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환(ㅍㅍㅅㅅ 대표, 이하 리): 국회의원 3번이나 되셨는데, 왜 4선 도전을 안 하셨어요?
정장선(평택시장 후보): 우선은 계속되는 정쟁이 힘들었어요. 또 하나는… 국회에서 법안이 어떻게 통과되냐면, 소위에서 다 결정되어서 나오면 상임위 통과되고, 그렇게 수백 건이 쏟아지면 본회의에선 그냥 내용도 모르고 누르는 거예요. 그런 것에 대해서도 회의가 많이 들었죠. 그래서 정치도 아예 그만둘까 하다가, 우리가 평택의 기초를 많이 만들었으니까 완성한다는 측면에서 단체장을 해야겠다고 마음먹은 거죠. 노무현 대통령님이 미군 기지 이전을 하며 평택의 운명을 바꾸는 큰 작업을 했어요. 평택은 수도권 맨 끝이라 규제는 규제대로 다 받는데, 서울에서 거리가 머니까 또 정작 할 수 있는 건 없었거든요. 평택지원특별법을 만들어서 규제를 풀고, 정부에서 18조 지원사업을 통해서 돈을 받고, 산업단지 430만 평을 받아서 삼성이 오게 하고요.
리: 정쟁 이야기를 하셨는데, 국회선진화법도 만드는 데 직접 관여하셨어요?
정장선: 남경필, 홍정욱, 김진표 이런 사람들하고 같이 했죠. 매일 몸싸움을 하는 상황이었으니 이걸 막아보자 했던 거예요. 현장에 가보면 정말 달라요. 막 때려 부수고, 1년에 절반을 싸우고… 지금은 신경전은 있어도 그런 건 없어졌잖아요.
리: 3선하고 더 이상 안 한다고 했을 때 조선일보에서 칭찬 기사를 냈을 정도였어요. 정말로 더 하고 싶은 생각은 없으셨나요?
정장선: 이번에 20대 총선 기획단장과 선대본부장을 맡았어요. 국회에서 회의할 일이 많으니 한 10개월간 국회를 자주 출입했어요. 그렇게 국회를 들락날락거리면서도, 한 번도 국회로 돌아가야겠단 생각이 안 들었어요.
리: 그 후에 국회의원 후보로 나가신 적 있지 않으세요?
정장선: 불출마를 했는데, 2년 후에 새누리당 의원이 선거법 위반으로 적발되어서 보궐선거를 하게 됐어요. 당에서 사람이 없으니 나가라고 해서 나간 거죠.
리: 막상 해보니까 지방선거가 더 힘들다면서요?
정장선: 힘들다기보다는 요구가 많아요. 시장은 행정을 맡고 있으니까 얽힌 이해관계도 많고, 단체, 협회, 주민분들이 각종 요구사항을 많이 말씀하시죠. 성격이 다른 것 같아요.
리: 의정에서 행정으로 넘어가시는 건데, 어떠세요? 적성에 맞을지 고민은 없으세요?
정장선: 의정은 법을 만들고 행정부를 감시하는 역할을 하는 거지만, 행정은 직접 수행을 하는 거죠. 행정은 집행하면서 성과를 낼 수 있기 때문에 보람이 있지 않을까 생각해요. 사실 어느 게 좋다 나쁘다 하는 건 좀 웃긴 것 같아요. 우리가 너무 서열화에 익숙해져 있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고요. 국회의원, 도의원, 시의원 이렇게 서열을 나누는 거죠. 그런 게 싫어요. 그래서 저는 국회의원 할 때도 시의원들 의정활동에 거의 관여를 안 했어요. 지금도 국회의원 중에는 지방의회 의장을 누가 하고, 상임위원장을 누가 하고 그런 걸 지시하는 사람들이 많아요.
리: 대학교 다닐 때는 어떠셨어요? 78학번이신데, 돌 던지거나 써클활동하거나 이런 건 안 하셨나요?
정장선: 그냥 평범했어요. 박정희 대통령 때 휴교령을 많이 해서 학교에 거의 안 간 것 정도만 기억나고 별다른 기억이 없어요. 졸업 후에는 청와대에 8년 동안 근무했어요.
리: 젊은 나이에 엄청나게 큰 경험을 하게 됐네요.
