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칙과 상식을 주창하는 대통령 후보가 당선되고 새로운 세상에 대한 기대가 때 이른 봄기운처럼 엄동의 겨울을 감싸고 있던 2003년 1월 9일 새벽, 경남 창원의 드넓은 두산중공업 공장 한 귀퉁이에서는 아무도 모르는 불꽃이 피어올랐다. 사람들이 출근도 하기 전이었던지라 불길은 태울 것을 마음껏 태웠다. 그 자리에서 발견된 것은 나이 쉰의 노동자 배달호의 검게 탄 시신이었다.
1월 9일 새벽 5시 그는 채 잠이 덜 깬 아내와 두 딸에게 뽀뽀를 하고서 출근해서 인적 없는 공장을 걸었다. 한때 잠바 안에 호루라기 몇 개씩을 들고 다니면서 조합원들 모이게 했던 ‘호루라기 사나이’답게 마지막으로 삐리리릭 호루라기를 불어봤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동료에게 전화를 걸었다. 하지만 아무 말도 남기지 않았다. 그저 목소리만 듣고 싶어서였을까. 전화를 걸었으면 말을 하라고 다그치는 동료의 채근을 뒤로 하고 그는 전화를 끊는다. 이윽고 그는 세상과 스스로를 단절하는 불을 당긴다.
무던히도 인간적인 사람이었다. 흔히 “결혼식은 빠져도 되지만 상갓집은 가는 것”이 도리라고 말은 하지만 번다하다는 이유로, 또는 멀다는 핑계로 넘어가는 일이 것이 보통이다. 그런데 배달호는 대공장답게 전국에서 모여든 동료들의 상갓집을 빠뜨리지 않고 찾아다녔다고 한다. 그와 함께 다녔던 동료가 질색을 했을 정도로…… 상갓집에서는 훌라를 쳐서 돈을 잃어 주거나 따더라도 술값으로 탕진(?)하는 사람이었고 틈만나면 나이 어린 동료들 집으로 초대해서 ‘소주보다는 좀 좋은’ 술상을 내며 고참 노동자 티를 내는 사람이었다.
그런 인심 좋은 고참 노동자가, 주변에 사람이 드글드글 들끓었던 사람이 아무도 모르는 시간과 아무도 없는 장소에서 외롭게 몸에 불을 당겨야 했던 가장 큰 이유 중의 하나는 ‘손배 가압류’라는 매우 새롭고 획기적인 회사의 노조 탄압이었다. 구사대를 동원해서 피를 보거나 심야에 농성장을 습격해서 옆구리에 식칼을 찌를 것 없이, 법원에 “노사분규 때문에 입은 피해를 보상하라”는 소송을 내고 가압류 판정을 받아 노동자들의 임금은 물론 집과 가재도구까지 꽁꽁 묶어 놓음으로써, 평화적이고 신사적으로 사람의 피를 말릴 수 있었던 것이다.
배달호가 분신한 1월 9일 다음 날 1월 10일은 월급날이었는데 그가 받을 수 있는 돈은 2만 5천원이었다. 그것이 ‘법’이었다. 그 법의 무서움을 경험한 노동자들은 그 법의 칼을 목에 쓴 배달호 근처에도 가기 싫어했고 배달호는 “사람들이 나를 피해…..”라고 아내를 보고 허탈하게 웃어야 했던 것이다.
전 세계적으로 노동쟁의에 민사적인 책임을 묻는 것은 드물다. 이유는 ILO(국제노동기구)의 말대로 “어차피 파업은 기업의 이익을 저해할 수 밖에 없다. 하지만 법이 노동권을 보장하는 것은 기업의 이익 대신 얻게 되는 노동자의 권익이 더 큰 공익적 가치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치자. 여기는 대한민국이니까 법치국가니까. 하지만 “사람이 미래”라고 틈만 나면 광고하는 두산의 사후 행각은 정말로 평온한 심기로 보아주기 어려웠다.
고인의 자동차에서 나온 유서가 너무나 침착하다는 이유로 ‘유서 대필설’을 흘린 것은 그 시작일 뿐이었다. 1991년 분신정국에서 사람 하나의 인생을 파멸로 몰아넣었던 그 올가미를 또 드리운 것이다. 세상에 목숨을 끊기로 작정한 사람 그 누가 자신의 유서를 굳이 남에게 대신 쓰게 한단 말인가.
그것이 먹혀들지 않자 사측은 남편의 죽음의 이유를 알고 그 죽음을 불러온 이유에 저항하려는 결심이 굳었던 부인을 배제한 채 고인의 어머니와 누이들을 공략한다. “사실상 노조가 죽인 것”이며, “부인이 바람이 나서 고인이 괴로워했다.”는 식으로 가족들을 꼬드겼고 돈까지 떠안기며 유혹한 것이다. 남편 잃은 아내는 시어머니에게서 “너 때문에 아들이 죽었다.”는 소리를 들으며 가슴을 찢겨야 했고, 다니던 교회를 떠나야 했고, 이웃으로부터 경원당해야 했다. “사람이 미래다”고 주장하는 기업에게 ‘사람’이란 무엇이었을까. ‘미래’란 무엇이었을까.
고인은 사회주의자도 아니었고 혁명을 꿈꾸던 사람도 아니었다. 근무 시간 전 집합해서 정강이 차이며 앉아 일어서 하던 시절에 노동자가 되어 대한민국 노동법이 보장하는 노동자의 권리를 매개로 보다 나은 삶과 가치를 향해 노력하던 숙달된 고참 노동자 중의 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불법 파업을 했다는 이유로 그 흔한 폭력 한 번 행사하지 않은 배달호는 징역 1년에 집행 유예2년의 전과자가 되었을 뿐 아니라, 30억이라는 천문학적 임금 가압류를 당해야 했다. 군부독재 정권도 아니고, 요즘 말 많은 친기업정권 때도 아닌. 김대중 정권과 노무현 정권의 바톤 터치 기간에 말이다.
배달호의 죽음으로 시작된 2003년에도 많은 사람들이 죽어갔다. 한진중공업 김주익 노조 위원장 역시 ‘손배가압류’의 희생자가 되어 크레인에 매달려 있다가 목매달아 죽었고 또 다른 노동자 하나는 아래와 같은 유서를 남기고 몸에 불을 놓았다.
“노무현 대통령님! 얼마나 많은 노동자들이 죽어야 이 나라의 노동정책이 바뀔 수 있겠습니까? 더 이상은 안됩니다. 제가 마지막 희생자가 돼야 합니다. 노동자들과 대화는 외면한 채 오로지 노동자 죽이기로 일관하고 있는 악질 기업주들에 대해서 반드시 정부 차원의 대응이 있어야 합니다. 그것만이 이 나라의 경제를 살리는 길이란 것을 아셔야 합니다. 내내 건강하십시오.” 그때 노무현의 대답은 “분신으로 항거할 때는 지났다.”는 것이었다.
고(故) 노무현을 생각할 때마다 그 사자후가 귀에 울리고 안타까운 마음에 시선이 천정으로 향하면서도 “노무현은 X새끼야.”라고 술자리에서 말하는 친구의 말에 섣불리 반박할 수 없는 것은 배달호로 시작된 죽음의 행진에 대해서 당시의 행정부 수반으로서의 책임을 피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2003년 1월 9일 새벽, 아무도 보지 않는 곳에서 아무에게도 미움 살 일 없이 살았던 한 선량한 노동자가 아무로 모르게 스스로를 불태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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