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환(ㅍㅍㅅㅅ 대표, 이하 리): 어릴 적 정보가 없는데요, 초중고는 계속 포항에서 다니신 건가요?
오중기(경북도지사 후보): 예, 영흥초등학교라고 죽도시장 근처에 인접한 학교를 다녔어요. 이명박 대통령, 이상득 의원, 이병석 의원… 이런 유명한 사람들이 나온 학교죠. 대한민국 변화 발전에 상당한 걸림돌이 되었던 역대 큰 인물들이 그 초등학교를 졸업했습니다…
리: 초중고를 포항에서 나오셨는데, 그때 기억 속의 포항은 어떤 이미지였나요?
오중기: 뭐 포스코가 전부였죠. 포스코를 중심으로 해서 사람들이 협력업체를 토대로 지역경제를 움직였습니다. 그 사람들을 토대로 또 서비스업이 발전하고… 이렇게 포스코가 전부였던 시절이에요. 그러니 포스코를 둘러싸고 지역 내에서도 불균형 발전이 이루어졌죠. 건실한 직장 있는 분들의 집단이 있었고, 그렇지 못한 분들은 서비스업을 통해 살아가던 시절이었어요.
리: 후보자 본인은 어느 집단에 속해 있었나요?
오중기: 저는 당연히 후자였죠. 아버지께서 죽도시장에서 미역, 최소, 과일 같은 품목의 소규모 중간 도매를 하셨어요. 그러다 보니 인근에 배달 많이 다니시고 그랬죠. 그때 저도 같이 배달 다니면서 아버님 도와드리곤 했는데, 그때 장사하셨던 분들이 지금도 인근에 계세요. 포항 인근의 장을 가면 오 씨 아들내미 왔다고 하는 분들이 계십니다.
리: 어렸을 적 데모하면 아버님께서 뭐라 하셨어요?
오중기: 아유, 뭐 난리도 아니었죠. 어머니도 없이 키웠잖아요. 그때만 해도 엄마 없이 자란 놈이 대학 가는 게 흔한 세상은 아니었어요. 그렇게 고생하며 대학 보내놨는데, 일반 집시법도 아니고 국가보안법으로 연루되니까 아버님이 정말 낙망 많이 하셨습니다. 환갑도 못 보시고 요절하셨어요. 그게 저에게는 천추의 한이 되었어요…
리: 도지사 나가는 거라도 한번 보셨어야 하는데.
오중기: 그럼요, 얼마나 자랑스러워하셨을까요. 제가 청와대도 갔다 왔는데 그것도 아주 좋아하셨을 거예요. 아버님 그렇게 보낸 기억들은 떠나가질 않아요. 그 죗값을 제가 더 나은 세상을 만드는 것으로 다해야 한다, 이런 것도 제가 일선을 떠나지 않는 이유 중 하나입니다.
리: 아버님 돌아가실 때부터 그런 결심을 하셨던 건가요? 더 나은 세상에 투신하겠다는…
오중기: 그렇게 오다가 깜방도 갔다 오고, 구속도 되고, 그런 것들로 인해서 아버님이 많이 아프셨고, 갑작스러운 죽음을 맞이하고… 여러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그것도 더 나은 세상을 만들기 위한 길들이니 벗어나서는 안 되겠다는 각오를 했죠. 지금도 많이 힘들지만 우리의 큰 대의가 있는 거고, 아버님을 그렇게 보낸 데 죄책감도 있는 거고요.
형의 책을 훔쳐본 꼬맹이, 그대로 운동권에 투신하다
리: 그런데 86학번 들어가자마자 운동을 시작하셨나요? 어쩌다? 선배한테 낚였어요?
오중기: 조금 달라요. 포항은 상당히 보수적인 동네라 흔히 말하는 ‘의식화 교육’을 받을 기회가 별로 없었어요. 얼마 전 팟캐스트 나가서 말씀드린 건데, 제 형님이 『4·19 혁명론』이라는 책을 갖고 있었어요. 그걸 한번 넘겨 봤는데 김주열 열사 사진을 본 거죠. 눈이 휘둥그레져서 그 책을 쭉 읽었어요.
리: 순식간에 길이 뒤바뀐 거군요.
오중기: 그전까지 저는 학생회 간부를 하면서 조국에 대한 충성, 민족에 대한 사랑이 큰 사람이었어요. 전두환 대통령 각하에 대한 충성심이 상당히 컸었죠. 그분 따라 나도 육사를 가야 하겠다… 이런 생각을 할 정도였는데, 그걸 읽으니까 이게 말이 안 되는 거예요. 소위 말하는 정의, 사회가 올바르게 나아가야 할 길 이런 데 눈이 작게 트였던 거예요. 그래서 대학 들어가자마자 자발적으로 데모했어요. 누가 꾀어서 한 게 아니었어요.
리: 1987년의 기억 좀 떠올려 주실 수 있으신가요?
오중기: 그때 제가 2학년이어서 주도할 정도의 위치는 아니었어요. 흔히 말하는 선봉조였죠. 몸빵조. 전투의 선봉에서 전투를 지휘하는 일을 했어요.