정장선: 그렇게 청와대에 있다가 지방자치 할 때 일종의 하방 운동이 있었어요. 서울에 있는 사람이 지방으로 내려가자, 이제 지방선거에 참여하자고 해서 무소속으로 출마해서 도의원이 됐죠. 만 37세였으니 젊은 나이였지요. 당시 지방의회는 대부분 연세 드신 유지분들이 돈도 많이 쓰고 그런 문화였어요. 그래서 새로운 문화를 만들어보자고 시작해서, 젊은이들과 교류하고 젊은 자원봉사자들과 모여서 열심히 했죠. 67% 득표로 당선됐어요.
리: 그런데 노태우, 김영삼 정부에서 행정관 경험이 있으면, 민주자유당으로 출마했으면 편하게 갈 수 있었지 않았어요?
정장선: 그때는 정당을 할 생각을 아예 안 했었어요. ‘할 바에는 무소속으로 나가든지 안 하겠다’였죠. 그래도 이길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었거든요.
리: …아니, 그 자신감은 어디서 나온 건가요?
정장선: 아니, 그런 느낌이 있었어요. 도와주는 젊은 사람들도 있고. 어쨌든 그렇게 당선되면서 기대는 많이 불러일으켰는데, 막상 실제로 도의원이 할 수 있는 게 거의 없었어요. 보좌진도 없고요, 명예직이라 기본적으로 무급이고 수당도 많아 봐야 100만 원인데 경조사비로 몇백만 원이 나가는 거예요. 진짜 이러다 집도 팔겠다 싶어서, 그때부터 경조사비 못 낸다고 선언을 했어요. 밥도 얻어먹고 다녔죠. 처음에는 “그러려면 뭐하러 했냐”고 많이들 뭐라고 했는데 나중에는 다들 ‘그런가 보다’ 하더라고요. 그렇게 버티면서 의정활동을 열심히 했죠. 포럼 만들어서 토론도 하고, 환경신문도 만들고, 그린스카우트 같은 것도 했어요.
리: 처음에 도의원할 때도 이 지역을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하셨나요?
정장선: 특히 정치문화를 많이 바꿨죠. 제가 지역 신문 세 군데에서 도의원 대상으로 우수의원 BEST 5를 꼽으면 꼭 다 들었어요.
리: 정말 부지런히 하셨네요.
정장선: 그런데 그렇게 한 5년 하다 보니까 회의가 드는 거예요. 역할이 제한되어 있고, 경제적으로도 너무 힘들고. 도의원 할 동안엔 아내 수입만으로 살았어요. 그래도 아내가 한 번도 돈 이야기를 안 했는데, 어느 날은 울면서 할 이야기가 있다고 하는 거예요. 해보라니까 생활비 좀 보태달래요. 얼마나 보태주면 되냐니까 20만 원이라도 좀 보태 달라고 하더라고요… 정말 회의가 많았죠. 그때 집사람도 교사 초년기였고, 외환위기 후라 급여도 많이 줄었었어요. 그 말 들으면서 안 그래도 많았던 고민이 더 깊어졌죠. 그런데 그때가 총선 즈음이었어요. 그래서 총선에 나가서 한 번 일을 저질러봐야겠다 생각한 거죠.
리: 총선 비용은 어떻게 하셨어요?
정장선: 집사람한테 지금까지 해온 게 아까우니까 마지막으로 해보고 안 되면 정치를 떠나겠다고 했죠. 생각할 시간을 달라고 하더니 결국은 허락했어요. 마지막이란 약속을 하라면서요. 그래서 연말에 돈 1,000만 원을 대출받았어요. 예전에 카드사에서 한 번 무담보 무보증 대출 연락이 왔던 게 기억나서. 그걸로 1999년 12월부터 선거운동을 시작했는데… 사무실도 선배가 공짜로 쓰라고 내줬고, 집기도 후배들이 다 가져온 걸로 마련했는데도, 그 1,000만 원을 두 달 반 만에 다 써버렸어요.
리: 당시 1,000만 원이면 큰돈이기는 하지만… 선거에 쓰려면 금방 다 쓰죠.
정장선: 공보물 만드려면 사진을 찍어야 되는데 그 돈도 없어서 어렵게 어렵게 찍었죠. 그런데 2월에 민주당에서 후보로 나가지 않겠냐는 연락이 오는 거예요. 전혀 생각도 않고 있었는데요. 당시에 민주당 후보가 약했는데, 젊은 사람이 뛰어다닌다는 소리를 듣고 여론조사를 넣어봤더니 이기는 걸로 나온 모양이에요. 그래서 생각 끝에 수락하고, 당선됐죠.
