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환(ㅍㅍㅅㅅ 대표, 이하 리): 이번이 첫 선거시죠?
차상돈(경남 사천시장 후보): 첫 번째 아닙니다. 두 번째도 아니고 세 번째입니다.
리: 그럼 두 번은 어떻게, 어떻게 나오셨습니까.
차상돈: 2014년 지방선거 때 사천경찰서장을 하다가 출마를 선언했죠.
리: 언제 나오셨어요?
차상돈: 58세에 나왔죠.
리: 연세 많으신데 정정하시네요.
차상돈: 지금은 62살이죠. 그때 여야 합의로 기초단체장 공천을 안 하겠다고 했어요. 그걸 순진하게 믿었죠. 그래서 이 지역은 새누리당을 많이 지지하니까, 새누리당에 입당해서 준비했죠. 그런데 결국 합의가 안 이루어지고 공천을 하게 됐어요. 그럴 줄 알았으면 김무성 대표나 그런 사람들한테 공천 줄지 안 줄지 물어보고 사직했을 텐데 순진했죠.
리: 공천을 안 하면 당에서 누가 나오게 되는 겁니까? 다 나오는 건가요?
차상돈: 무공천으로 한다는 거죠. 당에 소속은 되어 있더라도, 누구를 지정해서 공천을 안 하고 나오고 싶은 사람은 다 나오니까 한 당에서도 두 명, 세 명이 나올 수 있는 거죠. 사실 저는 현 시장이 새누리당이니까 공천을 받을 수 없는 게 거의 확실했거든요. 당원도 아는 사람이 거의 없었고요. 그래서 거의 첫 정치에서 사기당한 거죠. 당에서 수십 년 해온 사람을 어떻게 이겨요.
사람이 하는 정치를 하고 싶어서 시작한 정치
리: 그런데 사기당했다기에는 솔직히 믿을만한 게 아니지 않았나요?
차상돈: 제가 정치를 몰랐던 거죠. 알았으면 당하지도, 하지도 않았을 거예요. 그래서 최초의 잘못된 선택으로 이 고생을 하게 됐죠. 당적 이야기로 저를 공격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새누리당에 들어갔던 건 사실이지만 당 행사에 한 번도 참석을 안 했어요. 가서 보니까 이 당은 희망이 없다고 답이 나오더라고요.
리: 왜요? 나왔다고 너무 막말하시는 거 아닙니까?
차상돈: 아뇨, 실제로 그래요. 경선과정을 보니까 ‘이야… 이건 정말 공직사회의 사고방식으로는 감당을 못하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첫째로 자신들끼리 딱 뭉쳐서 외부의 신진 인사가 들어오지 못하게 장벽이 쳐요. 둘째로는 경선하는 데 1,198명을 지역 권리당원 중에 선거인단을 뽑기로 했어요. 그런데 그중 98%가 투표했어요. 이번에 민주당 경선 투표율이 50%밖에 안 됐어요. 새누리당 당원들이 다 저하고 같이 나왔던 김재철 MBC 전 사장한테는 투표를 안 하고 정만규 당시 시장한테 몰아줬던 거죠. 그런데 지금 시장이 된 송도근 시장은 경선을 안 하겠다고 탈당해서 무소속으로 나왔죠. 자기는 두 번 떨어진 경험이 있으니까 ‘아, 이거 들어갔다가는 공천을 못 이긴다’는 판단을 하고 무소속으로 나간 거죠. 저는 그래서 이 당을 떠나야겠다. 무소속으로 나가서 당선된 후에 당을 선택해야 살아남을 수 있다고 생각했던 거죠.
리: 김재철 사장 되게 불쌍한데요. 그렇게까지 정권에 충성했는데… 그래서 총선 때는 무소속으로 나오신 거예요?
차상돈: 그렇죠. 그때는 선거를 좀 해본 사람들이랑 세 명이서 국회의원 출마를 할지 말지 밥 먹으면서 이야기했어요. 그런데 한 명은 사천시장이 되려면 이번에 국회의원 출마해야 한다고, 홍보 효과가 20~30억씩 나온다는 거예요.
리: 남의 돈 몇천, 1억 날아가는 건 신경도 안 쓰시고 참 쉽게 이야기를…
차상돈: 아니, 그분도 해봤으니까 하는 이야기에요. 그래서 방송 나오지, 플래카드 붙이지. 그러면 확실히 알리는 기회가 된다는 거예요. 경찰서장 했다고 해봐야 고작 1,000명밖에 저를 모르니까 나가야 된다는 거죠. 그런데 또 다른 사람은 시장 출마 하면 끝까지 시장으로 가야지, 국회의원 나갔다가 시장 나가면 이미지가 안 좋다는 거예요. 그래서 비교를 해봤죠. 그런데 제가 하동에서도 서장하고, 또 조영남 씨 다음으로 명예군민 3호가 됐어요. 인기가 좋았죠. 또 사천이 절대적으로 사람이 많고, 삼천포 쪽에도 아는 사람이 있으니까 사천에서 적극적으로 지지를 받고, 하동에서도 표를 얻으면 당선이 된다고 계산했던 거죠. 그렇게 민주당 후보가 안 나온다면 된다는 계산 하에 출마했는데 남명우라는 후보가 9전 10기로 민주당에서 출마했죠.
리: 그분은 10번 나왔는데 한 번도 못 붙은 거예요? 왜 그럴까요…
차상돈: 그건 모르죠. 그래서 서로 단일화를 하려고 했는데 안 됐죠. 남명후 후보가 거부했어요. 그렇게 제가 33% 얻었고, 남명우 후보가 13%를 얻었죠.
리: 그러면 단일화했어도 안 되는 거 아니에요?
