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The New York Times의 「How Genetics Is Changing Our Understanding of ‘Race’」를 번역한 글입니다.
1942년, 인류학자 애슐리 몬터규는 『인류의 가장 위험한 신화: 인종 개념의 오류』에서 인종이 유전적 근거가 없는 사회적 개념이라고 주장했습니다. 그는 그 근거로 ‘흑인’의 정의가 지역에 따라 다르다는 사실을 이야기합니다.
미국에서는 역사적으로 자신의 조상 중 한 명이라도 아프리카 사하라사막 이남에서 온 이가 있을 경우 ‘흑인’이라고 불렸습니다. 반면 브라질에서는 조상 중에 한 명이라도 유럽인이 있을 경우 ‘흑인’이 아닌 것으로 받아들여졌습니다. ‘흑인’이 상황에 따라 달라진다면 어떻게 흑인을 정의하는 유전적 근거가 있을 수 있을까요?
1972년, 유전학 연구는 이런 주장에 힘을 실어주기 시작했습니다. 그 해, 유전학자 리처드 르원틴은 혈액의 단백질 변이를 분석한 연구 결과를 발표했습니다. 그는 인류를 서구 유라시아인, 아프리카인, 동아시아인, 남아시아인, 아메리카 원주민, 오세아니아인, 호주인의 일곱 ‘인종’으로 구분했고, 단백질 변이의 85%는 집단 내의 변이였으며 ‘인종’ 간 변이는 15%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그는 사람들 사이의 차이 중 대부분은 ‘개인의 차이’라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인류 집단 사이에는 ‘생물학적 인종’ 개념을 지지하는 충분한 차이가 없다는 합의가 이런 식으로 만들어졌습니다. 또한 인종은 시대와 국가별로 달라지는 ‘사회적으로 구성된’ 개념이라는 주장이 힘을 얻었습니다.
인종은 사회적으로 구성되는 것이 사실입니다. 또한 르원틴이 쓴 것처럼 인류가 유전자의 관점에서 ‘놀라울 정도로 서로 비슷’한 것도 사실입니다. 하지만 이런 합의는 점점 질문을 허용하지 않는 일종의 종교로 변해갔습니다. 이를 믿는 이들은 오늘날 다른 인종으로 분류되는 사람들 사이의 평균적인 유전자 차이는 너무나 미미해서 생물학적으로 거의 의미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이들은 집단 간의 유전자 차이에 관한 어떤 연구도 부정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연구는 아무리 좋은 의도를 가지고 시작했다 하더라도 생물학적 차이를 지지하는 유사과학적 주장의 근거로 쉽게 쓰일 수 있으며, 바로 그런 생물학적 차이에 대한 주장이 과거 노예제도를 정당화했고, 우생학을 발전시켰으며, 나치의 유대인 학살로 이어졌기 때문입니다.
나 또한 유전학의 발견이 인종주의를 정당화하는 방식으로 오용될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유전학자로써 나는 ‘인종’ 간의 평균적인 유전적 차이를 더 이상 무시할 수 없다는 사실 또한 압니다.
과학적 진보 앞, 선한 이들의 버틸 수 없는 고지
지난 20년 동안 유전자 분석 기술은 놀라울 정도로 발전했습니다. 이제 우리는 한 개인의 조상을 ‘500년 전(곧 7만 년 전 분리된 서부 아프리카인과 유럽인의 유전자 풀이 다시 아메리카 대륙에서 섞이기 전)의 서부 아프리카에 살았던 조상을 가졌다’는 정도의 놀라운 정확도로 측정할 수 있습니다. 이런 기술을 이용해 우리는 인종 개념이 한편으로는 사회적으로 구성되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더라도, 다른 한편으로 오늘날 인종 간에 발견되는 차이가 이들이 가진 유전자에 어느 정도 기인한다는 사실을 밝힐 수 있습니다.
최근 유전학 연구는 유전자가 피부색 같은 인종 간의 단순한 특성을 설명하는 것을 넘어 신체의 구조와 크기, 그리고 질병에 대한 민감성까지도 설명합니다. 예를 들어 우리는 이제 왜 북유럽인들이 남유럽인보다 키가 평균적으로 더 큰지, 왜 유럽계 미국인이 아프리카계 미국인보다 다발성 경화증이 더 많이 걸리는지, 반면 말기 신장 질환은 왜 아프리카계 미국인이 더 많이 걸리는지 유전적 요소를 이용해 설명할 수 있습니다.
