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환(ㅍㅍㅅㅅ 대표, 이하 리): 어쩌다 출마하게 되셨나요?
서철모(화성시장 후보): 공군사관학교 졸업하고 공군에 있다가 5년 만에, 그러니까 1977년에 정치하려고 전역했어요. 전역하자마자 김대중 총재 지지선언을 했죠.
리: DJ를 너무 사랑하다가 여기까지 온 건가요…
서철모: 사랑요? 그건 아니고요. 1988년에 사관학교를 갔는데, 당시는 민주화 물결이 거셌죠. 집안이 어렵다 보니 사관학교에 가게 됐는데, 군 생활이 저랑은 좀 안 맞는 부분도 있었죠. 의무복무 5년 마치고 전역해서 바로 민주당 당원으로 가입하게 됩니다.
리: 어떻게 버티셨어요. 안 맞는 답변 달달 외워서 쓰면서…?
서철모: 그건 좀 오해인데, 아무리 사관학교라고 해도 하나의 대학입니다. 안 맞는 답변은 없어요. 학문을 하는 곳이지 사상을 공부하지는 않아요. 제 아들도 육사 들어갔습니다. 사관학교에 부정적이라면 아들 가는 거 말렸겠죠. 하하.
20대에 백수 생활만 두 번, 그토록 정치가 하고 싶었다
리: 어렸을 때 생활은 어땠나요?
서철모: 아버님은 유리가게, 어머님은 분식점을 했어요. 저희가 8남매인데, 부모님까지 열 명이 단칸방에 살았어요. 부모님은 무학이셨고, 우리 형제들도 배움이 어려웠죠. 제가 만 나이로 49인데, 제 나이에 부모님에 8남매까지 10명이 단칸방에 산 사람은 드물 거예요.
리: 사관학교 가셔서 너무 행복했겠네요.
서철모: 정말 좋았죠. 일단 잠자리는 편안했으니까요. 공사에서 임관한 후에 첫 근무지는 오산 미군부대였습니다. 주로 미군들과 근무했는데, 저한테 잘 맞았던 것 같아요. 3년은 미군부대, 1년은 충주, 1년은 공사에서 근무했습니다.
리: 한국인과 있을 때랑 미국인과 있을 때랑 차이가 있었나요?
서철모: 문화적으로 차이가 있죠. 30년 전 이야기이긴 하지만 미국인은 업무 중심적이고 한국인은 관계 집중적이죠. 물론 관계가 업무를 위한 기초라지만, 공군은 유독 심해요. 육군은 한 해 소위 임관자 6,000명 중 육사 출신이 200명이 조금 넘습니다. 그런데 공군은 600~700명 중 공사 출신이 200명이 넘어요. 영관급 이상은 90%가 넘어가죠. 공군 생활은 사실상 관계에 의해 지속된다고 봐야죠.
리: 제대하고 어떤 걸 하셨어요?
서철모: 나오자마자 민주당에 입당했는데, 제가 먼저 뭘 하겠다고 해도 당에서 시키는 게 아무것도 없었어요. 사실 지금 보면 이해가 됩니다. 스물여덟, 아홉짜리가 당에 가면 지금도 할 일이 없어요. 그러고는 시간이 지나도 연락이 없더라고요. 일단은 취직도 해야겠다고 해서 기아자동차에 입사하게 됩니다.
리: 능력자네요…
서철모: 능력이라기보다는 사관학교 나온 사람을 기업이 좋아하는 부분도 있고… 기아자동차는 그때도 약간 국민기업 같은 정서가 있었습니다. 어쨌든 본사 수출본부에 들어갔어요. 그런데 7월 1일에 입사했는데, 15일에 기아자동차가 부도가 납니다.
리: 그래도 신입사원을 자르진 않잖아요.
