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고에 갈 뻔했던 소년 농부
이승환(ㅍㅍㅅㅅ 대표, 이하 리): 어릴 때 어디서 계속 자라셨어요?
이재준(고양시장 후보): 충남 아산이죠 뭐. 현충사가 저희 동네입니다. 고등학교는 천안 중앙고등학교를 나왔고요.
리: 공부를 굉장히 잘하셨나 봐요. 몇 년생이시죠?
이재준: 호적으론 1960년생으로 되어 있어요. 실제로는 1959년생.
리: 초중고 시절엔 다양한 유형의 학생이 있는 법인데요. 본인은 어떤 유형의 학생이셨어요?
이재준: 집안일을 도우면서 학교에 다녀야 하는 입장이었어요. 초등학교 2학년 때 아버님이 돌아가셨어요. 집에서 했던 게 처음에는 도토리묵, 그다음에 채소를 하다가 우리나라 소득수준이 높아지면서 비닐하우스에 딸기, 참외를 재배했죠.
리: 그래도 다행히 땅은 있으셨나 봐요(…)
이재준: 그 시절엔 고소득 작물이 없었어요. 쌀에 보리, 밀이 전부였는데 농업기술이 개발되어 비닐하우스라는 것이 나오고 노지에서만 재배되던 딸기나 참외도 일찍 생산할 수 있게 되었죠. 우리 경제가 1970년대 초중반부터, 특히 서울이 소득수준이 높아지며 비싼 과일을 소비할 수 있게 됐어요. 새벽부터 과일을 따서 10시쯤 출하하면 서울에서 그게 다 소비가 됐죠. 나름 쌀농사 말고도 부가소득을 얻을 수 있었어요.
리: 그때가 기억이 나시나요? 어떤 느낌이 들었나요?
이재준: 일을 어머님이 혼자 하시니까, 저희 5남매가 자전거, 리어카로 온양 시내까지 아침부터 배달을 했었죠. 고등학교는 원래 농고를 지망했어요. 담임선생님이 농업 선생님이셨는데, 저 데리고 맨날 과수원 가꾸고 하면서, 농사를 지으라고 계속 꼬셨거든요. 그런데 어머님이 원서를 바꿔 버리셨죠. 농업 하는데 꼭 농고까지 가야 하냐며.
리: 그렇게 고등학교는 다른 도시로 가셨는데요. 어떻던가요?
이재준: 온양과 비교하면 천안은 굉장히 큰 도시에요. 진짜 공부 잘하는 애들이 있더라고요. 전 고등학교 2학년 때부터 자취했어요. 고2 때는 친구 집에서 그 친구 공부도 봐 주고 하면서 자취를 했고, 고3 때는 혼자 자취했고… 사실 고등학교 때까지 학원이라는 걸 다녀본 적이 없어요. 형한테만 투자했어요. 형이 또 공부를 잘했거든요. 반면 딸들은 투자 안 하고. 그런데 형이 대학을 안 갔어요. 농민운동을 했는데…
리: 충청도에서요? 그 당시엔 전농도 없던 시절 아닌가요?
이재준: 그때 우리 집이 한겨레 신문에 나왔어요. 전국 최초로 쌀 국가 수매를 주장하며 야간에 벼를 군청에 다 쌓아놨는데 그걸 쓰레기 차에 싣고 우리 집 앞마당에 다시 버리더라고요. 그게 ‘쓰레기 차에 버려진 농심’으로 한겨레 신문에 대서특필되죠. 지금은 직불금 주고 하지만, 그땐 쌀 수매를 안 했어요. 그런데 그것밖에 농가는 소득이 없으니까. 형은 그렇게 운동하다가, 오래전에 돌아가셨어요. 농민장으로 치렀죠.
리: 형님은 고등학교 때부터 그런 기질이 있었던 건가요?
이재준: 그런 것도 좀 있었어요. 형님이 대학에 갔으면 제가 농사를 지어야 했을 텐데… 제가 대학 다닐 때 점을 한번 보러 갔어요. 점 보는 사람이 이상하다는 거예요. 학운이 없는데 어떻게 대학을 다니는지 이해를 못 하겠다고. 형이 안 가니까. 너라도 대학 가라고 투자를 받은 게 고3 때 혼자 자취한 거죠.
리: 그럼 공부는 열심히 좀 하셨어요?
이재준: 공부가 열심히 되나요, 뭐. 3학년 때 시작한다는 것도 쉽지 않고. 대신 좋은 친구들이 있어서 따라 했는데 사실 당시 시골에서 서울에 예비고사 보고 들어오는 게 어려웠어요. 천안이라고 해도 그렇고, 아산은 더 그랬고. 그래도 어떻게 정릉으로 와서, 국민대를 들어가게 됐어요.
격동의 신입생 시절부터, 투머치토커 학생회장이 되기까지
리: 그런데 그게 하필 1979년이었어요.