내가 우려하는 것은 집단 사이에 근본적인 생물학적 차이가 있을 가능성을 거부하는 선한 이들이 과학적 진보 앞에서 더 이상 버틸 수 없는 고지를 고수하다 자신의 무덤을 스스로 파게 될까 하는 것입니다. 나는 또한, 어떤 발견이 이루어지든(앞으로 어떤 사실이 발견될지는 누구도 알 수 없습니다) 그 발견을 인종주의자들이 자신들의 편견을 강화하는 ‘과학적 근거’로 사용할 때, 이 선한 이들이 과학을 이해하지 못하고 그들의 주장에 반박하지 못하게 될까 하는 것이 두렵습니다.
바로 이런 사실 때문에, 우리는 모래 속에 머리를 파묻고 준비되지 않은 상태로 당하기보다 인종 간의 가능한 차이를 건전하고 과학적인 태도로 이야기할 방법을 그 어느 때보다도 긴급하게 찾아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유전학 연구가 집단 간의 평균적인 생물학적 차이를 어떻게 연구하는지 이야기하기 위해 내가 수행한 연구를 설명해 보겠습니다.
2003년경, 지난 수백 년 동안 서로 뒤섞인 미국의 집단이 전립선암의 위험 인자를 찾는 데 도움이 될지 알아보려 했습니다. 당시 미국에서 스스로를 아프리카계 미국인으로 생각하는 이들은 스스로를 유럽계 미국인으로 생각하는 이들보다 전립선암이 걸릴 확률이 1.7배 높았습니다. 이런 차이는 식생활이나 환경의 차이만으로는 설명이 불가능했고, 유전적인 원인이 있을 가능성이 높았습니다.
연구 결과 자신을 아프리카계 미국인이라 말한 이들의 유전적 조상은 평균적으로 약 80%가 16–19세기 노예가 되어 미국으로 건너온 아프리카인이었습니다. 나와 내 동료들은 전립선암을 가진 1,597명의 아프리카계 미국인을 조사해 서부 아프리카인의 유전자 비율이 높은 유전자 위치를 조사했고, 2006년 마침내 우리는 우리가 찾던 유전자를 찾았습니다. 바로 평균에 비해 아프리카 조상에게서 온 유전자의 비율이 2.8% 높은 유전자 위치였습니다.
연구를 더 진행함으로써 우리는 그 위치에 전립선암의 확률을 높이는 독립적인 위험 인자가 적어도 7개 이상 있음을 발견했습니다. 이는 모두 서부 아프리카인에게 흔히 발견되는 유전자입니다. 우리의 연구는 왜 아프리카계 미국인이 유럽계 미국인보다 전립선암의 비율이 높은지 충분히 설명했습니다. 우리는 아프리카계 미국인 중에도 이 위치의 유전자는 유럽계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이들은 전립선암의 확률이 다른 유럽인들과 같다는 사실 또한 발견했습니다.
이 연구는 사회적으로 구성된 ‘아프리카계 미국인’과 ‘유럽계 미국인’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유전자 일부를 ‘서부 아프리카인의’ ‘유럽인의’ 것이라 부를까요? 물론이죠. 그럼 이 연구는 집단별로 질병의 비율을 다르게 만드는 위험인자를 찾았고 이 사실이 인명을 살리고 사람들을 더 건강하게 만드는 데 도움이 될까요? 역시 당연합니다.
대다수가 질병의 가능성을 높이는 유전자를 찾는 문제에는 동의하겠지만, 보통은 거기까지입니다. 그들은 질병에 미치는 유전자의 영향을 찾는 것과 어떤 유전자가 행동과 인지능력에 영향을 미치는가를 별개의 문제라 주장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이를 원하든 원하지 않든, 이미 그 경계를 무너뜨린 다양한 연구 결과가 있습니다.
최근 경제학자 다니엘 벤자민은 대부분이 유럽계 조상을 가진 40만 명 이상을 대상으로 그들의 교육 기간을 조사했습니다. 이들의 사회경제적 배경을 통제한 뒤, 그와 그의 동료들은 더 오랜 교육을 받은 이들에게 명백하게 더 흔하게 나타나는, 신경계 발달에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74개의 유전자 변이를 발견했습니다.
이 유전자 변이들이 어떻게 작동하는지는 아직 분명하게 알지 못합니다. 유전학자 오거스틴 콩은 아이슬란드인을 대상으로 한 후속 연구에서 이런 유전자 변이가 또한 이들이 아이를 더 늦게 가지게 만든다는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어쩌면 이 변이들은 지능이 아니라, 단지 학교를 오래 다니게 하는 어떤 행동과 관련이 있을지 모릅니다.