리: 대구경북도 돌 던지고 이런 게 많았나요?
오중기: 대구경북에서는 이중삼중고가 있는 셈이었죠. 서울이나 전라도 같은 데는 국민적 지지도 상당했고, 세력도 컸어요. 그런데 대구경북은 학교, 노동현장 등 협소한 장소에서 진행되었고, 시민분들도 지지해 주지 않는 학생운동을 했어요. 많이 힘들었죠. 6월 항쟁이 전국적으로 불을 붙일 때도 냉대하셨어요. 시민들 가게 같은 데로 도망가도 쫓겨나기 일쑤였죠.
리: 서러우셨겠습니다…
오중기: 많이 서러웠지만 대구경북이 가진 한계가 있던 시절이니까요. 그런데 노태우의 6·29선언이 나오기 2~3주 전부터 분위기가 반전됐어요. 저희는 그때도 지역주의 해체, 영호남 화합을 세게 외쳤어요. 그런데 30년이 지난 지금도 그 문제가 해소되지 않았죠.
리: 그 1987년도에 구속되신 건가요?
오중기: 그해 막 구속된 건 아니에요. 항쟁 이후로 학생회가 좀 더 대중화됐죠. 저희는 6월 항쟁 이후 한국 사회에서 가장 모순인 분단 구조를 걷어내지 못하면 한국사에 미래가 없다고 생각했어요. 그러면서 임수경 방북과 평양 축전 건으로 국가보안법 위반이 되어서 구속됐죠. 그때 같이 한 인물들이 임종석 의장, 지금은 국회의원인 박완주, 김영진, 기동민, 지금 정무수석 하고 있는 한병도… 386 중에서도 전대협 3기죠. 이 사람들이 조통위를 이끌었어요.
리: 그래서 그 건으로 아예 구속이 돼버렸군요. 얼마나 살다 나왔습니까?
오중기: 저와 같은 죄명으로 서울여대 총학생회장이었던 친구가 12월에 3년 형을 선고받았어요. 저는 해를 넘긴 1월에 선고를 받았죠. 그런데 절묘하게 12월 말에 김일성 신년사가 나왔어요. 1월에 국가보안법 완화하고 평화 분위기를 만들어 가자는 이야기가 나온 거예요. 노태우 대통령이 받아들이면서 평화 무드가 형성되었고, 저는 집행유예로 풀려났죠.
리: 와… 그럼 군대도 안 가고…
오중기: 아뇨, 이게 좀 다릅니다…. 집행유예를 받으면 군대 면제해주던 시절은 맞는데, 막상 학생들은 군대로 싹 집어넣고 싶으니까 기준을 바꿔버렸어요. 실형 2년 이상 받아야 군대 면제가 되는 거로. 제 위의 85학번은 국가보안법으로 집행유예 받으면 군대 안 가던 시절이었는데… 저는 뭐 구속도 되고 군대도 가고…
리: 돌아오고 나서는 인생 선택의 기로에 딱 놓일 것 아니에요? 그 이후에는 어떤 선택을 하셨어요?
오중기: 나이는 27이 다 되어 가는데 어떡해야 하나… 하는데 문민정부가 들어선 거죠. 게다가 생활고도 겹쳤고요. 서울이나 전라도 지역은 정계로 많이들 진출하는데 지방은 그렇지 못하거든요.
리: 그래도 경북에서 경북대와 영남대 정도면 규모도 있고 정계와 연결되기도 쉬울 것 같은데, 왜 안 됐던 거죠?
오중기: 그때 대구경북은 다 민정당이 잡고 있었잖아요? 90% 이상. 지금은 그나마 많이 약진하긴 했는데 그것도 20%밖에 안 돼요. 그러니 뭐 당시에 학교에서 데모했다 하면 빨갱이죠. 학교 나와서 야간 생활해도 빨갱이. 그래서 지역에 토대가 없었습니다. 지금은 지방선거 후보자가 100명이나 하는데, 그때는 엄두도 못 냈어요.
리: 하긴 지난 지선만 해도 거의 안 나왔죠.
오중기: 제가 도지사 후보 나갔을 때, 이 넓은 땅덩어리에서 겨우 10명 나왔습니다. 그런 지형 때문에 사회진출에 대한 고민이 많았죠. 그때 마침 문민정부가 들어서면서 절차적 민주주의에 대한 우리의 역할은 끝난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고 아버님도 돌아가시면서 가정적 어려움도 상당해지고 그래서…
뭔가 빠진 직장생활, 노무현의 탄핵으로 깨어나다
리: 그래서 대학교를 졸업한 뒤 첫걸음이 되게 중요하셨을 것 같아요.
오중기: 한 2년은 헤맸죠. 아까 말씀드렸듯이 서울 지역은 사회단체나 정계나 연구소 등등 진출할 기회가 많은데 우리는 잘 없어요. 보통 노동 현장에 들어가거나 자체적인 단체를 꾸리는 건데 저도 여기저기 헤맸죠. 형님이 하던 동네 작은 학원이 있어요. 거기에서 2년 정도 일했습니다.