이재준: 1979년… 아마 3월 2일일 거예요. 입학식 날 서클 소개가 있었어요. 원래 후진국 문제 연구회, 당시 청문회란 이름으로 개칭한 서클이 있었는데 이승만, 박정희 독재정권 하에서 학원의 진정한 정의가 무엇인가 연구하는 곳이었어요. 그러니까 짭새들이 안내하는 2학년 선배를 잡아가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그날 서클에 입회하죠.
리: 아니, 잡혀가는 걸 보고 입회했다고요?
이재준: 사실 유신 정권에 대한 건 고등학교 때부터 이미, 학교에서 안 가르쳐줘도 공부하다 보면 다 보이는 거잖아요. 첫 사건이 옥중문학인의 밤이었어요. 1979년도 5월에 기독교방송국에서 열려요. 김남주, 송기숙 시인이 고문당해서 위독하시니 치료를 받을 수 있게끔 해달라는 거였죠. 김대중 선생님은 못 들어왔고. 김영삼 대통령이 들어왔나 모르겠네. 행사를 진행하려는데 밖을 둘러싼 전경들이 문을 밀치고 들어오려 그러고, 우린 200명쯤 되는데 그걸 막으면서 행사를 진행하고… 대한민국의 현실이 이렇게 절박하다는 걸 느꼈죠. 그리고 농활 거부 투쟁을 해요.
리: 농활을 왜 거부한 거죠?
이재준: 그땐 학도호국단이 주최하는 관제 농활이었어요. 그때 우리가 서클 연합회를 만들어서, 의식 있는 서클들이 주체적으로 농활을 하자고 했는데 그것도 또 차단되죠. 그러다 학교 축제를 맞이한 게 10월 26일이에요.
리: 기억력이 굉장히 좋으시네요? 아! 1979년 10월 26일이라면…
이재준: 축제에 가수 이은하가 오고 그랬어요. 그런데 이런 시국에 무슨 축제냐, 그래서 단상을 점거하려는데 ROTC가 다 둘러싸고 물리적으로 제압을 하는 거예요. 그렇게 쫓기다가, 뚝섬에서 자취 중인 친구와 술 마시고 여인숙에서 잤어요. 그런데 아침 4시인가 5시에 호외요, 하는 거예요. 이 새벽에 무슨 호외가 있냐 하고 봤더니, 박정희 서거. 이 자들 또 거짓말하는 거 아냐, 하고 일찍 학교를 갔더니… 문을 다 막았더라고요. 종암동에 다 같이 모여서 TV를 봤어요.
리: 대학교 1년간의 이야기만으로 이렇게 다이나믹하다니. 그 이후에는 어떤 일이 있었나요?
이재준: 1979년 말 쯤 제가 정각원이라는 절에서 자취했어요. 거기에서 총학생회 부활 모임을 했죠. 김대중 씨도 이제 들어와서, 다 같이 한신대 강연도 가서 김대중 대통령을 외치기도 했는데… 5·18이 일어난 거죠. 당시 저는 친구들과 5월 15일에 봉천동에서 모였는데 학생들은 자제하란 애기도 나오고, 결국 서울역 회군이 벌어졌어요. 그리고 5월 17일에 계엄령이 터졌죠. 그 후로는 상황을 몰랐어요. 지금 생각해 보면 5월 20일쯤 되었을 것 같네요. 광주가 이상하다 그래서 몇 명이 내려가다가 논산 지날 때쯤 다 체포돼서 서울로 돌려보내 져요. 이미 광주 고립 작전이 시작되었던 거죠.
리: 어떻게 하셨어요, 그때?
이재준: 서울로 가는 차를 대기해놓고 젊은 사람은 무조건 다 보내는 거예요. 그래서 돌아와 있다가 한신대 선배가 처음으로 무등산을 넘어와 서울 쪽에 광주 사건을 기록해 알려왔어요.
리: 5·18 소식을 듣고 변화가 있었어요?
이재준: 그 이후엔, 어떤 것도 할 수 없었던 것 같아요. 공부방 같은 데서 모이면 잡아가니까, 사회과학서적 공부 모임을 경복궁에서 한 적도 있어요. 거긴 걔네들이 안 잡거든요. 그러다 1981년 4월 18일에, 부활과 4월 혁명이라는 주제로 함석헌 선생님과 송건호 선생님이 향린교회에서 강의를 하죠. 우리는 일찍 들어갔는데 나머지 분들은 차단당해서 못 들어왔어요. 심지어 송건호 선생님도 못 들어오시고. 강연 끝나고 신세계 분수대 앞에서 철야하다가 해산하고 돌아가고. 그러다 바로 5월 7일 군대 가서 3년의 공백이 생기죠.
리: 군대에서는 운동권, 빨갱이라고 따로 다루고 그런 건 없었습니까?
이재준: 그런 건 없었어요. 저희 집을 보안사가 다 수사했는데 그 수사한 친구가 제 중학교 친구예요. 그 친구가 이제 하는 이야기가 ‘지금은 너 때문에 자기가 자랑스럽다’고 해요. 당시 아산 보안대에서 관리하는 사람이 두 명이었는데 그중 하나가 자기 친구라는 게 너무 고맙다고. 군대 있는 동안에는 중대장이, 사적 유물론 비판 같은 책 읽고 독후감 쓰라고 한 게 다예요. 사상교육을 시킨 거죠.
