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사가 이번 거사에 달렸소. 만약 실패하면 내세에서나 봅시다. 나는 자결하여 뜻을 지킬지언정 적의 포로가 되지는 않겠소.”
날카로운 눈매에 콧수염을 단정하게 기른 한 남자의 입에서 흘러나온 소리였다. 주위를 둘러싸고 있던 사람들도 일시에 숙연해졌다. 비장한 한 마디를 남긴 사람의 이름은 김상옥. 그가 말한 ‘거사’는 상상을 절하는 것이었다. 국내로 잠입하여 사이토 총독을 죽이겠다는 것.
그를 위해 마련된 권총 4정과 실탄 800발과 폭탄이 담긴 나무 상자를 매만지던 그의 머리 속에는 잡다한 추억들이 스쳐갔다. 구한말 군인이던 아버지, 말발굽 제조공으로 가난과 싸워야 했던 어린 시절, 우연히 나갔던 교회에서 받았던 감화, 교회 부설 야학에서 호롱불과 씨름하며 읽었던 책들, 약장수로 돌면서 눈에 담았던 조선 팔도의 풍경들, 1913년 동료들과 함께 조직했던 ‘대한광복회’의 기억들, 그리고 착하기만 했던 아내와 남매까지.
철물점 주인, 항일 투사가 되다
철물점 주인으로서 안정된 삶을 살 수 있었던 그의 인생을 뒤바꾼 것은 역시 기미년의 3.1 운동이었다. 일본 경찰이 한 여학생에게 칼을 내리치려는 것을 보고 자기도 모르게 몸을 날려 경찰을 때려누일 만큼 대담했던 그는 비장한 봉기와 참담한 진압을 지켜보면서 자신의 안락한 미래를 버린다. 1920년 11월 상해로 망명한 김상옥은 의열단에 가입했고, 글머리의 각오를 남기고 2년여 만에 고국으로 돌아온다.
종로경찰서는 의열단 이하 독립운동가들에게는 원수의 소굴이었다. 숱하게 많은 이들이 그곳 취조실에서 몸이 부서졌고, 이후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으며, 일본 정예 경찰력이 집결해 있던 일종의 심장부였다. 그런데 1923년 1월 12일 밤 8시 일제의 간담을 내려앉히는 일이 벌어진다. 종로경찰서에 폭탄이 떨어진 것이다.
원래 김상옥 일행은 종로경찰서 앞을 사이토 총독이 지나간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대기 중이었다. 그런데 김상옥의 동료가 불심검문에 체포되어 일이 틀어지자 김상옥이 떡 본 김에 제사 지낸다고 폭탄 성능도 시험할 겸 원한에 사무친 종로서 경무계 창문에 대고 폭탄을 던져 버린 것이었다.
일찍이 칼 앞에 맨몸으로 뛰어들었던 김상옥, 귀국하면서 세관 보초를 때려누이고 유유히 압록강 남쪽을 밟았던 간 큰 사내 김상옥은 난리가 난 종로경찰서를 뒤로하고, 한 치의 당황함도 없이 경성의 어둠 속으로 스며들었다. 이후 그는 후암동 매부의 집에 숨었다. 서울역 근처에 은신했다가 서울역에 행차하는 사이토 총독을 때려잡을 계획이었다. 그런데 그 집에 기거하던 여자의 오빠가 하필이면 종로서에 근무하고 있었다. 끄나풀의 밀고로 종로경찰서 형사대가 출동했다. 선봉은 종로경찰서 유도 사범 다무라였다.