리: 왜 들어갔어요?
정장선: 경제적 어려움도 있었지만, 어차피 국회의원은 결국 정당을 선택해야 될 테니까요. 그래서 결정을 하게 됐죠.
리: 반대로 신한국당에서 제안이 왔으면 받았을 것 같아요?
정장선: 신한국당은 어차피 신인들한테 안 줘요. 당시에는 민주당이 여당이었는데, 다들 공천받으려고 난리였어요. 그런데 저는 오라고 제안을 받았으니 진짜 행복한 거죠.
평택의 역사와 함께 한 국회의원 생활 12년
리: 처음에 국회의원 되니까 어땠나요? 갑자기 권력자가 됐잖아요.
정장선: 그런 생각은 안 해봤어요. 국회의원들이 행사 나가면 시장부터 시작해서 막 몇 명씩 데리고 다녔어요. 그런데 저는 다 혼자 다녔어요. 그래서 당원들한테 엄청 반발이 심했어요. 왜 저렇게 초라하게 다니냐고.
리: 아니, 당원들이 무슨 관계가 있다고 반발해요?
정장선: 그래도 우리 국회의원인데 왜 이렇게 초라하게 다니냐는 거죠. 그땐 막 지방자치가 시작됐을 때라 시장 권력이 엄청났는데도, 국회의원이 시장 데리고 다니고 그랬죠.
리: 국회에서는 상임위는 주로 어떤 쪽으로 일하셨어요? 다양하게 여기저기 다 있었던 것 같은데요.
정장선: 평택항 개발 때문에 처음에는 농림해양위원회에 들어갔어요. 당시에는 평택항이 거의 텅 비어있었거든요. 평택항 예산도 많이 받아서, 평택항의 기초를 제가 만들었다고 자부하고 있어요.
리: 어떻게 예산을 잘 따낼 수가 있었죠?
정장선: 저는 아무런 배경이 없었어요. 386도 아니었고. 아무도 도와준 사람이 없었죠. 그냥 죽어라 발로 뛰어다녔어요.
리: 평택항 하나로 지역에서는 완전 스타가 됐겠네요?
정장선: 많이들 알아주셨죠. 또 그때는 농업이 어려울 때라, 제가 농특위원장을 맡아서 정말 전국을 열심히 돌아다녔어요.
리: 그때 노무현 대통령 탄핵 정국도 있었잖아요? 어땠어요?
정장선: 사실 그때도 회의가 들어서 국회의원 출마를 안 하려고 했어요. 총선기획단장이던 김한길 씨를 찾아가서, “나는 국회의원 출마 안 하고 시장 나갈 테니까 명단에서 빼달라”고 하니까 처음에는 농담하는 줄 알죠. 진심이라고, 빼달라고 계속 그러니까 엄청 놀라더니… 다음날 그냥 저를 공천 발표해버리더라고요. 그렇게 또 출마한 거죠.
리: 두 번째 임기에는 평택항처럼 기쁜 일이 아니라 미군 기지처럼 힘든 일이 생겼잖아요.
정장선: 그때는 제가 평택 미군 기지 이전 때문에 건설위원회를 들어갔어요. 신도시 만들고, 미군 기지 수용하는 문제가 다 관련되어 있으니까요. 건설위에서 4년 동안 일하면서 특별법을 대표발의해서 만들고, 산업단지 430만 평 만들고, 대기업이 내려올 수 있도록 수도권 규제를 풀어서 삼성이 내려오게 만들고, KTX 평택역 서게 하고 다 제가 했죠.
리: 그중에 제일 힘든 건 뭐였어요? 두 번째 임기 때 굵직한 일들이 많았는데요.
정장선: 워낙 충돌되는 이해관계가 많았어요. 수용 문제도 컸고요. 그때 2,000만 평이 수용대상이었어요. 그러니까 주민 반발이 심하고, 주말마다 데모하고, 의견 들어주고 설득하느라 힘들었죠. 또 이명박 정부 들어와서는 금융위기가 터지면서 보상이 늦어지고, 공사 여건이 나빠지니까 업체가 철수하면서 주민들은 또 불만이 많아져서 더 힘들었죠.
리: 쌍용자동차는 세 번째 임기 때죠? 그때는 어땠나요?
정장선: 이명박 정부가 막 밀어붙였죠. 해고해버리고 공장 폐쇄하겠다는 식으로 요. 해고된 사람들이 살려달라고 하고, 저도 어떻게든 한 명이라도 더 살리려고 계속 뛰어다녔죠.