리: 놀라운 일들이 많았네요.
이재준: 근데 그 양반도 독종은 아니었어요. 그 중대장한테 고마운 게, 그렇게 지침이 내려왔는데 그거 한 권만 한 거잖아요. 맨날 이상한 책 가져다 놓고 독후감 쓰라 그러면 그것도 고문이잖아요. 당시 제 주특기가 105, 박격포에요. 박격포는 본부에 있지를 않거든. 맨날 어디 현장에 있잖아요. 근무를 나가면 살 것 같죠. 안에 들어가면 독후감 써야 하고.
리: 제대 후에는 분위기가 좀 바뀌어 있던가요?
이재준: 1983년 10월쯤 제대를 했어요. 나와선 후배들과 공부 모임을 했죠. 그런데 제가 예비역이다 보니, 뭔가 준비해야지 않냐 물어봐도 별 얘길 안 하더라고요. 그래서 1984년 4월 18일에도 그냥 도서관에 있는데 후배들이 다급하게 뛰어왔어요. 5·18 비디오를 상영하고 시국 집회를 하기로 했는데 다 도망간 거예요. 어떻게 해야 하냐 그러길래, 체육관에 있지 말고 광장으로 나가라고 했어요. 그렇게 광장에 모였는데 발언하는 사람이 없어요. 그래서 마이크를 잡았죠. 제가 말은 잘 못 하는데 선동가 기질이 있어요. 7-8시간을 혼자 이야기한 거예요.
리: 그동안 안 잡혀갔어요? 그게 더 신기한데요?
이재준: 교내니까요. 그렇게 수십 번의 집회에서 마이크를 잡게 되죠. 그러다가 후배들이 총준위(총학생회준비위원회)를 만들길래 저는 뒤로 빠졌어요. 그런데 총준위에서 총학생회장을 선출한 걸 정부에서 불법으로 간주를 하죠. 그러면서, 1984년 말 정권이 학원 자율화 조치를 취하며 내년에 다시 직접선거로 총학을 선출하면 그건 인정하겠다고 해서 임시로 총학을 했던 친구들은 부모들이 잡아가지고 군대를 보내요.
리: 정말 재밌는 시대네요(…)
이재준: 그땐 그랬어요. 죽으니까. 죽은 사람이 한둘이 아니니까. 정권의 유화조치로 총학생회가 부활하면서 제가 학생회장이 되었는데 학내문제보다는 대외 문제를 보게 되죠. 저희가 속했던 데가 서울 네 개 권역 중 북부 지평이었어요. 그러다 저희 지평에 오수진 씨를 현대백화점 앞 커피숍에서 만나죠.
리: 압구정 현대백화점이요?
이재준: 네. 쟤네들은 엉뚱하게, 우리가 맨날 골방에 있을 거라고 생각하니까. (웃음) 거기서 만나면서 세계인권선언일에 우리도 성명을 내기로 했거든요. 그런데 서울대에서 발표하기로 한 건 불발되고, 우리만 밤새워 대자보를 써서 붙인 거예요. 저쪽에선 기자회견 하는 데가 노출되는 바람에 못 한 거죠. 김춘형이란 동기가 있어요. 그날 ‘나 무슨 일 있을지도 모르니까 나 어디 잡혀가면 집사람한테 얘기 좀 해 달라’고 그랬어요. 그런데 정작 아무 일도 없더라고.
리: 잠깐만요, 사모님은 어쩌다가 만나셨어요?
이재준: 같은 동아리 후배였어요.
리: 좌빨의 길로 끌어들이고 이제 결혼까지 하게 된 거군요(…) 뭔가 이것저것 다 해봤는데 안 잡혀 들어갔네요?
이재준: 그렇죠. 잡힌 건 몇 번 돼요. 예를 들어 1984년 말에 연대 집회 갔다가 잡혀서 마포 경찰서에 갇혔어요. 그런데 마포경찰서장이 선배야. 그래서 다 풀려났어요.
행복하게 산 적이 없었던, 어떤 후배의 죽음
리: 졸업할 때쯤 어떤 길로 가야 할지 여러 고민을 했을 텐데요. 홀어머니도 계시고, 형은 운동을 했고. 어떤 생각으로, 어떤 길을 선택하셨어요?
이재준: 그때는 먹고 살아야 하잖아요? 쌍용정유란 곳에 취직했었어요. 그 이후 울산에서 딱 5년 살다 왔어요.
리: 그때는 멀쩡하게(?) 사셨어요? 노조 만든다든가 하지 않으셨어요?
이재준: 그때는 행복하게 살았습니다(웃음). 그러다 여기 와서, 1989년 당시 김윤기라고 성남 덕진양행 노조위원장이었다가 분신자살한 친구가 있어요. 김윤기 열사 장학회를 만들어서 그걸 최근까지 운영했죠. 지난번에 세계 최장기 고공농성을 했던 재능교육 농성현장도 찾아가서 200만 원 드리고. 쌍용차 대한문 앞에 농성할 때도 200만 원을 드리고 했어요. 기아차 노조원들이 인권위에서 노공 농성할 때도 사적으로 200만 원을 드렸고요.
