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의 못다한 꿈을 이루기 위해 시작한 구의원
이승환(ㅍㅍㅅㅅ 대표, 이하 리):굉장히 긴 인생과 정치적 역정을 겪으면서 여기까지 오셨어요. 그 과정에서 본인에게 큰 분기점이 됐거나 결정적이었던 순간을 세 순간 정도만 꼽는다면 어떤 걸까요?
김미경(서울 은평구청장 후보): 우선은 정치에 입문하게 된 계기일 것 같은데요. 아버지가 경찰이셨는데 1998년에 정치로 나가게 되셨어요. 원래는 시의원을 준비하고 계셨는데, 그때만 해도 정말 돈 선거가 장난이 아니었고, 암투도 심했죠. 그래서 1992년부터 출마를 준비하셨는데 다른 사람이 갑자기 오면서 못 나가기도 하고 그랬죠. 그러다 구의원이라도 나가보겠다 하셔서 1998년에 출마하셨어요. 그때 제가 직장을 쉬고, 아버지를 도왔는데 그때 정말 불합리한 걸 많이 봤어요. 거의 돈 선거의 절정을 봤죠.
리: 지역은 은평에서 어디였어요?
김미경: 수색이요. 제가 초등학생 때부터 수색에 살았어요. 그때는 돈 선거 해주겠다는 브로커도 엄청 많았고, 그 외에도 돈이 많이 나갔어요. 저희도 아버지 명의로 갖고 있던 아파트를 두세 개를 날리고, 현금도 그때 다 썼죠. 그때 제가 ‘제도권 밖의 시민단체에서 기껏해야 한두 개를 바꿀 수 있다면, 제도권 안에서는 대여섯 개는 바꿀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리: 보통은 더러워서 못 해 먹겠다고 하지 않나요?
김미경: 그런 생각도 없진 않았죠(웃음). 그러다 2003년에 지역구 의원이셨던 분이 사직하시면서 재보궐 선거가 생겼어요. 초등학교 선배님이셨는데, 사실 이 분이 예전에 구의원 선거에서 아버지랑 겨루시기도 하셨고, 정치 성향도 다르신 분인데 아버지 선거를 도와드리는 걸 봤던 모양이에요. 그때는 기초의원 정당공천제가 없을 때기도 했고, 그래서 저한테 보궐에 나가보는 게 어떻겠냐고 제안을 하셨어요. 주위에서도 ‘아버지 대신에 해 보는 게 어떻겠냐?’는 의견이 많았고, 또 어머니가 적극 지지해주셨어요. 보통은 남편이나 딸이 한다고 하면 말리시잖아요. 그런데 어머니는 ‘한 번 해 봐, 아버지가 못한 거 해봐’ 이러셨죠.
리: 아버지는 뭐라고 하셨어요?
김미경: 아버지는 좋아하셨죠. 주변에서 권유도 있고, 딸이 한다고 하니 아버지도 그때는 오케이하셨죠. 그때 또 2002년에 노무현 대통령께서 선거공영제를 만드시면서 돈이 부족해도 선거를 할 수 있는, 나중에 보전해주는 구조가 만들어지면서 제가 돈이 없어도 선거를 치를 수 있었죠. 그때 다행히 당선됐는데, 정말 그래서 부모님께 감사했어요. 부모님이 막 많이 있어서 베풀고 그런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사람 냄새가 나는, 그런 상황에서도 베풀려고 노력하는 분들이셨거든요. 당시 지역 분들이 저 본인이 아니라 제 부모님을 보고 지지해주셨던 것도 컸다고 생각해요.
리: 아버지는 그럼 선거 한 번만 나가신 거예요?
김미경: 그렇죠. 그다음에 저를 해준 건 부모님의 인품을 보고, 물론 상대방의 인품도 있었겠지만, 그 지역에서 돈을 벌었지만 있는 사람이 안 쓴다는 기조였던 것 같고. 저희 부모님은 정말 인간적인 부분을 많이 생각하셨던 분이었죠. 그런 기조 속에서 제가 당선됐고, 구의원 생활을 쭉 하게 됐죠.
