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6월 12일, 어쩌면 결정적으로 코너에 몰린 두 사람이 ‘세기적인 만남’을 가졌다. 도널드 트럼프는 섹스 스캔들을 비롯해 여러 가지 추문으로 국내 정치 무대에서 위기에 처했다. 북한의 경제는 큰 위기라는 소식이다. 그런 두 사람이 만났다.
이유야 어쨌든 한반도에 평화가 올 것 같은 분위기다. 이런 호기를 잘 활용해 결국은 통일을 이루어야 할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통일 후 북한에서 통할 남한의 베스트셀러는 어떤 책일까? 비록 통일을 이루지 못하더라도 남북교류가 자유로워졌을 때 북한에서 인기를 끌 남한의 책 말이다.
나는 1991년에 프랑크푸르트 도서전에 만난 독일 최대의 도매상인 KNO의 책임자에게서 독일이 통일된 후 구동독 출신의 사람들이 가장 열렬히 읽었던 책이 어떤 책인지를 직접 들은 적이 있다. 그는 마거릿 미첼의 유일한 소설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는 없어서 팔지 못할 정도라고 했다. 마침 그즈음 다른 작가가 쓴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속편 『스칼렛』이 출간돼 전 세계에서 다시 인기였다.
이후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에 대해 알아본 바에 따르면 이 소설은 많은 기록을 보유했다. 미국의 한 조사에 따르면 세계에서 가장 많이 팔린 책은 『성경』이었고 다음이 『스포크 박사의 육아전서』였다. 2차 대전 이후 베이비붐 시대에 출현한 이 육아책은 구체적이고 세세한 육아프로그램을 제시해 아이가 있는 집은 거의 비치할 정도로 인기를 끌기도 했지만 “아이들의 다양성을 간과했다”는 이유로 불살라지기도 했다.
3위가 바로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였다(이후 이 기록은 깨졌다. 온라인 시대가 도래하면서 ‘해리포터’ 시리즈라는 공전의 베스트셀러가 탄생한 이후 자주 세계적인 베스트셀러가 등장했다).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가 탄생한 것은 미국의 대공황기인 1936년이다.
미국 남부 지주 집안의 딸인 스칼렛 오하라는 연약한 이상주의자 애쉴리 윌크스와 물질주의적이며 행동가인 레드 버틀러와의 사이를 영악하게 넘나들었다. 경제적인 불황기에는 늘 살아남는 것이 관건이다. 경제적인 불황기에 가장 힘든 것은 50대 여성과 그의 딸들이다. 열여섯 여성 스칼렛의 삶을 그린 이 소설이 독일이 통일된 후 구동독지역에서 가장 많이 팔려나간 책이 되었다는 사실이 시사하는 바는 무엇일까?
IMF 외환위기 시절에 한국에서 가장 많이 팔린 소설은 양귀자의 『모순』이었다. 이 소설은 불륜은 아니었다. 하지만 이 소설의 주인공인 25세 여성 안진진은 돈은 많지만 재미는 없는 ‘현실’과 돈은 없지만 꿈이 있는 ‘몽상’을 대표하는 두 남자를 놓고 고민하다 결국 현실을 선택한다. 그 길은 자살한 이모가 자신에게 쓴 유서에서 결코 걷지 말아야 할 길이라고 알려주었던 인생이었다. 그래서 제목은 ‘모순’이다.
하여튼 인간은 삶이 힘겨울 때 로맨스를 꿈꾼다는 법칙은 늘 통용된다. 영화로 만들어지는 불멸의 고전은 거의 모두가 불륜 소설이다. 그리고 그 불륜의 사랑은 늘 아름답다. 갈망이 크면 한순간의 만남이 갖는 환희가 크고, 그로 인한 파탄의 상처 또한 깊은 법이다. 여자가 불륜에 빠질 때(물론 상대가 남자이니 여자만 불륜에 빠진다고 볼 수는 없다)는 언제나 경제 상황이 좋지 않았다.