리: 김윤기 열사 장학회를 후보님이 계속 운영해 오신 거예요? 계속 혼자 운영하시는 건가요?
이재준: 처음엔 제가 1년에 200만 원씩을 내서 학생 두 명에게 장학금을 줬어요. 그런데 그걸 어떻게 알고 재학생들이 취재하러 와서, 학교 교지에 나간 거예요. 덕분에 사람들이 많이 오겠다 했는데 안 오더라고요(…). 그래도 몇 사람이 알게 돼서, 힘을 합쳐서 운영해요.
리: 근데 그 당시에 200만 원이면 적은 돈이 아닌데요. 김윤기 열사가 어떤 분이시고, 어떤 관계시길래 이런 걸 만드셨죠?
이재준: 그때는 그게 등록금이었어요. 저희 서클 83학번 후배로, 행동대장 하던 친구죠. 구속됐다 나와서 노동운동을 했어요. 한 번도 행복한 삶을 살아보지 못한 거죠. 덕진양행에서 노동 문제가 일어나자, 최종 협상 과정에서 신나 뿌리고 분신자살을 했어요.
리: 아끼는 후배였을 텐데… 같이 계셨을 때 일어난 일은 아니죠?
이재준: 그렇죠, 저는 울산에 있었을 때니까. 장례식이 금방 끝날 줄 알고 3일 휴가를 내고 왔는데 몇 달을 갔어요. 그때도 느꼈던 것은 그거예요. 대한민국은 엉터리다. 서울대 출신이 죽었으면 세상이 이렇게 외면하지 않을 텐데, 국민대학교 출신이니까 그렇구나. 국회의원이 와도 맨날 장영달 선배 같은 분만 왔어요. 약자들은 항상 외면받아요. 이번 선거 과정에서도 힘없고 빽 없으니 그럴 거예요. 대한민국은 아직도 어떤 봉건사회, 계급사회란 걸 많이 느끼죠.
리: 이건 인생에서 굴곡 정도가 아니라 변곡점이라 할 정도로 큰 경험인데요. 그 이후로는 어떤 일을 하셨어요?
이재준: 서울 와서 장학회를 만들면서 개인사업을 했죠. 피혁. 옛날에는 우리나라가 기술이 없으니 일본에서 수입했고, 우리나라가 기술이 좋아지니까 중국에 수출하고… 이젠 중국이 다 생산하니까 우리가 이제 밀리는. 어쨌든 그 일을 했는데요. 잘 벌 때도 있었는데 IMF 때 자본이 거의 다 뭐…
리: 노동 문제에 민감하시다가 사업주가 되어보니까 어떠시던가요?
이재준: 뭐 무역이니까, 고용 인원이 그다지 없잖아요? 직원이라고 해도, 서류가 왔다 갔다 하는 거고.
리: 근데 중계 쪽은 망해도 그렇게 크게 망할 일은 없지 않아요?
이재준: 60평짜리 창고에 가죽 원단이랑 자재를 사놨는데 이걸 넘기기도 전에 IMF 사태가 난 거예요. 1,000원에 샀는데 100원에도 안 팔리는 거죠. 거의 나앉다시피 했어요. 그 이후 승용차로 한 다발씩 사다가 하면서 재기했죠. 그게 제일 잘 됐을 때가 2002년도인데 노무현을 만난 건 1996년, 1998년.
노무현을 만나, 정치를 시작하다
리: 엥? 갑자기 노무현 이야기가 왜 나오죠?
이재준: 그 이야기가 이제 나와야 해요. 돈도 그럭저럭 버니까 또 운동을 했거든요. 1996년도, 노무현 종로 선거에 사람이 없잖아요. 그래서 거기서 자원봉사를 하게 되죠. 그땐 졌는데 1998년도 보궐선거에 또 나왔죠. 거기서도 4개월 활동을 했는데 이번엔 당선이 됐어요.
리: 1996년에 노 대통령을 처음 본 건데 어떠셨어요? 느낌이라든지, 관계라든지.
이재준: 좋죠. 진실하고 소탈하시고, 그게 매력이죠 뭐. 그리고 2000년도 부산 선거까지 같이했어요. 급여를 받진 않았어요, 그 정돈 됐으니까. 그러다 2002년 대선 때 연청(새시대새정치연합청년회) 덕양 갑 지구 회장을 해요. 그게 처음으로 당에 가입한 계기가 된 거죠.
리: 대선운동할 때나, 혹은 그 전에 선거운동할 때 인상적인 기억들이 좀 있었을 것 같은데.
