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환(ㅍㅍㅅㅅ 대표, 이하 리): 원래 어릴 때는 어디 사셨어요?
안승남(구리시장 후보): 서울 뚝섬에 살았어요. 그러다 집안 형편이 안 좋아져서 풍납동으로 이사했죠.
리: 둘 다 당시로서는 환경이 좋지 않은 곳이었네요.
안승남: 뚝섬은 아니었어요. 교육환경도 좋았고요. 아버지가 1.4 후퇴 때 월남하셔서 국군으로 참전하셨다가 다시 이북으로 못 가시게 됐죠. 그래서 아내와, 제 누나 둘이 이북에 그대로 남아있는 상태로 실향민이 되신 거죠. 그래도 양복 기술이 있으셔서 뚝섬에 양복점을 차려서 자기 사업도 하고, 집도 있는 유지가 되셨어요. 그래서 본인은 초등학교도 못 다니셨지만 저와 형제들은 사립초등학교를 보내셨었어요.
그러다 아버지가 풍 맞으시고, 돈 빌려준 거에도 문제가 생기면서 풍납동으로 이사를 갔었어요. 그래서 사립초등학교라 이사도 못 하니까 초등학생이 학교 가려고 새벽 5시에 일어나서 버스 타고 학교를 가고 그랬죠. 그러다 이제는 진짜 쫄딱 망해서 공릉동으로 갔죠. 그 후로는 진짜 1년, 6개월마다 계속 이사했어요.
리: 쫄딱 망했는데 어떻게, 공부는 계속 잘 하셨나 봐요.
안승남: 중학교 때는 그래도 반장 하고 그랬는데 고등학교 가서는 좀 딸렸어요. 그래서 1965년 뱀띠니까 원래는 84학번인데 한 해 재수해서 85학번으로 외대에 입학했죠.
늘 학우들과 함께했던 외대 아이돌
리: 대학에 가자마자 좌빨의 길을 걸으셨나요?
안승남: 아뇨, 그것보다는 교회를 다닌 게 컸어요. 제가 중고등학교가 다 미션스쿨이었어서 중학교 때부터 주일학교를 열심히 다녔어요. 뭐 청년 예수라면 지금 한국에서 어떻게 할까? 이런 걸 배웠어요. 기독교 교육, 성경 공부를 하다 보니까 그렇게 세상을 보는 눈이 달라졌죠.
또 우리 교회가 막 엄청 개혁적이나 그런 교회는 아니었는데, 교회에서 굉장히 자율, 자치를 강조했어요. 중등부, 고등부, 청년부에서 스스로 임원을 뽑고, 임원들 위주로 사업계획서를 만들고 지출결의서를 끊어서 돈 타서 사업하고, 영수증으로 회계처리하고 또 연말이면 1년 사업계획 짜고, 매달 사업 실천하고 평가하고 이런 활동을 중학교 2학년 때부터 대학 들어가고나서까지 쭉 했어요. 그러다 보니까 ‘제삿상의 제사음식을 먹어야 하나?’ 이런 토론도 다채롭게 했어요. 그러니까 기독교 사상에 대한 새로운 해석이나 접근들도 하게 됐죠.
또 당시에 저는 재수했으니까 친구들은 84학번으로 먼저 대학을 가 있었잖아요. 그러니까 이 친구들이 광주 이야기를 저한테 들려주는 거예요. 진짜로 “얘네들은 무슨 이런 소리를 해?”라고 생각했어요. 정말 있을 수가 없는 이야기였던 거죠. 사실 어릴 때는 방송에 폭동이다 그렇게 나왔잖아요. 그런데 친구들이 그런 이야기를 해주고, 또 비디오 보고 책 읽은 이야기를 해주면서 어렴풋이 흔들렸다가 이제 대학 들어가서는 정말 깨닫게 된 거죠.
그래도 조금 다행이었던 게, 진짜 84학번까지는 교내에 늘 사복경찰들이 있었거든요. 그래도 조금씩 민주화되면서 85학번부터는 그러지는 않았어요.
리: 그나마 조금씩 학내 민주화가 이뤄질 때였나 보네요.
안승남: 진짜 제 위 학번은 집회 한 번 하려면 밧줄 타고 그래야 됐어요. 저는 노래 부르는 써클을 들어갔는데 거기에서 아내도 만났죠. 제 후배였는데 제가 독자여서, 군대를 짧게 다녀와서 복학한 후 만나 졸업도 같이하고 그랬죠.
리: 아름다운 스토리네요.
안승남: 지금 아내가 선거 때문에 많이 고생하고 있죠… 어쨌든 제가 했던 써클이 ‘해무리’라는 써클이었는데 1987년 6월 항쟁 때는 학내 집회 때 노래 가르쳐서 같이 부르고 그랬어요.
리: 노래 동아리가 그렇게 건전한 곳은 아니었나 보군요.
