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록빛 헬멧을 쓴 청년이 오토바이를 타고 서울 이곳저곳을 달린다. 고객이 주문한 음식을 따끈하게 배송해주는 배달 라이더 청년이 여기 ‘부릉 스테이션’에 모였다. 배달 라이더 청년이 보고 느낀 서울을 말하기 위해서다.
지난 20일, 박원순 서울시장은 서울시장 후보로서 공약 정책을 발표했다. 주요 공약 중 하나는 ‘청년이 꿈꾸는 서울’이었다. 하지만 많은 청년이 청년정책 이야기를 들으면 일단 의심부터 하곤 한다. 그동안 청년의 현실과 동떨어진 정책을 자주 봤기 때문이다.
박원순 캠프는 청년정책과 실제 청년 사이의 괴리감을 줄이기 위해 서울에 거주하는 다양한 청년을 만난다. 오늘은 바로 라이더 청년이 ‘공약 프로듀서’가 됐다. ‘주인공은 나야 나! 나야 나!’ 청년정책의 주인공인 청년이 박원순 서울시장 후보의 청년정책을 직접 검증하고 평가한다.
과정은 꽤 귀엽다. 카드를 통해 공약을 알아보고 평가한다. 가장 먼저 라이더 청년은 동물이 적힌 카드와, 형용사가 적힌 카드를 받았다. 자기소개 시간과 자신이 느끼는 서울을 설명하는 시간이다. 동물 카드를 하나 뽑아 자신을 비유해서 설명하고, 형용사 카드를 하나 뽑아 이상적인 서울의 모습을 얘기한다.
라이더들은 멋쩍어하면서도 유쾌하게 자신을 소개했다. 이동섭 씨는 ‘개’ 카드로 자신을 설명했다. ‘개 팔자’처럼 상팔자같이 살고 싶단다. 이상적인 서울의 모습으로는 ‘여유로운’ 카드를 뽑았다. 서울도 ‘개 팔자’처럼 살짝 여유로운 팔자이길 원한다고 했다. 서울이 시간적·물질적으로 이모저모 청년에게는 각박한 곳처럼 느껴진다고 말했다. 여유로운 서울이 된다면 ‘결렬하게 아무것도 안 하고 싶다며’ 웃음기가 서린 농담을 건넨다.
지금, 청년들의 최고의 고민은?
훈훈한 자기소개가 끝난 뒤 한차례 눈빛이 바뀌었다. 청년정책이 적힌 카드를 건네받은 라이더들은 진지하게 카드를 살핀다. 마음에 드는 정책을 고르라는 주문을 받은 그들의 손이 분주하다. 가장 많은 표를 받은 정책은 ‘청년 보금자리’다. 역시 청년 스스로도 청년 주택난을 가장 심각한 문제로 느꼈다. 특히 지방이 연고지인 청년들이 서울로 일자리를 잡을 경우 발생하는 어려움을 토로했다.
전세로 옮겨보고 싶어서 시중은행에 전세자금대출을 알아봤어요. 그랬더니 1,200만 원이 나오더라고요. 담보가 없다 보니 그런 거죠.
대구가 고향인 부릉(메쉬코리아) 라이더 이동섭 씨는 비서울권 출신 청년들의 주택문제를 강조했다. 월세가 비싸면 사람이 살 정도는 돼야 하는데 그 정도도 아니라며 한숨 섞인 목소리를 냈다. 서울주택도시공사에 따르면 서울지역의 ‘가처분소득대비 주거비율’은 우리나라 평균인 23.6%를 훨씬 넘는 30%다. 한 달 소득 중 30% 이상을 주거비로 지출한다는 의미다. 가뜩이나 소득이 적은 사회초년생, 취준생, 학생들의 비율이 높은 청년 계층의 경우 주거비가 큰 고민거리일 수밖에 없다.
박원순 서울시장은 서울시 공적임대주택(공공임대·공공지원) 24만 호 중 14만 5,000호를 대학생과 신혼부부 등 2030 청년세대에 집중적으로 공급할 것을 공약으로 내세웠다. 역세권 청년주택 8만 호를 1인 가구 청년과 신혼부부에 공급하고, 세운상가 청년·스타트업 등 입주자 특성을 고려한 사회주택과 신혼부부용 공동체주택 같은 다양한 수요자 맞춤형 주택이 1만 3,000호 공급할 것을 약속했다.
저는 사실 SH(서울시 행복주택)에 당첨이 됐거든요.
이동섭 씨의 얘길 들은 맥도날드 라이더 박정우 씨는 자신의 이야기를 덧붙였다. 박정우 씨는 운이 좋게도 서울시의 청년 주택 정책에 혜택을 받은 케이스다. 그는 서울시의 청년주택, 청년통장 등 다양한 청년정책들이 존재하고 잘 시행된다는 점에서 긍정적인 평가를 했다.