리: 학원은 해보니까 어떻던가요?
오중기: 포항을 비롯해 경북이란 데가 갖고 있는 한계가 뭐냐면, 참 아이들이 중학교 때까지는 똑똑해요. 역량도 있고, 공부도 잘하고. 그런데 이 친구들이 고등학교 올라가면 다 죽어가는 거예요. 교육열은 높은데 그걸 담아낼 수 있는 시스템을 못 갖고 있던 거죠. 포항에서 제일 명문이라는 고등학교에 들어갈 때는 반 5등 안에 드는 친구들이 들어갑니다. 그런데 그런 고등학교에서 졸업할 때는 거기서도 한 3% 정도만 서울의 명문대학교로 진입해요. 안동이나 김천에도 명문고가 있는데 거기도 한 5%만 진학하는 마찬가지의 현상이 있었어요.
리: 2년 학원 하시다가 서울로 올라가신 건가요?
오중기: 네, 한국일보 입사해서 한 6년 있다가 동아일보에서 스카우트 제의 들어와서 옮겼습니다. 기자는 아니고 업무직으로 갔어요. 한국일보 광고국에 배치돼서 많은 사람을 알게 되어서 좋았죠. 하지만 호시탐탐 편집 쪽 시험을 치고 그랬는데, 앞에 말씀드린 전과가 걸리더라고요. 또 학교 다닐 때 성적도 엉망이고, 일단 지방대 출신이고… 이 세 가지 관문을 뚫을 수가 없더군요.
리: 그때 영남대면 꽤 괜찮은 학교 아닌가요?
오중기: 그렇지 않아요. 서울의 눈으로 보면 그렇지도 않은 데다, 운동한다고 학교 성적도 좋을 리 없지 않습니까.
리: 어떻게 보면 지방 운동권 차별을 받았다고도 생각할 수 있겠네요.
오중기: 차별이라기보다는, 어쩔 수 없는 한계였죠. 지금 지방 대학 졸업한 일반 학생도 취업 진로에 거대한 장벽이 있는 것처럼, 지방 운동권들도 큰 장벽을 만나고 인프라도 없었던 거죠. 제 기억으로는 저희 86학번 구속됐던 친구 중 그래도 집이 부유했던 친구들은 사업을 하거나 아버님 사업을 물려받았지만 그렇지 못한 사람들은 참 힘든 시기를 보냈죠. 알고 보니 제 나이 또래에서 제가 1호 취업이었습니다.
리: 어쨌거나 신문사 생활 8년을 하면서도, 예전 친구들과 계속 교류를 나누었나요, 그래도?
오중기: 아까 말씀드렸듯이 지방 운동권 출신 학생들은 여러 가지 어려움이 있어요. 일부는 전교조 활동, 일부는 노동 현장이나 사회단체에 합류하는데 그것도 사실 극소수예요. 저와 경북에서 함께 운동한 이들 중 구속당한 친구가 100명이 넘었는데 그나마 서울에서 생활하며 월급 받는 건 저 하나였어요. 오갈 데 없는 후배가 엄청나게 많았지요. 그래서 이 후배들하고는 10년 동안 같이 생활을 했어요. 취업준비 하라고 방 내줘서 공부하게 해주고, 뭐 공부하고 싶다는 애는 학비도 보태주고… 그 세월을 한 10년 했어요.
리: 거대했네요 진짜… 그동안 다들 자리 좀 잡던가요?
오중기: 아뇨… 15년 전까지 자리 못 잡은 친구들이 허다했습니다. 100명 모이면 직장 생활 하는 친구들이 10명 있었어요.
리: -_-; 그쯤 되면 90명에 문제가 있는 거 아니에요? 취업 좀 해야지.
오중기: 전과 기록이 있잖아요. 또 구타당하고 정신적으로 상처받고 이런 게 엄청 크다 보니까, 사회에 원만하게 적응하기가 쉽지 않았어요. 그래서 저희들이 대충 생각한 게, 그래도 조금 자리 잡은 친구들이 힘을 합쳐 이런 친구들을 도와가면서 하자… 그래서 10년 뒷바라지하면서 노력한 거예요. 그런데 한계가 느껴지더라고요. 이 길로는 도저히 답이 안 나왔어요. 이건 지형을 바꾸지 않으면 안 된다, 하던 차에 노무현 대통령의 탄핵을 맞이한 겁니다.
노 대통령 탄핵을 보고 경북에서 일생을 마치기로 하다
리: 허어… 그때 이미 열린우리당 당원이었나요?
오중기: 아뇨, 그땐 아니었어요. 그런데 광화문 동아일보 사옥 있지 않습니까? 일하다 바라보니 집회 때마다 너무 가슴이 뛰더라고요. 대통령이 탄핵을 당했는데 월급만 받아먹고 사는 내 모습도 너무 고민되고… 기존 선배들과 한번씩 만나면서 제 고민을 집중했어요. 어떻게 해야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느냐? 답은 ‘기득권을 유지해온 지역주의의 해소’더라고요. 고민을 엄청나게 하다가 결국 부탁해서 내려왔어요.