안승남: 굉장히 열악한 환경에서도 문화운동, 대중성을 갖고 접근하던 모임이었죠. 그때 선배들이 제가 ‘노래를 가르치고 마이크를 잡으면 인원이 늘어나면 늘어났지, 집에 가지를 않더라’고 하더라고요.
리: 원래 사회 같은 걸 잘 봤나요?
안승남: 교회에서 맨날 레크레이션, 싱얼롱 이런 걸 했으니까요. 항상 친근하고 다정다감하고 재밌고, 신나고, 부흥회 하듯이 분위기 잡고 그런 걸 잘할 수밖에 없었죠.
리: 노래하는 써클 자체가 애초에 목적이 노래를 부르는 것보다는 운동을 위한 곳이었던 건가요?
안승남: 이전의 너무 과격하고 자기들끼리만 하는 운동보다는 소위 학우들과 함께하자는 모임에 가까웠죠.
리: 그때부터 개량으로…
안승남: 개량이 아니라 너무 편향되어있던 걸 제대로 잡은 거죠. 우리 써클이 6월 항쟁 때 가장 많은 사람을 데리고 나간 써클이었어요.
리: 그러다 어쩌다가 전대협까지 들어가서…
안승남: 그때 써클을 하니까 원래 써클연합회장을 나가라고 했다가 떨어졌어요. 그게 1987년 겨울이었거든요. 대통령 선거 때여서 ‘공정선거 감시단’을 학교에서 꾸려서 공정선거 캠페인을 했어요. 그때 (임)수경이랑도 같이 일했죠. 그런데 그때 또 총학생회 선거도 해야 하는데, 대선과 시기가 맞물리니까 다음 해 1988년 3월로 미뤘어요. 그런데 대선 끝나고 선배들이 저를 총학생회장으로 내보내려는 거예요. 그런데 친구들이 ‘총학생회장 하면 되자마자 4월에 달리지 않냐, 그런데 승남이는 독자니까 부회장으로 바꾸자’고 했죠.
리: 달리다뇨?
안승남: 바로 잡혀가니까… 그래서 조금 놔두자, 그래서 84학번 선배가 총학으로 나가고 저는 부총학생회장으로 나가서 당선됐죠. 근데 또 다행히 그때부터 노태우가 유화국면을 펼쳐서 잡혀가진 않았죠. 그 선배가 정형주라고 성남에서 국회의원 3번 나갔다가 다 떨어졌죠.
리: 갑자기 이야기가 슬퍼지네요…
안승남: 그때 형주 형은 전대협 부의장 맡아서 밖으로 많이 돌아다녔고, 저는 학내 일을 주로 맡았어요. 그때 학내 민주화 문제 가지고 학교와 회의를 많이 했는데, 그때 회담하다 좀 안 된다 싶으면 원래는 뽀개고 나가거든요, 보통. 그런데 우리는 ‘뽀개기는 왜 뽀개냐’하면서 끝까지 회의하고, 그리고 회의 결과를 늘 학우들에게 공개했어요. 그때 수경이가 대자보 많이 붙였죠.
리: 투쟁방식이 굉장히 유화적이었네요.
안승남: 아까 개량화됐다고 했잖아요(웃음). 그런데 이건 개량이 아니라 학우들과 같이하려고 했던 거죠. 그래서 총학생회 보고대회 하고 그럴 때 학생들이 엄청 많이 모였어요. 이제 학교가 골치 아픈 거죠. 얘네들이 대충 뽀개고 가야 하는데 그러지 않고 맨날 사람들만 많이 모으고… 그래서 학내 민주화에서 많은 걸 얻어냈죠. 그래서 그 후로 5년을 계속 우리가 총학생회장에 당선됐죠.
리: 임수경 방북 때는 어땠어요?
안승남: 수경이가 86학번이었는데, 원래는 저랑 같이 졸업을 해야 되는데 수경이는 졸업 못 했죠. 그때가 1989년이었잖아요. 저는 부총 끝나고 4학년이 됐는데 갑자기 수경이가 북한을 갔다고 연락이 온 거예요. 그래서 바로 짐 챙겨서 집에서 나왔죠.
리: 왜요?
안승남: 아니, 후배가 북한 갔는데 선배가 무사하겠어요?
리: 아니, 가는 걸 모르고 있었어요?
안승남: 그걸 누구나 알면 정보가 새잖아요. 그래서 저도 학교 학생처에 연락 온 다음에 그걸 듣고 다른 애가 그거 듣고 전화해줘서 알았어요. 그래서 TV 보니까 도착했다는 소식이 나오길래 바로 짐 싸서 학교로 들어왔죠. 그때 한 형은 집에서 나오라니까 “아니 난 상관없잖아?” 그래서 다르게 바꿔서 “술 먹고 놀자” 했는데 또 “바빠” 하고 끊었어요. 그런데 경찰이 그 집에 들이닥쳤는데, 그러면 책이 나오잖아요.