차상돈: 그런데 심리적인 효과라는 게 있잖아요. 45%를 넘어서는 시너지가 붙었으면 됐을 수도 있죠. 그런데 제가 사천에서는 49%로 1등을 했어요. 여상규 의원한테 5,000표를 이겼죠. 그게 기반이 되어서 차상돈이 정치권에 들어간다는 게 많이 알려졌죠.
리: 그러면 정치를 해야겠다고 생각한 건 왜인가요?
차상돈: 저는 정치에 입문한 계기가 다른 사람하고 조금 달라요. 다른 사람들은 명예를 위해서, 무슨 자리를 했으니 다른 걸 해봐야지 그런 마음인데 저는 달라요. 저는 처음에 경찰서장을 한 게 하동 경찰서장이었어요. 그때 하동 경찰서를 짓는 중이었는데, 서장이 알아서 하라는 식이었어요. 85% 정도를 짓기는 했는데 남은 예산이 1,000만 원이라는 거예요.
리: 무슨 말도 안 되는 이야기죠…? 건물을 세워야 되잖아요?
차상돈: 건물은 한 85% 다 지기는 했어요. 이제 마무리를 하면 되는 과정이기는 한데, 그래도 경찰서 울타리도 안 되어 있고 그런 상황인 거예요. 그래서 계속 여기저기 찾아다니면서 후원을 부탁했는데, 그걸로는 턱이 없는 거예요. 그러다가 누가 ‘서장이 직접 하동군수를 찾아가서 부탁하면 도와주지 않겠느냐’ 이러는 거예요. 그래서 찾아갔더니, 뭐 실무진이 사이에서 미리 조율해놓은 게 있기는 할 거예요. 그런데 바로 1억 2,000을 지원해주겠다는 거예요. 대한민국 경찰사에 없을 일이죠.
리: 아무리 생각해도 이런 시골 행정은 개판인 것 같네요(…) 아니 무슨 1억을 그렇게 쉽게 내줘요.
차상돈: 쉽게 내준 게 아니죠. 서장의 인품을 보고.
리: ㅋㅋㅋㅋㅋㅋㅋㅋㅋ
차상돈: 뭐 그리고 또 여기가 제 고향이 아니잖아요. 그런데 제가 고향보다 하동을 사랑하고 제 일처럼 동네일을 하니까 군수가 바로 지원해준 거죠. 그래서 총 1억 8,000 정도를 지원받아서 완공했어요. 그 후에 또 진해 경찰서장을 할 때도 조경을 다시 했죠. 저는 일하는 곳마다 흔적을 남겼어요.
리: 왜 경찰서장이 건설업자가 되어서…
차상돈: 문화예술을 사랑하고 친환경적인 경찰인 거죠. 또 경찰의 딱딱한 이미지를 부드럽게 만들려고 한 거죠. 그런데 진해에서는 물어보니까 경찰서를 잘해놨는데 시에서 5,000만 원을 지원해줬다는 거예요. 하동은 인구 5만의 시골도시이고 진해는 20만이 되는 도시인데 진해는 5,000 지원받았고 하동은 2억 가까이 지원받았다, 그러면 하동에서 얼마나 파격적 지원을 해준 거예요. 그게 다 제가 노력을 했던 거죠.
리: 그래서 그 부분하고 정치를 하게 된 계기는 어떻게 이어지는 거죠?
차상돈: 그때 지역에서 일하시는 군수, 국회의원, 군의원 이런 분들이 저를 눈여겨보셨죠. 제가 떠날 때 송별식장을 하는데 지금은 돌아가신 군의회 의장님이 “우리 차상돈 서장은 일을 열심히 하고, 저런 사람은 정치를 하면 참 잘할 사람이다” 이렇게 이야기를 하신 거예요. 그러자 옆에 있던 조유행 군수님이, 3선을 하셨을 정도로 아주 인품이 좋은 분이신데 맞장구치시면서 아주 잘할 거라고 하시고, 또 옆에 있던 여상규 국회의원이 “차 서장이 정치하면 내가 많이 도와줘야지” 이러는 거예요.
수많은 역경과 방황 끝에 달게 된 무궁화의 무게
리: 옛날로 잠깐 돌아가 볼게요. 원래 고향은 어디세요?
차상돈: 태어난 곳은 사량도에요, 통영 사량도.
리: 통영 분이셨군요? 어쩐지 발음이 딱… 저희 외가가 통영이어서요. 특유의 발음이 있죠…
차상돈: 저는 서울에 있어도 별로 말이 안 바뀌더라고요. 사량도에서 태어났는데 아버지는 삼천포 중학교 1기세요. 그때 사량에는 학교가 없으니까 삼천포로 나왔던 거죠. 그런데 사량면에서 옛날로 치면 공립 야학 비슷한 건데, 공립학교를 만들었어요. 그런데 저희 아버지가 사량 출신으로는 유일하게 중학교를 나왔으니까, 또 그때 삼천포에서 마침 야학 선생을 하고 계셨어요. 그래서 돌아와서 사량 공민학교의 설립자가 되셨죠. 돈을 많이 내신 건 아니고, 설립에 주도적 역할을 하셔서 설립자로 기록이 되셨어요. 그리고 어머니 친정은 삼천포 부잣집이었는데 사량으로 시집을 와서 제가 태어났고, 한 다섯 살 정도에 삼천포로 이사를 갔죠.
리: 그러면 사천이 사실상 고향이네요? 초중고는 여기서 다니신 거죠?
차상돈: 초등학교는 삼천포초등학교 51회, 중학교는 진주중학교…
리: 그러면 혹시 사천에 중학교가 없었나요?
