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욕구 및 동기를 설명하는 가장 유명하고 고전적인 이론 가운데 하나가 바로 심리학자 매슬로의 ‘욕구 위계 이론’이다. 해당 이론에 따르면 인간의 욕구는 생리적 욕구, 안전의 욕구, 애정과 소속감의 욕구, 존중의 욕구, 자아실현의 욕구, 크게 다섯 종류로 구분된다(매슬로는 이후 인지적 욕구와 심미적 욕구를 더해 7단계로 자신의 모형을 수정하기도 했다. 그리고 욕구 위계 이론의 한계점을 본 다른 심리학자들에 의해 현재는 욕구 위계 이론에 대한 수정된 모형이나 대안 이론들도 존재한다.
그러나 본 글에서 다루고자 하는 것은 욕구 위계 이론이 타당한가, 에 대한 부분이 아니기 때문에 여기서는 가장 일반적으로 널리 알려진 ‘5단계 모형’을 다룬다).
이 이론에서 상정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보편적이고, 기본적인 형태의 욕구들이다. 어쩌면 그런 이유 때문에 이 이론이 그토록 많은 사람들에게 공감대를 사게 되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실제로 그가 주장한 욕구의 종류들과 우선순위들을 보면 무척 친숙하고 직관적이다.
- 일단 먹고사는 문제가 해결되고: 생리적 욕구
- 안전이 보장되어야: 안전의 욕구
- 비로소 다른 사람들에게로 시선을 돌려 유대와 화합을 도모할 수 있다: 애정과 소속감의 욕구
- 그렇게 관계 맺음을 시작하다 보면 드는 것이 존중받고(하고) 싶다는 마음: 존중의 욕구
- 결국 장기적으로 인간이 원하는 것은 자신이 가진 잠재력의 온전한 실현이다: 자아실현 욕구
욕구 위계 이론의 핵심 주장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인간이 가지고 있는 욕구는 여러 갈래로 구분되며, 먼저 추구되는 욕구가 있고, 나중에야 추구될 수 있는 욕구가 있다. 즉, 욕구 간에 위계가 있기에 상대적으로 하위 단계에 속한 욕구가 먼저 충족되지 않으면 상위 단계에 있는 욕구 충족은 어렵다.’
이 욕구 위계 이론이 복잡한 세상을 사는 현대인들에게 주는 함의는 무엇일까? 직접적으로 먹고 마시고 자는 일에 집중했던 과거 원시시대와는 달리, 오늘날 현대인들에게 주어진 어깨 위의 부담은 무척 크고 넓다.
즉, 우리들은 단지 먹고 마시는 문제에만 집중하며 살 수 없다. 우리가 사는 사회 속에는 법과 윤리가 있고, 제도가 있고, 직업시장이 있고, (평생) 교육이 있고, 무수한 형태의 여가 활동들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렇게 해야 할 일, 해야 할 것 같은 일이 너무도 많이 있기에, 우리는 종종 욕구 충족의 방향성을 잃어버리고 만다.
도대체 무엇부터 해야 할까? 행복하려면 일을 줄이고 가족, 친구들과 함께하라는데 그렇게 할까? 아니야, 지금은 좀 고되도 열심히 일을 해서 돈을 벌어 놔야 나중에 행복하게 살 수 있어. 가만, 그렇게 하자면 무슨 일을 해야 돈을 벌 수 있을까? 일은 또 어떤 일을 해야 하고? 일을 고를 때 내 적성과 흥미가 중요할까, 사회 트렌드가 중요할까? 내가 그 일을 골랐다 해도, 그것을 하기 위한 자격은 충분한가? 어떤 준비를 먼저 해야 하지?
매슬로의 욕구 위계 이론은 이렇게 현대인들이 경험하기 쉬운 수많은 욕구 (충족 수단)들 사이 ‘교통정리’를 하는 데 유용한 지침이 되어줄 수 있다. 말하자면 욕구의 종류에 따라, 욕구 충족 수단/행위들을 분류하고 우선순위를 두어 순차적으로 실천에 나설 수 있도록 우리를 돕는다.