리: 있었겠죠…
안승남: 그래서 바로 잡혀갔죠. 그러고는 나중에 빵에서 나와서 “야, 그때 니 말 듣고 피했으면 되는 건데…” 그러더라고요.
리: 참, 인생 재밌게 사셨네요. 졸업하고는 뭐하셨어요?
안승남: 저는 졸업하자마자 바로 취업이 됐어요. 쌍용정유, 기름장사였죠. 보통 졸업하고도 학생운동의 배후에 있거나 그런 경우가 많은데, 저는 ‘선배들은 또 다음을 준비하고 떠나야지, 계속 있으면 안 된다’는 주의였어요. 그래서 맨날 학생과 가서 구인광고 보고, 도서관 가서 공부도 하고 하다가 입사하게 됐죠.
리: 취업하니까 어떻던가요?
안승남: 정신없죠. 그런데 퇴근할 때쯤 되면 우리 회사 근처에 친구, 선후배들 다 모이는 거예요. 술 사달라고(…) 그러다 1년 지나서 우리가 민주동문회를 만들었는데, 제가 사무국장이 됐어요.
리: 참 타이틀이 많으셨네요.
안승남: 저는 늘 쉬지 않고 일을 해요. 그렇게 한 5년 쌍용정유를 다니다가 외대 총동문회로 직장을 옮겼죠. 거기에서 제가 94년에 개교 40주년을 정말 성황리에 열었죠. 1만 5,000명이 올림픽 체조경기장을 꽉 채웠어요.
리: 어떻게 그렇게 많이 불렀어요.
안승남: 엄청 쉬워요. 어떻게 했냐면, ‘외대인의 날’ 하면서 신문광고를 냈어요. 그때 출연진이 누구였냐면 외대 동문들을 쫘악 깔은 거예요. 안성기, 송승헌, 최수종, 이승환, 그리고 그다음이 제일 중요한데 차인표. 경제학과 1년 후배예요. 중간에 미국 가면서 관뒀지만.
리: 그때 차인표면… 진짜 난리였겠네요.
안승남: 이제 그 광고를 보고 외대 동문의 자녀들이 ‘아빠, 차인표 보러 가자!’ 이러니까 1만 5,000명이 쉽게 꽉 찼죠.
리: 그럼 출연진 개런티도 장난 아니었을 텐데 얼마나 줬어요?
안승남: 노 개런티였어요.
리: 이야…
안승남: 동문이니까요. 유열, 정은아 선배 나오고, 거의 외대가 아니라 문화예술대였죠. 수경이도 그때 출연했어요. 임수경과 차인표는 또 유치원 동창이었거든요. 외대 역사상 그렇게 큰 행사가 없었을 거예요. 그걸 성공리에 끝내고 또 총동문회 간사가 되고, 그러다가 2010년에 출마해서 도의원이 됐죠.
민주화와 기독교라는 두 개의 발로 뛰어온 의정 생활
리: 그러면 총동문회에 꽤 오래 계셨는데 갑자기 어쩌다 도의원 출마를 하신 거예요?
안승남: 제가 원래 1997년 대선 때 김대중 대통령이 수평적 정권교체를 끌어낼 때 동문회 활동을 하면서 구리, 남양주에서 뜻있는 분들과 함께 구리·남양주 시민모임을 만들었어요. 1996년에 만들어서 지역 시민 활동을 하면서 비판만 하는 게 아니라 대안도 마련하는 시민운동을 했죠.
리: 구리는 언제 오신 거예요?
안승남: 대학교 4학년 1989년에 왔죠. 아까 쫄딱 망했다고 했잖아요. 그러다가 큰 누나, 둘째 누나는 다 시집가고 저랑 아버지만 구리 수택동 지하실 방을 얻어서 넘어왔죠.
리: 그때는 중앙선도 없었을 텐데, 서울에는 어떻게 오갔어요?
안승남: 없죠. 여기서 강변역 가는 버스도 없었어요. 워커힐까지 가서 마을버스 타고 강변역으로 넘어갔죠. 아무튼 그렇게 시민모임 활동을 하면서 이런저런 일을 하니까 지역사회에서 많이 부각이 됐죠. 그러면서 교회에서도 계속 활동하고, 김근태 선배님하고도 교류했죠. 전대협 활동하면서 만난 우리 친구들이 김근태 선배님하고 또 민청학련 관련되어서 아주 가까운 사이어서 교류가 많았죠. 목사님은 또 김거성 목사님이라 민주화 운동 하던 분이 돌아가시면 그 장례예배 집전을 다 뒤에서 챙겨주시고 그런 분이셨고요.
리: 그 교회 자체가 상당히 진보적이었던 건가요?
안승남: 네, 기장 교회니까요. 지금도 계속 다니고 있어요. 지금은 목사님이 이재정 교육감 되고 경기도 교육청 감사담당관 하고 있죠.