차상돈: 아니요, 진주중학교가 그때는 엄청나게 명문이었어요. 그래서 진주중학교를 시험쳐서 들어갔다가 고등학교는 다시 삼천포고등학교로 돌아왔죠.
리: 아니, 왜 돌아왔어요?
차상돈: 공부를 못해서…
리: 공부를 못 했어요? 세상에, 되게 잘하셨을 것 같은데.
차상돈: 당시 진주중학교 시험에 합격한다는 건 가문의 영광이었죠. 그런데 청소년기에 방황을 했어요. 어영부영 수업 안 들어가면서 농땡이 치고. 그러다 보니까 고등학교를 좋은 곳을 못 가고 재수해서 삼천포고로 ‘컴백고홈’을 했죠.
리: 재수까지 해서 삼천포라니 좀 슬프네요. 정말로 놀았나 봐요. 삼천포고로 돌아가서는 어땠습니까? 부모님이 엄청 실망하셨을 텐데요.
차상돈: 실망 정도가 아니라, 아버지는 “내가 니 놈 때문에 사업도 다 망했다” 이러셨죠.
리: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왜 애 탓을…
차상돈: 아버지가 정말 저에 대한 기대가 컸어요. 어느 정도였냐면 정말 대단한 건데, 아버지가 대단한 분이었어요. 아까 말한 것처럼 학교를 주도적으로 설립하시고 사량면에서 면의원을 하시고 의장도 하셨더라고요. 그러다가 이제 가난에서 벗어나서 양조장도 사고, 정미소도 사면서 삼천포로 나오게 된 거죠. 섬 소년이 40대에 시골 부자가 된 거예요. 그런데 ‘사량도 섬 놈’ 소리를 들으니까, 아들은 절대로 안 들어야겠다. 그래서 본적, 이름, 생일을 싹 바꿔버렸어요. 그래서 제가 농담으로 간첩이라고 합니다(웃음). 본적을 그래서 경남 고성군으로 바꿨죠. 이름은 차준영에서 차상돈으로 바꾸고요.
리: 어느 쪽이 더 마음에 드세요?
차상돈: 저는 상돈이가 더 마음에 듭니다.
리: 다행이네요.
차상돈: 세 번째로 생년월일은 1957년 10월 25일생이었는데 그해 12월 25일생으로 바꿨어요. 예수님처럼 훌륭한 사람이 되라고 바꾼 거죠. 사실 본적을 고성으로 바꾼 것도 고성에서 훌륭한 사람들이 많다고 바꾼 거예요. 지금도 국회의원이 한 번에 대여섯 명씩 나와요. 인재의 도시였죠.
리: 그게 그런데 아버지가 너 때문에 망했다는 거하고는 무슨…
차상돈: 그래서 제가 삼천포에 있는 용산초등학교에 다녔는데, 아버지가 고성에 양조장을 사서 내려가시게 되면서 저만 외갓집에서 학교를 다니게 삼천포 초등학교로 전학을 보냈어요. 외가집도 그때 대단했죠. 고기 그물 만드는 새끼줄 공장을 했어요. 이제는 아무도 안 쓰는데 나일론줄이 나오기 전에는 전부 짚으로 만들었죠. 대한민국에서 마지막으로 짚으로 만드는 공장이었어요. 그런 집인데 외할아버지가 인물만 보고 아버지한테 어머니를 시집보냈던 거죠. 그래서 고성에 양조장을 사서 내려가기 전에 저랑 같이 삼천포 초등학교로 2km 정도를 걸어가시면서 하시는 말이 “네가 왜 삼천포 초등학교로 진학을 하는지 아느냐” 제가 그걸 어떻게 알겠어요, 논에서 개구리 잡고 뛰놀고 그러던 시절인데요. 말을 안 하니까 “경남에서 제일 좋은 진주중학교 시험에 합격해야 되기 때문이다” 하시는 거예요.
리: 우후, 아버지의 뜻이 이뤄진 거네요.
차상돈: 두 번째, 서울로 대학을 가서 다음에 국회의원이 되어야 한다. 이거였죠. 그래서 진주중학교에 갔는데 하라는 공부는 안 하고 그냥 애들이랑 어울려 다니면서 잠이나 자고 그랬죠. 그러니까 58명 있는 반에서 56등, 57등 했고 당연히 고등학교를 못 갔죠.
리: 그래서 사업 망한거랑은 대체 무슨 상관이죠?
차상돈: 그런데 그때 또 저희 집이 망해갔어요. 그런데 집에서 제가 놀고 있으니까 아버지가 얼마나 답답했겠어요. 그때 아버지가 시내버스 회사를 운영하셨는데 가서 조수나 하라고 그러시기도 했어요.
리: 실제로 했어요?
차상돈: 실제로 했죠. 목수 일도 했고, 어부 일도 해봤어요. 그렇게 방황하다가 이제는 학교를 가야겠다 싶어서 학교에 가긴 했는데 또 그냥 가방만 들고 다녔죠. 그러다가 정신 차린 게, 고등학교 2학년 말에 제야의 종소리를 듣다가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드는 거예요. ‘지금 친구들은 다 대학 가서 멋지게 바바리 코트 입고 돌아다니는데…’ 하는 생각이 들면서 눈물이 나더라고요. 그래서 대학을 가야겠다고 마음먹고 공부를 하기는 했는데 또 바로는 못 가고 재수를 하게 됐죠.
리: 재수 때는 공부 열심히 했어요?