리: 학창시절이나 직장 다니실 때도 정치에 관심이 있으셨나요?
김미경: 제가 중학교 2학년 때 책을 많이 봤는데, 염세주의적인 책을 많이 봤어요. 뜻도 잘 모르면서 죽음과 관련된 책을 많이 읽고 그랬죠. 그게 지금 안경을 쓰게 된 계기이기도 하고. 또 신문을 보면 정치면을 굉장히 많이 봤어요. 그래서 정치에 관심이 많았죠. 그렇게 커가다가, 고등학교 때는 제가 공부도 좀 잘 안 하고 반항심도 있었어요. 그런데 고등학교 담임선생님이 “너는 꽃을 보면 아름답다는 생각에 머물지 않고, 그 뒷면의 무언가를 보려고 하는 것 같다. 그래서 미경아, 너는 꼭 공부를 열심히 했으면 좋겠다” 이런 편지를 써주셨어요.
리: 낭만적인 선생님이셨네요. 그래서 그 후로 공부하셨어요?
김미경: 열심히는 했는데, 4수까지 하다가 도저히 안 되겠어서 포기를 했죠. 그때 제가 연대 앞으로 학원을 다녔어요. 한창 데모할 시기잖아요. 그런데 그런 걸 제대로 모르고 지냈죠. 지나가면서 ‘저 사람들이 왜 저럴까?’라는 고민은 많이 했지만… 일단은 학원에 가서 공부해야 하는 입장이었으니까요. 그래서 시대에 제대로 참여하지 못한 게 아직도 가슴에 남아있어요.
리: 그렇게 4수 해서 결국은 대학에 들어가셨나요?
김미경: 아뇨, 대학가는 걸 그만두고 사회생활을 했어요. 하지만 한편으로는 계속 목마름이 있기는 했죠. 사업은 디자인도 하고, 의류 사업도 하고, 일본과 무역도 하고 다양한 일들을 했죠. 그래서 아버지 선거 때 디자인 같은 걸 돕기도 했고요.
리: 아버지는 왜 민주당 쪽으로 가신 거예요?
김미경: 제 고향이 전남 영암이에요. 아버지도 당연히 호남분이시고, 그래서 김대중 대통령님을 ‘선생님’이라고 부르셨죠. 그래서 민주당으로 시의원 준비하셨다가 계속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서 밀리셨던 거고… 마지막으로 구의원 도전을 하셨는데 실패하셨죠.
리: 아버지는 왜 지역 정치를 하고 싶으셨던 거예요?
김미경: 우선은 아버지가 정치외교학과 출신이세요. 또 역사적인 사건들을 보시면서 정치에 대한 욕구가 커지셨던 것 같아요. 아버지가 지역에서도 열심히 활동해오셨어요. 바르게살기 위원장 같은 것도 오래 하셨고요. 그러다 보니 자연스레 지역사회 활동을 많이 하던 사람들의 지방 의원이 되는 구조이기도 했고요.
리: 아버지가 계속 떨어지셨던 선거에서 덜컥 당선되신 셈인데, 당선될 줄 아셨어요?
김미경: 한 번도 떨어진다는 생각은 안 했어요. 다만 당선된 건 아버지가 지역에서 많이 활동하신 덕이라고 생각해요. 실제로 그런 이야기도 많이 들었고요. 그런데 제가 당선되어서 활동하다 보니까, 아무래도 지역에서 회의나 행사를 가면 자꾸 높은 대접을 해주시려고 하고, 저를 계속 가장 상석에 앉히고 인사말을 하게 하고 그러는 거예요. 그런데 거기에 아버지가 계시는 경우가 많았죠.
리: (웃음)
김미경: 사실 좀 애매한 상황이잖아요. 그러면서 아버지가 지역사회에서 해오시던 역할을 제가 하게 되고, 아버지는 계속 뒤로 빠지셨죠. 그래서 아버지 존함이 김용진이신데, 처음에는 ‘김용진의 딸 김미경’으로 제가 불렸어요. 이제는 당신이 ‘김미경 서울시의원의 아버지’로 불리시죠. 계속 잘할지 걱정하시면서 조언을 많이 해주고 계세요. 지금도 가장 든든한 지원군은 부모님이시죠.
