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환(ㅍㅍㅅㅅ 대표, 이하 리): 사실 최근 선거에서 2연패를 기록하셨잖아요? 인생에서 항상 승리하는 길만 걸어오셨을 것 같은데…
이용섭(광주광역시장 후보): 그렇지 않아요. 시골에서 중고등학교를 나오고, 대학도 서울이 아니라 전남대를 나왔고, 또 호남 출신이에요. 그때는 학연, 혈연, 지연 같은 연고주의가 큰 역할을 했죠. 저는 호남 출신에 지방대니까 이중 핸디캡이 있었죠.
리: 구체적으로 어떤 차별을 받으셨나요?
이용섭: 1990년대 이전에는 거의 영남분들이 공직 사회를 좌지우지했죠. 우리는 선배가 전혀 없으니 아무래도 인사나 보직 면에서 불이익을 받을 수밖에 없었고요. 일례로 김대중 대통령께서 당선되셨을 때 제가 재정경제부에 있었는데, 재경부 본부 국장급 이상 중 호남 출신이 저 혼자였어요.
리: 정말 영남 공화국이었군요;;;
이용섭: 제가 2001년에 1급 국세심판원장으로 승진했는데, 한 일간지에서 ‘이용섭이 1급이 되면서 재정경제부 1급 이상 관료가 모두 서울대라는 오명(?)을 벗었다’ 이렇게 쓸 정도로 지방대생도 적었어요. 제가 건설교통부 장관을 할 때도 국무위원이 20명 정도 있었는데 저 혼자 지방대 출신이었어요.
리: 호남향우회 이야기하면서 호남이 엄청 똘똘 뭉친다는 이야기들을 하잖아요. 별로 안 그런가 봐요?
이용섭: 뭉치는 것도 사람이 있어야 뭉치죠. 또 호남향우회가 뭉친다는 것도 그만큼 생존하기 어렵기 때문에 서로 돕기 위해서 뭉치는 거죠. 이제 그런 연고주의가 사라져야 합니다. 지금까지 한국 사회에서 얼마나 연고주의가 심했으면 이력서에 지역, 학교를 쓰지 말자는 블라인드 채용 같은 제도가 나오겠습니까.
리: 블라인드 채용을 공직뿐 아니라 사기업에도 적용하는 건 기업의 자율을 막는 것 아니냐는 반발도 있던데요.
이용섭: 블라인드 채용은 학력, 경력을 보고 뽑는 게 아니라 맡게 될 업무에 가장 적합한 능력, 역량이 있는 사람을 뽑자는 것이죠. 논리적으론 매우 우수한 제도죠. 다만 맹점이 있다면 어떻게 역량을 검사할 것이냐 하는 건데, 그런 것도 다 개발이 되어있습니다.
후배들에게 발 디딜 언덕이 되어주고 싶었다
리: 힘든 환경 속에서도 본인은 계속 승진하셨어요.
이용섭: 제가 인생을 살면서 느끼는 게 인생이 새옹지마, 전화위복이라는 겁니다. 다들 저보고 청렴하다고들 합니다. 제가 사상 처음으로 국회 인사청문회를 세 번(국세청장, 행정자치부 장관, 건설교통부 장관) 거쳤는데 세 번 다 통과했어요. 사실 저를 도와줄 주변 사람이 아무도 없으니까, 조금만 티가 있어도 물러나야 하니 청렴할 수밖에 없었던 거죠. 화가 복이 된 거지요.
리: 자화자찬을 굉장히 좋아하시네요(…)
이용섭: 원래 저는 자화자찬을 못 하는 사람이에요. 그런데 정치를 하다 보니 변해가는 거죠. 저는 이걸 변화관리라고 합니다. 다들 제가 능력이 있다고들 하는데, 제가 학교 다닐 때 공부를 잘 하거나 그런 것도 아니에요.