이재준: 1996년엔 노무현 후보가 연설하면 되게 쨍쨍했어요. 근데 1998년, 사람들이 보면 됐다 생각하니까 이 쨍쨍함이 사라지는 거야. 선거도 좀 기복이 있구나, 당선 가능성에 따라 목소리에 배어 나오는 게 다르다는 걸 느꼈는데. 개인적으로는 그게 있어요. 부산에서 저희가 일정을 너무 빡빡하게 돌리니까 사람 열 명도 없고 그런 데는 좀 빼주고 쉬면 안 되냐 하세요. 저희는 안 됩니다, 차에서 이동할 때 주무세요, 했죠. 그렇게 진실되게, 열심히 했는데 진 거예요. 사실 지지율은 엄청나게 높았거든요. 노무현 후보께서는 지지율 저거 가짜라고, 우리도 안 믿고. 상대 진영에서 김해 평야지대 비닐하우스에서 돈 나눠준다는 첩보를 입수해서 쳐들어가기도 하고.
리: 잡았어요?
이재준: 못 잡았죠. 똑같은 비닐하우스 수백 개 중에 어디서 하는지는 알 수가 없었죠. 어쨌든 그러면서 저도 정치에 입문하는 계기가 됐죠.
리: 그런데 대선 이후 민주당 분당, 탄핵 사태가 있었는데요.
이재준: 그때 제가 처음엔 열린우리당에 안 갔어요. 민주당이라는 지구당이 없어지니까, 당 사무집기를 둘 데가 없는 거예요. 그래서 제가 사업을 하면서 두 칸짜리 사무실을 썼는데 한 칸에 지구당을 옮겨 놨어요. 당원명부랑 상근자가 계신데, 당원으로서 어떡해요. 그걸 유지하다가 나중에 통합할 때 열린우리당으로 가게 되죠. 그것 때문에 유시민 의원이 여기서 정치 할 때 제가 민주당파로 분류된 건데요. 처음부터 넘어갔으면 저도 핵심 주류로, 국회의원 다 했을 거예요. 하지만 민주당을 지킬 사람이 없으니까, 전 평당원일 뿐이지만…
리: 사실 별로 그럴 필요 없었잖아요. 정치인생이 많이 꼬였어요.
이재준: 요새는 진정성이라고 표현하는데, 사실 그렇게 살면 피곤해요. 어쨌든 합당 이후 열린우리당으로 활동하면서, 자영업도 2007년까지 계속했어요. 2006년도에는 지방선거에 도의원으로 출마했다가 낙선하기도 하고요.
리: 왜 낙선했을까요?
이재준: 그때는 뭐 당이… 박근혜 대표가 칼 맞고, 완전 싹쓸이 당했을 때죠.
리: 집에서 뭐라고 안 했어요? 하던 일이나 계속하지 정치는 왜 하냐고.
이재준: 안 그랬어요. 아들만 좀 그러더라고요. 아들이 초등학생, 어릴 땐데 걔가 ‘한나라당 갔으면 됐을 텐데’ 그러더라고요. 아이 입에서 그 얘기가 나오니까 미안하더라고요. 아, 그리고 2002년도엔 제가 민족문제연구소 고양, 파주 초대 회장이 돼요.
리: 어떤 곳인가요?
이재준: 친일인명사전 만드는 단체에요. 저희가 민족문제연구소를 만들 때는 회원이 500명이 안 됐는데 친일인명사전 제작비가 국회에서 삭감되면서 엄청나게 많이 늘어나죠. 또 시민사회진영, 민주노총, 고양시민회, 저, 민주노동당이 같이 이주노동자 내복 보내기 운동, 밀린 월급 받아주기 운동 같은 사업을 했어요. 그때 이주노동자가 강제로 쫓겨나고 명동성당에서 농성하고 그럴 때거든요. 그러다가 2007-2008년엔 고양시민회 정책위원장을 맡아서 시정에 대한 비판, 대안을 제시하게 되고요. 고양시민회 정책위원장으로서의 활동이 2010년 선거 때 많은 도움이 됐죠.
리: 시민단체에서 있었던 여러 에피소드 중에서 기억나는 거 있으세요?
이재준: 노천명 묘지가 여기 있어요. 그걸 전임 시장이 관광자원화 하겠다 해서, 저희가 그걸 무산시켰죠. 그 사람이 친일파니까 할 거면 공과를 다 적어서 하라고 한 거예요. 그리고 내유동에 가면 장벽, 전차 방어선이 있어요. 거기에 장준하 기념비가 있거든요. 매년 한 번씩은 같이 풀베기를 갔죠. 사실 역사나 어떤 정의는 외워서 되는 게 아니거든요. 실생활 속에서 계속 되새겨야 유지되는 것이죠.
리: 고양시 관련해서 활동한 건 어떤 게 있을까요?
이재준: 2007년 일이에요. 외곽순환로 통행료가 6개월 동안 운영하는데 49억 7,000만 원의 수익금이 발생해요. 근데 저걸 국토부가 가져갔어요. 그래서 저건 당신들 몫이 아니고 그만큼 비싼 돈을 주고 다닌 사람들의 몫이다, 해서 그래서 그걸 반환받았어요. 그래서 5,200원으로 책정됐던 통행료가 4,300원으로 900원이 내려갔지요. 10년이 지나 또 요새 인하가 됐잖아요? 방법에선 차이가 있지만, 사실상 그 싸움의 발단과 논리, 자료의 부정확성을 계속 지적해왔던 게 저였죠.