리: 그게 조율이 거의 불가능할 것 같은데요. 어떻게 해결하려고 노력했나요?
정장선: 권영길 의원하고 같이 계속 뛰어다녔는데, 정부가 더 이상은 안 받아들이겠다고 해서 결국 그 수준에서 합의하게 됐어요. 그때 경찰은 밀어붙여서 진압하려고 하고, 노조는 옥쇄저항을 하고 거의 전쟁터였죠. 겨우 대파국은 면했는데, 아직 복귀 못 하신 분들이 있죠…
리: 이런 문제가 제일 어려운 것 같은데, 최악의 상황은 피했지만 노동자들을 구제하는 것은 성공하지 못한 상황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정장선: 우리가 뭘 할 수 없는 상황이었죠. 그때 정부는 그랬잖아요. 노무현 정부라면 그렇게 안 했을 텐데요. 그래도 해고를 최소화할 수 있도록 하고, 수용을 하려고 했을 텐데 이명박 정부는 그냥 밀어붙였죠. 항상 사측 입장을 대변하고, 힘의 논리를 적용했죠.
리: 3선할 때는 역시 쌍용차가 너무 크고… 다른 것은 또 어떤 게 있었나요? 초선, 재선 때는 굵직한 개발 사업들이 많았는데요.
정장선: 3선 할 때는 금융위기가 오고 보상이 미뤄지니까 지역에서 반발이 워낙 심했어요. 경제자유구역 620만 평 개발을 김문수 지사가 시작했는데 막판엔 돈 없다고 손을 떼버렸죠. 그러니까 지역 주민들 반발이 더 거세졌어요. 지역은 그런데, 또 그때 18대 국회 절반은 농성하면서 싸웠으니까요. 방송법, 4대강 개발 사업, 한미 FTA, 이런 정쟁이 너무 많았어요. 그러면서 건강도 망가지고, 회의도 많이 들어서 멈춰야겠다고 생각했죠.
리: 그런데 사실 의견 가지고 싸울 수밖에 없는 공간이잖아요?
정장선: 그렇죠. 그런데 그게 논쟁이 아니라 물리적으로 농성하고 싸우고… 국회에서 밤을 새워가면서 난투극 벌이고… 이런 게 일상화되어버렸죠. 그때는 서로 이야기를 안 들었죠. 타협 자체가 불가능했던 것 같아요. 정부와 여당이 무언가를 할 때 야당에도 의견을 묻고 설득해야 되는데 그런 게 너무 없었죠. 그래서 선진화법을 만들었던 거고요.
리: 3선에서 물러나시고는 그러면 좀 평화로운 시기를 보내셨나요?
정장선: 좀 여유로운 시간을 보내며 책도 읽고 그랬죠. 그런데 갑자기 재보궐선거가 생기면서 당에서 저보고 좀 나와달라고 해서 나오게 됐죠. 당에서 요구하니 나가긴 했는데, 끝까지 출마하지 말았어야 한다는 생각도 들어요. 불출마 선언을 했으니까요…
리: 처음으로 떨어져 보니까 어땠어요?
정장선: 떨어지고 이기고 하는 건 그냥 받아들이면 되는 거죠. 떨어져서 야인생활을 한다는 게 자기를 돌아보는 계기가 되어서 정치하는 데 큰 도움이 될 수도 있고요. 6년이라는 공백기가 저한테는 좋았다고 생각해요. 이전에는 너무 바쁘게 살았어요. 계속 정쟁을 버티고, 주민들의 민원 속에서 워커홀릭처럼 살았어요. 시간이 비면 내가 뭔가 해야 하는데 안 하고 있는 건가 싶을 정도였어요.
리: 거의 강박관념이네요…
정장선: 워커홀릭이었죠. 저한테 시장을 맡겨서 할 기회를 준다면 최선을 다할 거예요. 하지만 이번에 안 되면 저는 정치를 완전히 떠나서 새로운 인생을 살아갈 거예요. 제가 이번에 출마하면서 계속 기도하는 제목이 이거예요. “하나님 뜻대로 결정해주시면 저는 어떤 것이든 기쁨으로 받아들이겠습니다”라고요. 선거는 최선을 다하지만 모범적인 선거를 할 거예요. 당선되면 마지막 정치 노정이 될 수도 있을 것 같아요.
리: 시장 한 번 하고 은퇴하시게요…?