리: 진정한 좌빨 교회네요.
안승남: 그렇다기보다는 대외 선교 활동을 충실히 하는 거죠. 기복신앙과 자기 교회의 성장만에 빠져있지 않고, 지역 사회와 교감하고 여러 부분에서 같이 활동을 하는 거죠.
다시 돌아가서, 그렇게 시민모임하고 지역사회 활동을 하다가 김대중 대통령이 대통령 되고 나서 “중앙에만 정권 교체하면 뭐하냐, 지방에서도 민주화에 참여했던 뜻있는 분들이 직접 참여해서 해야 한다” 그러셨어요. 그래서 새정치국민회의가 만들어졌고, 저한테 도의원 공천을 주기로 했는데 갑자기 신한국당에 있던 사람을 데려다가 내보낸 거예요. 그래서 지역에서는 ‘이건 안 된다’ ‘무소속이라도 나가라’ 그래서 결심을 하고 총동문회에 사표를 냈죠. 그러니까 회장님이 “너 될지도 안 될지도 모르는데 무슨 사표야. 잠깐 휴가 갔다 와” 이러셨어요. 그래서 휴가를 얻어서 선거를 치렀는데 당연히 떨어졌죠. 10% 받고…
리: 아이고, 돈 많이 날렸겠네요.
안승남: 아뇨, 돈을 많이 날리려면 돈으로 선거를 치러야 하는데, 저는 선거법을 지키는 선거, 돈 안 쓰는 선거, 남을 비방하지 않는 선거를 했죠.
리: 사실 돈이 없었던 거 아니에요?
안승남: 쓸 돈이 없기도 했죠(웃음). 그래서 1998년에는 그랬는데, 2000년에는 그 도의원이 뇌물수수혐의로 옷을 벗었어요. 그때그때 보궐선거 경선에는 제가 결과가 안 좋아서 못 나갔죠. 그런데 그때 또 무슨 일이 있었냐면, 총선연대 낙천·낙선 운동이라는 게 전국적으로 있었어요. 저는 구리시 총선연대 사무국장을 맡아서 구리시에서 출마하려던 이건개 국회의원 낙천·낙선 운동을 주도했죠.
리: 그 양반은 무슨 죄를 지었나요?
안승남: 그 양반은 슬롯머신 사건으로 뇌물을 받았었죠. 또 남양주에는 안경사 협회 로비 사건에 연루된 이성호 장관이 있었고. 이 두 사람을 다 낙선시키려고 했어요.
리: 뭐… 개판이었네요.
안승남: 이건개 의원 낙천·낙선 운동의 메인 이벤트가 뭐였냐면 애완견 콘테스트 대화였어요. “이 개 이름이 뭐죠?” “이건 개? This is dog?” 이러면서 “이 개의 단점은 뭐죠?” 이런 쇼를 했어요. 그래서 후보자를 희화화했다고 선거법에 걸려서 그때 징역 6개월에 집행유예 2년을 받았어요.
리: 학교 다닐 때도 한 번도 깜빵에 안 가셨다더니 어쩌다…
안승남: 그래서 그때 빨간 줄이 쫙 그어져서 지금도 그런 이야기가 나오죠.
리: 그런데 이건 사실 표현의 자유 침해 아니에요?
안승남: 그런데 선거기간에는 후보자를 희화화하면 안 돼요.
리: 참 선거법이 후졌네요… 희한한 일이 많았네요.
안승남: 그래서 5년 동안 피선거권이 정지됐죠.
리: 꼬였네요.
안승남: 그래도 노무현 대통령 만들 때는 열심히 가서 뛰고. 그래서 당선시키고, 그러다 2005년에 노무현 대통령 인기가 바닥칠 때였잖아요. 그때 딱 사면 복권이 됐어요. 그래서 상향식 지방선거로 당의 위기를 극복하자 그러면서 구리시장 출마를 딱 선언했죠. 그런데 경선을 안 붙여주고 단수공천을 때려버린 거예요. 열이 받겠어요, 안 받겠어요? 공천 못 받아서 무소속 나갔지, 선거법 걸려서 묶여있었지, 시장 경선 안 붙여주고… 그러면 시의원이라도 나가려고 했는데 이것도 또 현역 시의원이 기득권 지키려고, 경선하지 말자고 연판장 돌리고 난리를 쳤어요. 그래서 안 됐죠,
그런 와중에도 제가 탈당하지 않고 끝까지 당에 남아서 선대본부장 맡고 하면서, 그렇게 당 인기가 안 좋을 때, 중부 지방에 아무도 열린우리당 당선이 안 될 때 구리시만 600표 차로 당선시켰죠.
리: 굉장히 놀라운 결과네요.