다른 연구도 있습니다. 유전학자 다니엘 포스투마는 7만 명 이상을 대상으로 한 연구에서 지능 검사 성적을 예측할 수 있는 20개 이상의 유전자 변이를 발견했습니다. 지능 검사와 학습 기간이 그 사람의 양육에 영향을 받을까요? 물론입니다. 하지만 그런 검사 결과나 시간이 또한 그 사람의 행동이나 인지능력의 어떤 측면과 관계된 무언가를 측정하지 않을까요? 그럴 가능성이 매우 높죠.
모든 유전자 변이의 정도는 집단에 따라 다르기 때문에, 즉 서로 다른 집단이 동일한 유전자 변이를 가질 가능성은 거의 없기 때문에 행동과 인지능력에 영향을 주는 유전자의 효과 또한 집단에 따라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어쩌면 당신은 인류가 공통의 조상에서 갈라진 것은 너무 최근이라 자연선택이 본질적인 차이를 만들 시간이 없었고, 따라서 집단 간의 생물학적 차이는 매우 작다는 이야기를 듣게 될지 모릅니다.
하지만 이 주장은 사실이 아닙니다. 동아시아인, 유럽인, 서아프리카인, 호주인은 최근 다시 교류가 이루어지기 전까지 거의 4만 년 이상을 분리되어 있었고 이는 진화가 일어나기에 충분한 시간입니다. 실제로 오거스틴 콩의 아이슬란드 연구는 지난 100년 사이에 학습 기간을 예측하게 만드는 유전자 변이에 대한 유의미한 자연선택이 있었음을 보였습니다.
우리가 침묵한 자리를 어떤 주장이 채우는가
유전학자와 인류학자가 인간 집단의 차이에 대한 낡은 합의만을 반복하는 것이 왜 위험한 일인지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침묵하는 동안 그 빈자리를 어떤 종류의 주장들이 채우는지 살펴보는 것으로 충분할 것입니다.
뉴욕타임스에서 과학 기자로 오래 일했던 니콜라스 웨이드는 2014년 출간한 『불편한 유산: 유전자, 인종, 인간의 역사(A Troublesome Inheritance: Genes, Races and Human History)』에서 최근의 연구 결과가 인간 집단 간의 차이에 대한 우리의 생각을 바꾼다고 정확히 썼습니다. 하지만 그는 여기에서 더 나아가 최근 연구가 기존의 스테레오타입을 유전자를 통해 설명한다는, 근거가 불확실하고 무책임한 주장을 펼쳤습니다.
예를 들어 웨이드는 사하라 사막 이남의 아프리카인은 지난 수천 년간 유라시아인이 겪은 고된 노동에 의한 자연선택을 겪지 않았기 때문에 열심히 일하지 않는 경향이 있다는 인류학자 헨리 하펜딩의 주장을 소개했습니다. 그러나 이 주장에는 어떤 과학적 근거도 없습니다. 나를 포함한 139명의 유전학자는 웨이드의 책에 나타난 인종주의적 스테레오타입에 어떤 유전학적 근거도 없음을 지적하는 항의 서한을 뉴욕타임스에 보내기도 했습니다.
또 다른 잘 알려진 예는 1953년 DNA를 공동 발견한 제임스 왓슨입니다. 그는 2007년, 아프리카인이 유럽인에 비해 낮은 지능을 가지게 만드는 유전적 요인이 있음을 암시하는 연구가 있다는 어떤 과학적 근거도 없는 주장을 인터뷰에서 이야기함으로써 콜드 스프링 하버 연구소 소장직에서 강제로 물러난 적이 있습니다. 몇 년 뒤, 왓슨은 나와 내 동료 유전학자 베스 샤피로에게 물은 적이 있습니다.
당신 유대인들은 유대인이 왜 그렇게 다른 사람들보다 영리한지 언제쯤 밝힐 셈이오?
그는 유대인들이 수천 년 동안 학자로 길러지는 자연선택을 겪었기 때문에 여러 분야에서 성공을 거둘 유전적 장점이 있을 것이며, 동아시아 학생들은 고대 중국 사회에서 권력에 복종하는 자연선택을 겪었기 때문에 그렇게 말을 잘 듣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최근 그와 만났을 때, 왓슨은 자신이 그런 말을 했다는 사실을 부정했으며 지금 그런 입장도 아니라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샤피로는 자신도 같은 기억이 있다고 확인해 주었습니다.)