욕구 위계에 따라 내가 지닌 욕구들을 정리하다 보면 알게 되는 사실들이 있다. 미처 이전 단계에서 충족되지 못했던 욕구가 있었기에 내가 이토록 그다음 단계 욕구 충족에 쩔쩔맸던 것은 아니었는가, 혹은 당장 내게 급한 욕구는 따로 있었는데 정작 나는 너무 먼 곳만 바라보며 살아왔던 것은 아니었는가 등등.
그래서 사실 실천 행위까지 가지 않더라도, 여러 종류의 욕구 각각을 내가 그동안 얼마나 잘 충족시켜왔는가 점검해보는 것만으로도 매슬로 욕구 위계 이론이 우리 개개인들에게 주는 의의는 크다. 상대적으로 관심이 부족했던 욕구가 있었다면, 앞으로의 인생 계획은 해당 욕구를 더 충족시킬 수 있는 방향으로 설계해 나갈 수 있기 때문이다.
자존감은 어디에서 오는가?
자존감 열풍을 둘러싼 심각한 오해 중 하나는 세상의 모든 문제들은 곧 자기 자신의 문제로 귀결된다는 암묵적 전제들이다. 자존감 향상을 기치로 내 걸고 있는 상당수 담론들에서는 우리가 일상에서 경험하는 온갖 대인관계, 일의 문제가 결국 ‘자기 자신을 충분히 존중하지 못하는 것’에서 비롯되는 것이라 설명한다. 마치 자존감이 만악의 근원이라는 식의 설명이다.
그러나 한편, 자존감은 구세주와 같은 대상이 되기도 한다. 자존감이 모든 것들의 문제였으므로 자존감을 향상시킬 수 있다면 일도, 대인관계도 술술 잘 풀려나가리라는 마법 같은 유혹이 바로 그것이다.
실제로 상당수의 자존감 관련 서적들을 들여다보면 결국 문제가 되는 것은 자기 자신뿐이다. 내 마음을 바꾸고, 내 행동을 바꿔야 한다고 말할 뿐, 왜 다른 사람들이 아닌 내가 바뀌어야 하는지, 상황을 놔두고 나 혼자 바뀐다고 뭔가 근본적인 해결이 될 것인지에 대해서는 별말을 들려주지 않는다. 물론 그 이유를 모르는 바는 아니다.
- 심리학은 처음부터 세상이 아닌, 개인을 분석 단위로 삼는 학문으로 출발했다. 세상사 돌아가는 문제들보다는 한 개인 내부에서 벌어지는 온갖 심리적 역동에 더 많은 관심을 가져 왔고 이는 지금도 어느 정도 맞는 사실이다.
- 세상을 바꾼다는 것이 어디 쉽던가. 더구나 지금이 복잡다양함의 끝을 달리는 초고도문명사회라면 더더욱. 세상을 바꿀 수 없으니 결국 바꿀 수 있는 것은 자기 자신뿐이다. 뜨고 지는 수많은 자기계발서들이 암묵적으로 전제하고 있는, 불편한 속내다.
그러나 ‘개인’에만 집중할 수밖에 없었던 몇 가지 이유가 있었다 한들, 그것이 곧 외부적인 요인들을 외면해도 좋다는 의미가 되지는 않는다. 자세히 짚고 넘어가지는 못할지라도, 적어도 의도적인 외면은 곤란하다.
무엇보다 자존감이 오로지 개인의 마음가짐으로부터 비롯된다는 발상부터가 사실이 아니다. 어떻게 마음먹느냐, 자기 가치에 대해 어떻게 주관적으로 지각하고 있느냐는 분명 중요한 문제이지만 그것이 전부인 것은 아니다. 인간은 온갖 크고 작은 맥락(context) 속에 산다. 그리고 사회적 동물인 인간은 맥락을 거부할 수 없다. 자연스럽게 자존감이라는 요소도 맥락에 따라 출렁인다. 요컨대, 내가 절대자나 세상의 지배자가 아닌 이상, ‘내 마음대로 안 되는 자존감’이 존재하는 것은 어쩔 수 없다는 이야기다.