차상돈: 열심히 했죠. 그런데 워낙 중고등학교 시절에 놀아서 영어가 안 되는 거예요. 그래서 점수 높은 대학은 못 가고, 마산에 있는 경남대학교 법과대학교에 진학했죠. 그런데 또 나이가 삼수한 나이니까, 그해 11월로 군대 영장이 나왔어요. 그래서 그냥 미팅이나 하고, 막걸리나 먹고 그러다 군대를 갔죠. 그런데 군대 가서 진짜 생각이 바뀌었어요. 군대를 나오면서 두 가지를 이야기했어요. 하나는 제가 공병대였는데, 그래서 진짜 죽어라 노가다를 했어요. 그래서 절대로 사회 나가면 노가다판은 안 간다 싶었죠. 두 번째는 저는 그래도 대학교 다니다 왔는데 중졸, 고졸 이런 사람들이 소위, 하사를 달았는데 전 쫄병이죠. 그런데 또 간부랍시고 그 사람들이 일은 안 하고 맨날 노는 거예요. 그래서 절대로 또 쫄병은 안 하겠다고 했죠. 그렇게 나오자마자 머리띠를 꽉 묶고 책을 챙겨서 절로 들어가서 공부하기 시작했어요.
리: 무슨 공부를 했습니까?
차상돈: 내가 부족했던 영어공부부터 시작해야겠다고 해서 그때는 『성문 종합영어』가 아니라 『정통 종합영어』가 있었는데 그거를 하루에 볼펜 한 자루씩 다 써가면서 15시간씩 공부했어요. 그렇게 정통 종합영어를 거의 마스터하려는데, 스님이 겨울도 다가오고, 땔감도 없고 그러니까 나가라고 하더라고요. 그렇게 나오니까 아직 영어가 잘 되지는 않아서 영어 시험이 없는 시험을 찾아봤어요. 그런데 변리사 시험이 없더라고요. 그래서 2년 동안 죽어라 공부해서 특허법은 거의 다 외울 정도가 됐는데, 딱 4학년 올라가니까 영어가 시험과목에 포함되더라고요.
리: (…) 그래서 어떻게 했습니까?
차상돈: 그래서 공무원 시험을 해야겠다 생각했죠. 그때 친구가 9급 검찰직 시험에 붙었는데, 그래서 저도 쳤는데 떨어졌어요. 그래서 제 공부에 대한 한계를 느끼고 ‘이제는 서울로 가자’ 해서, 고등학교 졸업하고 재수 공부하러 서울로 갔던 것처럼 이번에는 대학교 졸업하고 공무원 시험 준비하러 서울로 간 거죠.
리: 그때가 몇 년 쯤이었어요?
차상돈: 1985년이었는데 종로에 일식 기와집에 연탄난로 피워놓고 여섯 명씩 다다미방에서 자는 그런 학원이 있었어요. 연탄가스로 안 죽은 게 다행이었죠(웃음). 그런데 1년 동안 진짜 열심히 했는데 온갖 시험에 다 떨어졌어요. 강원도, 경기도, 인천 공무원 시험 떨어지고 숙대 교직원 시험, 대한주택공사, 대한신탁공사, 친구가 라면회사 영업사원이 되길래 따라서 넣었는데 그것도 떨어졌죠. 대체 무슨 팔자인가 싶더라고요… 그러니까 추석 때도 시골에 못 내려갔죠. 그래서 추석에 그냥 학원에서 같이 공부하던 친구들이랑 밥 먹고 바람이라도 쐬려고 인사동에 나갔죠. 그러다가 동네 슈퍼에서 캔맥주랑 새우깡 사서 맥주를 마셨죠. 그런데 작년까지 인천공항 경찰대장 했던 조용식이라는 친구가 있어요. 그 친구가 “차형, 차형은 무슨 공부 해요?” 묻길래, 사실 이제 다 떨어져서 칠 게 없다. 그랬죠. 그러니까 “작년에 여기 있던 친구가 경찰 간부 후보생 합격했대요. 차형 공부하는 걸 보니까 그건 합격하고도 남을 것 같은데요.” 하면서 100일 남았는데 한 번 해보라는 거예요. 그래서 과목이 뭐냐니까 다 제가 공부해 온 과목인 거예요.
리: 워낙 지금껏 많은 시험을 쳤으니까…
차상돈: 그렇게 얻어걸린 거죠. 그래서 이번에는 진짜 죽기 살기로 신림동 고시원에 들어가서 치질이 걸릴 정도로 공부했어요. 한 10명이 같이 공부했는데 저 혼자 붙었죠.
리: 간부 시험 붙으면 어디서부터 시작하는 거예요?
차상돈: 무궁화 하나(경위; 파출소장, 계장급)부터. 경찰대 출신하고 동급이죠. 그래서 시험 합격하고는 진짜 보무도 당당해졌어요. 완전 인생이 바뀌었으니까요. 그리고 아내랑 결혼도 하게 됐고요. 아내는 대학교 다닐 때부터 만났는데, 아내는 통영에서 교사 생활하는데 저는 아직 취업도 못 했으니까 결혼을 못 했죠. 또 중학교 때부터 부모님들이 저를 얼마나 꼴 보기 싫어했겠어요. 그걸 일순간에 다 청산한 거죠. 그렇게 1987년 4월에 임관하고, 창원 경찰서로 첫 발령이 나서 계장을 돌아가 서울로 올라갔죠.
리: 그때면 매번 시위하고 경찰 일이 엄청 많았을 때 아닌가요?
차상돈: 6·29 선언은 부산에 파견 나갔을 때 용두산에서 봤죠. 화염병도 엄청나게 보고… 또 창원에서 노사분규도 많이 봤고요.
리: 보면서 어땠어요?