리: 사모님은 뭐라 하시던가요?
오중기: 아, 난리도 아니죠. 그때 국장님이 고맙게도 사표를 3번이나 반려하며 그런 말씀을 하셨어요. 나이 마흔에 접어드는데 남들은 다 지키고 싶어 난리다, 그런데 너는 왜 새길을 가려고 하느냐, 동아일보는 네가 뭐든지 할 수 있는 좋은 직장인데 왜 여길 나가려고 하냐… 그때 제 연봉이 얼추 7,000은 넘었어요. 애들 교육비도 지원해주고. 그러니까 개인적인 삶을 살기에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상황이었는데 내가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리: 왜 이걸 꼭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을까요? 탄핵을 계기로 뭔가 가슴이 끓어올랐다든가?
오중기: 음, 그런 거죠. 지난 10년 직장생활 하기 전에 경실련에서 사람을 모집했는데, 합격 통보를 받았어요. 그런데 그때는 월급이 너무 적었어요. 먹여 살릴 식솔이 많아서 한국일보를 선택한 거예요. 그런데 마음 한편에서는 항상 어떤 죄책감과 사회변화에 대한 갈망을 품고 있었어요. 직장생활이라는 게 그렇지 않습니까? 성실히 임하려면 다른 활동을 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에요. 그래서 그나마 유지했던 게 후배들 뒷바라지하는 역할이었죠.
리: 흐음…
오중기: 그런데 있을 수가 없는 탄핵이 생긴 거죠. 말도 안 되는 과오가 있던 것도 아니고… 박근혜 1/10 정도의 과오만 있었어도 그런 기분은 안 들었을 거예요. 그런데 “우리 당 사람이 잘 됐으면 좋겠다” 그 한마디 한 걸 가지고 탄핵한 게 말이 안 됐죠. 심지어 그 탄핵을 받아준 세력이 열린우리당에도 있었고요. 그 상황에 전부 분개한 거예요. 우리가 목숨 바쳐서 만들어낸 민주 정부인데, 이렇게 말아먹을 수 있나 하는 분개가 들었죠.
리: 목숨까지야… 아, 젊었을 때요?
오중기: 그럼요, 우리 대학 다닐 때 죽은 사람이 한둘입니까. 이한열, 박종철, 김세진 열사부터 시작해서 돌아가신 분들만 해도 수십 명이 넘어요. 저만 해도 티는 안 나지만 몸이 성한 데가 없어요. 치아도 다 나갔고요. 그런 세월을 걸어와서 더 나은 민주 정부가 들어섰고, 정치하는 사람들이 정치하고 우리 같은 사람은 주변에서 도움을 준다 이런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탄핵을 맞이한 거죠.
리: 아…
오중기: 결국 저 탄핵을 끌어낸 한나라당 세력의 근거지가 대구경북인 거예요. 그들이 결국 지역주의에 기대어 기득권을 유지했던 거죠. 저들과의 한판 승부가 이루어지지 않으면 대한민국 사회는 정말 선진국가로 나갈 수 없겠다는 판단이 들었어요. 드디어 내 할 일이 생겼구나, 라는 생각이 계속 들었어요.
리: 그렇게 정치에 뛰어드신 거군요.
오중기: 기동민 의원이 지인인데, 당시 김근태 의원실의 수석 팀장이었죠. 그런데 김근태 선배님 대통령 선거 나온다 해서, 마침 대구경북에서 역할을 해온 적 있는 제가 옆에서 도와드렸어요. 그러며 다시금 느꼈죠. 직장 다니면서 하는 덴 한계가 있잖아요. 와, 이제 내려가 살지 않으면 안 되겠구나 싶더라고요. 주말은 원래 가족들과 보내야 하는데 퇴근하면 김근태 의원님 쫓아 내려가기를 6~7개월 이상 했죠. 와이프한테 “이래 살면 내가 몬 살겠다”라고. 너무 고통스럽다, 내부터 좀 살자(웃음). 그러면서 제가 먼저 내려갔죠.
리: 아니, 근데 아무리 연봉 좀 높다 하지만, 후배들 먹여 살리고 공부시키면서 사표 쓰고 지방 내려갈 돈이 어디 있었습니까?
오중기: 방배동에 분양받았던 아파트를 정리했습니다. 그때 부동산 대폭등기라 두어 배 올라 있더라고요.
리: ……
오중기: ……
협박으로 유지해 온 기득권을 교체해야 ‘경북’이 바뀐다
리: 경북에 내려와서 처음 본격적으로 한 활동은 무엇이었죠?
오중기: 대구에 김근태 의원님 관련해서 연구소를 하나 내서 있었어요. 그런데 의원님이 대통령 선거 낙마를 하셨죠. 그리고 바로 대선에서 정동영 후보가 이명박한테 완전 박살 났죠.
리: 박살 날 때 어떠셨어요?