왓슨과 웨이드의 주장이 효과를 발휘하는 이유는 학계가 인구 집단 간의 평균적인 유전적 차이를 비정상적으로 무시한다는 그들의 판단이 사실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이런 진실에서 출발해 실제로는 아무런 근거가 없는, 그저 인종주의적 스테레오타입에 맞는 주장을 펼치게 됩니다. 그들은 학계가 혐오 발언이나 낡은 인종주의적 헛소리에 혹시라도 근거를 제공할까 봐 조심하는 그 틈을 이용하는 것입니다.
바로 이런 이유로, 올바른 상식을 가진 과학자들이 이 분야에서 발언해야 합니다. 우리가 집단 간의 유전적 차이에 대한 과학적인 설명을 제공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대중의 신뢰를 잃을 것이며 오늘날 만연해 있는 전문가에 대한 불신을 더욱 키울 것입니다. 이 분야에 대해 논의를 과학자들이 회피함으로써, 이 분야에서 과학적으로 다루어질 어떤 내용보다도 더 사악한 내용의 유사과학이 이 분야를 채웁니다.
오늘날 우리가 믿는 집단 간의 유전적 차이에 대한 사실들은 대부분 사실이 아닙니다. 예를 들어 2016년 우리 실험실은 인간 조상의 유전자를 분석해 사람들이 지금 생각하는 것처럼 ‘백인’이 아주 먼 과거부터 존재했다는 것이 사실이 아니라는 것을 보였습니다. ‘백인’은 10,000년 전 거주하던 네 인구 집단이 섞인 것이며, 이들은 오늘날 유럽인과 동아시아인의 차이만큼 차이가 나는 다른 집단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앞으로 유전학이 인간의 수많은 특징이 유전적 변이에 영향을 받으며, 그 특징은 또한 평균적으로 인구 집단마다 다르다는 사실을 밝힐 때 여기에 어떻게 대처해야 할까요? 적어도 이 사실을 부정하는 것은 비과학적이고 바보 같은 일이며 말도 안 되는 대응일 것입니다.
나는 남성과 여성의 생물학적 차이처럼 대하는 것이 가장 자연스러운 반응일 것이라 생각합니다. 남자와 여자의 차이는 1억 년 이상의 시간 동안 진화와 적응에 의해 만들어졌으며 인구 집단 간의 차이보다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큽니다. 남성과 여성은 염색체 하나를 아예 다른 것으로 가졌을 정도로 큰 유전적 차이가 있습니다.
남자와 여자의 생물학적 차이가 매우 크다는 사실은 누구나 인정할 것입니다. 해부학적 차이 외에도, 남자는 평균적으로 더 덩치가 크고 힘이 셉니다. (사회적 기대나 양육이 미치는 영향의 정도에는 이견이 있지만, 성격과 행동에도 유전자에 의한 평균적인 차이가 있다는 사실 또한 분명합니다.) 우리는 이런 남성과 여성의 생물학적 차이를 어떻게 해결하려 하나요? 그 대답은 명백합니다. 우리는 남성과 여성에 유전적 차이가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만 그런 사실에 무관하게 두 성이 같은 자유와 기회를 가진다는 사실 또한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이런 이상에 현실이 아직 도달하지 못했고, 남성과 여성 사이에 아직 불평등이 존재한다는 사실 또한 명백합니다. 그러나 적어도 그 목표는 분명합니다. 특히, 남성과 여성의 경우에 비해 우리가 각 인구 집단 사이에서 발견하게 될 차이는 그보다 훨씬 덜 뚜렷할 것입니다.
오늘날 인류는 모든 인간에 대해, 그들이 어떤 유전자를 받았건 간에 그들을 동일하게 대해야 하며 또한 같은 권리를 가져야 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입니다. 개인 간에 나타나는 수많은 차이에 비해 집단 간에 나타나는 평균적인 차이는 훨씬 더 적으며 따라서 집단 간의 유전적 차이를 받아들이는 것은 훨씬 덜 어려운 일일 것입니다.
과학이 어떤 사실을 밝혀내든, 그 결과에 편견을 가지지 않고 우리가 이를 성숙하게 대처할 수 있을 것이라는 자신감을 가지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저 인구 집단 간에는 어떤 유전적 차이도 없다는 주장만을 반복하는 것은 인종주의자가 유전학의 주인이 되는, 우리가 가장 피하고 싶은 미래를 만들 것이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