안승남: 그래서 4년 뒤인 2010년에 도의원 공천을 받아서 당선됐죠
리: 2006년에는 박영순 시장이 왜 당선됐다고 생각하세요? 그때 경기도가 거의 전멸이었잖아요.
안승남: 경기도뿐 아니라 서울, 인천, 경기, 강원 다 전멸이었죠. 그런데 왜 이겼냐? 사실 이 분이 98년에 도의원 무소속 출마했을 때 당선되셨던 분이에요. 그런데 2002년 선거에서는 대통령 아들 문제, 일명 ‘홍삼 트리오’ 문제가 많이 불거지면서 떨어졌죠. 그때 박영순 시장이 야인으로 있으면서 조직, 지역을 엄청 챙겼어요. 그렇게 구석구석 챙기면서 기반을 다진 거죠.
리: 그때부터 박영순 시장하고 같이 활동하신 거예요?
안승남: 박영순 시장하고는 1996년도부터 같이 활동했죠. 박영순 시장이 원래 관선 시장이었어요. 그 후에 시장, 국회의원 나갔다가 떨어졌었죠. 이 분이 1996년에 함께 당에서 일하자고 했는데 제가 시민운동도 하고 있고, 직장도 서울이고 그래서 “다른 도와줄 방법을 찾아보자”고 했는데, 이분이 저를 구리시 선거관리위원으로 추천을 했죠. 그러다 제가 1998년에 공천 준다고 해서 사퇴하고 나왔는데 정작 공천은 못 받았죠.
리: 박영순 시장도 사실 나중에 안 좋은 일에 연루되셨잖아요. 공과 과를 따지자면 어떤가요?
안승남: 제가 본 박영순 시장은 지방정치인 중에서 제일 부지런한 사람이에요. 온갖 루머는 있었지만 그게 사실이라면 은팔찌 차고 들어갔어야죠.
리: 그런데 어쨌든 최종적으로는 법에 걸린 거 아니에요?
안승남: 그게 어떤 거냐면 구리월드디자인시티 사업이 있어요. 그때 ‘그린벨트 해제 요건 충족 완료’라는 말을 썼어요. 그건 그린벨트가 해제됐다는 게 아니라, 해제를 위한 요건을 충족했다는 행정 용어거든요. 그런데 이게 허위사실이라고 1심에서는 80만 원을 받았는데, 그다음에 300만 원을 받고 아웃된 거죠. 그런데 또 윤호중 국회의원은 비슷한 내용을 걸었는데 여기는 80만 원으로 끝났죠.
리: 왜죠?
안승남: 대통령 집권 시기가 달라요. 그래서 박영순 시장은 뇌물을 받은 것도 아니고, 허위사실도 아니고, ‘그린벨트 요건 충족 완료’라는 단어만으로 그렇게 된 건데, 사법부의 해석이 영향을 받은 거라고 봐야죠..
리: 사실 박영순 시장 같은 경우에는 야당인데도 돈을 잘 끌어왔다는 평가를 받았죠?
안승남: 솔직히 돈 끌어와서 개발한 게 어딨어요. 다리 놓는 거, 길 뚫는 거, 지하철 놓는 건 국가계획에 다 있어요. 계획 잡힌 거에다가 숟가락 올리는 사람들이 많아요.
리: 그러면 시장은 뭐 해야 하죠…?
안승남: 정말 내 삶의 변화를 느끼게 해주는 거죠. 아무리 중앙정부가 복지, 장애인 정책을 강조해도 실제로 그걸 하는 건 기초지방자치단체에요. 80세 먹은 휠체어 탄 할머니를 중앙정부에서 어떻게 챙겨요.
리: 그렇긴 하지만, 그것도 국가 정책에 따라서 가는 것 아닌가요?
안승남: 국가정책에서는 개개인에 대한 맞춤 정책이 아니라 큰 흐름의 정책만 나온다는 거죠. 이걸 맞춤형으로 해결할 수 있는 걸 구리시 지자체에서 디테일하게 가야 한다는 거죠.
안전과 환경을 통해 만들어 갈 모범 지자체, 구리시
리: 노란 셔츠는 언제부터 입으셨어요?
안승남: 2010년 지방선거 출마할 때죠.
리: 그 계기는 뭔가요?
안승남: 일단 제 얼굴에 잘 받고, 사진빨도 서고, 노란색의 분위기도 좋았고, 그때 당 색깔도 노란색이었잖아요. 그래서 일단은 입었는데, 계속 입다 문득 생각해보니까 내가 지금 말고 또 언제 노란 옷을 많이 입었을까? 하니까 유치원 다닐 때 원복이 노란색이잖아요. 왜 그런가? 아이들은 가장 안전에 민감해야 하는 존재니까 노란 셔츠가 안전을 뜻한다고 의미를 부여했죠. 또 영화 〈택시운전사〉에서 김사복 씨 역할을 맡은 송강호의 모범운전자 옷도 노란색이잖아요. 그래서 안전과 모범 정치, 이런 뜻이 있다고 생각해요.