흥미롭게도 매슬로 욕구 위계 이론은 작금의 ‘자존감 열풍’에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욕구 위계 이론에 따르면 개인 안팎으로 자존감을 추구하고자 하는 욕구는 바로 네 번째 단계인 ‘존중의 욕구’에 해당한다.
그리고 이 존중의 욕구가 충족되기 위해서는 먼저 거치지 않으면 안 되는, 이른바 선행조건이 존재한다. 다름 아닌 ‘애정과 소속감의 욕구’다. 조금 더 자세히 풀어보자면 다음과 같다. 자존감 책을 읽는 우리들은 대개 자존감 향상을 위해 자기 자신의 마음에 초점을 맞추지만, 사실 그전에 먼저 채워져야 하는 것은 애정과 소속감의 욕구다. 그리고 이 애정과 소속감의 욕구는 명칭에서부터 유추 가능하듯, 당연히 혼자서는 충족시킬 수 없는 가치다.
자존감은 관계로부터 비롯된다
애정과 소속감을 기대할 수 없는 환경에 놓여있다면 자존감을 향상시킬 수 있는 선행조건을 충족시키지 못했다는 의미가 된다. 학대받는 가정 속에서 자라왔다면, 학교생활 하면서 마음 둘 사람이 없었다면, 직장에서 인간적인 대우를 받고 있지 못하다면, 그에게 당장 급한 것은 관계의 활성화이지 ‘존중(esteem)’은 아니다.
애정과 소속감이 시급한 상태에서 존중이란 사실상 사치에 가깝다. 다른 사람과 연결되어 있다는 감각, 그리고 그 연결이 비교적 안정적으로 지속되리라는 믿음이 전제되어야 비로소 그 보금자리 속에서 존중의 싹틔움을 고민해볼 수 있는 것이다.
자존감이 낮아 괴롭다면? 스스로를 혼자 있게 두지 말라. 당장 필요한 것은 당신이 SOS를 칠 수 있는 든든한 아군을 찾아 나서는 일이다. 언제나 기본적으로 내게 우호적인 시선과 위로를 건네줄 수 있는 사람들을 적극적으로 만나는 것이야말로 자존감 향상 노력을 위한 가장 중요하면서도 기본적인 선행 조건이다. 가족, 친구, 동료 등 마음이 복잡할 때 언제든 연락할 수 있는 사람들의 목록을 항상 마음속에 가지고 다닌다면 좋겠다.
만약 그조차도 확보되지 못한다면 복잡한 심경을 인터넷 익명 게시판에라도 털어놓는다면 어떨까? 당신에 대해 아는 바가 전혀 없을 것임에도, 어떤 이해관계가 없을 것임에도 사람들은 분명 당신의 진심 어린 속내를 들어주고 위로의 말을 건네줄 것이다.
자존감 향상보다 중요한 것은 자존감 관리요, 이른바 “자존감 네트워크(Self-esteem Network)”의 형성이다. 각자 방 안에 틀어박혀 억지로 자존감 올리려 애쓰지 말고, 그 대신 서로가 서로의 자존감을 지켜주는 모습이 어쩌면 더 바람직한지 모른다.
혼자서 만드는 자존감은 연약하다. 맥락에 휩쓸려 얼마든지 무너질 수 있다. 그러나 연대를 통해 빚어낸 집단적 자존감(Collective Self-esteem)은 강하다. 쉽게 무너지지 않아 나를 지탱해주고, 우리를 지탱해주는 심리적 자원이 되어줄 것이다.
자존감, 알고 보면 그거 그리 어려운 것이 아니었다. 평소 내가 지인들에게 건네는 말 한마디 속에 자존감이 담겨 있었고, 지인들이 내게 들려주는 말 한마디 속에 자존감이 또한 담겨있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원문: 허용회의 브런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