리: 그러면서 2010년에도 또 도의원에 도전하셨어요.
이재준: 네, 그래서 2010년, 2014년에 당선이 됐죠.
도의원이 제일 좋은 것 같아요, 국가 일도 지방 일도 다 할 수 있으니까
리: 도의원이란 위치가 저 같은 사람이 듣기에는 뭔가 애매하게 보이거든요. 권력이 있을 것 같진 않고, 그래도 하려면 뭔가 할 수 있을 것 같고. 어떠셨어요, 직접 해보시니까?
이재준: 도의원이 제일 좋은 것 같아요. 국가 일도 하고, 지방 일도 하고, 다 할 수 있으니까. 결국 어떤 마인드를 갖고 하느냐가 문제에요. 정말 많은 일을 했어요. 최초로 한 것도 많아요. 비정규직 차별금지 및 무기계약직 전환 조례란 걸 만들었죠. 도 및 도 교육청에 근무하는 비정규직이 1만 3,000명이었어요. 그래서 집단 농성하고 그랬던 거잖아요. 그분들을 다 무기계약직으로 전환을 한 거죠. 또 전국 최초로 외국인 인권지원센터를 만들었어요. 5개국어로 동시 통역 가능한 분이 항상 대기하죠.
리: 굉장히 큰일을 하셨네요.
이재준: 또 전국 최초로 GMO 학교급식 의무표시제를 만들죠. 전국 최초로 통신비밀보장 권리증진에 관한 조례를 만들어서 경기도에 1년 2번씩 꼭 조회 건수를 보고하게 했어요.
리: 그런 조례들을 통과시킬 때 사실 맘대로 할 수 없어 어려운 점이 많았을 것 같은데요.
이재준: 지금 최근에 대법원에서 일부 승소 판결을 받아 낸 조례가 있어요. 전자파안심지대 지정에 관한 조례인데, 핸드폰 많이 쓰시면 전자파 때문에 뇌세포에 많이 영향을 미쳐요. 그래서 외국에서는 청소년까지는 이걸 못 쓰게 하거든요. 근데 우리는 아이들한테 키즈폰 주잖아요. 이거 야만이에요. 그런 걸 규제하도록 하는 조례인데, 저희가 통과시킨 걸 보고 장하나 의원이 국회에 입법 발의를 했는데 상정도 못 하고 끝나버렸죠. 통신업자들이 너무나 강고하니까 안 되는 거죠. 또 동료 의원들도 뭐라고 하는데 이런 걸 잘 넘어야 해요. 제가 생긴 건 이래도 동료 의원들이, 제가 사정하면 좀 들어줘요. 여야 구분 없이. 그래서 항상 그분들한테 고맙죠.
리: 도의원으로 계시는 동안에 여러 일을 하셨지마는, 도 전체가 아니라 고양시를 위해서 만든 조례 같은 것도 있나요.
이재준: 고양시만을 위해서 할 수는 없죠. 다만 그런 건 있어요. 미세먼지 집중지구 관리지정에 관한 조례. 버스 중앙차로에 미세먼지 농도가 얼마 이상이면 다 미세먼지 집중관리지역으로 지정해서, 공기청정기 설치하고 셜터 설치해라. 김문수 지사님 시절에 제가 만든 조롄데, 행정부에서 반대하고 그랬는데 제가 이겼어요. 옥상녹화도 마찬가지예요. 이걸 다년생 작물로 해야 되는데 1년생 심어놨다가 다 뽑아버리잖아요. 이걸 의무적으로 하도록 바꾸었고요. 친환경 교통개선지구라는 걸 만들어서 차량을 줄이거나 도로 폭을 줄이는 걸 지원해서 자동차가 도심 내에 못 들어오게끔 했죠. 결국은 내 편리가, 내 소비가 쓰레기예요. 그렇잖아요? 그런데 다들 편리만 생각하고 쓰레기는 생각하지 않죠. 차량 이용량을 줄이지 않으면 미세먼지가 줄지 않아요. 외부적인 요건은 우리가 할 수가 없는 거고.
리: 2012년이면 미세먼지 문제가 그렇게까지 불거지지 않았을 때예요. 어떻게 그 문제에 관심을 갖게 되셨어요?
이재준: 버스 타 보면 죽어나요. 여름 뙤약볕에 아스팔트에서 올라오는 복사열 하면 거의 40도 가까운데, 매연 먹으며 지나가 보세요. 폭도 좁아서 밀치면 다 죽어요. 다른 나라는 대중교통이 우선이에요. 한 차선을 막아서 병목이 생겨도 막죠. 누구의 권리가 더 존중되어야 하는지 생각해요. 대중교통은 편해야 되고, 나는 자가용 끌고 가야 되고, 도로는 내야 되고, 세금은 안 내야 되고… 여러 가지가 다 어긋나고 있어요. 또 GMO 의무표시 할 때는 대단했어요. 학교, 학부모님들 반대하고, 영양사님들도 반대하고.
리: 왜 그럴까요? 학부모들은 사실 그런 거 붙이기를 원하지 않나요?