서철모: 그래도 사표를 냅니다. 물론 사표 수리는 안 됐어요. 회사에서는 어차피 부도가 나도 합병되고 다시 시간이 지나면 정상화 될 테니까 회사에 있어도 된다고 했는데, 그게 좀 성격에 안 맞았거든요. 저는 기아가 좋아서 입사한 것이지 다른 기업에 입사한 것도 아니거든요.
리: 참 성격 특이하다는 이야기를 많이 듣….
서철모: 특이하죠. 신세 지는 거 상당히 싫어하고요. 그러다 ‘김대중 총재가 대통령이 되는 길’이라는 편지를 써서 보냈는데, 그걸 본 김대중 총재가 ‘어? 여기 이상한 놈 있네. 당에서 한번 만나봐라’, 그렇게 해서 중앙당에서 일하게 됩니다.
리: ……
서철모: 그 후에는 군 청년전역장교들과 김대중 대통령 후보 지지 기자회견을 해서 9시 뉴스에 나가고 그랬어요. 이회창 총재의 아들 병역 비리 문제가 아주 클 때였는데요. 선후배들 찾아다니면서 이거 하자고 해서, 위관급 청년 전역장교 60명 정도를 모았죠.
리: 군 쪽 선후배들이면 굉장히 보수적이지 않나요?
서철모: 제대한 사람들이잖아요. 위관급 장교들이라는 게 사관학교 출신도 있지만 ROTC나 사관후보생 출신도 있고요. 그리고 반 이상은 이미 그 취지에 적극적으로 동의하는 상황이었고요.
당선된 경선, 쿨하게 당을 위해 양보하다
리: 그래서 다시 백수가 되니까 어떠셨나요.
서철모: 공군참모총장 했던 김두만 장군이, 자기 아들(김상우 의원)이 국회의원인데 같이 한번 일해보지 않겠냐고 제안해주셔서 6급 보좌진으로 들어가게 됐어요. 제가 군에 있을 때 정보 특기로 대북 정보를 담당했거든요. 의원실에서는 대북 경수로 지원사업, 탈북자 지원정책 같은 일을 했죠.
리: 국회에는 얼마나 계셨던 거예요?
서철모: 1998년부터 2000년 5월 30일까지 일했어요. 의원님의 신뢰가 깊어서 제가 선거를 총괄했는데, 김영춘 의원님한테 밀려서 떨어졌죠. 보통은 그러면 다른 의원실로 옮기는 경우가 많은데 저는 의리 지킨답시고 다른 의원실로 못 갔죠. 또 백수가 됐습니다.
리: 굉장히 FM을 좋아하시네요. 군대 계속 계시지…. 두 번째 백수 생활은 어떠셨나요? 그동안은 모아둔 돈이 있어서 그렇게 힘들지는 않으셨을 것 같은데….
서철모: 저는 돈을 모으진 못했고, 그 전부터 저희 집 사람이 의왕시에서 보리밥집을 했어요. 지금은 다른 식당인데, 어쨌든 생계는 여유로운 편이었죠. 저는 계속 정치할 거니까 출마하겠다고 말했고요.
리: 바로요?
서철모: 네. 2002년에 의왕시에서 도의원으로 출마했어요. 김원봉 새정치국민회의 도의회 원내대표하고 경선을 했습니다. 제가 63% 정도 득표해서 이겼죠.
리: 그래서 도의원 당선까지 성공했나요?
서철모: 아뇨, 지방선거 정국이 어려울 때였어요. 경선 1위를 했는데, 경선은 이겼을지 몰라도 본선 경쟁력이 없다고 후보 자격을 박탈당해서 김원봉 후보가 출마했죠. 당에서 원하니 저는 선당후사 정신으로, 통 크게 제 사무실까지 드린다고 했습니다. 지금과 같이 경선에 룰이 없던 때였어요. 그래서 이번에 제가 신인가산점을 받게 된 겁니다.
리: 이런 불공정한 일을 당하고도 당과 안 싸우셨나요.