차상돈: 한도 끝도 없죠. 기억나는 에피소드도 정말 많고요… 6월항쟁 때 부산 KBS가 점거를 당할 뻔했어요. 그때 진짜 인파(人波)라는 말이 실감 나더라고요. 사람들이 밀려오는데 아스팔트 길이 울퉁불퉁하니까 진짜 파도치듯이 밀려오는 거예요. 막아야 하는 입장에서는 정말 무섭죠. 막 화염병도 터지고, 불기둥도 치솟고 그랬죠. 그렇게 지내다가 서울로 올라왔는데 경찰이 되고 난 후에는 팔자가 펴서 완전 술술 풀렸죠.
경상도 촌놈, 서울에 와서 경찰청을 누비다
리: 서울 올라오고 어떻게 됐길래 팔자가 폈다고 하실 정도예요?
차상돈: 경찰이 되고 나서는 정말 잘 흘러가는 거죠. 좋은 보직도 가고, 인정도 받고, 또 승진도 잘 되고요.
리: 뭘 잘해서 그렇게 인정을 받으신 거예요?
차상돈: 뭘 잘했다기보다는 대인관계가 좋았어요. 저하고 같이 근무하는 상사나 동료는 저를 싫어하는 사람이 한 명도 없었어요. 상사, 동료, 부하를 대하는 데에서 다 인성이 나타나는 거죠. 서울에 올라오게 된 것도, 제가 고등학교 다닐 때 우리 집 아래채에 셋방을 살던 전경대장이 있었어요. 그런데 그 당시에 이 양반이 총경 승진을 해서 경찰청 경비과장을 했어요. 그러니까 딱 전화가 와서 “야, 차상돈이! 시골에서 그만 놀고 서울에 오지?” 이러더라고요. 그래서 경찰청으로 올라갔죠. 첫 보직이 경찰청 경비계장이었죠.
리: 서울 올라가니까 어떻던가요?
차상돈: 창원에 있을 때는 진짜 공짜로 술, 밥 얻어먹고 다니고 옛날식 경찰이었죠. 계급 낮은 사람이 밥 사고 그랬어요.
리: 아니, 왜요?
차상돈: 현장을 돌아다니니까 이것저것 챙길 거라고 생각해서 일종의 상납 문화가 있었던 거죠. 그래도 다행히 서울 와서는 높은 사람이 밥을 사더라고요. 그래서 좋았죠. 올라와서 한 2년 가까이는 정말로 숨 막히는 시간을 보냈어요. 그때 일을 많이 했어요. 공문 기안하고, 예산 조율하고, 법률 질의 문답…
리: 거의 행정직이었네요?
차상돈: 그렇죠. 그러면서 경찰일 하면서 가장 뜻깊은 일 두 가지를 했는데 청원경찰법 시행령을 제가 바꿨어요. 당시에는 청원경찰 정년이 법률이 아니라 대통령령, 시행령으로 되어 있었는데 이걸 55세에서 59세로 올리는 걸 1990년에 제가 했어요. 그동안 민원이 많았는데 아무도 해결을 안 해주던 걸 제가 해결했죠. 제가 100% 다 추진했어요. 위에서는 사인만 해줬죠. 법제처 도움도 받고 친구들 도움도 받고 해서 법령을 개정했죠. 그리고 또 독도에 선착장 있죠? 제가 독도 담당이었는데 독도를 다녀온 후에 독도 선착장을 입안했어요. 경찰 생활을 30년 하면서 가장 자랑스럽게 말할 수 있는 게 독도 선착장을 입안했다는 거죠.
리: 그럼 서울에는 몇 년 계셨어요?
차상돈: 저는 주로 경찰청에 있었죠. 그래서 제가 ‘경찰청에서 잘 나가던 차상돈’이라고 하는 거죠. 그때 제가 막 온 청을 다 설치고 다녔어요. 그래서 웬 촌놈이 설치고 다닌다고 유명했는데, 박일용 씨라고 김기춘하고 같이 초원복집에 있었던 사람이 있어요, 당시에는 3차장, 수사방범 담당이었는데 그 부속실, 그러니까 비서실로 선배들이 저를 추천했어요. 그게 또 인생의 전환점이 됐죠. 그분을 제가 7년을 따라다녔어요.
리: 진짜 오래됐네요.
차상돈: 한 사람을 7년 연속으로 모인 사람은 경찰 비서단 중에 제가 유일할 거예요. 나중에 경찰청장까지 하셨죠.
리: 이분하고 긴 시간 같이하셨는데 일적으로 뭐 배운 게 있나요?
차상돈: 정말로 많이 배웠죠. 비서들이 출세하는 이유가 있어요. 다양한 인물들을 경험하고, 그분들의 업무 기술을 배우고, 그분들이 살아가는 걸 다 보잖아요. 처음에는 방범수사국 비서를 하다가 부산경찰청장으로 내려가실 때는 제가 승진 공부한다고 서울에 있었는데, 그때 초원복집 사건이 터졌죠. 그래서 1993년 3월에 청주 중앙경찰학교장으로 가게 됐는데 그때 따라가서 부속실장을 했어요. 그때부터는 아무도 안 따라가려고 했죠. 끈 떨어진 신세니까요. 그런데 저는 사나이 의리로 따라갔죠.
리: 사실 바로 안 잘린 게 이상한 거 아니에요? 초원복집 사건 정도면…?
차상돈: 그런데 YS시기 최고 경찰 실세라고 했잖아요.
리: 참 세상이 더러웠네요 그때도(…) 바로 잘려야지…
차상돈: 그리고 YS가 대통령이 됐잖아요.
리: 됐으니까…
차상돈: 그리고 1993년 9월에 해양경찰청장으로 발령이 났죠. 여기는 진짜로 옷 벗는 자리였어요. 그런데도 저는 따라가서 부속실장을 했죠. 그런데 이 분이 또 살아남아서 1994년 7월에 서울경찰청장이 됐어요. 그리고 또 5달 만에 경찰청장이 됐죠. 그래서 제가 경찰청장 부속실까지 하게 됐죠.