다만 정보접근성에 대한 문제제기를 했다. 좋은 청년정책이 있다 하더라도 소수의 사람만 정보를 알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고졸이나 전문대 학생과 같은 정보소외계층한테까지 정책 관련 정보가 도달하기 쉽지 않다고 말한다. 경기도가 G-bus를 통해 정책 홍보에 적극적인 것처럼 서울시도 홍보에 힘을 더 쓰면 좋을 것이라 조언했다.
박정우 씨는 1등 공약으로 서울형 유급병가를 골랐다. 서울형 유급병가는 질병에 따른 경제적 위험으로부터 일하는 가정을 체계적이고 상시적으로 보호하기 위한 정책이다. 연·월차가 없는 일용직, 특수고용직, 개인사업자가 입원 시 1인당 연 15일의 병가를 부여하고, 서울시 생활임금 수준의 일당 지급한다.
박정우 씨는 유급병가 같은 좋은 제도가 생기길 바라는 한편, 실제 현장에서 실효성이 있을지 염려했다.
산재를 받아봤더니 정말 편하더라고요. 하지만 대다수 라이더가 살짝 다치는 경우엔 참고 일하는 경우가 다반사죠.
최근 박정우 씨는 사고 후 산재처리를 받았다. 라이더 직업 특성상 크고 작게 다치는 경우가 많지만, 대부분 산재처리를 부담스러워 한다고 했다.
한국의 경우 산재처리를 할 경우 사업주에 대한 관리 감독이 즉시 들어온다. 산업안전을 위반한 경우에는 사업체가 처벌받을 위험이 있어서 사장님들이 산재처리를 하기 꺼리는 경우가 많다. 유급병가도 산재처럼 현장에서 시행되는 데 어려움이 있지 않을까 걱정을 내비쳤다.
또 다른 부릉 라이더인 이영찬 씨는 ‘임금 체불 ZERO‘를 최고의 공약으로 꼽았다. 임금체불 정책은 신속한 임금체불 조사 및 해결을 위한 임금체불신고센터 설치를 약속하는 공약이다.
광역 및 25개 자치구에 임금체불신고센터를 설치하고 노무사와 전문가를 채용해 운영한다. 노동 행정의 지방분권을 통해 중앙정부가 가진 ‘근로감독권한’ 중 임금체불 조사권한을 지방정부에 이양하도록 건의한다. 노동부가 검토 중인 임금채권보장기구를 적극적으로 알리고 이와 연계해 노동자 생계안정을 보장한다.
이영찬 씨는 고향에서 근로계약서를 쓰지 못해 체불된 임금을 돌려받는 데 어려움을 겪은 친구들의 사례를 여럿 경험했다. 아직까지도 많은 회사가 근로계약서를 작성하지 않은 채 노동자를 고용하는 현실에 안타까워했다.
동시에 모든 회사가 근로 계약서를 작성하도록 공격적인 정책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노동자들이 자신의 권리를 제대로 챙길 수 있는 사회가 조성되기를 바랐다.
배달 라이더 청년의 눈으로 본 서울
라이더만이 보고 느낄 수 있는 정책들도 자세하게 나왔다. 맥도날드 라이더 박정우 씨는 아쉬웠던 공약으로 미세먼지를 뽑았다. 야외 노동자에게 포커스를 맞춘 미세먼지 공약이 필요하다고 얘기했다. 미세먼지 문제에서 가장 취약한 계층 중 하나가 라이더, 청소 노동자와 같은 야외 노동자이기 때문이다.
현재는 미세먼지가 심각할 경우 야외 노동자 개인이 사비를 털어 마스크를 구매할 수밖에 없다. 사업자에서 의무적으로 라이더에게 헬멧을 제공하는 것처럼 미세먼지가 심한 날에는 마스크를 제공하는 것을 의무로 정했으면 좋겠다고 덧붙였다.
미세먼지를 넘어 날씨 관련한 정책이 필요하다는 색다른 시선을 내놓기도 했다. 한파에 야외 노동자들에게 방한용품을 제공하거나, 장마 때는 아쿠아슈즈 같은 대비 물품을 사업체에서 제공하는 것이다. 특히 날씨에 큰 영향을 받는 배달 업종의 경우, 기상청을 기준으로 날씨에 따른 추가 수당이 존재했으면 하는 바람도 들을 수 있었다. 부릉의 경우 라이더 대상 쇼핑몰을 통해서 소속 라이더들이 마스크 등을 저렴하게 구입할 수 있도록 지원한다.