서철모: 불공정하죠. 하지만 말씀드렸다시피 선당후사. 당이 우선입니다. 그리고 그런 것은 실력을 갖춘 다음에 바로잡아야 한다고 생각했고요. 어쨌건 그 이후 이인제 후보의 경선불복이 있었고, 이인제법이 만들어졌고, 경선 결과 승복에 대한 사회적 요구가 거세져서 지금은 이런 문제가 해결됐죠.
유럽에서 배운 것: 비교하는 순간 불행해진다
리: 당에서 보는 시선이 아주 좋아졌겠네요. ‘아주 훌륭한 젊은이’라는 식으로요.
서철모: 그렇게 봐 주시는 분들도 있고요, ‘이상한 놈’이라고 보시는 분들도 계시고요.
리: 그래서 계속 백수를….
서철모: 집사람이 하는 식당에서 계속 일했죠. 서빙도 하고. 다행히 식당이 잘 되었어요. 돈을 벌고 나니까, 세상을 좀 배워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2003년부터 5년간 집사람과 아이들과 함께 세계를 돌아다녔습니다. 40여 개국을 돌아다니면서 견문을 넓혔죠. 돌아다니면서 유럽권 사람들이 왜 행복해하는가에 대한 고민도 좀 했어요.
리: 왜 유럽권 사람들이 행복한 것 같아 보이던가요?
서철모: 본인들이 지금 하는 일에 대한 만족도가 높았어요. 그 사람들은 자신과 상대방을 비교하지 않고, 남을 앞서기보다는 내가 할 수 있는 걸 하려고 해요. 무리한 행동을 하지 않죠. 우리는 대체로 그렇지 않거든요. 사회가 개인들에게 ‘무리’를 강요하죠. 저도 마찬가지였고요.
리: 우리나라 사람들이 자신과 남을 비교하는 데는 최고잖아요. 왜 그럴까요.
서철모: 우리 부모님은 지금도 한글을 모르시고, 형제들도 배움이 어려웠죠. 그런데 옆집 살던 친구는 공부를 좀 해서 의대에 갔더니 20년 후의 삶이 완전히 달라져 있었어요. 한국은 교육을 통해서, 성적으로만 올라갈 수 있어요. 그런데 선진국은 그렇지 않죠. 스스로 하고 싶은 것을 찾으려 하죠. 의사가 된다고 삶이 확 바뀌는 것이 아니고요.
리: 좋은 건가요? 신분 상승이 안 된다는 건데.
서철모: 개념이 좀 다르죠. 좋은 대학 가서 신분이 바뀌는 게 아니라,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해도 사회적으로 안정되는 거예요. 예를 들어 프랑스는 대학들이 평준화되어 있고, 대입은 바칼로레아죠. 답이 없는 문제를 내고, 다양한 답들을 인정해 줘요. 일정 수준이 되면 자기가 하고 싶은 학문을 할 수 있죠. 물론 그랑제콜이라는 엘리트 코스의 시험도 있지만, 일단 모두 대학에 진학해야 인생이 달라진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40% 정도만 진학하죠.
리: 우리 현실하고는 좀 다른데요.
서철모: 사회적으로 분위기가 다릅니다. 존경을 받는 직업도 다르고요. 사회도 학부모도 변해야죠. 사실 이미 시대가 바뀌기도 했어요. 의사가 안정적인 직업일까요? 부도나는 병원들도 많습니다. 공무원이나 군인은 안정적인 직업이기는 하죠. 하지만 부를 축적하거나, 사회적으로 추앙받는 직업은 아니거든요. 최근에야 불경기로 젊은 세대들이 안정을 추구하니까 그리됐지만… 참 궁금해져요. 꼭 그 정도 성적이 되어야만 장교가 될 수 있을까요?
리: 그럼요?
서철모: 위험한 발상 같기도 하지만, 장교, 공무원이 꼭 성적이 좋아야만 되는 건 아니거든요. 일정 정도의 실력이나 자질만 가지면 50% 정도는 추첨으로 뽑아도 된다고 생각해요. 현재는 사회적으로 잉여 학습이라고나 할까요, 하고 싶은 거, 자기계발을 할 시간이 너무 없어요. 성적 올리는 데 집중하느라.
