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글은 영화 〈버닝〉의 스포일러를 포함합니다. 내용 누설을 원하지 않으면 이 글을 닫아 주세요.
서사를 감싸는 무드
개인적으로 지금까지 이창동 감독의 영화를 좋아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소설가 출신의 감독이라 그런지 영화적 이미지가 문자에 끌려다닌다는 느낌을 받았기 때문이다. 한국 영화의 뿌리라 할 수 있는 유사 리얼리즘적 문예 영화의 업그레이드판이 왠지 이창동의 영화 같았다. 〈초록물고기〉 〈박하사탕〉 〈오아시스〉에서 영화가 소설과 어떻게 다른지 나는 알 수가 없었다.
수작 〈밀양〉 역시 ‘살인자가 하나님께 회개해 버린다면 피해자는 도대체 누구에게 죄를 물을 것인가?’라는 문자적 설정에 귀속되는 것을 완전히 벗어나지는 못했던 것 같다. 그는 〈밀양〉에서 지방 도시의 끈적하고 차가운 느낌을 제대로 그려내지만 〈파주〉나 〈곡성〉에 비할 바는 아니다. 그의 영화에서 결국 불만스러운 부분은 ‘영상 언어를 통해 어떻게 서사를 감싸는 무드를 만들어 나갈 것인가’였다.
영화 〈버닝〉은 그런 측면에서 한 걸음 나아간 느낌을 받았다. 왠지 감독이 그런 비판을 의식하고 있는 것처럼 말이다. 종수(유아인 분)의 집에 반복적으로 울리는 목소리 없는 전화, 북한의 확성기 소리, 집안 주변의 풍경을 그리는 마치 해진 후의 어스름한 화면 톤은 갑자기 사라져 버린 해미(전종수 분)와 관련된 모호한 미스터리와 어우러져 묘한 분위기를 만들어 내는 데 성공한다.
그런 진일보는 사소하지만 초반 씬들에서부터 느낄 수 있었다. 해미와 종수가 처음 만나 뒷골목에서 담배를 피우며 이야기를 나누는 장면, 카메라는 티 나지 않게 조금씩 측면에서 움직여 어느 순간 두 사람을 잡는 정면으로 옮겨져 있었다. 대단한 장면은 아니었지만 긴 이야기를 나누지 않고도 충분히 두 사람이 경계심을 풀고 가까워졌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이런 장면들이야말로 말에 의존하지 않는 영화적 표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야기는 이렇게 두 청년의 만남으로 시작한다.
두 개의 여행
종수와 해미는 오래전 학교 동창이었고 우연히 다시 만난다. 종수는 작가를 지망하지만 알바를 전전하고 있고 해미 역시 나래이터 모델 알바를 하고 있다. 둘은 술을 마시며 자신들의 이야기를 하며 친해진다. 어느 날 그녀는 종수에게 자신이 아프리카 여행을 다녀올 것이라며, 자신의 방에 있으나 경계심이 강해 눈에 보이지 않는 고양이의 밥을 부탁한다. 그리고 두 사람은 하룻밤을 보낸다. 얼마 후 해미는 부유층인 벤(스티븐 연)과 함께 한국으로 돌아오고 종수는 벤과 자리한다.
이 영화에서 탁월하게 묘사하는 부분은 바로 지금 한국사회의 계급 감각에 대한 이야기다. 벤의 친구들과 해미, 종수가 같이 만났을 때 클럽 씬이 그것이다. 그들의 대화 장면에는 두 가지 여행이 드러난다. 우선 해미는 자신이 겪은 아프리카 여행을 벤의 친구들에게 묘사한다. 그런데 그곳에는 아프리카 부족들이 보여주는 의식들을 한껏 몰입하며 재현하는 해미를 구경하는 벤의 친구들이 있다.
여행자의 입맛에 맞게 가공된 그 부족의 의식에 의심 없이 몰입하는 해미의 모습을 구경하는 조소 어린 눈빛이야말로 벤과 친구들이 가난을 여행하는 모습이다. 계급 간의 분리가 공고해지고 격차가 커지면서 가난은 마치 남한 속의 아프리카 같은 것이 되어 버린 것이다. 벤은 권태를 피하려 해미와 다른 여자들을 여행하고 있을 뿐이다. 해미와 종수에게 대마를 통한 새로운 감각을 계몽하기까지 한다. 대마는 언젠가는 피할 수 없을 한국 사회의 미래로, 상징적으로 더 자유롭고 정치적으로 올바를 것이기도 하다.
