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을 가기로 마음먹은 후 산적한 문제들을 처리하고 나면 마지막으로 남는 큰 숙제가 하나 있다. 바로 ‘캐리어에 무엇을 넣을까?’다. 집에서 사용하는 모든 물건을 짊어질 수밖에 없으니 추리고 추리고 또 추려 최대한 간결하게 짐을 싼다. 옷가지, 속옷, 세면도구 등 기본 물품이야 공통이겠지만 사람마다 취향이나 성향에 따라 빠뜨리지 않는 필수품이 있다. 그간의 여행 경험을 바탕으로 사소하지만 여행의 질을 높여준 필수템 몇 개를 소개한다.
A4 용지 크기의 전기 찜질팩
추위를 많이 타는 체질이다. 한겨울에 5-6겹 껴입는 건 예사다. 겉으로 크게 티가 나지 않기 때문에 사람들은 내가 껴입은 옷들의 개수를 확인하면 꽤 놀라곤 한다. 한 해, 한 해 갈수록 추위를 더 심하게 느낀다. 그래서 국내, 열대 지방이나 여름 여행할 때 빼고는 늘 전기 찜질팩을 챙겨 간다.
호텔, 호스텔, 게스트 하우스 등 별이 몇 개인가? 시설이 어떤가? 이런 건 중요하지 않다. 아무리 온도를 올려도 해외의 난방시설은 나의 욕망을 채워주지 못한다. 바닥부터 뜨끈한 한국식 온돌 난방에 익숙한 몸뚱이는 어디서나 늘 추위를 느낀다.
씻기 전에 코드를 연결해 전원을 켜서 침대 안에 넣어 놓고 샤워하러 간다. 씻는 사이 따끈하게 데워진 이불 사이로 들어가면 하루 종일 쌓인 여행의 피로가 눈 녹듯 사라진다. 나처럼 추위를 잘 타는, 그리고 해외의 난방시설에 늘 부족함을 느끼는 사람들에게 최고의 만족도를 선사하는 아이템이다.
봄·가을용 오리털 침낭
대도시나 믿을 만한 호텔에 묵는 여행을 할 때는 굳이 챙겨가지 않는다. 대신 싸구려 호스텔, 오지나 제3세계로 떠날 때는 꼭 캐리어에 넣는다. 세계 어디나 저렴한 숙박업소는 우리가 이해하는 수준의 청결을 기대하기 어렵다. 그것은 분명 가난한 여행자가 감수해야 할 부분이다. 서서 잘 수는 없으니 옷을 잔뜩 껴입은 채 눕지만 께름칙함에 몸을 뒤척이다 잠을 설칠 수밖에 없다. 그렇게 밤을 망친 이후에는 온종일 컨디션이 엉망일 수밖에 없다.
하루의 1/3 정도를 눕는 침대의 상태가 상상을 초월하는 경우를 몇 번 겪고 나니 아예 침낭을 챙겨간다. 여행지에서 잠을 잘 자는 것만큼 다음 날의 여행을 위한 완벽한 준비는 없다. 봄·가을용 오리털 침낭은 무게도 거의 나가지 않고 부피도 작고 보온 효과도 확실하다. 옷가지 몇 개를 빼더라도 오지에서의 숙면을 위해 침낭을 챙겨간다.
일회용 마스크 팩
화장은 하는 사람이나 알지 화장을 하지 않는 사람들은 그 개수가 얼마나 많은지 알지 못한다. 밖으로 나가기 위한 최소한의 상태를 만들기 위해, 화장을 하는 사람들은 꽤 많은 시간과 돈(제품)과 노력을 들여야 한다. 평소야 화장대에 놓인 화장품을 순서대로, 욕심대로 바르면 되지만 여행에서는 좀 다르다. 기초화장만 하더라도 토너, 에센스, 아이크림, 크림, 에멀션 등등 다양한 종류와 효능의 제품이 포함된다.
여행에 갈 때 난 이 모든 걸 마스크 팩 하나로 해결한다. 얼마나 짐의 부피를 줄이고 화장에 투자하는 시간을 줄일지 그 방법을 고민하던 내게 마스크 팩은 해답이 되었다. 위의 다양한 제품이 그 안에서 다 해결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물론 사람마다 피부 상태가 다르기 때문에 본인의 피부 상태를 고려해서 사용해야 한다. 일단 봉지를 뜯어 내용물을 꺼내 얼굴에 얹으면 끝! 쉽고 편리하다.
여행 기간 중 매일 아침저녁으로 사용하기 때문에 너무 과도한 영양을 포함한 팩은 제외한다. 또 똑같은 제품을 매일 사용하진 않는다. 아침에는 수분 위주로, 저녁에는 영양, 보습, 진정 위주로 번갈아 가면서 구분해 사용한다. 개수를 잘 맞춰 준비하면 여행의 시작점에는 꽤 묵직하지만 여행 마무리에는 아예 남지 않아 가벼운 몸과 마음으로 돌아올 수 있다.
플립플롭 슬리퍼
일명 ‘쪼리’라 불리는 발가락에 끼우는 슬리퍼다. 더운 나라에 갈 때는 피부처럼 늘상 신는다. 언제 비가 쏟아질지도 모르고, 도로 사정이 그다지 좋지 않은 곳을 가는 뚜벅이 여행자에게 예쁘고 비싼 신발은 필요 없다. 덥지 않은 나라에 갈 때도 꼭 챙겨 간다. 장거리 비행 시에는 비행기에 타자마자 갈아 신기도 한다. 갑갑한 비행기 안에서 내 발이라도 해방감을 느끼게 해주기 위한 방법이다.
여행지 숙소에 도착했을 때 제일 먼저 캐리어에서 꺼내는 것도 플립플롭 슬리퍼다. 물론 호텔 방에 일회용 또는 다회용 슬리퍼가 있긴 하다. 하지만 누가 신었을지 모를 다회용 슬리퍼에 내 발을 넣고 싶지 않다. 또한 바닥과 바로 닿는 듯 쿠션감도 없고, 일회용품 쓰레기를 만들어 내는 것도 지구에 못 할 짓 같아 일회용 슬리퍼를 사용하지 않는다.
외국 사람들이야 아무렇지도 않게 신발 신고 활보한 호텔 바닥을 맨발로도 잘 돌아다니지만 나는 그게 쉽지 않다. 싸고 가볍고 잊어버려도 아깝지 않은 내 발에 편한 플립플롭 슬리퍼 하나면 여행이 한결 쉽고 편해진다.
원문: 호사의 브런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