두 차례 문재인 캠프에서 배운 것: 통합돼야만 이긴다
리: 그러면 2007년 대선은 외국에서 보셨어요?
서철모: 2007년 대선 때는 한국에 있었어요. 보면서 이명박이 되겠다고 생각했죠. 외국에서는 노무현 대통령의 인기가 참 대단했거든요. 그런데 잠깐 한국에 들어와 보니까, 이건 뭐. 평가가 너무 안 좋더라고요. 보석을 가지고도 그 가치를 모르는, 그런 느낌이었죠.
리: 왜 그랬을까요?
서철모: 한국의 정치가 성숙하지 못해서 그러지 않았나 싶어요. 성숙한 정치는 유권자들, 정당인들, 출마자들이 함께 만들어 가야 하죠. 하지만 현실은 생각보다 썩 좋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후보자들에겐 많은 유혹이 있습니다. 후보자는 자신의 것을 갖고 선거를 해야 해요. 그런데 이미 갖춰진 조직이나 기득권자에게 자리 약속, 사업 약속해주면서 하면 선거가 아주 쉬워집니다. 그러면 안 됩니다. 그래서 저는 이번 선거에서 실험해봤습니다. 제 가까운 지인들, 100% 순수하게 지지해 줄 사람들, 그런 분들로 캠프를 구성했고, 덕분에 캠프 연령층이 굉장히 낮아졌죠. 손 안 벌리다 보니, 생각보다 힘들더군요. (웃음) 그래도 아주 의미 있는 선거라고 생각합니다.
리: 어떤 의미가 있었을까요.
서철모: 문재인 대통령의 선거도 그랬죠. 문재인 대통령이 특정 조직이나 계파, 집단의 노력으로 대통령이 되신 게 아니잖아요. 우리 국민들의 시민들의 촛불혁명으로 되었죠. 속된 말로 정치적 빚이 없는 거죠.
리: 그건 정말 크죠. 문재인 대통령은 부채의식이 없으니….
서철모: 우리 캠프도 그렇습니다. 자발적 참여와 선거운동을 원칙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 집단을 챙겨야 한다’거나 ‘무슨 무슨 자리를 달라’거나 하는 분위기가 전혀 없습니다. 평평한 운동장에서, 기득권의 개입 없이, 적어도 우리 캠프는 그런 선거를 하고 싶다 – 어떤 요구도 없이 이런 캠프의 기조를 지키면서 싸워준 지지자들에게 정말 감사하고 있습니다.
리: 한명숙 캠프로 들어가며 민주당에 복귀하셨죠?
서철모: 네. 한명숙 캠프에서는 수행팀장을 했는데, 아쉽게도 간발의 차로 떨어지셨죠. 참 좋으신 분이었는데 안타까워요. 정말 검소하시고, 올곧고…. 제가 볼 때 그 당시에도 당의 화합이나 집중력이 좀 떨어지지 않았나, 그리 생각합니다. 이후 정세균 의원님과 친해져서, 정세균계로 분류되게 돼요.
리: 그런데 어떻게 2012년 문캠에서 일하게 된 거죠?
서철모: 정세균 의원은 범 친노로 구분이 되죠. 다른 계파와 달리 스탭들도 교류가 많고요. 2012년 경선에서 문재인 의원이 대통령 후보가 된 후 ‘용광로 선대위’를 만들게 되는데, 문재인 캠프에서 제게 상황실을 맡아줄 수 있냐는 제안을 했죠. 그렇게 상황실 기획팀장으로 자리를 옮겼어요. 라꾸라꾸를 놓고 집에도 안 가고 일했습니다. 2012년 대선에서 가장 회의에 많이 참석한 사람이 저예요. 상황실이 컨트롤 타워가 되어야 하거든요.