리: (…) 잘하셨잖아요…
이용섭: 아니 뭐 행시는 합격했지만요. 제가 민주 대통령 세 분께 모두 발탁을 받아서 중용됐었어요. 어떻게 보면 능력이 뛰어났다고 할 수 있지만, 제가 정말 뛰어나서가 아니라 어려웠던 환경 때문에 능력을 키울 수밖에 없었던 거죠.
리: 호남 출신으로서 다른 사람들에게 도움이 될 기반이 되어야겠다는 생각을 하셨던 건가요?
이용섭: 그렇죠. ‘내 후배들은 연고주의 때문에 피해를 받게 해서는 안 되겠다. 내가 열심히 노력해서 산맥까지는 몰라도 언덕이라도 되어야겠다’는 마음가짐으로 노력을 한 거죠. 그래서 제가 광주에서 서울로 간 게 2막이라면, 제 인생의 3막은 연어처럼 고향에 내려가야겠단 생각을 하게 된 겁니다. 저도 서울에 가서 많은 경험을 쌓았으니 그 경험을 제 고향의 발전에 헌신해보자 한 거죠.
리: 행정가로 있을 때와 정치가로 있을 때, 어떤 모습이 더 마음에 드세요?
이용섭: 정치를 하지만 저는 행정가에 가깝죠. 저는 스스로 대한민국의 영원한 공복이라고 생각하거든요. 공직자는 세 가지 자세를 가져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국가에 헌신하고 국민에게 봉사하고 스스로에게는 절제해야 합니다. 국가에 헌신한다는 것은 국가의 이익과 내 이익이 상충하면 국가의 이익을 따르는 겁니다. 국민에게 봉사한다는 것은 국민의 이익과 제 개인의 이익이 다르면 국민의 이익을 따른다는 것이고요. 그렇게 살려면 개인이 하고 싶은 것, 먹고 싶은 것, 보고 싶은 것을 절제해야 되는 것이죠.
리: 아까부터 설명이 대단하신데, 혹시 설명충이라는 단어 아세요?
이용섭: 모르겠는데요…
리: 죄송합니다, 이 3원칙은 언제 만드신 거예요?
이용섭: 제가 공직생활하면서 계속 가지고 있었던 원칙이에요. 행정가나 정치가나 국가발전과 국민의 행복을 위해서 일한다는 건 같은데 일하는 방식은 많이 달라요. 행정가들은 원칙을 중시하기 때문에 냉철한 머리를 중시하지요. 반면에 정치인들은 감성을 중시하기 때문에 냉철한 머리보다는 뜨거운 가슴을 강조하는 편이지요. 야구로 따지자면 행정가들은 직구·강속구를 선호하고 정치인들은 변화구를 좋아하는 거죠.
리: 본인은 왜 행정가에 가깝다고 생각하세요?
이용섭: 원칙을 중요하게 여기다 보니 융통성이 부족하고, 사교적이지 못한 편이에요. 거기다 가장 중요한 게 거짓말하면 얼굴이 빨개져요.
리: 아까부터 어쩐지 얼굴이… 별로 좋아 보이시지는 않…
이용섭: (웃음) 그래서 처음에 정치에 입문한다고 했을 때 반대가 많았어요. 그때는 다들 정치인하면 거짓말을 밥 먹듯이 한다고 생각할 때였으니까요. 제 처를 비롯해서 다들, ‘계속 얼굴 빨개져서 다니려고 하느냐’ 하더라고요.
국가기관을 하수인으로 보지 않았던 노무현 대통령, 국세청장 자리를 맡기다
리: 정치는 어떻게 입문하시게 됐어요?
이용섭: 결정적인 원인은 노무현 대통령이시죠. 노무현 대통령을 만나지 않았으면 저는 정치를 안 했을 겁니다. 노무현 대통령께서 우리 사회의 가장 큰 문제는 결국 정치로 해결할 수밖에 없다고 하셨어요. 공자 말씀처럼 “정자 정야(政者 正也)”, 정치는 바르게 하는 것이고 공정한 것이거든요. 문제는 정치인들에게 있죠. 그래서 정치를 탓할 게 아니라 좋은 사람들이 많이 정치권으로 나가야 한다는 말씀을 대통령께서 많이 하셨어요.
