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적 아버지가 가장 싫어했던 사람은 전두환이 아니었다. 한 달이 멀다하고 집에 찾아와 시청료를 독촉하던 KBS 징수원이었다. 초등학생이었던 나야 뭔지도 몰랐지만, 전기요금이나 수도세는 한 번도 밀리지 않고 내시던 아버지가 못 내겠다고 버티던 유일한 ‘요금’이 바로 KBS 수신료였다(당시에는 “시청료”라고 불렀다). 나 역시 그 징수원 아저씨가 싫었다. 아버지는 수신료 징수원이 방문할 때마다 내게 TV 수상기를 갖다 버리라며 “액션”을 요구하셨다. 한바탕 실랑이가 끝나고 징수원 아저씨가 가면, 당시 잘나가던 권투선수 유명우의 경기를 봐야 한다며 저녁에 다시 갖고 오라는 지령이 떨어졌다.
하루 이틀도 아니고 징수원 아저씨만 오면 난 그 무거운 TV 수상기를 들고 집안을 들락날락해야 했다. 짜증도 짜증이지만 난 왜 KBS만 안보면 되지, TV 수상기까지 갖다 버려야 수신료 면제가 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런 실랑이가 사라진 때는 1994년 KBS가 월 2,500원의 수신료를 한전의 전기요금과 함께 청구하는 통합징수란 ‘신의 한수’를 던진 이후였다.
수신료를 볼모로 한 KBS의 자사 이기주의 역사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당시 아버지가 요구한 액션은 나름 근거가 있었다. 수신료 징수의 근거는 KBS를 시청하는지의 여부가 아니라 TV 수상기 보유 여부였고, 그것은 지금도 마찬가지다. 정확히 말한다면 월 2,500원의 수신료는 KBS를 보는 요금이 아니라 “시청자들이 보편적으로 필요하다고 여기는 콘텐츠와 수신 환경을 제공받기 위해 내는 일종의 세금”과 같다.
그래서 TV 수상기의 보유는 방송을 시청하겠다는 의사표현으로 간주하여 수신료 징수의 근거가 되어 왔다. 그래서 따지고 들어가면 수신료는 “KBS 수신료”가 아니라 그냥 “수신료”라고 부르는 게 맞다. 그럼에도 수신료의 대부분이 KBS의 재원으로 사용되고 수신료 인상폭의 제안도 KBS가 맡고 있다. 물론 최종 결정은 국회에서 이뤄진다.
문제는 지난 30년이 넘도록 이 수신료가 한 번도 인상된 적이 없다는 사실이다. 수신료의 대부분을 가져가는 KBS에겐 갑갑한 노릇이다. 당연히 KBS 사장은 누가 취임하건 수신료 인상안을 필수과목 수강하듯 정부 기관에 신청해 왔다. 하지만 모두 알고 있듯 KBS 사장은 정권의 입맛에 맞는 낙하산 인사라는 이미지를 벗어날 수 없었고, KBS 보도는 한 번도 정치권에서 “공정성”이란 아무도 모르는 기준을 충족시킨 적이 없었다.
이러다보니 수신료 인상의 시대적 책무(!)를 다해야 하는 KBS는 지난 2011년처럼 야당을 위협하는 강수를 두기도 했다. 작년도 마찬가지였다. 수신료를 4,000원으로 인상해 준다면 광고를 약 2,100억 원을 줄이고, 뭔지는 정확히 모르겠지만 ‘공적 책무’를 다하겠다고 대국민 약속을 했다. 그런데 30여 년의 한이 너무 컸던지, TV 수상기가 아니라 PC, 노트북, 스마트폰 등 방송을 수신하는 모든 디바이스에 수신료를 부과해 달라는 가히 SF스러운 “정책 과제”를 제안하는 통에 네이버 실시간 검색어 순위에 오르는 기염을 토하기도 했다.
재밌는 사실은 이 일을 계기로 각종 수신료 면제 방법이 인터넷에 회자되기 시작했고, 수신료 징수의 단위 또한 KBS 시청이 아니라 TV 수상기에 있다는 사실을 재확인했다는 점이다. 25년 전 아버지가 깨달으셨던 사실을 우린 그 난리를 치고서야 다시 확인한 셈이다. 수신료 납부의 이유가 KBS의 시청 요금이 아니라 보편적으로 필요하다고 여기는 콘텐츠와 수신 서비스를 제공받기 위함이라면 수신료 인상에 대한 동의는 굳이 KBS를 대상으로 할 이유가 없다.
수신료 인상, 소비자를 설득하려면 KBS가 아닌 EBS에 써라
어떻게 보면 30년 넘게 수신료 인상의 논리가 설득되지 못한 이유는 KBS가 “수신료는 우리 것”라는 자사 이기주의에서 헤어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정치적 논란에서 벗어나고, “KBS” 수신료가 아닌 “수신료”를 인상할 수 있는 방법을 고민했어야 한다. 쉽게 말하면 수신료 인상 제안자로서 KBS는 “우리 좋으라고 올리는 게 아니다”라는 메시지를 던져야 한다는 뜻이다.
“KBS” 수신료가 아닌 수신료는 지금도 존재한다. 바로 EBS가 받는 수신료 몫이다. 종북 vs 수꼴이란 무시무시한 대립전선에서 그나마 자유로운 콘텐츠는 바로 EBS의 콘텐츠다. 그리고 수능에 상당한 영향을 끼치는 수능방송과 교재야말로 수신료를 내야 하는 이유인 보편적으로 필요로 하는 콘텐츠다. 그런데 EBS에 돌아가는 수신료는 말 그대로 “쥐꼬리”만하다. 쉽게 말하면 우리가 매달 내는 2,500원 중 2,291원은 KBS에게, 71원은 EBS에 돌아간다.