오중기: 예견한 거라 충격은 덜했지만, 정말 허망했죠. 어떻게 쌓아 올린 민주 정부인데 이렇게 허망하게 내주나… 보니까 기초가 안 되어있는 거예요. 상층부는 정치 권력을 어떻게든 바꿔 왔는데, 지역의 권력들은 그대로였어요. 그걸 보면서 이제 마음을 좀 더 먹고, 이명박 대통령 당선된 첫해 총선에 출마했어요. 그게 대통령 고향인 포항 북구입니다. 하지만 선거는 구도잖아요? 1대 1로 붙으면 15~20%는 나올 것 같았는데…
리: 아이고, 보전도 못 받으셨군요.
오중기: 그때 한나라당에서 치열하게 경선하던 한 사람이 경선에서 져서 무소속으로 나와버린 거죠. 그때 당의 지지율이 5%도 안 되던 때인데 당의 지지가 있습니까, 뭐가 있습니까… 사람들은 보전도 못 받는다고 나가지 말라고 하는데, 그때는 제가 정말 정신이 나가서 이럴 때 나가지 않으면 내 진정성도 없는 거로 생각했어요. 눈치 보고 살고 싶지도 않았고. 어찌 되었든 간에 시작해야 한다 결심하고 보전 못 받을 거 충분히 예상하고 출마했습니다. 5.8% 나왔던가요, 그때.
리: 지지율은 중요한 게 아니고, 돈을 얼마나 쓰셨습니까?
오중기: 1~2억 얼마였죠. 그것도 적게 쓴 거긴 한데… 돈보다 더 큰 문제는, 계속 그런 선거 구도가 유지됐으니까… 제가 여러 차례 선거에 나갔지만, 2016년, 그러니까 재작년까지도 15%를 넘은 적이 없습니다.
리: 당 지지율도 문제가 있지만, 사실 경북에 조직이란 게 있긴 있었어요?
오중기: 없죠. 조직도 없고, 당원이라 해봤자 몇 명 없으시고… 그래서 제가 당원 한 20명 만들어보자고 마음을 먹었어요. 그래서 지금 제 지역구에는 한 500명 이상의 권리당원들이 계세요. 경북 전체에서는 거의 1만 명에 육박하고 있습니다.
리: 경북… 진짜 험지 정도가 아니네요… 그런데 사실, 대선 때야 사람 보고 찍을 수 있지만 지선이나 총선은 엄청난 희생을 하면서 한 명 한 명 설득해야 하잖아요. 그 설득의 과정은 어떠셨어요?
오중기: 가장 첫 번째는 가장 가까운 지인들부터 설득하는 거죠. 친구들, 친척들. 정권교체가 이뤄지기 전까지는 우리 친척들만 해도 제가 포항에서 이런 정치 하는 걸 부정적으로 보시는 분들이 많았어요. 다른 의미보다 제가 너무 힘들어하니까… 그런데 대통령 선거 이후에는 많이 달라지셨죠.
리: 뭐라고 설득하셨어요?
오중기: 말하자면 제 정치 대의랑 맞물리는 건데, 첫째는 대한민국 사회가 새로운 길을 모색해야 한다. 새로운 1류 국가로 성장하지 못하면 우리 아이들에게 미래는 없다. 워낙 파이가 작으니까 항상 남을 짓밟고 일어서야 한다고 가르치지 말고, 파이를 넓혀서 다 같이 살 수 있는 세상을 만들어야 한다. 또 하나는 우리 포항이라는 곳이 경북의 가장 큰 도시인데, 포스코를 중심으로 그동안은 살아왔다. 하지만 20~30년 지나면 어떻게 변해서 망할지 모른다. 지금도 끊임없이 관련 비리가 나오는데 그것만 움켜잡고 있는 게 정치냐…
리: 그런 얘기가 있거든요? 전라도의 민주당, 혹은 경상도 새누리당 모두 토호들이 꽉 잡아서 발전이 없는 거라고.
오중기: 결국 중심은 먹거리 문제예요. 거기 튼튼한 어떤 얽힘이 있고, 그게 지역사회를 지탱하고 있죠. 아무리 중앙 정치가 바뀌어도 이 기득권들이 정치면 정치, 경제면 경제, 그 밖의 문화 사회까지 많은 부분을 움켜쥐고 안 바뀌는 거예요. 그게 드러난 예시가 지난 선거의 경북 전체 선출직 기초의원입니다. 몇백 명을 뽑는데 경북에서 단 2명만 됐어요. 그나마 저희 지역구에서 심혈을 기울인 게 먹혔는지 1명이 당선됐죠.
리: 그럼 견제 자체가 이루어질 수가 없겠는데-_-;
오중기: 견제라고 할 것도 없고요, 거의 독재죠. 그래서 이 부분에 대한 극복이 필요합니다. 특히 박근혜 정부가 망쳐온 것들을 보면 더욱 그렇죠.
리: 만약 이명박근혜 시절 동안 경북이 완전 몰표만 안 줬으면, 10~20% 정도는 민주당에 줬으면 어떤 변화가 있었을 것 같나요?