이재준: 학교 측에서 힘든 거죠. 부모님들은 사실상 학교 측의 입장을 반영해서 말씀하시는 거고.
리: 참 많은 일을 이루셨는데 본격적으로 시장에 나선 이유는 무엇인가요?
이재준: 사실 중앙정치를 생각했는데요. 사실 중앙정치가 할 수 있는 게 없어요. 전부 협상이잖아요. 의회가 만드는 법이 실제 우리 실생활까지 오려면은 한참 걸리고, 거의 와닿지도 않아요. 제가 만든 법안이 100개가 넘어요. 이건 다 시민들 삶에 영향을 미치잖아요. 더 직접적으로 도시의 삶의 형태를, 도시를 바라보는 시각을 바꾸고 싶었죠. 사람들은 신도시, 교통, 일자리, 개발만을 요구해요. 하지만 저희 캠프의 방식엔 투자가 거의 없어요. 지금 있는 사람들이 어떻게 행복한 삶을 살 수 있을까 하는 게 첫째죠.
리: 근데 여기가 땅값 안 오르기로 전국에서 가장 유명한 지역 중에 하나잖아요. 근데 사람들이 교육열도 높고 소득도 나쁘지 않다 보니, 굉장히 압박이 심할 것 같은데.
이재준: 그래서 생각을 좀 바꿔봤어요. 4년이 지나면 주민의 50~60%가 바뀐다고 해요. 어쩔 수 없는 이사 수요도 있겠죠. 하지만 그 밖에는 내 삶이 풍족해서 내가 이사 안 가면, 내가 안 팔면 자연히 가격이 올라가는 것 아닌가. 그래서 콘셉트가 그런 쪽으로 간 거죠.
리: 여기 굉장히 오래 사셨는데 어떤 점이 불편하셨어요?
이재준: 불편하다기보다… 진짜 절실한 요구가 있는 사람들이 있어요. 예를 들어 1-2km 걸어 나와서 버스를 타야 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그럼 그 사람들에 대한 교통수요를 맞춰주는 게 우선이지, 내가 강남으로 가는 데 빨리 가야 되는 것이 우선일까 하는 의문이 있어요.
리: 사실 그런 점에서, 고양시는 신도시라 불리는 일산과 비일산의 굉장히 갈등이 심하지 않겠습니까? 교통 얘기 간단하게 하셨는데, 산업 문제는 어떻게 접근하려고 하세요?
이재준: 일자리도 4차산업혁명이다 해서 일자리를 많이 만들면, 그게 꼭 좋은 건가 의문을 제기할수 있는 거죠. 그 일자리가 고양시민의 자리가 아니라, 전문적인 외부인들의 일자리인 거예요. 그럼 여기에 재원을 투자했을 때 고양시민들에게 들어오는 혜택은 뭐냐는 문제가 생기는 거죠. 우리 고양이 원하는 산업은 무엇인가, 4차산업혁명만이 아니라 정말 여기서 일했던 분들이 할 수 있는 그런 게 뭘까 고민하는 거죠. 첨단 산업보다 물류, 소상공인, 은퇴자를 위한 사회적 기업 같은 개념이에요. 지금 누리버스 같은 공약을 보면 사회적 기업을 만들어서 마을 주민들이 마을 기사가 되는 버스회사를 만드는 건데, 그런 식으로 조금 더해볼 수도 있지요. 그리고 고양시에 대형 유통매장이 27개에요. 10만에 하나씩만 있어도 흑자 내기가 힘든데 그만큼 소상공인들은 어려워진 거죠. 소규모 점포의 2-3인 고용이 다 사라지는 거예요. 이 생태계를 어떻게 지킬 수 있을지도 고민을 하고요.
도시의 패러다임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는 시장이 되고 싶다
리: 지금 말씀하시는 패러다임 전환 자체는 굉장히 올바르다고 생각을 하는데요, 문제는 이걸 현실적으로 어떻게 할 수 있을까요? 누리버스 정도 외엔 별로 안 나올 것 같거든요.
이재준: 공유공장이란 게 있어요. 소규모 기업들이 물건을 팔려면 박람회에 출품도 해 보고, 시제품을 500개든 1,000개든 만들어서 어디 보내주기도 하고 해야 하는데, 그런 걸 만들 데가 없어요. 3D프린터를 비롯해 장비나 설비를 갖춰놓고 누구든지, 언제든지 활용할 수 있게 하는 거죠. 또 사회적 기업 하시는 분들도 공통된 얘기가 지원만 해주지 말고 기반을 좀 만들어 줬으면 좋겠단 얘기를 해요. 제일 어려운 부분이 임대료잖아요. 그래서 비교적 싼 원도심 쪽 상가를 갖다가 공공임대상가로 제공하는 정책도 경기도에서 해 봤어요.
리: 어땠나요?
이재준: 수요가 너무 많아요. 그런데 너무 고급화된 곳에만 있어요. 그런 것이 아니라 사실상 빈 사무실을 한 섹터를 빌려서 창업공간을 제공하면, 하나의 단지가 되고 자기들끼리 네트웍이 되잖아요. 젊은 사람들이 활동하니까 지역도 활성화가 되고요.