리: 젊은 나이에 파격적으로 국세청장에 발탁이 되셨잖아요? 그건 어떻게 가능했던 건가요?
이용섭: 제가 국민의 정부 마지막, 2002년에 관세청장으로 있었어요. 그러다 2003년 노무현 정부가 들어서며 초대 국세청장이 됐죠. 정작 저는 노무현 대통령님을 국세청장 임명장 받을 때 처음 뵀어요. 전 정무직을 하고 있었으니, ‘이제 새 정부에서 일하기 쉽지 않겠구나’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국세청장이 됐어요.
리: 왜일까요?
이용섭: 저도 알 수가 없었죠. 이전까지 국세청은 정권의 더 측근들이 가는 자리였어요. 세무조사권을 가지고 있으니까 정권과 운명을 같이하는, 소위 믿는 사람을 앉혔죠. 그런데 대통령님을 한 번도 본 적 없는 저를 발탁하신 거예요. 그 이유를 3·1절 기념사를 들으면서 깨달았죠. “참여정부는 더 이상 ‘권력 기관’에 의존하지 않을 것”이라고, “권력 기관들은 이제 국민을 위한 기관으로 거듭나야 한다”고 말씀하셨어요.
리: 대단하군요…
이용섭: 저는 권력 기관으로 인식되던 국세청을 국민의 기관으로, 봉사기관으로 혁신하라는 뜻으로 받아들였죠. 그래서 취임하자마자 세정혁신위원회를 만들어서 박원순 변호사를 영입하고, 접대비 실명제와 현금영수증제 도입, 특별세무조사 폐지 등 많은 개혁을 했어요.
리: 반발도 엄청났겠는데요?
이용섭: 제가 접대비 실명제 도입할 때는 지금 김영란법 도입할 때보다 훨씬 반대가 많았죠. 이게 50만 원 이상의 접대를 하면 세금에서 공제받기 위해서는 누구에게 접대했는지 밝히라는 건데, 그 당시에는 사장이나 가족들이 이걸 사적으로 유용하고 접대비 처리하고 그랬어요. 접대비 제도가 도입되면서 우리나라의 호화사치성 접대가 많이 사라지고 문화 접대가 많이 늘었습니다.
노무현-문재인에게 인정받은 혁신의 아이콘
리: 행정자치부로는 어떻게 옮겨가시게 된 겁니까?
이용섭: 제가 국세청장을 2년을 하면서 혁신의 아이콘이 됐죠. 노무현 정부 5년을 관통하는 정신은 혁신이고요. 그래서 2005년에 신설된 청와대 혁신관리수석을 하기도 했고요. 정부 부처의 혁신을 담당하는 곳이 행정자치부예요. 갑자기 대통령님께서 어느 날 저를 행정자치부 장관으로 내정했다고 발표하셨죠.
리: 상의도 없이요?
이용섭: 예, 저에게 사전에 언질도 주지 않으셨습니다.
리: 국세청장은 누가 추천했나요?
이용섭: 대체 누가 추천해줬을까, 정말 궁금했죠. 그런데 2012년 대선 때 어떤 기자가 물어보더라고요. “혹시 문재인 후보가 쓴 『운명』이라는 책 읽어보셨어요?” 거기 제 이야기가 나온다는 거예요. “당시에 이용섭 현 국회의원을 국세청장으로 추천한 것은 내 아이디어였다.” 본인과는 일면식도 없지만 관세청장으로서 매우 혁신적이었고, 주변의 평도 매우 좋았다, 그래서 추천했다고요.
리: 뭘 했길래 혁신 소리를 들은 거죠?