일본에서는 버블붕괴가 시작될 무렵에 와타나베 준이치의 불륜 소설 『실락원』이 공전의 히트를 쳤다. 그런 일본에서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가 베스트셀러에 오른 것은 도쿄올림픽이 열린 1964년이다. 그해 베스트셀러 1위는 투병 생활을 보낸 여학생과 연인인 남학생이 주고받은 서간집인 『사랑과 죽음을 응시하며』(오시마 미치코, 고노 마코토)이다.
이 책은 이후 일본 출판시장에서 정기적으로 붐을 이루는 ‘순애(純愛)물’의 선구자다. 그해에 야마오카 소하치의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2위였고,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가 3위였다. 그러니까 일본의 대중은 그해에 『사랑과 죽음을 응시하며』를 읽고 난 아쉬움을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에 나오는 스칼렛의 사랑으로 마음을 달랬던 것이 아닐까?
한국 출판의 상황은 어떨까? 베스트셀러는 당대의 사람들이 꿈꾸지만 따라서 하기 어려운 삶을 그린 소설이다. 어쩌면 인간은 소설 주인의 삶에서 자신의 꿈을 투영하는 것인지 모른다.
‘전후허무주의’가 지배하던 1950년대는 ‘아프레걸’이 떴다. ‘아프레걸’은 전후(戰後)를 뜻하는 프랑스어 ‘아프레 게르(apres guerre)’와 소녀를 뜻하는 영어 단어 ‘걸(girl)’을 합성한 조어로, 향락과 사치와 퇴폐를 상징했다. “자유분방하고 일체의 도덕적인 관념에 구애되지 않고 구속받기를 잊어버린 여성들”로 ‘성적 방종’의 의미도 내포한다. 정비석 장편소설 『자유부인』의 주인공 오선영이 바로 그렇다.
한국전쟁은 한반도 인구 3000만 명의 10%인 300만 명을 희생시켰다. 전장에서 죽은 이는 주로 군인이었다. 살아서 돌아오지 못한 남편을 그리워만 해야 했을 여성들은 어땠을까? 춤바람이라도 피우고 싶지 않았을까? 대학 국문학 교수인 장태연의 부인인 오선영은 정숙한 가정주부였는데 이 여성은 남편의 제자인 신춘호와 춤바람이 나면서 가정은 파탄의 위기에 처한다.
하지만 겨우 춤바람에 불과한데도 서울법대 황산덕 교수는 《서울신문》에 소설을 연재하던 정비석 작가를 “중공군 50만 명에 해당하는 조국의 적”이라고까지 격렬하게 비판했다. 그러니 요즘 드라마가 그렇듯이 작가는 결말을 싱겁게 끝낼 수밖에 없었다. 신춘호가 오선영 오빠의 딸과 결혼하여 미국유학을 떠나자 잠시 선망, 유혹, 질투, 울분으로 탈선과 좌절, 실의에 빠져있던 오선영은 장태연의 이해와 아량으로 서로 과오를 뉘우치고 가정으로 돌아와야만 했다.
이후는 어땠을까? 『82년생 김지영』이 뜨는 2010년대까지 시대를 대표하는 여성들이 있다. 그걸 시대별로 다시 정리했다. 마지막으로 팁 한 가지. 나중에 자료를 뒤져보니 독일이 통일된 뒤 동독 사람들이 처음으로 만들어낸 베스트셀러는 『합법적으로 세금을 내지 않는 ○○가지 방법』이란 책이었다. 어쩌면 사랑과 돈은 인간의 딜레마이자 인간의 영원한 꿈이 아니겠는가?
그리고 육아다. 『스포크 박사의 육아전서』 같은 허접한 육아서를 만들라는 것이 아니다. 아이들이 자라면서 제대로 읽을 수 있는 그림책과 동화, 청소년 소설들을 잘 만들어놓으면 통일이 되고 나서는 큰 이익을 얻을 수 있지 않을까?
원문: 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