한을 위협하지 않겠다는 신호로 한미 연합훈련을 잠정 중단하겠다고 밝혔습니다. 북한으로서는 미국과 대등한 위치에서 회담하고 협상했다는 것만으로도 정상국가로 발돋움하는 중요한 첫걸음이자 대내 선전용으로도 얻을 게 많은 회담이었습니다. 《이코노미스트》는 “정상회담에서 오간 말들을 실제 이행할 수 있는 행동으로 바꾸는 작업이 절대 쉽지 않을 것”이라며, “회담이 일어나기 전인 몇 주 전과 지금을 비교해보면 트럼프 대통령이 북한을 움직일 수 있는 카드를 몇 개 잃어버렸다”고 평가했습니다.
원문: 뉴스페퍼민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