이용섭: 문재인 후보가 쓴 책을 보면 제가 관세청장하면서 관세 행정도 많이 혁신을 했고. ‘그 이후에 국세청 개혁도 잘해서 혁신수석도 하고, 장관도 두 번 하고, 국회의원이 되어서도 의정활동도 잘하고 있어서 고맙게 생각한다. 이용섭 국회의원은 참여정부와 인연도 없는데 이렇게 발탁해준 것에 대해서 늘 고맙게 생각한다더라’ 그런 이야기가 반 페이지 정도 나와요.
리: 캬… 두 명의 대통령에게 인정받으신…
이용섭: 그런데, 문재인 대통령은 저를 국세청장에 추천해줬다고 여태껏 한번도 직접 이야기하신 적이 없어요. 국민들이 마음을 맡길 수 있는 대통령이라면 이 정도의 심지는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서, 더 열성적으로 지지하게 됐습니다.
리: 학창시절에는 어떠셨어요?
이용섭: 학교 다닐 때 특출하지는 않았어요. 가난한 농사꾼 아들이었고 중고등학교 6년간 12km를 걸어 다녔어요. 집에 오면 농사짓고 그랬죠. 그런데 그러니까 제 친구들이 저 때문에 부모님한테 꾸중 많이 들었죠. 주위 부모님들이 “용섭이 좀 봐라, 용섭이는 공부도 잘 하고 학교 갔다 오면 농사도 짓는데 너희는 뭐하냐” 하신 거예요(웃음).
가장 무서운 게 시민의 뜻이었다
리: 그렇게 승승장구하다, 2010년, 2014년에 경선에서 떨어졌어요.
이용섭: 제일 아픈 게 2014년 선거죠. 당시 광주 시장 도전에 생각이 없었어요. 그런데 그때가 안철수의 새정치연합 신당이 돌풍을 일으키던 때라, 지역 국회의원들과 김한길 대표가 경쟁력 있는 사람이 나가주길 바랐어요. 그래서 출마 선언을 했는데… 바로 다음 달에 안철수 신당하고 합당했어요. 이러니 제가 필요 없어진 거죠. 저보고 출마해달라고 얘길 했던 김한길과 후보를 경선으로 뽑겠다던 안철수, 두 대표가 최고위원들이 반대하는데도 5월 2일 기습 전략공천을 해버렸어요.
리: 그때 기분이 어떠셨어요?
이용섭: 인생의 쓴맛을 그대로 느꼈죠. 정치란 게 인간이 상상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만들어내는 곳이구나 느꼈어요. 전략공천을 꼭 해야 한다면 사전에 이해해달라든지, 뭐라도 소통이 있어야 하잖아요? 없었어요. 결국 다음날 정론관 기자회견을 통해 탈당했죠. 그때 제가 뭐라고 했냐면, “일제강점기 조국, 대한민국을 구하고자 만주로 떠나야 했던 독립군의 심정으로 사랑하는 당을 떠난다” “김한길, 안철수가 민주당을 떠나는 날 다시 민주당으로 돌아오겠다”고 했어요. 그 후 저는 이 약속을 지킨 거죠.
리: 2016년 국회의원 선거에도 쓴맛을 봤잖아요?
이용섭: 안철수, 김한길이 나간 후 복당했어요. 여론조사에서 상대방보다 제가 2배 이상 지지율이 높았기 때문에 다들 된다고 했죠. 그런데 민주당 역풍이 불기 시작한 거예요. 시민들이 민주당 독주에 대해 강하게 질책해야 한다는 여론의 바람이 불었습니다.
리: 맞는 말인 것 같네요(…)
이용섭: 광주 국회의원이 8명인데, 다들 그렇더라도 다 떨어져도 이용섭은 된다고 했어요. 당연히 저도 그럴 줄 알았죠. 그런데 졌어요. 그때 많은 걸 느꼈어요. ‘임금은 배고 백성은 물이다.’ 이런 말이 있잖아요? 민심이라는 게 매우 무섭고 중요한 것이라는 걸 느꼈죠. 국민의당 바람 얘기가 많지만, 그래도 그런 정도의 바람은 제가 이겨냈어야 하는데 제 부족한 점이 컸지요.