청년이 없는 청년영화
그런데 결국 이 영화가 공허했던 것은 종수나 해미라는 가난한 청년 세대에 대한 존재론이 없었기 때문이다. 해미는 지금의 이 세계를 떠나고 싶어 하는 자유의지를 가지고 있는 인물로 그려지고 몇몇 장면에서 에너지를 뿜어낸다. 하지만 기본적으로는 갑자기 사라진 존재로서 극의 맥거핀의 역할을 하고 있다. 종수의 경우 아프리카 여행을 떠난 해미의 방에서 자위하듯, 벤과 같이 하는 해미에게 자신의 감정을 말하기를 포기해 버리는 모습에서도 드러나는 것처럼 그저 자위하고 지켜보는 존재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다 해미가 사라지고 벤에게 홀린 듯 빠져들어 간다. 뻔히 보이는 미행을 하고 벤이 불 질렀을 수도 있는 비닐하우스를 찾아다닌다. 이 홀림이야말로 이 영화의 가장 탁월한 부분이지만 종수라는 인물 자체엔 심지가 없다. 감독의 머리 속에 제대로 납득이 되는 인물이 오직 벤일 뿐이기 때문이다. 벤의 자유로움과 권태, 인간에 대한 조소가 감독에게 충분히 설득력 있게 다가오기 때문에 나머지 인물들은 그저 그에 반응하는 존재로 전락해버린 것이다.
감독이 던진 여러 모호한 메타포들은 극의 무드들과는 친화성이 있었지만, 사실상 주요 인물의 비어 있음을 감추는 작용을 할 뿐이다. 삶의 의미를 구하는 자의 배고픔, 그레이트 헝거는 사실상 어떤 영화의 상징으로도 쓰일 수 있는 것처럼 말이다. 영화는 벤의 행동을 비판적인 관점으로 보려 하지만 이런 맥락에서 보면 감독의 시선은 벤과 겹쳐버린다. 종수가 극을 이끌어 가지만 그 모습은 마치 벤에 의해 관찰되는 것만 같다.
종수가 벤에게 빠져들어 집착하는 과정은 충분히 영화적으로 긴장감 넘쳤지만 너무 명확한 결론, 종수가 벤을 죽이는 것은 그 모호한 분위기를 견딜만한 인물이 하나뿐이었기 때문이다. 벤은 거의 해미를 죽인 것이고 (해미의 고양이를 확인한) 종수는 그것을 알고 벤을 죽인다.
이렇게 되어 버리면 그 긴장감 넘치는 스릴러적 경기도 북부와 홀린 청년이 우리에게 해석될 여지는 철저하게 제한되어 버린다. 적어도 이 결론만 바꾸었더라도, 범인을 명확히 보여주는 그 부분만 차단했더라도 이 영화는 좀 더 많은 것을 담은 것처럼 보일 수도 있었을 것이다. 어쩌면 그래서 그 모호한 결론이 더 나빴을 수도 있지만 말이다.
결국 이 영화가 탁월하게 그리는 것은 계급이고 빠진 것은 청년들의 존재론이다. 좀 더 멀리서 바라보면 계급론에 익숙한 것은 이전 세대의 그것이다. 사실상 벤은 청년이 아니라도 별 상관이 없어 보인다. 그의 교포식 어법은 꽤 설득력이 있지만 그의 자리에 익숙한 중년의 인물을 넣어도 별다른 결론이 날 것 같지는 않다. 그렇다면 이 영화에서 생체적으로 젊은 세 인물은 그저 새롭게 보이기 위한 포석에 지나지 않는다.
그럴 바에는 스필버그의 〈레디 플레이어 원〉처럼 자신이 모르는 것을 아는 것으로 하는 것보다는 자신의 방식대로 돌파했어야 했다. 이를테면 명확하게 벤의 시점에서 이야기를 끌고 갈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감독은 그가 서 있는 자리를 인정하고 싶지는 않았던 것 같다. 혹은 영화 속 판토마임에 대한 메타포처럼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그 자리에 없다는 것을 잊어버리고 있는 것일 수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