오중기: 중요한 건 그겁니다. 정치인들이 표를 먹고 사는데, 지역 주민들 반응이 이러면 내가 떨어질 수도 있겠다, 이런 생각을 가져야 했다는 거죠. 그런데 안 했어요. 관행처럼 해 오던 행정, 정치… 그러다 보니 가장 밑바닥에서 고생하는 서민들의 아픔이나 이해관계, 요구 등을 이해하고 관철시키기 쉽지 않은 겁니다. 소위 보여주기식 행정을 하게 되는 거죠. 그냥 뭐 하나 더 짓고, 엑스포 하나 올리고 이런 식으로 행정이 흘러가게 되는 거예요.
리: 그래서 전라도에서 되게 큰 사건이 일어났잖아요? 순천에서 이정현이 당선된 거. 거기 여론이, 우리가 얘가 좋아서 시키는 게 아니다, 맨날 해 먹기만 하니까 안 되겠다 이런 움직임이 그런 대사건을 낳았죠. 그런데 왜 경북은 그런 움직임이 한번도 없었을까요?
오중기: 경북이 좀 더 공고합니다. 단순히 지역주의 차원의 문제가 아니에요. 왜냐하면 경북 기득권은 노무현, 김대중 정부가 들어섰음에도 굳이 잘 지낼 필요가 없어요. 그래도 지방 권력은 다 돌아갔으니까. 공장도 돌아가고, 경제구조도 일정 부분 돌아갔으니까 그럴 틈이 안 생긴 거예요. 또 하나는, 부끄러운 고백이지만, 이정현 같은 사람이 경북에서 안 길러진 거죠.
리: 생각해보면… 후보님도 오래 하셨지만, 이정현만큼 오래 하신 건 아니네요.
오중기: 그렇죠. 하지만 김부겸 같은 사람이 경북에서 나온다면 역전극이 일어날 수 있어요. 저희가 그 모델로 성장하려는 거예요. 아직은 좀 역부족이긴 하지만…
리: 짐이 참 무겁네요.
오중기: 예, 그렇죠. 특히 이번 지방선거는 제 개인적인 선거도 아니고, 역사적인 흐름에서 일어나는 중차대한 선거거든요. 문재인 정부가 경북 지역에서 연착륙할 수 있다면, 그게 지역주의를 해소해 가는 과정인 거죠.
또 경북 자체만의 미래를 본다면 지금 남북정상회담을 통해서 북방외교의 물꼬가 트이는 중이잖아요? 경북이 많이 어려워요. 특화된 산업도 부족하고, 대기업은 진출하지 않고 있어요. 이젠 미래 먹거리를 만들어내야 해요. 그런데 북방경제의 물꼬가 트이는 이 중요한 시기에 역사인식이나 평화, 북에 대한 기본적 인식조차도 없는 자한당 기득권들이 경북의 기득권을 유지하고 있어요. 그들로는 이 문제를 해결할 수가 없는 거죠.
리: 해결책은 크게 두 가지라고 생각하는데, 첫 번째는 교육이고 두 번째는 산업이라고 봐요.
오중기: 일단 거점별 특화 산업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예전처럼 정부에서 지원해주고 대기업을 땡겨서 먹여 살리던 시절은 지났어요. 그 대표적인 예가 원전 24개 중 경북에 12개가 와 있는 것 아닙니까. 그런 방식으로 경북이 살아온 거예요. 미래의 위험이나 리스크는 생각도 안 하고.
리: 경주에도 방사물 폐기장이 있지만, 시민들이 ‘제발 다른 데 줘;;’이러는 상황이잖아요.
오중기: 그러니까, 역으로 생각하면 먹고 살 만하다 싶을 때 누가 그거 달라 그러겠습니까? 그렇게 큰 위험성이 있는 것을… 가치 변화가 필요해요. 아까 말씀드린 것처럼 경북만의 특화된, 거점도시만의 특화된 산업들을 안착시키는 게 중요하죠.
리: 특화 이야기 많이 하시는데, 포항은 포스코가 있다 치고 구미 경산 쪽으로는 공단지대가 있잖아요? 이걸 업그레이드 하시려는 건가요?
오중기: 두 가지 측면이 있죠. 일단 그동안 진행됐던 것에 속도를 내는 거예요. 아까 얘기했던 정치 구조와 맞닿은 얘기입니다. 정부와 치열하게 싸워서 예산을 받아와야 되는데 그걸 제대로 못 했어요. 그래서 정말 중요한 부분이 진도를 나가지 못한 게 많습니다. 두 번째는 기존의 제조업이나 경제적 토대를 고도화시켜야 해요. 좀 더 스마트화해야 하고요.