리: 뭐가 부족했나요? 다들 늘 자기가 부족하다고 하지만…
이용섭: 제가 더 노력을 했어야 하는데 너무 안일하게 대응했죠. 서울에서 중앙당 일하느라 지역구 관리를 제대로 못 한 것도 있고요. 민주당이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달라져야 한다는 강력한 질책이었죠. 그때 선거에서 실패하고 얻은 교훈이 ‘감사하는 마음을 갖자’는 것이었어요.
리: 누구에게요?
이용섭: 모든 것에 대해서요. 2008년에 제가 정부에 있다가 정치권으로 나왔을 때 공천을 받아서 당선됐잖아요. 저는 그때는 그걸 당연한 것으로 생각했어요. 내가 공천을 못 받으면 누가 받겠나 생각했는데 그것 자체가 실은 고맙고 감사한 것이었다는 거죠. 떨어졌어도 건강하니까 고맙고 저 자신을 성찰하는 시간을 가질 수 있으니 감사하고 인생과 정치는 전화위복, 새옹지마니까 이것도 훗날 나에게 도움이 될 거라고 생각했어요.
약속을 지키는, 능력 있는 시장이 필요할 때
리: 그래도 지금 인생에서 제일 싫어하는 사람 TOP 5 안에 안철수가 들어가죠?
이용섭: 다 용서했어요.
리: 말 바꾸기… 사실 정치의 세계에서는 있을 수 있는 일 아닌가요?
이용섭: 언론에서 그렇게 생각하기 때문에 이런 일들이 반복되는 겁니다. 약속을 지키지 않으면 다음 선거에서 응징해야 한다고 국민들이 생각하면 정치인들이 옳은 길을 갑니다. 많은 분이 정치하다 보면 약속 좀 깰 수도 있다고 생각하니까, 정치인들이 약속을 깨게 되는 거예요.
리: 사실 민주당은 자중지란을 일으키는 정당이라는 느낌이었는데, 최근 2년 새 지도부가 끈끈하게 뭉치는 모습이 보여요. 왜 그런 변화가 일어났다고 보세요?
이용섭: 리더십의 문제에요. 문재인 대통령이라는 리더가 있기 때문에 일사불란하게 움직여지는 거죠. 문재인 정부가 출범한 지 1년밖에 안 되었는데 세상이 크게 바뀌고 있잖아요. 일촉즉발의 위기로 치닫던 한반도에 평화의 바람이 불고 있고, 보수정권 10년의 적폐를 청산하고 대한민국을 나라다운 나라로 바꿔가고 있잖아요. 그러니까 리더의 역할이 이렇게 중요한 거예요. 제가 주장하는 게 광주도 마찬가지다, 광주도 누가 시장이 되느냐에 따라서 광주의 역사가 바뀌고, 시민들의 운명이 바뀐다는 거예요.
리: 광주에서 제일 절실한 문제가 뭐라고 생각하세요?
이용섭: 광주가 정치적 소외와 경제적 낙후로 인해서 많은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정치적 소외는 문재인 정부가 들어서면서 어느 정도 극복이 됐다고 봐요. 경제적 낙후는 새로운 시장이 시민들과 함께 극복해야 할 과제에요. 많은 시민이 문재인 정부 5년 동안 광주가 획기적으로 발전하지 않으면 광주는 한반도 남녘의 중소도시로 추락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실제로 2012년부터 광주 인구가 계속 줄고 있습니다.
리: 이번 선거는 어떻게 출마결심을 하게 됐나요?