리: 또 2014년 세월호 참사의 상징색도 노란색이죠… 그때는 어떠셨나요?
안승남: 저는 그냥 제가 원래 입던 노란 셔츠를 입었는데, 아무래도 세월호 참사 이후다 보니까 좀 더 부각됐죠.
리: 도의원 하시면서 안전 문제에 좀 신경을 많이 쓰셨나요?
안승남: 제가 초선 때는 행정자치위원회, 재선 때는 안전행정위원회에 있었어요. 둘 다 소방을 다뤘죠. 예방을 위한 소방 예산 지원, 소방 공무원들이 필요한 일을 하기 위한 예산 뒷받침을 많이 했죠. 인력 보강도 많이 했고요.
리: 소방 같은 경우에는 결국 지방자치가 제대로 굴러가지 않으면 한계가 뚜렷하다는 말도 있는데, 이게 사실인가요?
안승남: 경기도는 그나마 나은데 다른 곳은 소방관 근무여건이 열악한 곳이 많아요. 인사권, 지휘권은 광역지자체에 주더라도 예산은 중앙정부에서 지원을 해야 한다는 게 그런 문제 때문이죠. 편차가 너무 심해요. 그러다 보니 여건이나 인원이 많이 부족한 곳이 많아요.
리: 그 밖에 도의원 하면서 기억에 남는 정책 같은 게 있나요? 이건 나 아니면 아무도 안 했을 것 같다거나.
안승남: 일단 초선 때 경기도 전역에 뉴타운 지정이 되어 있었는데, 뉴타운을 해제하는 일을 주도했죠.
리: 세상에… 쉽지 않았을 것 같은데요.
안승남: 전국 최초로 뉴타운 해제 조례를 만들었어요. 주민의 의견을 수렴해서, 주민의 의지를 확인하는데 문제는 뉴타운이라는 게 찬반 갈등이 엄청 심했어요. 그래서 그걸 해결하는 방법으로 토지 소유자 중 25% 이상이 반대하면 지정을 해제하는 걸 제시했어요. 이게 왜 그러냐면 뉴타운 추진할 때는 25% 이상이면 추진위원회를 만들고, 75% 이상이면 조합을 만들어요. 그러면 25% 이상이 반대하면 조합 자체가 성립이 안 되는 거잖아요. 그래서 그러면 해제할 수 있게 했죠.
리: 실제 반응은 어땠나요?
안승남: 일단 조합이나 추진위원회를 구성하지 않은 곳은 제가 만든 조례로 25% 이상 반대가 나온 곳은 다 해제를 했죠. 또 추진위원회나 조합이 만들어진 곳들은 50% 이상의 주민이 계속 추진을 희망하면 지지가 높다고 판단해서 진행할 수 있도록 했죠. 구리시 사례를 보면, 12개 구역 중에 10개 구역이 해제됐죠.
리: 와… 어마어마하네요.
안승남: 엄청난 파장력을 가진 조례를 만든 거죠. 뉴타운은 사업성도 있는 동네를 싹쓸이해서 부숴버리고 짓는 거잖아요. 그것보다는 새로운 땅에 아파트를 지으면서 주택 보급을 하는 게 낫지, 사는 보금자리를 없애면 안 된다고 생각해서 또 경기도 마을만들기 조례를 만들었어요. 공동체가 함께 논의해서 낸 결론으로 주차장을 만들든 뭘 하든 마을에 필요한 것을 준비할 수 있도록 한 거죠. 발전되어서 문재인 정부의 도시 뉴딜 정책이 된 거죠.
리: 환경, 보전에 관심이 많으신 것 같은데, 이번 공약에도 그런 공약이 있나요?
안승남: 쓰레기 소각 문제요. 저는 무조건 소각해서 버리는 게 아니라 제대로 분해해서 버리는 게 필요하다고 봐요. 그래서 최대한 재활용을 늘리고, 또 재생하는 방향을 시민 참여를 통해서 이룩해서 결국 쓰레기 소각장을 없애야 한다는 생각을 하고 있죠.
리: 가능할까요? 지원을 엄청 많이 해줘야 할 것 같은데요.
안승남: 쓰레기를 소각하기 위해 들어가는 비용만큼 지원하면 되는 거죠. 재활용, 재생 등을 지원해서 소각에 들어가는 예산을 줄인다면 그만큼 이쪽에 지원하는 거죠.
리: 재선 때는 어떤 정책이 기억에 남으세요?
안승남: 경제과학기술위원회에 가서 소상공인, 전통시장, 골목상권, 마을기업 살리기 같은 일들을 계속 진행했어요. 구리시로 볼 때는 전통시장에도 예산확보를 해서 전통시장에서 공연하고 발전되게끔 했고, 경기도 벤처창업 지원센터를 유치했죠. 건물을 임차해서 공간을 마련해서 벤처나 IT에 관심 있는 사람들이 필요하면 혼자서도 들어와서 사무실에서 연구하고 공부할 수 있도록 했죠. 지금은 8개 기업이 들어와 있고, 개인 입주자도 꽤 많고요.