리: 상황실이라면 선거의 다양한 면을 볼 수 있을 텐데요, 자평해보자면 어땠나요?
서철모: 역시 당의 집중도가 약했죠. 캠프가 시민캠프, 민주캠프, 미래캠프, 이런 식으로 나뉘어 각자 움직이는 경향도 있었고요. 이길 수 있는 선거를 졌다는 생각이 가장 강한 선거예요.
리: 선거를 여러 번 치른 후, 정치에 대한 생각이 어떻게 달라졌다고 생각하세요?
서철모: 당 중심의 선거가 중요하다고 느꼈어요. 또 대선도 결국 사람이 하는 거다. 사람과 사람과의 신뢰가 있어야 캠프가 운영된다. 그게 정치의 시작이라는 생각을 하게 됐죠.
리: 그러면 또 결국 사람들을 엮는 건 시스템이라는 말을 하게 되지 않나요?
서철모: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저희 캠프는 100% 자원봉사로 운영돼요. 하도 안 믿어서 이젠 강조하지도 않습니다. 저는 정치를 거창하게 보지 않아요. 정치는 사람과의 관계거든요. 그런데 사람들이 인터뷰하면 포장을 합니다. 그러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하거든요. 누구에게나 부족함이 있지만 대단한 것처럼 이야기를 해야 하는 거예요.
나는 내가 믿는 길을 간다
리: 말씀하시는 걸 들으면, 지방선거보다 총선에 나가고 싶어 하실 것 같은데…
서철모: 사람들이 자꾸 나누려고 하는데, 총선이나 지방선거나 모두 정치하는 틀입니다. 모두 같은 정치영역이고 다르지 않다고 봅니다.
리: 그래도 입법과 행정은 영역이 다르지 않나요.
서철모: 그렇게 보지 않아요. 시장도 얼마든지 입법을 합니다. 국가적인 입법만 입법인가요? 조례도 입법입니다. 시장이 정치 하는 자리인가요, 행정 하는 자리인가요? 저는 보리밥집, 부대찌개집, 꼬막집도 했고, 오리집도 했어요. 서울에 칼국숫집은 아직도 운영하고요. 식당 하는 사람이 한 가지 식당만 해야 하나요?
리: 이번 경선 기간에 폭행 전과 이야기를 비롯해 잡음이 굉장히 많았잖아요. 어떻게 잘 마무리되었나요?
서철모: 제가 마무리할 게 있나요? 제 식당에서 2004년도에 후배와 다툼이 있었어요. 거기서 두피 열상 전치 2주가 나온 거고, 벌금형을 받은 겁니다. 이유 여하를 막론하고 잘못했고, 반성하고 있습니다. 확실히 반성한 만큼, 그 뒤론 폭력 행위가 전혀 없었어요. 인정할 건 인정하고요. 당시 밥집 할 땐 제가 항상 갑을관계에서 을이였던지라…
리: 음주운전도 한 건 있지 않나요?
서철모: 네, 있습니다. 1998년. 20년 전에 음주운전 한 건 있고요. 그 이후엔 역시 반성해서 한 건도 없습니다.
리: 그런데 자리를 잡기까지 정말 오래 걸렸군요. 이제야 정식 정치에 크게 도전하게 된 이유가 있나요?
서철모: 이제 마흔아홉이고, 그렇게 오래 걸렸다고 생각하진 않아요. 2017년 대선 이후 청와대에 가게 됐어요. 사회혁신수석실에 있었는데, 작년 수석실의 가장 큰 업무가 ‘혁신읍면동’이었거든요. 예산 205억을 야당에서 전액 삭감했어요. 그래서 이게 좋다는 걸 내가 직접 해서 보여주자. 이런 생각이 들었죠. 지방자치분권의 매우 중요한 요소거든요. 시민들에게 권력을 주는.
리: 혁신 읍면동 사업이라는 게 뭐죠?