이용섭: 광주 시민들이 계속 문자, 이메일도 보내시고, 서울로 직접 찾아오시는 분도 계셨어요. ‘광주에 와서 경제적 낙후를 극복해달라. 일자리위원회 부위원장은 대안이 있지만, 광주시장은 대안이 없다.’ 이런 이야기를 계속해주시는 거예요. 그래서 ‘시장으로 출마하는 것이 결초보은하는 것이다’, 그렇게 판단을 하게 됐죠. 제가 좋지 않은 여건 속에서도 나라의 중요한 일을 할 수 있었던 것은 김대중, 노무현 민주 대통령을 만났던 행운도 있지만 고향 분들이 적극적으로 뒷받침을 해주신 거거든요.
인구가 줄어드는 광주, 일자리 많은 광주로 바꾸겠다
리: 사실 모두가 일자리를 외치는데, 가장 어려운 문제고 해결하기도 어렵거든요. 일자리위원회 계실 때 어떻게 이런 구조적인 문제를 극복하려고 노력하셨나요?
이용섭: 과거에는 일자리 정책이라는 게 없었어요. 그때는 성장하면 일자리가 바로 늘어났어요. 그런데 자동화, 기계화 설비가 도입되고 계속해서 구조조정을 하고, 인건비가 싼 나라로 공장을 이전하면서 고용 없는 성장이 일어나는 거죠.
리: 네. 그렇죠…
이용섭: 취업유발계수라고 돈을 10억 투자했을 때 일자리가 몇 개 만들어지는지에 대한 수치가 있는데, 1990년에는 10억당 일자리가 75개 만들어졌어요. 그런데 지금은 12개 만들어지죠. 또 과거에 우리가 생각했던 대기업이 일자리를 많이 만든다, 제조업이 일자리를 많이 만든다, 수출이 일자리를 많이 만든다는 것은 이제는 틀린 개념이에요. 그래서 중소기업 창업을 활성화하고 수출보다 내수를 늘리고, 제조업보다는 서비스업을 키워야 하는 거죠. 제조업 일자리의 취업유발계수는 7개밖에 안 돼요. 그런데 서비스업은 20개가 나오거든요.
리: 그러면 광주의 일자리에 포커스를 맞춰보죠. 지금 일자리가 대부분 수도권에 집중되고 있잖아요. 어떻게 하면 광주에 일자리를 늘릴 수 있을까요
이용섭: 이명박-박근혜 정부 10년 동안 일자리 정책이 21번 나왔어요. 그런데도 청년 일자리 문제가 해결이 안 됐어요. 그냥 백화점식으로 나열만 했지, 적중하는 정책을 못 만들었기 때문이죠. 그래서 발상을 전환해서 특단의 대책을 강구해야 한다는 겁니다. 일자리가 넘쳐나는 광주 만들기 10대 공약을 발표했어요. 대표적인 한두 가지만 말하면, 경제자유구역을 만들려고 해요.
리: 세제 혜택이나 이런 걸 주는 건가요?
이용섭: 그렇죠. 경제자유구역은 세금 혜택을 주거나 규제를 없애서 외국인 투자나 외국 기술을 가져오는 거예요. 그런데 지금 여기는 아무것도 없거든요? 지금 여기 빛그린산단, 광주역, 군 공항, 도시 첨단 산단 등을 연결해 미래 산업과 국제 놀이 시설에 특화된 경제자유구역으로 지정해서 새로운 뉴딜 정책을 실시하려고 해요. 빛그린산단은 자동차 부품, 스마트카로 해서 자동차 특화 산단으로 할 것이고요. 도시첨단산단은 에너지 밸리로 만들고, 군 공항은 스마트 시티 내지는 국제 관광 시설을 설치하려고 합니다. 그러면 여기서 상당히 많은 일자리가 나올 거예요.
리: 도시마다 이런 단지에 대해 경쟁적으로 공약을 내놓고 있는데요. 광주가 입지적으로 유리한 게 있나요?