나머지 138원은 어디로 가냐고? 징수 대행자인 한전이 가져간다. 이해가 안되는 건, 원래 한전이 통합징수 이전부터 발행하고 우편비용을 내온 전기요금 고지서에 <TV수신료 2,500>이라는 단 9글자를 새기는 비용이 왜 138원이나 되는지 모르겠다는 것이고, EBS보다 더 받아야 하는 근거는 대체 뭔가라는 점이다.
최근 EBS는 <스페이스 공감>의 공연 횟수와 제작진을 줄이겠다는 계획을 발표했다가 뮤지션들과 시청자들의 반발로 철회하는 소동을 벌이기도 했다. 예술에 대한 몰이해로 비판할 수도 있지만, 사정을 들여다보면 근본적인 해결책이 필요한 걸 알 수 있다. 현재 EBS의 재원구조를 보면 총 2,428억 원의 연간 수입 중 수신료를 포함한 공적 기금이 28.1%, 방송광고와 출판사업 등의 상업 재원이 71.9%를 차지한다(2010년 기준). 공적 기금의 일부인 수신료의 비중은 6.5%(159억 원) 밖에 되지 않는다(KBS는 5,689억 원으로 수입의 39.3%를 차지한다).
사정이 이러니 EBS의 재원을 늘릴 방법은 광고와 출판사업, 즉 교재판매 밖에 없다. 그런데 EBS 광고는 현재 KBS 광고와 함께 “끼워팔기”를 하는 형편이고, 출판사업은 정부가 교육비 부담을 덜겠다며 교재 값을 낮추라고 하면 언제라도 줄어들 판이다. 이러니 EBS는 줄어드는 광고 매출과 교재 매출을 메우기 위해 제작비를 축소 할 수밖에 없다는 핑계(?)가 가능했다.
KBS만 시청자들이 원하는 컨텐츠를 제공할 수 있다는 오만을 버려야
수신료가 KBS 시청 요금이 아니라 “보편적으로 필요로 하는 콘텐츠”에 대한 요금이라면 EBS의 이런 재원구조에는 분명히 문제가 있다. 지극히 보편적인 콘텐츠인 수능 교재와 교육 콘텐츠는 비싼 값을 치루어야 하고, 수신료로 만들어져야 할 괜찮은 프로그램들은 갈수록 줄어든다. 게다가 광고로도 돈을 벌어야 하니, 어린이 프로그램 앞뒤로 부모들이 난감해 할 각종 캐릭터 상품과 공연 광고로 도배를 해야 한다.
수신료가 KBS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면 EBS의 보편적 콘텐츠와 서비스에 대한 분배몫은 EBS의 역량에 대한 평가를 떠나 인상될 필요가 있다. 수신료 인상분의 상당수가 EBS로 돌아간다면, 수능 교재의 출고가는 더 낮출 수 있고, 부모들이 펄쩍 뛸 어린이 대상 광고들은 줄어들 수 있다.
수신료 인상은 KBS에게 조국 통일보다 더 중요한 일이지도 모른다. 물론 수신료는 인상되어야 한다. 문제는 시청자들이 그게 “KBS에게 주는 돈”이라고 생각한다는 점이다. KBS가 가장 많이 가져가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정말 수신료를 올리고 싶다면 KBS는 수신료가 자기들이 하고 싶은 것을 더 잘하기 위해 받는 돈이 아니라, 시청자들이 원하는 콘텐츠와 서비스를 위해 쓰는 것이라고 설득해야 한다. 그리고 그런 콘텐츠와 서비스는 반드시 KBS만이 제공하겠다는 발상을 버려야 한다.
EBS 편을 들자는 게 아니다. 시청자들이 매달 꼬박꼬박 내는 수신료는 당연히 시청자들이 원하는 콘텐츠의 재원에 쓰여야 하며, 모두가 동의할 콘텐츠는 바로 교육과 문화예술 콘텐츠일 것이다. 그래서 “수신료를 인상하여 고품질 방송, 한류 진흥을 하겠다”는 말보다 “EBS 수신료를 인상하여 교육비 부담을 줄이겠다”는 약속이 더 설득력 있다.
KBS라는 이름을 떼지 않은 수신료 인상안, 누구도 설득할 수 없다
이 정도 배포는 있어야 KBS가 다만 조금이라도 자사 몫의 수신료 인상분을 요구할 수 있지 않겠나. 2,000원의 인상분 중 EBS에게 1,500원을 주고, 우리는 500원만 받겠다는 눈물겨운 호소가 있다면 당장이라도 수신료 인상에 동의할 수 있다. 이렇게 해야 이후에도 KBS가 EBS 분배몫을 줄여가며 자사 몫을 조금씩 늘리는 수신료 인상안을 제안할 근거도 생긴다. 여기에 한전에게 징수를 맡기지 말고 수신료 센터를 따로 세워 별도로 징수하겠다는 약속까지 하면 금상첨화다.
왜 이렇게 KBS 수신료 인상 전략을 구구절절하게 늘어놔야 하는지 나도 모르겠다. 장담컨대 KBS는 이 글에 절대로 동의하지 않을 것이다. 여전히 KBS에겐 수신료란 시청자가 원하는 콘텐츠에 대한 재원이 아니라 자신들이 원하는 “KBS 수신료”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분명한 건 KBS라는 이름을 떼지 않고 수신료 인상을 계속 요구한다면, 30년 동안 반복되어 온 정치적 공정성의 논리에서 한 발짝도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이다. 지금처럼 그냥 쭉 고집하시라. 앞으로 30년 동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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