리: 그런데 지금 고양시에서 많이 얘기하는 게 우리가 맘대로 할 수 있는 게 없다, 광역시가 아니기 때문에. 그래서 개발도 맘대로 못 하고 그린벨트 어떡하냐, 6중 규제다, 이런 얘기가 많은데요.
이재준: 그건 맘대로 못 하지만 원도심 디자인은 다시 할 수 있죠. 이제 신도시를 건설하는 건 지양하고, 원도심을 어떻게 다시 일으켜 세우는가가 더 중요하다고 봐요. 일산신도시도 조금 지나면 원도심이 돼요. 이 원도심을 다시 리모델링해야지, 또 옆의 땅을 개발해버리면 이 땅은 어떻게 될 것인가 고민하기 시작한 거죠. 고층 건물도 마찬가지예요. 이걸 100년 후에는 누가 철거할 거냐, 철거 비용은 후대의 몫인데… 합의가 필요한 거죠.
리: 전주시장님 뵈었을 때랑 이야기가 비슷한데요. 전주가 지금 문화와 산업을 잘 버무린 대표적인 도시가 되어가고 있잖아요. 고양도 10년 전부터 여러 시설을 유치했는데, 그렇게까지 재미를 보고 있는 것 같지는 않아요.
이재준: 공공시설이나 자족시설이 방향을 잘못 잡았지 않나 생각을 해요. 자족시설 용지로 빼놓은 걸 업자들이 사다가 10년 동안 놀리면 그 용도 제한이 풀려요. 거기에 30층짜리 50층짜리 다 아파트를 지은 거죠. 자족시설이 다 주거용으로 변질된 거예요. 이러면 이 토지 소유권이 맞는 거냐, 이런 생각까지 드는 거죠.
리: 그래도 전전 시장, 강현석 시장님이 킨텍스, 한류월드, 종합운동장 등 많이는 지었잖아요. 이걸 어떻게 해야 할까요?
이재준: 킨텍스 같은 경우 흑자라고 하는데, 제 관점에선 거의 흑자가 아니에요. 감가상각이 제대로 되어있는 건지, 대손충당금은 제대로 충당을 하는 건지… 노후화되면 헐고 다시 짓거나, 리모델링을 해야 하잖아요. 그걸 적립 않고 전부 수익으로 편성을 해 버리면 이익이 나는 것처럼 보이죠. 하지만 50-60년 계속 가려면 일정 부분을 재투자해야 하는데 그 재투자가 제대로 이뤄졌느냐는 부분이죠. 한류월드란 것도 뭐 거의 15년이 비어 있고, 완성되려면 시간이 한참 더 필요해요. 그나마 업체가 선정되었지만 한류 공연장 외에 나머지는 그냥 쇼핑몰이거든요. 테마가 다 죽어버린 거죠. 그리고 백석동 출판단지, 여기도 또 아파트로 변했고요. 삼송에도 테크노밸리가 들어오기로 되어 있었는데 결국은 스타필드라는 대규모 매장이 들어오고요.
리: 스타필드 들어온 건 좋지 않나요?
이재준: 자족시설이 매장으로 바뀐 거예요. 자족시설은 고용 창출 부분이 있는데, 이건 지역 상권이 침해당하면서 고용 이전이 될 뿐인, 착시 같은 거죠. 고양시 같은 경우 대통령이 공약했듯이 입지규제를 해야지, 더 많은 대형 쇼핑몰이 들어오는 것은 문제가 많죠.
리: 지금까지 고양이 이랬다고 하면, 나의 고양은 이렇게 사람들에게 기억될 것이다, 하는 이미지가 있을까요?
이재준: 제가 이런 얘길 했어요. 저를 기억하지 말고 제가 만든 좋은 정책들을 기억했으면 좋겠다. 우리가 이제 도시에 대해서 좀 겸허했으면 좋겠어요. 도시는 내 욕망만 채우는 곳이 아니다, 도시는 영원하다. 나에게 부여된 그 자그마한 시간, 그 자그마한 권리를 도시의 건물들과,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어떻게 규정할 것인지. 도시라는 개념을 삶이라는 개념과 함께 고민하는 시장으로 기억됐으면 좋겠어요. 인문학적인 성찰을 하고, 내가 왜 고양시에 있어야 하나 하는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는. 성찰, 철학, 관점이 있는. 그런 걸로 기억됐으면 하는 바람이죠.
리: 일반적인 정치인에 비해 삶의 경험이 다양하신데요, 이재준답다는 걸 자서전에 쓴다면 어떻게 쓸 수 있을까요?
이재준: 글쎄요, 생각을 안 해 봤는데. 어쨌든 지금까지 성장 일변도로, 빨리 가는 걸 목적으로 했던 걸 좀 바꿔 보자. 그 과정에 있는 수많은 변화와 흐름을 보는 시간을 가져 보자. 거기에 시민들의 고민도 들어가고, 이를 가지고 삶에 만족감과 행복을 줬으면 좋겠다는, 그런 말씀을 드리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