서철모: 차치분권은 한 명의 리더가 세상을 끌어가지 않는 거예요. 예전에는 국가가 70하고, 30을 넘기면 경기도가 25하고, 5는 기초단체가 하고 이런 개념이었어요. 하지만 자치분권은 화성시가 하고 싶은 게 있으면 100을 해보고, 못하겠으면 30을 넘기면 경기도가 20하고, 10은 국가가 하는 거죠. 예전과 반대로 이제는 올라가는 거예요. 그러려면 시민에게 권한을 돌려줘서 시민의 행정참여를 쉽게 만들어야 해요.
리: 일종의 주민참여예산제 같은 개념이네요.
서철모: 그렇죠. 그게 원래 자치분권으로 가는 개념이에요. 그런데 주민참여예산은 주민 의견이 예산에 반영될 뿐, 행정에는 관여하지 못해요. 동 행정에 관여할 수 있는 시스템을 만들어야 하죠.
화성만의 독자적 발전의 길
리: 화성에서 출마하신 이유가 있나요?
서철모: 일단 제가 사는 곳이고요. 신도시라는 게 좋았어요. 저는 동탄2신도시 최초의 입주민이에요. 저보다 먼저 입주한 사람이 몇 안 돼요. 그러니까 객지에서 왔다는 얘기를 들을 필요가 없지요. 그리고 확장성이 좋아요. 다양한 가능성의 도시죠. 지방자치분권이 시작되면 가장 역동적인 도시로 만들 자신이 있어요.
리: 남은 땅이 많기는 한데, 문제는 수도권으로서 여기가 적절한가 하는 거겠죠.
서철모: 충분히 수도권이죠. 강남역에서 버스를 타면 막혀도 50분이면 옵니다. SRT를 타면 수서역까지 14분 30초면 도착하고요. 이제 거리의 개념을 시간으로 바꿔야 합니다. 오히려 강남까지는 서울의 노원보다 가깝습니다. 게다가 화성에는 삼성전자, 현대기아차가 있고요. 제약단지도 있고, 주변엔 LG전자 평택공장도 있죠. 화성의 1인당 소득이 6만 불 대입니다. 한국의 발전성 있는 10대도시 중 하나죠. 화성은 현재도 대단하지만, 앞으로는 더 커나갈 도시가 확실합니다.
리: 균형발전 얘기를 하셨는데, 굉장히 시끄러운 문제입니다. 어떻게 보시나요?
서철모: 저는 좀 다른 생각을 갖고 있어요. 왜 자꾸 패러다임을 동서균형발전으로 잡죠? 대한민국 대통령 누구 한 명이라도 서울을 발전시키려 한 적 있나요? 사람들이 서울을 좋아하니 서울이 발전하는 겁니다. 대한민국은 서울 집중적으로 갈 수밖에 없어요. 어디서나 서울을 향해 교통이 발달하는데, 그 선에 운 좋게 동탄이 걸려 있는 거죠. 억지로 발전시킨 곳이 아니에요. 서부 주민들은 동탄의 교통이나 스포츠센터 등을 부러워하시는 경우가 있는데, 동탄 아파트가격에 다 포함된 거죠. 국토부가 한 거죠. 입주자들이 비용을 부담한 거고요. 개념을 좀 바꿔야 합니다.
리: 어떤 식으로 말이죠?
서철모: 주민들 돈 걷어서 도로 뚫고, 스포츠센터 만들었다고 아무도 설명을 안 해요. 욕먹기 싫어서요. 사실을 알려줘야 해요. 균형발전이 아니라 지역에 맞는 특화발전을 해야 해요. 서울이랑 울릉도가 똑같이 되는 것이 발전이 아니거든요. 예를 들어 팔탄에 아파트 지어서 신도시처럼 해달라고 하는데, 아파트만 지어놓으면 될까요? 동탄처럼 지하철이나 고속철도를 끌어오려고 하면 그게 될까요? 된다 해도, 아파트 입주자가 부담하려면 천문학적인 비용일 텐데요.