14명의 경찰이 집을 에워싼 상황에서 김상옥은 놀라운 사격 실력을 발휘하면서 현장을 빠져나간다. 유도 사범 다무라는 유도 실력을 발휘할 새도 없이 총 맞은 귀신이 됐고 나머지 경찰은 닭 쫓던 개가 되어 버렸다. 바야흐로 경성은 발칵 뒤집혔다. 종로경찰서에 폭탄이 터지더니 용의자를 잡으러 간 종로경찰서의 유도 사범이 죽고 경부 두 명이 중상을 입었다. 그러고도 범인은 바람같이 사라지다니…
경성 내 전 경찰력이 눈을 까뒤집은 가운데 김상옥은 또 한 번 대담함을 과시했다. 남산을 타고 도망가서는 오늘날 금호동에 있던 한 절에 잠입, 가사와 장삼을 빌려 입고 서울 시내로 재진입한 것이다. 사람이 운이 좋은 것도 한두 번이지, 그렇게 아슬아슬한 고비를 넘겼으면 제집 드나들 듯하던 중국쯤으로 도망갔어도 좋았으리라. 하지만 김상옥의 발걸음은 무조건 서울 도심으로 향하고 있었다. 사이토 마코토 총독 가까운 곳, 여하간에 그를 잡을 수 있는 곳. 그가 스며든 것은 오늘날의 종로구 효제동이었다.
1천 대 1, 조선 최고 쾌남의 최후
하지만 일본 경찰의 사냥개들은 결국 김상옥의 냄새를 맡았다. 1월 22일 김상옥을 확인한 일본 경찰은 경기도 경찰부장 지휘하에 무려 천여 명의 무장 경관을 동원하여 일대를 에워싼다. 김상옥 한 명을 잡기 위해 말이다. 그로부터 장장 3시간 35분 동안 김상옥은 쌍권총을 들고 인근의 지붕을 타고 오르내리면서 1천 대 1의 총격전을 벌인다.
지레 겁먹지도 않았고 함부로 포기하지도 않았다. 몸에 열한 발의 총알을 맞으면서도 그는 끝까지 침착했다. 진두에서 지휘하던 서대문 경찰서 경부 구리다가 그 희생양이 됐고, 수십 명의 일본 경찰이 사상했다. 이윽고 마지막 순간 한 발 남은 총탄으로 그는 대한독립만세를 부르짖은 뒤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1923년 1월 12일부터 1월 22일까지 경성을 뒤흔든 열흘의 주인공 김상옥은 그렇게 장렬하게 죽어갔다. 온몸이 전부 간으로 이루어진 것 같던 대담한 남자, 유난히 찌질한 남자가 많았던 우리 역사에서 단연 돋보이는 쾌남아 김상옥이 온 조선을 놀라게 했던 날들의 시작이 1923년 1월 12일이었다.
1년 뒤 한식날을 전후하여 어느 동아일보 기자가 김상옥의 무덤을 찾았다. 그 무덤에는 망자의 주소가 중국 상해로 적혀 있었다. 평소에 그는 죽어서도 혼은 상해에서 독립운동을 할 것이니 행여 죽으면 주소를 중국 상해라 써 줄 것을 원했던 것이다. 기자 앞에서 어머니는 이렇게 통곡했다고 한다.
“너무 잘나서 그랬는지 못나서 그랬는지 그 일(독립운동)로만 상성을 하다가 그만 그 지경이 되었습니다. 죽던 해에도 몇 해 만에 집이라고 와서 제 집에를 들어앉지도 못하고 거리로만 다니다가 죽었습니다. 밥 한 그릇 국 한 그릇을 못 해먹이고 그렇게 죽은 생각을 하면…” 그러면서 주저앉아 울었다. “그냥 거기에 있으면 생이별이나 할 것을 왜 와서 영 이별이 되었느냐.”
일본 경찰 천 명 앞에서도 거침이 없던 김상옥도 그 통곡 앞에서는 고개를 숙였으리라. 어린 시절 내내 아버지 없이 가난에 시달리다가 젊은 나이에 저승에 와야 했던 자신의 아들에게도 미안함을 금치 못하였을 것이다. 홀연 그런 생각이 든다. 우리는 김상옥의 어머니의 통곡 앞에서, 그리고 김상옥 앞에서 고개를 들 수 있을까. 대학로 마로니에 공원에 있는 김상옥 동상 앞에서 당당할 수 있을까.
원문: 산하의 오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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