또 메르스 사태 때는 구리시에 메르스 때문에 봉쇄된 건물이 두 곳이었어요. 그런데 봉쇄가 되면 병원이나 건물주는 보상이 되지만, 소상공인이나 임차인은 보상이 안 돼요. 그래서 이런 공익 목적으로 건물을 폐쇄했을 때 소상공인, 임차인을 지원하는 조례를 최초로 만들었죠. 예를 들어서 인질극이 벌어졌을 때나 메르스로 건물을 폐쇄해야 할 때 거기에 임차인, 소상공인에 대해서는 지원해주는 조례를 만든 거죠.
리: 안전과 관련해서 굉장히 디테일한 걸 좋아하시네요. 좀 기발한 정책을 잘 내시는데 이번에고 기발한 정책을 준비하신 게 있나요?
안승남: 구리시의 가장 번화한 곳 중 하나가 꽃길이에요. 여기가 완전 술집 골목이에요. 구리시 한강 변에서 하는 코스모스 유채꽃 축제가 유명해요. 그런데 축제 때 거기에 먹거리라든가 볼거리가 다 거기로 몰려버리면 구리시의 골목 상권이 한가해지는 거죠. 그래서 꽃은 한강으로 보러 가지만 먹거리와 볼거리 전부 구리 시내에서 축제하자, 하고. 또 도시농업 협동조합을 만들어서 주말이면 천연잔디 심은 팔레트를 꽃길에 쫙 깔아버리는 거예요. 그러면 주말마다 천연잔디를 밟으면서 축제를 하는 거죠. 또 이렇게 천연잔디 도시농업을 활성화하면 왕둔천변 축구장에도 천연잔디를 쫙 깔 수 있죠.
리: 구리월드디자인시티는 뭐에요?
안승남: 그게 남경필 도지사가 취임 99일째 되는 날 와서 연정사업으로 발표됐던 거예요. 그게 거의 다 진행되어서 행정자치부의 중앙투자심사만 통과하면 그린벨트 해제가 완료되고 사업이 진행될 수 있었는데, 박영순 시장이 선거법으로 아웃되면서 유야무야되고 있죠. 그 후에 바뀐 백경현 시장이 일을 안 했고요.
리: 자기 일 아니니까요?
안승남: 어제 토론회에서 박영순 시작이 200억을 낭비했다 그러면서 비판했는데, 정작 본인은 임기 동안 구리시를 위해서 얼마를 썼냐고 물어보니까 쓴 돈이 없대요. 말을 못 하는 거예요. 남이 쓴 걸 혈세 낭비라고 막 몰아붙이는데, 이미 들어간 돈이면 끝까지 일해서 만들 생각을 안 하고 도중하차를 하려고 하니까 답답한 거죠. 이게 지금 사업이 또 축소된 상태라 외국인 투자자들이 요구하는 경제성 분석, 마스터플랜 마련 같은 걸 해야 하는데 전혀 안 하고 있으니 답답한 거죠.
리: 그러면 갈 길이 머네요.
안승남: 갈 길이 먼 게 아니라 행정절차는 90% 이상 됐어요. 그 이후를 안 하니까 문제죠. 그러니 투자자들은 시장이 의지도 없는데 우리가 왜 관심을 가지느냐 하면서 다 떠나버렸죠. 시장이 되면 다시 투자자들의 신뢰를 회복할 수 있는 노력들을 진행하면서 마스터플랜, 경제성 분석 같은 것들을 해서 구리월드디자인시티에 남은 절차인 중앙투자심사를 위한 노력에 매진하겠다는 거죠.
시민이 주인인 구리시를 만들겠다
리: 퇴임하시면 어떤 시장으로 시민들이 기억했으면 좋겠어요?
안승남: 일을 마치고, 잘했다고 박수 칠 때 떠나야죠.
리: 뭐… 박수 치면 재선하고 3선 해야죠.
안승남: 그건 아직 제가 계획에 없는 게, 도의원도 한 번 했더니 아직 할 일이 남은 거예요. 그래서 재선했는데 두 번 하고 나니까 의원으로서 할 수 있는 것에는 최선을 다했지만 늘 집행부에서 걸려요. 그래서 ‘아, 시민이 제대로 참여하고 시민의 의견을 수렴해서, 조금 늦게 가더라도 시민들과 함께 지방자치, 지방분권의 역할들을 펼쳐보면 어떨까.’라는 생각이 들고, 또 문재인 정부에서 좋은 기획을 하는데 거기에 맞게 구리시의 지방자치를 펼쳐보자는 계획이 있다 보니까 나선 거죠.