리: 특색에 맞춘 특화발전은 어떻게 하는 거죠?
서철모: 동탄같이 만들 수는 없다는 겁니다. 팔탄이 발전할 방법을 논의하자는 거죠. 팔탄에 논밭이 너무 많으니 논밭 2만 평을 유채꽃밭으로 만들자. 그래서 6차산업, 관광산업 지역을 조성하자. 이러면 지원하겠다는 거예요. 서북부에는 에코뮤지엄을 만들어서 초원이 있는 공간, 오고 싶은 공간을 만들자, 이런 식으로요. 이런 것을 주민들에게 적극적으로 설명하고 새로운 롤모델을 만들어야 해요. 아무리 차가 막혀도 사람들은 강원도에 갑니다. 이동시간을 허비해서라도 가고 싶은 아이템을 만들어야 하는 거예요.
리: 또 어떤 것을 생각하시나요?
서철모: 예를 들어 낙농 클러스터를 조성해서 낙농축제도 하고, 제부도에서는 갯벌 체험도 하는 융합적 프로그램을 짜는 거죠. 서남부 산업단지에는 교통망을 강화해야 하고요. 그런데 관광단지 같은 경우, 교통이 너무 좋아지면 바로 공장이 들어섭니다. 화성이 난개발된 이유가 공장이 많이 들어와서예요. 이건 정말 고민입니다. 절차대로 공장 짓는데 행정에서 막을 수가 없거든요.
리: 교육에 대해서는 어떤 생각을 가지고 계세요?
서철모: 기초단체장들이 표를 인식하다 보니 교육정책을 남발합니다. 잘못이죠. 물론 저도 교육정책을 낼 겁니다. 하지만 외국처럼 공교육과 그 외를 나눠야 해요. 선진국에서 초등학교, 중학교의 목표는 인재 양성이 아니라 건전한 시민 양성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공교육이 인재를 만들기를 원하죠. 공교육에서 모두가 의사 판사 변호사가 양성되길 기대하죠. 맞지 않아요. 다만 학교 밖 교육에 대한 부분은 시에서 해야 해요. 전 친 노동정책을 펴려고 합니다. 노동자 자녀들이 밤에 방치되지 않고 안전하게 있을 공간만 제공해도 부모들이 맘 편하게 열심히 일할 수 있어요. 근데 이건 교육정책이 아니라 노동정책으로 봅니다. 노동자들에 대한 직접 지원은 시가 할 수 없지만, 노동에 전념할 요건을 만들어주자는 거죠.
리: 환경 쪽으로도 뭔가 마련하고 계신가요?
서철모: 환경은 보전이 기본 원칙입니다. 저는 개발 공약이 거의 없습니다. 대신 에코뮤지엄 같은, 자연 상태를 복원하겠다는 공약이 있어요. 미세먼지에 대해서는 초중고 및 유치원, 어린이집, 노인정에 공기청정기를 보급할 계획입니다. 화성이 예산이 좀 많거든요. (웃음) 저는 당선 전에는 돈 안 드는 공약 위주로 공약의 50%만 낼 거예요. 나머지 50%는 시장이 되고 100일간 시민, 공무원들과 의견을 나눈 후에 발표할 겁니다.
리: 나중에 시장이 된 다음에, 물러날 때 서철모의 화성시가 어떻게 기억되었으면 좋을까요?
서철모: 저는 주춧돌을 놓는 시장이 되고 싶어요. 제가 주춧돌을 놓으면 다음 시장이 기둥을 세우고, 그다음 시장이 지붕을 놓으면 돼요. 유럽은 다 그래요. 자기 임기에 집을 완성하려고 하지 않아요. 자기 임기에 끝내려니까 문제가 생기고 사상누각을 지어서 무너지는 거죠. 제 임기 내에 거창한 집을 짓겠다는 공약을 내세우고 싶진 않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