리: 정말 보고 배울 건 엄청 많았겠네요. 주요 조직의 굵직한 건 다 봤으니까요.
차상돈: 국정원, 청와대, 언론, 기자 다 만났으니까요. 그리고 또 거기서 끝나지 않아요. 제 인생이 소설로 쓰면 한참 써요. 이분이 경찰청장 끝나고 나서는 또 96년 12월에 안기부 1차장으로 갔어요. 정부 바뀔 때까지 했죠. 사실 이회창 대통령 만들려고 간 거죠. 그런데 이회창이 떨어졌죠. 대한민국 최초로 호남 세력이 정권을 잡았잖아요. 그러면서 영남 세력 몰락의 순간을 다 봤죠. 그러다 저도 그 자리에 못 있고 국립과학수사연구소로 갔고요.
리: 참 다양하게 오갔네요?
차상돈: 거기서 또 승진 시험 때문에 피눈물 나게 공부했어요. 살아남는 일은 공부밖에 없다 해서 시험공부를 했죠. 경찰 시험은 첫 시험에 다 됐어요. 경감에서 경정 승진하는 것도 첫 시험에 딱 됐어요. 그렇게 경정되면서는 부산으로 갔는데 박일용 차장이 구속되기는 했지만 예전 인맥들이 남아있죠. 그래서 저는 좋은 보직을 보내줬어요. 사실 서울에서 내려온 사람한테 정보과장을 시키지를 않아요. 그런데 제가 부산 북부 정보과장을 했죠. 부산 정보과장이 됐으면 처음에 누구를 만나야겠어요? 아까 인터뷰 전에 부산 경찰로 있었으면 문재인 대통령 알았냐고 물어봤죠? 제가 누구를 만났겠어요?
리: 문재인 대통령이요?
차상돈: 노무현 대통령을 만났죠. 부산 북부 정보과장을 할 때, 노무현 대통령이 부산 지역에 총선 후보로 출마를 해서 박근혜 정부 첫 비서실장이었죠, 허태열 후보하고 붙었어요. 그렇게 선거를 하는데 그때 제가 정보과장을 한 거죠. 그러면서 노무현 멤버들을 정보과장하니까 자연스럽게 만났어요. 그때 총무 본 사람이 지금 부산시장 위원장 하는 최인호 국회의원이었고, 지금은 사라진 사람인데, 노무현 초기에 총무비서관 했던 최도술씨가 사무국장을 했죠. 또 3철 중 한 명인 이호철 전 민정수석이 당시에 우리 정보 보안과에서 요시찰 인물이었죠. 그러니까 이호철은 잘 안 나타나고, 문재인도 잘 안 나타나고 그랬죠.
리: 그러면 이호철 같은 사람은 좀 털고 그랬어요?
차상돈: 그런 건 없었어요. 그 당시에는 이제 그런 건 거의 끝난 상황이었어요. 그래서 이제 선거를 시작하니까 정보과에 인사를 왔어요. 그때 인사 온 사람이 이광재 전 지사, 지금 청와대 부속실장인 송인배 이렇게 왔죠. 그렇게 지내다가 제가 서울로 올라갔는데 진짜로 노무현이 대통령이 되더라고요. 당연히 이회창이 될 줄 알았는데. 그러다 저는 경찰청 정보분석실장이 됐죠. 그 자리가 어떤 자리냐? 대한민국 경찰에서 정보를 하는 사람은 최고로 선호하는 자리고, 우리가 그 자리를 뽑을 때 호남 한 명, PK, TK 한 명 이렇게 뽑아요. 그래서 제가 PK 대표로 정보분석실장을 하게 된 거죠. 노무현 정부 출범과 동시에 그 자리에 들어간 거예요.
리: 일이 잘 풀렸네요?
차상돈: 그렇죠, 그 자리가 어마어마한 자리입니다. 중앙부처 가면 장관 만나고, 국회 가면 국회의원 만나요. 제가 맡았던 파트가 통일부, 환경부, 문화관광부, 교육부, 보훈처, 그리고 각종 공사, 전교조, 한총련, 범민련, 종교, 언론 다 했죠. 그래서 노무현 대통령 탄핵 촛불집회 때 다 관리했고, 사패산 터널, 새만금 다 봤죠. 8.15 집회 이런 것도 다 보고. 서울광장은 보수단체에 내주고, 종로는 진보단체에 내주고, 그걸 다 경찰청 정보분석실장 할 때 제가 했어요. 진짜 어마어마한 자리에요. 나와서 보니까 아는 거죠. 지금 하는 친구들도 그런 자리라는 거를 모르고 하는 거죠.
리: 그렇게 좋은 데 있다가 또 갑자기 지방 경찰서장으로 발령 난 거예요?
차상돈: 서장은 총경으로 승진하면서 내려온 거죠. 총경으로 승진 나면 원래 지방으로 내려올 수밖에 없어요.
리: 지방서장이 많이 센가요?
차상돈: 세다기보다는 좋죠. 경찰의 꿈이 경찰서장이잖아요.
리: 청장이죠.
차상돈: 청장은 너무 높죠. 와보니까 국회의원, 시장, 군수보다도 좋아요.
리: 왜요?
차상돈: 경찰서장은 누구한테 고개 숙일 일도 없고, 자기가 알아서 하면 되거든요. 정말 좋았어요.
리: 하동서장으로 처음 내려온 거죠? 예산 따는 것 말고 또 경찰 자체에 변화를 일으킨 게 있나요?