이용섭: 3단계로 접근하려고 하는데요. 우선은 광주가 다른 도시에 비해서 자동차나 전자 제조업이 잘 되어 있습니다. 기존 주력 산업들을 첨단 기술과 접목해 베트남 같은 곳으로 떠나지 않도록 투자 환경을 만들어줘야 합니다. 두 번째는 4차 산업혁명 시대에 맞는 신성장 산업 육성입니다. 그걸 위한 게 에너지 밸리에요. 다행히 한전이 이곳에 있고, 한전공대도 만들면 가능성이 있죠. 마지막으로 가장 역점을 두는 것은 광주다움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광주만의 독특함을 발굴해 브랜드화, 산업화하여 광주만의 먹거리, 볼거리, 일거리를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죠.
리: 광주다움이란 무엇일까요?
이용섭: 광주를 옛날부터 의향, 미향, 예향. 풍요로운 삼향의 도시라고 했습니다. 의향 광주의 정의로움, 미향 광주의 맛깔스러운 음식, 예향 광주의 전통 문화예술. 여기에 전라남도의 2,000개에 가까운 천혜의 섬과 해안선을 엮어서 광주만의 고유한 상품과 서비스를 만들어야 합니다.
리: 이건 산업하고는 별로 상관이 없는 것 아닌가요?
이용섭: 우리보다 앞서가는 도시를 따라잡는 추격자 전략으로는 광주에게 경쟁력이 없어요. 광주가 발전하기 위해서는 광주에 가야만 일할 수 있고, 광주에 가야만 볼 수 있고, 광주에 가야만 먹을 수 있는 광주만의 고유하고 독특한 것을 발굴해내야 한다는 것이죠.
리: 큰 그림은 잘 그려주신 것 같은데, 지방대 차별 문제도 심각하잖아요. 이건 어떻게 해결하실 건가요? 사실 거의 멸망 상태거든요.
이용섭: 그래서 제가 발의해서 통과시켰던 법안이 지방대학 육성 및 지역균형발전에 관한 법률입니다. 혁신도시에 나온 기업은 그 지역 출신을 30% 이상 뽑도록 했어요. 한전 같은 경우 작년에 전체 정원의 13%만 광주 전남 자원을 뽑았는데 하루아침에 30%까지 올리기는 어렵죠. 그래서 대통령께서 올해 2018년까지 18%까지 올리고, 매년 2% 이상씩 해서 2022년에 30%까지 채용하도록 했어요.
리: 공기업과 공공기관이 양질의 일자리이기는 하지만, 그 수혜 대상의 범위에는 한계가 있잖아요?
이용섭: 조금씩 해결해나가는 것이죠. 민간기업 경우에는 지역에는 그 지역에 맞는 고유의 사업이 있잖아요. 광주는 재생에너지, 자동차 등이 있죠. 이쪽과 관련된 특화된 맞춤형 인재 육성을 해서 지방대 문제를 극복하는 거죠. 이제는 총장이 좋아하는 인재, 교수가 좋아하는 인재가 아니라 산업 현장에서 필요로 하는 맞춤형 창의융합형 인재를 교육해서 만들어내야 하는 것이죠.
개발을 넘어 작은 부분의 모든 개선이 일어나는 광주광역시로
리: 밖에 보니까 ‘광주행복1번가’가 운영되고 있더라고요. 그건 어떻게 나온 거죠? 사실 시의원이나 구의원이 할만한 일이라는 생각도 드는데요.
이용섭: 시민들이 생활하면서 불편한 문제들이 참 많습니다. 그렇다고 소송할 문제도 아니고, 구청에서는 또 담당 업무가 아니라고 하죠. 그래서 ‘광주행복1번가’라는 플랫폼을 만든 거예요. 여기에다 느끼는 생활의 불편함을 말씀해주시는 거죠. 지금 한 300건이 들어왔는데, 우리 시민들이 제기했던 문제들을 취임 100일 이내에 해결해 드리고자 해요. 시민들의 삶을 바꾸는 첫 번째 일자리·경제시장이 되겠다고 이야기한 것을 실천하는 것이죠.