마지막으로 새로운 먹거리에 대한 특화사업을 안착시켜야 해요. 전북, 경기도, 충청도가 그걸 많이 선점했어요. 자율자동차 문제, 전기자동차 문제, 드론 문제, 그리고 소위 말하는 항공산업. 이런 것 중 경북에 제대로 안착한 건 하나도 없습니다. 시도는 맨날 하는데, 그것에 대한 인프라나 데이터베이스, 연구소 등의 준비들이 상당히 부족한 상황이에요. 그래서 남들이 선점할 수 없는 것을 찾아야 하는데, 이런 노력 하는 데 게을렀어요. 그래서 신재생에너지 같은 것을 찾아야…
리: 그런데 그것도 뭐 호남 같은 데서 더 많이 하고 있는…
오중기: 예… 새만금, 태안에서 이미 하고 있지요. 그래도 저희는 명분이 있어요. 어쨌든 원전 12기는 경북에 있는 거니까, 정부와 싸워야 하죠. 저는 문재인 대통령님께 최고의 존경과 찬사를 드리지만, 지역이 가진 현안 해결을 하기 위해서는 끈질기게 설득해야 해요. 왜냐하면 이건 경북의 나중 먹거리 문제도 있겠지만 지역 불균형의 문제도 있는 것이기 때문에. 대통령께서 이야기하시는 5대 국정 철학 중 한 가지가 균형발전이에요. 그런 맥락에서 경북을 좀 더 발전시켜야 해요.
리: 이야기가 별로 안 나온 게 교육 문제예요. 학부모나 어린 세대에게는 너무 중요한 문제잖아요? 그런데 그 경북이 이렇게 됐는데, 어떤 식으로 힘을 쏟을 수 있을까요?
오중기: 교육 문제는 결국 취업 문제를 관통합니다. 서울대, 연대, 고대가 명문화될 수밖에 없었던 것은 거기 나온 사람들이 고퀄리티의 일을 잡아서예요. 그래서 지방의 대학을 나오더라도, 혹은 서울의 대학을 나온 분들이라도 지방에서 충분히 먹고 살면서 인간다운 삶을 살 수 있는 정주 여건이 만들어지면 안 올 리가 없다고 봅니다. 대표적인 케이스로 포항공대가 있고, 한동대도 상당히 자리 잡고 있어요. 그래서 교육의 시스템과 내용, 인프라 구축을 위해 청년창업메카를 제1순위로 잡고 있어요. 실리콘밸리처럼 남들 상상 못 하는 메카를 만들어내는 거죠.
리: 경북에서 그걸 하려면 경북지역에 오는 사람들에게 돈을 퍼줘야 하지 않을까요?
오중기: 그렇습니다. 첫째는 지역 인재들이 지역에 잘 성장할 수 있도록 인프라를 구축해야 합니다. 그러면 자연스럽게 지역 학교에 대한 인프라가 활성화될 거고요, 그걸 통해서 교육의 질을 높이는 거죠. 요새는 변호사, 판사, 검사 안 해도 대한민국 사회에서 스타들을 배출하는 블라인드 방식으로 만드는 겁니다. 그런 경북의 토대를 만들어내면 교육의 시스템과 질적 역량이 좀 강화되겠죠.
이번에는 정말 “이기겠다”는 마음으로
리: 이번엔 보전은 받겠죠.
오중기: 뭐 보전이야 받아야지(웃음). 이번에는 이겨야죠. 그 지점이 다른 겁니다. 제가 청와대에 좀 더 오래 있을 수도 있었는데, 더 오래 있다 나오면 똑같은 패러다임에 갇히는 거죠. 떠밀려서, 할 사람이 없어서 나오는 선거요. 하지만 이번에는 그런 생각 안 하고 이기겠다는 각오로 나온 거예요.
리: 그전에는 이기겠다는 마음이 아니었던 건가요?
오중기: 견디겠다는 마음에 가까웠죠. 우리 세력을 유지하고 대통령 선거를 위해 노력해야겠다… 저번에는 이런 고민으로 도지사 선거를 치렀다면, 이번 선거는 ‘이기겠다’입니다. 저번 도지사 출마만 하더라도 ‘어려운 상황에서 누군가는 할 일을 해야 한다’는 관점에서 출마했어요. 하지만 이번에는 좀 다릅니다. 이번에는 경북지역을 바꿔보겠다는 저의 의지가 상당히 커요. 준비도 엄청나게 해 왔어요. 5대 전략, 9개 공약, 23개 시군구 공약, 2대 프로젝트 등으로 엄청난 정책 준비를 했어요.
리: 근데 참 제가 경북 사람이지만… 이번에도 와서 사람들에게 물어보니까 다 찍을 사람 없다고만 반복하더라고요. 새누리 너무 싫지만 민주당은 안 된다는 말에만 계속 갇혀 있어서…
오중기: 지난 지방선거에서 김관용 지사와 60% 차이가 났어요. 지난 대선에서는 홍준표와 저희가 40% 차이가 났죠. 그런데 이번에는 30% 차이로 일단 다가갈 수 있겠다는 계산이 서요. 그래서 저는 이길 수 있는 지점에 들어선다, 왜냐하면 60%에서 30% 찍은 거니까. 10%만 더 갖고 오면 박빙으로 가는 거예요. 많은 사람이 ‘경북이 되겠냐?’하고 있는데, 경북이 디비질 수 있다는 패러다임으로 바꿔 나가고 싶어요.
