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쿠류(伏龍)는 일본의 이른바 본토결전을 위한 장비였다. 발안 자체는 1944년경에 이미 나왔지만 실제로 미군의 본토 상륙거부를 위한 장비로서 대량 생산에 대한 검토가 들어간 것은 1945년 2월경이 되어서였다.
밀폐식 잠수복은 2개의 3.5리터 용량의 압축 산소통, 잠수함에서 사용되는 것과 같은 화학식 공기정화 장치, 그리고 고무튜브를 통해서 공급되는 유동식 식량 등을 장비하고 있었다. 유효 잠수 심도는 15m였으며, 15m 깊이에서 다시 수면으로 올라올 때는 잠수병을 방지하기 위하여 10미터 깊이에서 2분간 머무른 후 올라와야 했다. 보고에 따르면 비교적 짧은 훈련기간 이후에 사용자들은 자신이 원하는 심도를 자유롭게 조절할 수 있었으며, 해저에서 시간당 2,000미터를 이동할 수 있었다.
개발팀에 참여했던 사사노 대위의 증언에 따르면, 그는 7월 중순에 3~8m 깊이의 물속에서 8시간 25분을 머물러 있었으며, 그 시간 동안 계속해서 해저를 걸어서 이동했음에도 불구하고 부상후 극심한 피로를 제외하고는 별다른 신체의 이상 징후는 없었다고 한다. 후쿠류(伏龍)는 지속적인 개량을 통하여 수중 최고 35m 깊이에서 15시간을 견딜 수 있도록 공기정화 장치의 대형화 등을 실시할 계획도 있었다.
후쿠류(伏龍)의 주무장은 긴 장대 끝에 접촉식 신관을 장비한 기뢰를 매단 것으로 5식격뢰(五式撃雷)라는 명칭이 부여되었다. 공격방법은 자신의 위를 지나가는 선박을 향하여 기뢰를 충돌시키는 것으로 당연히 공격을 실시한 대원도 폭발력에 의해 사망한다. 전체 길이가 3.3m 정도인 이러한 무장이 쓰인 이유는 사용하기 간단하면서도, 자살 특공대원들이 공중 정찰에 발견되지 않을 정도의 심도에 머무를 수 있게 하기 위해서였다.
계산에 따르면 20kg의 TNT를 기뢰에 장착할 경우 40m 이상 떨어진 다른 대원들은 안전하다고 생각되었으나, 이중저를 가진 함선에 대한 폭파 시험에서 10kg의 TNT로도 충분한 효과를 낼 수 있다고 판단되자 5식격뢰의 작약량은 10kg으로 결정되었다.
그런데 실제로 일본이 계획한 후쿠류(伏龍) 대원들의 간격은 60m였다. 이에 대하여 전후 미군 조사관들은
“어차피 특공을 통해 인명을 희생시키기로 했다면, 안전 간격에 이토록 신경을 쓰는 이유는 무엇인가? 자살 공격으로 인한 폭발로 한 명을 희생시킬 수 있다면 왜 두 명은 안되는가?”
이러한 질문을 하였는데 이에 대한 일본군 관계자의 답변은 다음과 같았다.
“그것은 대원들의 사기문제 때문이었다. 자신의 공격으로 목숨을 잃을 각오가 돼 있는 대원도 다른 대원의 공격으로 인한 부산물로서 죽기를 원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후쿠류(伏龍)를 장비한 부대는 45년 9월 30일까지 6,000명 수준을 계획하고 있었으며, 이들 전원이 10월 15일 까지는 완전한 전투태세를 갖출 계획이었다. 부대의 편제는 다음과 같다.
– 6명 : 1개 분대
– 5개 분대 : 1개 소대
– 5개 소대 + 1개 정비 소대 : 1개 중대
– 3개 중대 : 1개 대대
후쿠류(伏龍)를 이용한 일본의 방어계획(특히 도쿄만 중심)은 다음과 같았다. 수심 10~15m의 바다에는 계류식 기뢰를 설치하고, 그 후방 심도 4~6m 지점에 후쿠류(伏龍) 대원들을 3열로 배치하는 것이었다. 위에서 밝혔듯이 안전거리를 60m로 설정하였기 때문에 미 상륙군은 3열의 후쿠류(伏龍) 방어선을 통과할 경우 20m 간격으로 배치된 후쿠류(伏龍)의 공격을 받게 될 예정이었다.
그러나 만약 공중 정찰로 발견된다면 후쿠류(伏龍)의 방어선은 항공기의 소형 폭탄이나 예비 포격으로 손쉽게 제거될 수 있었다. 따라서 후쿠류(伏龍) 부대원들은 동트기 전 새벽에 입수하여 해저를 도보로 이동 후 만약 살아남아 있다면, 일몰 후에 다시 해저에서 보로 전장을 이탈하여 바다에서 나오도록 계획되었다.
후쿠류(伏龍) 대원들의 수중에서의 의사소통은 2~5m 거리에서는 호흡장비를 확성기처럼 이용하여 가능했으며, 그 이상의 거리는 두 개의 금속을 부딪쳐서 신호를 보내는 방식이었는데 이는 최대 300m 까지 유효했다. 모든 대원들은 손전등과 손목에 차는 나침반이 지급되었으며, 소대장에게는 특수 잠망경도 지급되었다.
후쿠류(伏龍)의 활용을 극대화하기 위해서 콘크리트로 만든 수중참호, 해저 출입구 등도 기획되었으나, 이러한 설비 중 재미있는 것은 상선을 방어하는 항만의 주요 길목의 해저에 착저시킨 후 후쿠류(伏龍) 대원들의 생활이 가능한 공간 및 어뢰 발사기 등을 장비하는 아이디어였다.
전후 미 해군은 도쿄만 해저에 대하여 실제로 이러한 시설들이 있는지 조사하였는데 몇 군데서 의심되는 징후를 파악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심도가 너무 깊어서 잠수 작업에는 위험이 뒤따르기 때문에 가장 강력한 폭뢰로 철저히 폭격하는 것을 권고하는 정도로 그치고 말았다.
미 해군의 기술 보고서는 해저에서 장시간 체류가 가능한 이 장비에 대한 호기심을 보이고 있으며, 차후의 상륙 작전에는 유사한 위협도 고려해야 한다는 것으로 마무리를 짓고 있다.
그러나 당시 일본인들의 후쿠류(伏龍)에 대한 생각은 다소 다르다. 일본의 실제 작전 참가자들은 시계가 나쁜 수중에서 바로 몇 미터 옆을 지나가는 상륙정조차 공격할 수 없고, 바로 위를 지나가는 함정만을 공격할 수 있는데다가, 상륙 개시전의 예비 포격 및 항공기에 의한 소형 폭탄으로 손쉽게 제거가 가능한 후쿠류(伏龍)에 대하여 전형적인 탁상공론의 결과물로 생각했다고 한다. 그래서 조사를 받은 일부 일본인들은 “원자폭탄을 만든 나라가 왜 이런 것에 관심을 가지는가?”라며 의아해했다.
실제로 후쿠류(伏龍) 대원들의 상당 수는 십대 후반의 예과련(予科練) 출신이 대부분 이었으며, 훈련 중 사망자도 속출하였다고 하나 그 수는 정확히 파악되지 않는다. 꽃다운 나이에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죽음을 맞이한 후쿠류(伏龍) 대원들을에게 측은한 마음이 들 뿐이다.
※ 참고자료 : The Fukuryu Special harbor defence and Underwater attack unit Tokyo bay, September 1945 / ※ 원문 : http://note100.egloos.com/48455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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