리: 굉장히 추진력 있는 스타일이신 것 같은데요. 인구 감소와 관련되어 중요한 문제가 교육이잖아요. 교육과 보육 관련해서 추진하고 싶으신 방안이 있나요?
이용섭: 일자리가 넘쳐나는 광주를 만들어서 떠나는 광주에서 돌아오는 광주, 찾아오는 광주를 만들려고 해요. 신혼부부에게 우선적으로 주택을 공급하거나, 아이를 낳으면 광주에서 쓸 수 있는 지역화폐로 20만 포인트씩을 지급한다든지요. 아이만 낳으면 대한민국과 광주가 같이 키우겠다는 사회를 만들겠다는 거죠.
리: 어느 도시를 하면 무언가 떠오르는 게 있잖아요. 광주 하면 뭐가 떠오르는 도시로 만들고 싶으세요?
이용섭: 얼마 전에 UN에서 발표하기를 ‘미래의 경쟁력은 두 가지다. 하나는 전통 문화예술이고, 하나는 자연환경이다’라고 했어요. 이건 모방이 안 되는 것이거든요. 다행히도 광주에는 한국인의 애절한 한의 문화와 예술 같은 것이 많이 살아 있습니다. 정의로움과 전통 문화예술, 맛깔스러운 음식. 이게 이제 경제와 연결이 되어야 합니다.
리: 어떤 식으로 가능할까요?
이용섭: 광주의 정의로움을 문화예술로 승화시켜 영화, 극, 창, 판소리 등을 만드는 식이죠. 그렇게 광주 가야만 먹을 수 있는 음식, 광주 가야만 일할 수 있는 자리, 광주 가야만 들을 수 있는 문화예술을 만드는 겁니다. 정의로운 도시가 잘 살아야죠. 그래야 역사가 도덕적 교훈을 줄 수 있습니다. 독립군 후예들이 친일파 자손보다 못 살고 어려움을 겪는다면 누가 나라가 어려울 때 목숨을 바치겠어요. 광주는 정의로운 도시이기 때문에 잘 살아야 하고, 그래서 제가 광주를 대한민국의 중심도시로 우뚝 세우기 위해서 시장에 출마한 것입니다.
리: 마지막 질문인데요. 기존의 광주와 이용섭의 광주는 어떻게 이미지가 달라질 거라고 보시나요?
이용섭: 대한민국의 변방에서 중심이 될 것이다. 일자리가 없어서 떠나는 광주에서 돌아오는 광주, 찾아오는 광주. 그러니까 사람과 돈과 기업이 몰려오는 200만 광주 르네상스 시대가 열릴 것이다.
리: 4년 임기인데 너무 막 지르는 것 아닙니까…
이용섭: 이건 방향성이니까요. 광주시민들이 언제 어디서나 ‘나는 광주 산다, 광주 사람이다’ 자랑스럽게 이야기할 수 있는 당당한 광주를 만들어보자는 것이죠. 제가 1974년에 행정고시 합격해서 서울에 교육받으러 올라가서 하숙집을 얻으러 갔는데, 마지막에 어디서 왔냐고 묻더라고요. 제가 “전라도 광주에서 왔지라잉” 하니까 조금 기다려보라고 하더니, “우리 아저씨한테 물어보니까 오늘 낮에 방이 나가버렸다는데요?” 하는 거예요.
리: 세상에;;;
이용섭: 그게 1970-1980년대 광주에 대한 일반적 인식이었습니다. 우리 시민들이 죄지은 것도 아니고, 나라가 어려울 때마다 시대정신과 대의를 쫓아서 자기희생을 통해서 역사의 물꼬를 바로 돌렸는데 왜 그런 광주가 이런 취급을 받아야 하는지 하는 생각을 했어요. 앞으로는 우리 시민들이 당당하게 어디서나 나 광주 사람이다 이야기할 수 있는, 자랑스러운 광주를 만들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