리: 사실 4년 임기 안에 할 수 있는 게 있고, 일단은 기반을 닦아서 장기적으로 해야 하는 게 있잖아요? 그 둘로 나눠서 설명하자면 중점적으로 할 게 어떤 게 있을까요?
안승남: 구리월드디자인시티나 테크노밸리도 일단은 장기적 과제겠지만, 당장 뛰지 않으면 아무것도 실체가 드러나지 않죠. 그래서 일단은 당선되어서 인수위 구성하면 단기적 과제와 장기적 과제를 다시 재편성해야죠.
바로 할 수 있는 과제 중 하나가 장기 미집행 도시계획 시설 문제에요. 여러 문제로 진행되지 않는 사업이 계속 시민들에게 보상도 해주지 않고 묶여있는 게 많거든요. 지역경제 활성화와 재산권 침해 해소를 위해 이걸 다시 주민들에게 돌려주는 거죠. 반대로 구리시의 권한이 아니라 경기도나 중앙정부의 인허가가 필요한 건 시간이 오래 걸리는 문제죠. 구리디자인월드시티가 그런 거고요.
또 구리시의 큰 땅 문제가 세 군데 정도 있어요. 수택고등학교 옆에 아파트형 공장 부지로 확보했던 3,000평을 주상복합으로 개발할 거고, 또 전통시장 옆에 구 시민회관 부지에 전통시장을 활성화할 주차장 부지가 있는데 여기도 주차장만 넣을 게 아니라 주상복합을 지어서 주차 대수도 늘리고, 수익성 확보도 하는 거죠. 마지막으로 구리등기소 옆에 넓은 땅이 있는데 여기는 또 구리역 역세권이기 때문에 민자로 개발할 사업성이 있죠.
리: 설계해야 할 게 굉장히 많네요.
안승남: 그럼요. 이 땅들이 사실 제가 본 것만 해도 10년 넘게 방치되었는데 왜 그런 부분들을 해오지 못했는지 답답한 거죠. 이재명 도지사 후보가 성남시장 시절 공영개발로 이익을 많이 만들어냈잖아요. 구리시도 공영개발을 통해 이익을 확보하는 방향으로 생각하고 있어요.
또 구리시에 서울외곽순환도로, 구리-포천 고속도로 같은 길이 뚫리면서 아파트 소음 피해가 심각해요. 근처 주민분들이 계속 소음문제에 대한 문제제기를 했지만 해결을 못 해줬어요. 소음을 막아줄 수 있는 터널형 방음벽 같은 대책을 세워야죠.
리: 사실 보니까 구리가 강남까지는 굉장히 가까운데, 철도나 이런 게 많은 도시는 아니잖아요?
안승남: 구리와 인근 남양주 쪽이 계속 개발이 되면서 교통난이 점차 심각해지고 있죠. 일단 워커힐 호텔로 나가는 방향은 가변차선제를 도입해서 출퇴근 시간대 소통을 원활히 해줘야 하고, 구리 암사대교-용마터널이 구리시에서는 바로 서울로 진입하기가 어려운 구조거든요. 이것도 연결해야 하죠.
또 조금 더 욕심내면, 9호선이 고덕까지 연장 개통되면 바로 그 위가 토평동이란 말이에요. 그래서 구리월드디자인시티가 제대로 진행되면 토평동도 많이 개발될 거거든요. 그래서 9호선을 더 연장해서 토평 디자인시티역까지 이어서 다시 남양주 양정으로 가는 계획을 제안하고 있어요.
리: 되기만 하면 대박이겠네요. 9호선이면 서로 다 끌고 가려고 할 텐데요. 마지막으로 자신의 삶을 다른 것에 비유하자면 뭐인 것 같나요?
안승남: 오뚜기요. 쓰러져도 또 일어나야죠.
리: 별로 많이 안 자빠진 것 같은데요(…)
안승남: 어휴, 많이 자빠졌어요. 이게 선거 떨어지고 이런 것도 있지만 일을 하다 보면 이거 도대체 안 될 것 같아서 주저앉아야 할 때가 많은데 생각하고 고민하고, 주변에 도움을 요청하고, 주변에 아이디어를 모아서 다시 시작하면서 늘 넘어져도 다시 일어나서 계속하려고 해왔죠.
리: 이번에 떨어지셔도 또 하려고 하시겠네요.
안승남: 그래도 2010년 이후로는 계속 당선되었죠. 일할 수 있을 때 열심히 일해서 구리시가 지방자치의 좋은 모범이 되도록 할 거예요. 대한민국에 좋은 일들이 많은데 여기에 구리시가 혼자 퇴보하지 않으려면 정말 일 열심히 하는 모습으로 시민들과 함께하려고 합니다. ‘시민이 주인이다! 시민과 함께 만들어가는 청렴 구리를 위해 파이팅!’이라는 마음가짐으로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