차상돈: 경찰은 사실 누구 한 사람의 뜻으로는 변화할 수가 없는 조직이에요. 경찰청장만이 할 수 있죠. 경찰은 집행기관이니까, 위에서 시키는 대로 하는 거라서 경찰청장이 바꾸는 게 아니면 뭘 바꿀 수가 없어요.
민생의 걸림돌을 치우는 청소부가 되겠다
리: 첫 선거 준비 이후로 4년이라는 시간이 있었잖아요. 그사이에 배우고 느낀 점은 어떤 게 있어요?
차상돈: 인생사, 세상사를 배웠죠. 경찰이라는 조직 울타리 안에서 잘 보호받으며 이쁨받다가 이 폭풍우 치는 세상에 떨어져서 이제 세상을 알게 된 거죠. 각종 단체가 얼마나 많고, 이장의 끗발은 얼마나 세고, 길거리 좌판 하는 할머니 한 분 한 분이 얼마나 소중한지 다 알게 됐던 거죠. 선거를 나가면서 죽기 전에 이 세상의 속성을 알게 됐다는 것만으로도 만족해요. 그런데 또 제가 진짜 의리를 소중히 생각하는 사람이에요. 그러니까 박일용 청장을 7년 모시면서 옮길 때마다 다들 그만둘 자리라는 거를 제가 마다하지 않고 간 거예요. 그런데 선거판에 들어와 보니까 그런 거는 온데간데없고 자기 이익을 위해서 무슨 짓이든지 한다는 거죠. 오로지 선거에 당선되는 것 때문에 어제의 동지가 오늘의 적이 되고, 오늘의 동지가 내일의 적이 되더라고요.
리: 그런 온갖 지저분한 것들을 봤는데 왜 또 선거에 나오셨어요?
차상돈: 진실된 선거를 치르고 싶은 거죠. 누가 탔는지도 모르는 차가 지나가는 데 인사하고, 비 오는 날 우비도 안 쓰고 인사하고 이런 건 가식적이에요. 그런데 또 그렇게 하면 표가 나와요. 언론에서도 관심을 가져주고요. 그래서 진짜 제대로 선거를 치러보고 싶은 거죠. 그리고 또 4년 동안 계속 준비하면서 느낀 게 선거가 최악을 뽑지 않으려는 제도인데, 그 최악들이 뽑혔고 그걸 보면서 이건 잘못됐다고 느끼면서 제가 어떻게 해야겠다는 게 파노라마처럼 제 머릿속에 세워졌죠.
리: 그 파노라마를 조금 설명해주실 수 있을까요?
차상돈: 첫 번째, 시장으로서 인사권 행사를 하지 않을 겁니다.
리: 네에??? 아니 도장은 찍어야 할 거 아니에요.
차상돈: 도장은 찍어야죠. 무슨 말이냐면 시장이 인사권을 독점적으로 행사해요. 그러면 거기서 모든 부정부패, 비리, 갈등이 조장됩니다. 제가 7년 동안 비서 생활하면서 이것저것 봤을 거 아니에요? 그런 걸 보면서 인사를 안 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저는 세 번 서장 하면서도 거의 인사에 관여를 안 했어요. 반면 승진시켜줘야 할 사람은 적극적으로 승진을 시켜줬어요. 하동경찰 60년사에서 제가 처음으로 경사에서 경위 특진을 시킨 사람이에요.
리: 공무원 조직에서도 인사권 행사는 거의 안 하지만, 인센티브는 적극적으로 행사하시겠다는 건가요?
차상돈: 미리 정해진 인사, 학연이 개입하는 인사가 없도록 할 겁니다. 그래서 내부조직의 평가 50%, 외부조직의 평가 50%를 합친 점수로 평가를 할 거예요. 그리고 그건 모두 다 공개할 거고요. 그러면 누가 누굴 봐줬다 그런 이야기가 못 돌겠죠. 그러면 시장이 진짜 행정을 할 수 있게 되는 거고요.
리: 시민들과 소통하는 문제는 어떤 계획이 있으신가요?
차상돈: 저는 매월 첫째 월요일 점심은 사천시청 광장에서 자기 도시락을 싸 오는 시민 누구나 하고 같이 밥을 먹을 계획이에요. 카메라와 녹음장치를 설치해서 하고 싶은 말을 다 하게 하고, 그걸 담당 부서에서 정리해서 발표하는 거죠. 그런 식으로 시민과의 아크로폴리스 광장을 만들어서 대화할 거예요. 시민과의 만남을 하는 거죠. 그렇게 소통을 강화하고, 또 지금 예산 편성이 엉망입니다. 편의성, 선심성 예산이 넘쳐나요. 그래서 저는 예산 편성 단계부터 시민사회와 전문가를 참여시킬 겁니다. 정말 필요한 데에만 예산을 쓸 수 있도록 하는 거죠. 인사, 예산, 시민 소통을 확실하게 하겠다는 거죠. 이게 제가 공직생활하면서 느낀 거예요.
리: 그런데 정작 또 시민들이 말하는 건 먹고살기 어렵다, 먹고살게 해달라 이거잖아요? 사실 시장이 경제 관련해서 해결하기는 어렵기는 하지만요.
차상돈: 그렇죠. 시민들은 경제를 살려달라는데 시장은 할 방법이 없어요. 그래서 행정 서비스를 잘해주려는 거죠. 사람들이 어렵더라도, 행정 서비스를 잘해주면 배가 고플지는 몰라도 최소한 배가 아프지는 않잖아요.
리: 그런데 경제를 시장이 못한다고는 해도, 어떤 프로젝트를 따와서 예산을 늘리고 이런 건 가능하지 않나요?