정장선: 된다면 재선까지는 생각하고 있어요. 하지만 이후에는 은퇴할 생각이에요. 오래 할 생각은 없어요.
할 수 있는 것만 말하는 성실한 시장으로 기억에 남고 싶다
리: 출마한 이유는 뭘까요? 떠난 다음에 평택이 마음에 안 들었나요?
정장선: 노무현 정부 때 여러 성장 기반을 만들면서 평택이 지금 성장하고 있지만, 성장이 빠르게 진행되면서 부작용도 많이 생겼어요. 지금 여기는 3개 시군이 통합된 지역이기 때문에 지역 간 불균형이 크고, 이에 대한 불만이 확산되고 있죠. 또 난개발이 심화되면서 주차문제, 교통문제가 심각하고, 미세먼지 같은 환경도 많이 안 좋아요. 인구 유입이 제대로 안 되는 상황에서 택지는 많이 개발해서 집값이 폭락하고 있고요.
리: 요즘 세상에 집값이 폭락하고 있어요? 놀라운 곳이네요. 그럼 그 문제는 어떻게 해결할 수 있나요?
정장선: 앞으로 고민해봐야죠. 물량을 조정하거나… 그런데 이미 너무 많이 계획이 되어 있어서요… 인구는 많이 늘지 않는데 아파트 개발 계획이 너무 많아서 그게 고민인 거예요. 또 개발이 너무 빨리 되다 보니까 교육이나 문화 같은 게 따라가지 못하는 데 대한 불만도 많고요.
리: 사실 이번에 지방선거 나오는 분들이 개발 공약을 거의 안 외치고, 환경, 문화, 교육 이 세 가지에 주로 초점을 맞추더라고요. 어떻게 보면 시대정신이 이쪽으로 넘어갔다는 생각도 드는데, 그쪽으로는 어떤 생각을 하고 계세요?
정장선: 평택은 일자리가 공장 위주로 되어 있어요. 지금 관광이나 서비스업에 대한 인프라가 없어요. 뭘 좀 하려면 서울로 나가야 하고, 관광지도 거의 없고요. 도시가 성장하려면 산업간 균형이 이뤄져야 하거든요. 인프라를 많이 채워야죠. 삶의 질 부분에서도 개발이 능사가 아니라는 의식의 전환이 필요해요.
리: 놀 거리가 너무 없다는 부분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세요?
정장선: 두 가지로 나누면 청년이 갈 곳과 가족이 갈 곳이죠. 우선은 청소년과 청년들이 갈 곳, 쉴 곳, 계발할 수 있는 곳을 많이 만들려고 해요. 특히 미군부대 앞에 다문화 문화 공간을 만들어서 문화지대로 만들고 싶어요. 축제도 하고요. 또 평택항 주변도 수출은 많이 하는데 주위에 아무것도 없어요. 그래서 서비스 산업을 많이 개발하려고 하죠. 배만 왔다 갔다 하는 게 아니라 먹고 놀고 쉴 곳을 같이 만들어야 항만이 제대로 발전하잖아요.
리: 산업화에다가 문화를 덧씌우는 거군요.
정장선: 그리고 4차 산업 관련해서 1인 창업도 많이 지원하려고 해요. 이런 것들을 통해서 젊은이들의 일자리도 많이 만드는 거죠.
리: 교육 평준화 문제는 어떻게 생각하세요?
정장선: 해야죠. 그런데 여기는 사학이 많아서 어느 정도 기초를 만들어놓고 해야지 그냥 하면 불만이 많아지죠. 사전에 준비를 해서 부작용을 최소화해야 해요.
리: 정책들 말씀하시는 것들을 들으면 정책 하나하나를 조심스럽게 접근하시는 것 같아요.
정장선: 정책을 했다가 후유증이 생기면 되돌릴 수가 없거든요. 그런 부작용이 생기지 않도록 미연에 방지를 해야죠. 평준화가 좋다고 추진했다가 교육여건이 나쁘다고 평택 시내로 이사하고 그러면 어떻게 하겠어요. 여건을 만들어놓고 해야지 그냥 툭 해버리면 후유증이 더 커질 수도 있으니 그렇게 하면 안 된다는 거죠.
리: 2016년 총선에서 꽤 역할을 하셨잖아요? 그때 이렇게 성과가 좋을 거라고 예상을 하셨어요?
정장선: 예상은 못 했죠. 어려울 거라고 생각은 했지만 당을 어떻게든 최선을 다해서 살려보자는 의지로 했던 거죠.