리: 혹시 선거운동할 때 그런 건 없었나요? 악수하자고 손 내밀어도 안 한다든지.
오중기: 전과는 정말 분위기가 달라요. 어제만 해도 밤 10시까지 선거운동 하는데, 식당에서 인사하고 나오려니까 한 분이 쫓아 나와서 기죽지 말라고 말씀까지 해주시더라고요. 그래서 지금은 저희가 한번 잘해보겠다는 의지가 강해요. 여론조사 수치도 이전과는 다르고요. 옛날에 강원도 최문순 지사 나왔을 때도 30% 차이 났는데 뒤집었다는 것 아닙니까? 그런데 그 기적을 만들어냈던 팀이 지금은 저와 같이하는 거죠.
리: 경남 쪽 돌 때 많이 들었던 얘기가, 지금 경남의 시장이나 도지사 같은 사람들 때문에 전국적으로 확대된 복지가 경남에만 안 들어오고 있다는 애기였어요. 그런데 경북도 마찬가지인가요?
오중기: 그렇죠. 사회적 약자에 대한 복지는 그중에서도 특히 약했어요. 예산은 일정 정도 갖고 있지만 보여주기식 행정이 우선이었죠. 그래서 그쪽 예산율을 높여나갈 거예요. 전국에서 무상급식 안 되는 데는 경남, 경북 이 정도니까 말할 것도 없어요. 그래서 저희가 큰 공약도 내걸지만 조촐한 복지 공약도 많이 준비하고 있습니다.
리: 수도권 가면 교복 무상지원 얘기하고 있는데.
오중기: 교복은 무슨 무상급식도 못 하고 있는데(웃음). 그래서 제가 도민들께 호소하고 있어요. 문재인 대통령 한 분이 바뀌면서 한국 사회가 이렇게 발전하고 있는데, 경북도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도전을 만들어 낼 테니 도와달라고.
리: 대구경북의 시민들도 이제는 변해야 한다는 걸 실감하고 있다 생각하세요? 사실 현실에서 구체적인 불만이 있어야 일어나는 건데.
오중기: 결국 취업 문제입니다. 양질의 취업을 못 하는 문제요. 취업하려면 서울로 무조건 보따리 싸 들고 올라가야 하거든요. 그런 구조를 어떻게든 해소해야 해요. 지역경제 우선으로 흘러가야 2-3차 소비자가 먹고 사는데 이것을 정체시켜 왔던 것이 정치 구조죠. 거기에서 떨어져 나오면 더 나락으로 떨어질까 걱정하는 마음을 이용했던 게 경북을 지탱해왔던 기득권들의 힘인 것 같아요.
리: 사람들이 새누리를 찍고 싶었다기보다는, 이조차 놓칠 수 있다는 협박 조에 가까웠다고 보는 건가요?
오중기: 그렇죠. 이것마저 무너질까 하는 두려움. 문재인 대통령님 되신 이후 제가 고민해왔던 게 그겁니다. 문재인 정부가 여러분의 손을 놓지 않을 테니 두려워하지 마시라고. 문재인 정부에서 차근차근 경북 지역의 생활 터전, 삶의 질을 높이는 데 온 힘을 기울이면 저는 그것이 지역주의의 끝을 가져오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그래서 이번 지방선거에서 제가 도지사가 되면 지역주의는 끝날 겁니다.
리: ‘오중기라는 사람은 이런 사람이다’라는 질문을 받는다면?
오중기: 불꽃처럼 살다 죽고 싶어요. 제 이메일도 ‘iskr’인데, 불꽃이라는 뜻이에요. 가치를 중심으로 불꽃처럼 열정적으로 살다가 죽은 놈으로 평가됐으면 좋겠습니다. 개인적인 욕심은 벌써 다 이룬걸요, 뭐. 애 키워서 좋은 대학 보냈고, 둘째 애도 잘 자라고 있어요. 청와대 갔다 왔는데 개인적인 욕심이 더 이상 뭐가 있겠습니까. 도지사요? 도지사가 제 인생의 전부는 아닙니다.
리: 전부는 아니지만, 된다 안 된다의 갭이 너무 크잖아요? 청와대 행정관은 많지만 도지사는 별로 없으니까요.
오중기: 그게 인생의 꼭짓점은 아니죠. 하지만 아까 말씀드렸던 것처럼 대한민국 사회의 문제, 본질을 해결하기 위해서 도지사가 되고 싶은 거죠. 이 많은 문제를 굉장히 빠른 속도로 변화시킬 수 있고, 지평을 만들어 갈 수 있기 떄문이에요.
리: 어쨌거나 돈 다 까먹긴 했지만… 재산신고는 얼마로 하셨어요?
오중기: 거의 다 차용금이에요, 한 1억 얼마쯤 되려나? 제가 갖고 있던 자산은 한 몇천만 원 되려나요.
리: 이번 선거 끝나면 사실상 거의 0이 되겠네요.
오중기: 보전받으면 0은 안 되겠죠(웃음). 그래서 이번에는 모든 걸 부어서 이기는 선거가 될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