이동섭 씨는 보험문제와 도로법에 대해 아쉬움을 토로했다. 이륜차의 경우 출퇴근. 무상운송(음식배달). 유상운송(퀵·배달대행) 3가지로 보험체계가 나뉜다고 설명했다. 보험을 유상운송으로 들면 똑같은 책임보험임에도 가격이 너무 높아 라이더에게 큰 부담이 되는 것이다.
이동섭 씨는 ‘부릉’에 직접고용 돼 회사에서 보험을 들어 부담이 적지만, 다른 대부분의 개인 프리랜서 라이더들에겐 큰 걱정거리라고 지적했다. 보험료 부담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출퇴근으로 보험을 들 경우 실제로 사고가 나더라도 보험회사에서 보상을 받기도 어려워진다. 값비싼 보험 문제는 라이더 시장의 진입장벽 높이는 또 다른 요인이 되고, 청년 실업 문제로도 이어질 수 있다고 말했다.
이륜차 지정차로에 대한 불편함도 호소했다. 현재 도로법에 의하면 이륜차는 도로의 최하위 차선만 이용할 수 있다. 과거 이륜차를 우마차(소나 말이 끄는 차)와 같은 성능으로 여겼기 때문이다. 이륜차가 교통약자이기 때문에 제일 끝에서 달려야 한다는 의미다. 그러나 오히려 최하위 차선을 이용하는 지정차로제가 라이더에게 큰 위험으로 다가온다.
갓길에서 주행할 경우 정차하는 택시와 많이 부딪히게 되고, 보행자와 사고도 피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이동섭 씨는 실제로 덤프트럭이 다가와 차선을 피해줬더니 지정차로 위반으로 경찰에게 걸렸던 경험을 털어놨다. 지정차로는 라이더의 현실과 동떨어져 있는 제도임을 강조했다.
라이더에 대한 시민 의식의 전환도 필요하다고 입을 모았다. 이륜차에 대한 기존 세대의 잘못된 편견 때문에 도로 위 보복운전을 받는 경우가 많다고 얘기했다. 자동차의 경우 사방이 막혀 있는 구조지만, 이륜차의 경우 살짝 넘어지기만 해도 ‘팔 하나 다리 하나 부러지기 쉽다’고 토로했다. 이륜차나 라이더에 대한 고정관념이 사라져야 한다고 말했다.
고객들의 재촉으로 인한 어려움도 이야기했다. 퀵서비스의 경우 프리랜서로 개인 사업자가 배달량을 조절할 수 있지만 요식업계의 경우는 다르다. 배달 시간이 한정돼 있으므로 속도를 높일 수밖에 없게 된다. 결국 시간 재촉은 라이더들의 사고로 이어진다.
다양한 청년이 꿈꿀 수 있는 서울이 되길
라이더 청년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20대 개새끼론’을 떠올렸다. ‘정치에 관심이 없는 어린노무새끼들 때문에 나라가 망한다.’는 주장이다. 요즘 시대에 누가 그런 생각을 하느냐고 의아할 수도 있겠지만, 아직 메이저 일간지에서도 자주 쓰는 논리 중 하나다.
라이더 청년들의 이야기를 들은 오늘, 정말 ‘20대 개새끼’가 있는지 오히려 궁금해졌다. 내가 만난 라이더는 사회와 자신의 삶에 대해 깊이 고민하며, 말하고 싶은 게 많은 청년들이었다. 지금까지 청년들이 이야기하지 않았던 게 아니라, 오히려 우리 사회가 이야기할 기회를 주지 않았던 게 아닐까?
항상 청년 실업 얘기를 보면 취업을 하지 못한 대졸자 얘기더라고요.
‘청년’의 정의가 매우 협소하게 설정돼 있다는 박정우 씨의 지적이었다. 진정한 청년정책이 무엇인지 다시 한번 생각해 보는 계기가 됐다. 서울에는 대학을 다니거나 대학을 나온 청년만 존재하지 않는다. 서울에 사는 청년의 수만큼 다양한 청년의 삶이 존재한다. 좀 더 넓은 시각으로 청년을 정의하고 그에 맞는 정책을 만들어야 하는 이유다.
이를 위한 노력의 일환으로, 박원순 캠프는 라이더 청년 이외에도 화장품 판매 노동자, 특성화고등학교를 졸업한 사회인 청년, 웹툰·드라마·소설가 지망생인 청년을 만나 이야기를 듣는다. 정말 청년이 꿈꾸는 서울은 어떤 곳일까?
이제는 40~50대 정책 결정권자들이 임의로 청년을 상상해서 ‘보기만 좋은’ 청년정책을 꾸려서는 안 된다. 현실과 동떨어진 청년정책은 더 이상 먹히지도 않을 것이다. 청년이 자유롭게 꿈꾸고 살아 숨 쉴 수 있는 서울이 되도록, 더욱 현실적이고 다양한 청년정책이 수립되기를 희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