리: 왜 총선 때 분위기가 역전되었다고 생각하세요?
정장선: 시대의 흐름이 바뀌기 시작한 거죠. 당시 공천 파문에서 친박계가 너무 독선적으로 하면서 염증이 생긴 거죠. 이에 대한 반발, 저항이 생기면서 저희 당에 표가 온 거라고 생각해요. 저희가 잘했다기보다는 절대권력의 오만함에 대한 심판이었다고 생각해요. 앞으로 더 잘해야죠.
리: 굉장히 냉정하시네요. 촛불은 어떻게 보셨어요?
정장선: 총선이 절대권력에 대한 1차 심판이었다면, 촛불은 2차적으로 저항이 폭발한 거죠. 이제는 우리 사회에서 독단적, 독선적 권력이 의미가 없다는 경종을 준 것이라 생각해요. 이것은 누구에게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에. 소통, 통합을 통해서 국정이든 시정이든 끌어가야 한다는 신호를 준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리: 문재인 시대의 시대정신은 소통, 분권으로 보시는 건가요?
정장선: 정부가 잘하고 있다고 봐요. 지방분권 강화를 계속 말하고 계시고, 남북문제에서도 중재의 주축으로서 자랑스러운 성과를 내고 있죠. 인내하고 설득하면서 정말 잘하고 있어요. 나머지는 내치인데, 경제, 사회 분야에서도 소통과 통합을 통해서 잘해나가야 되겠죠.
리: 분권에 있어서 어떻게 지방에 권한을 이양해야 된다고 생각하세요?
정장선: 지금 지방자치단체에 권한이 부족하고, 재정적 독립도 취약해요. 그런 걸 해결하려는 노력이 필요하죠. 앞으로 책임이 커지면, 주민들 의견을 반영해 신중하게 판단하고, 지방의회와 잘 협력해 나가야죠. 제가 국회에 있으면서 싸우고 독단적으로 하는 것에 정말 싫증이 나 있기 때문에, 제가 되면 의회, 시민들과 잘 소통해 모범을 보여야 한다고 생각해요.
리: 여러 공약을 내놓으셨는데 이거 하나만큼은 내가 정말 잘할 수밖에 없다, 내가 최고다 하는 정책은 뭘까요?
정장선: 여러 개 있습니다만, 환경 문제가 워낙 심각하죠. 지금은 담당 부서가 산업환경국으로 산업에 종속적인 개념이라, 환경국을 따로 만들 예정이에요.
리: 시민들에게 어떤 시장으로 기억되고 싶으세요?
정장선: 성실하게 했다고 기억되고 싶어요. 사실 다할 수는 없죠. 하지만 성실하고 시민들의 목소리를 경청하려고 노력했다고.
리: 기존의 평택시와 본인 퇴임 이후의 평택시는 어떻게 바뀌어 있을까요?
정장선: 지역 균형 문제, 삶의 질 문제를 개선해 좋은 도시의 기초를 닦고 싶어요. 그래서 다음 시장이 편하게 일을 해서, 성공할 수 있게 하고 싶어요. 제 재임 기간에 다 완성하는 게 아니라 길을 잘 닦아놓고 싶은 거죠.
리: 마지막 질문드릴게요. 자서전을 쓴다면 자기 자신을 어떤 사람이었다고 쓰실 것 같아요?
정장선: 사실 저는 출판기념회를 한 번도 안 했어요.
리: 진짜요? 돈 걷어야 되잖아요.
정장선: 사실 강매 비슷한 거고… 그런 게 싫었어요. 그래서 아마 책은 안 쓸 것 같지만 그냥 말씀드리자면 ‘성실하게 일을 했다’ 그 소리를 듣고 싶어요.
리: 참 묵직하네요.
정장선: 정치가 대단한 것도 아니고요, 큰 것도 아니에요. 그냥 해보니까 성실하게, 열심히, 떠날 때 다음 사람이 잘 할 수 있도록 하면 되는 게 아니겠냐 생각해요.
리: 정치 왜 하세요?
정장선: 제가 볼 때 성실하게 했다는 것은 사실 함축적이라고 생각해요. ‘열심히 성실하게 했다’, 그런 평가가 다른 정치인들한테도 모범이 됐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어요. 시민들에게 정치가, 정치인이 필요하고 중요한 것이라는 느낌을 남기고 싶어요. 그래서 출마했고, 그렇게 시장 임기도 마무리하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