차상돈: 생각하는 게 여러 가지인데, 일단 지금 항공산업단지도 보상비가 너무 비싸서 추진이 안 돼요. 그래서 진행을 하나도 못 했어요. 이건 진짜 집권당의 힘이 아니면, 그 어마어마한 예산을 주려고 누가 그러겠어요. 그리고 이쪽 지역에 응급실 있는 병원이 없어요.
리: 그건 심각한데요?
차상돈: 다 진주 경상대 병원으로 가요. 그래서 사천에 국립의료원 분원을 만들려는 거죠. 그것도 집권당의 힘이 있어야 가능한 거고요. 그리고 또 제가 생각하는 것 중 하나는 신재생 에너지 활용이에요. 화력발전소의 폐열을 이용해서 아열대 식물 관광랜드를 조성하려는데 그것도 예산을 따와야 가능하죠. 또 지역 발전을 위해서 필요한 예산들, 사천 대교, 도로 확장 이런 것도 다 국가 지원을 받아야 되잖아요. 그러려면 집권당 후보가 시장이 되어야 한다는 거죠.
리: 이번에는 무소속이 아니라 민주당으로 출마하셨는데, 민주당 걸고 나오면 부담되지 않으세요?
차상돈: 굉장히 부담되죠. 제 지지율이 무소속으로 있을 때 얻었던 지지율보다 한 20% 떨어졌어요.
리: 그런데 또 반대로 문재인 대통령 인기는 좋잖아요?
차상돈: 그렇죠. 문재인 대통령 인기가 좋고, 또 김경수 후보 지지율이 54% 나왔다고 해요. 저는 30% 정도 나오니까 이걸 당이 끌어올려 줘야 하죠.
리: 자녀들은 뭐 하고 지내세요?
차상돈: 2남 1녀인데, 첫째 딸은 중국어를 잘 해서 증권계에서, 여의도의 신데렐라로 중국 전문가로 유명하죠.
리: 어쩌다 중국 공부를 하게 되신 거예요?
차상돈: 공부를 별로 못하는 데 또 1등은 하고 싶은 거예요. 그래서 외국을 보내달라고 했는데 돈이 없어서 중국 유학을 보냈는데 성공한 거죠. 둘째 딸은 호텔에서 일하고 아들은 아빠처럼 재수, 삼수, 사수를 하고 있죠.
리: 아직도요? 몇 살인데요???
차상돈: 늦둥이를 낳아서 그렇죠. 그 아들은 아빠로부터 피해를 봤다고 아빠에 대한 불신이 있죠.
리: 피해를 왜 봐요?
차상돈: 고3 때 선거 출마했거든요.
리: 에이, 그건 본인이 알아서 할 일이죠.
차상돈: 그렇기는 한데 또 자기랑 엄마 입장에서는 고3 때 아빠 퇴직하고 선거한다고 시끄럽게 했다는 거죠. 그래서 졸업하고 바로 군대를 갔는데 또 제대할 때 되니까 제가 국회의원 출마했죠. 그래서 휴가 나와서도 선거운동을 했어요. 그러니까 다시는 아빠 옆에 안 간다고, 이제는 안 내려온다고 하죠. 사실 딸 둘도 선거 때 정말 많이 도와줬는데, 그래서 여기서 차상돈 딸 하면 다 알아요. 그런데 이번에는 못 내려온다고 해서 아빠랑 엄마랑 둘이서 하겠다고 했죠.
리: 이번에 시장이 되면 기존에 계속 잡던 새누리 쪽에서 이어오던 사천시와 차상돈의 시는 어떻게 다를까요?
차상돈: 정말로 많이 바뀝니다. 사천이 지방자치 25년 동안 한 번도 정권교체가 없었어요. 지금 상대 선본에서 농협조합장들이 선거운동을 해요. 위법은 아니라는데, 사실 농촌사회에서는 농협 조합장이면 거의 공인이거든요. 그런 잘못된 관행을 재검토하려는 거죠. 사실 제가 개혁적인 사람은 아니에요. 그런데 앞으로 나아가는 데 걸림돌이 되는 관행은 과감하게 없애겠다는 거죠. 그리고 또 저는 재선을 안 하겠다는 각오로 일할 겁니다. 『목민심서』 첫 줄에 ‘목민관은 어렵고 힘들기 때문에 함부로 탐하지 말라’고 쓰여 있어요. 그런 자세로 정말 시민들을 위해서 일할 겁니다. 그러니까 인사도 안 하겠다는 거죠. 그렇게 떠나고 나서도 욕먹지 않는 시장으로 기억되고 싶어요. 200명 사천 경찰 중에서 저를 욕하는 사람이 지금 두 명밖에 없어요. 다 잘못된 이유로 욕하죠. 다른 정당한 이유로 욕하는 사람 있으면 제가 바로 후보 사퇴합니다.
리: 후보 사퇴시키기가 참 쉽네요… 그런데 지금 인구가 계속 줄잖아요. 어떻게 방법이 있을까요?
차상돈: 다들 인구를 늘린다고 이야기하죠. 그런데 그걸 어떻게 늘려요? 도시가 살기 좋아지면 자연스레 늘어나는 건데, 인구증가정책을 쓰는 건 이상한 거죠. 사천시가 양질의 행정 서비스, 기업 하기 좋은 조건을 만들면 자연스레 늘어나는 거죠. 저는 그런 소신이 있어요. 그냥 제가 이 지역을 위해서 무언가 일을 잘했다는 그런 소명의식 하나로 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저는 다들 저를 모니터링해달라고 말하는 거고요. 대표님도 사천시 자문위원으로 위촉하고 싶네요.
리: 돈 많이 주시면 하겠습니다.
차상돈: (웃음) 하여간 제가 어떻게 시정을 하게 되는지 꼭 계속 지켜봐 주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