리: 초선 때, 초보 정치인 시절은 어떠셨어요?
김미경: 굉장히 열정적으로 일했어요. 그래서 ‘발바리 구의원’이라는 별명으로 불렸어요. 사실 그때쯤부터 연쇄 성폭행범을 어느샌가 ‘발바리’라는 별명으로 부르기는 했는데, 당연히 그런 뜻은 아니었고(웃음). 정말 열심히 돌아다닌다고 해서 붙은 별명이었죠.
리: 기억나는 사례가 있나요?
김미경: 보도블록 턱이 보통 10cm에요. 그런데 이게 어떤 높이냐면, 휠체어를 타고는 도저히 높을 수가 없는 높이에요. 그런데 규정이 그렇게 되어있으니 다들 그냥 그대로 만드는 거죠. 그래서 지체장애인분들, 언론사, 토목과 담당 공무원을 모아서 실제로 10cm 턱을 넘을 수 있는지 실험했어요. 절대 못 넘었죠. 토목과 공무원은 “규정이 10cm라서 그냥 책에 나온 대로 규정을 맞추면 되겠지 싶었다. 그런데 이게 정말 이러면 안 되겠다”라는 걸 알았다면서 그 후로는 은평구의 보도 턱은 낮게 만들려고 하고 있어요. 그런 것들을 실제로 제가 돌아다니면서 본 것들이기 때문에, 발바리라는 별명이 좋았고, 또 그런 것들을 계속 지키고 구민들과 함께 바꾸려고 노력했죠.
현명한 구민들의 선택으로 이어질 수 있었던 정치생명
리: 그렇게 구의원이 되신 게 지금까지 첫 번째 삶을 바꾼 순간이었고, 두 번째는 어떤 건가요?
김미경: 두 번째 계기는 2006년 시의원 선거에서 떨어졌을 때요. 구의원 초선을 마치고 나서 시의원 선거에 출마했어요.
리: 그때면 열린우리당이 다 떨어졌을 때네요.
김미경: 맞아요. 처음에는 제가 안 나가겠다고 했다가, 가장 경쟁력 있다고 출마해야 한다고들 하셔서 출마했어요. 정말 열정을 다해서 일을 하다가, 선거 10일 전에 KBS 아침마당에서 전화가 왔어요. 서울에서 열린우리당 후보 중에 저만 당선이 될 것 같다고, 당선되면 출연을 해달라는 거예요. 캠프에서는 다들 좋은 신호라고 난리가 났죠. 그런데 3일 후에 박근혜 대통령 사건이 터졌죠.
리: ‘대전은요?’군요…
김미경: 그때 10%가 확 빠지더라고요. 그래서 우리 캠프에서는 1주일 동안 하루에 1%씩만 따라잡자고 했는데 결국 졌죠. 그때 은평구 구청장, 시의원, 구의원 후보가 모두 모여서 마지막으로 합동유세를 했어요. 구청장 후보가 가장 처음에 연설을 했고, 제가 마지막 연설을 했는데 그때 정말 구민들한테 “여러분, 현명한 히딩크가 되어주십쇼” 이렇게 정말 마음속으로 피눈물을 흘리면서 유세를 했어요. 그래서 지금도 그때 정말로 제 유세가 마음에 와닿았다고 하시는 분들이 있으세요.
리: 주민들에게 현명한 히딩크가 되어달라는 건 어떤 의미에요? 보통 주민보다는 지방의원을 감독 역할로 생각하지 않나요.
김미경: 2002년 월드컵 때 히딩크 감독이 성공한 게 박지성 같은 신인들을 유명세보다는 실력, 잠재력을 보고 뽑은 거잖아요. 그래서 주민분들이 다른 걸 다 떠나서 정말 일 잘할 사람을 뽑아달라고 한 거죠. 그때 제가 서울 시내 시의원 후보 중에 가장 표차가 적게 낙선했어요. 그러고 선거 후에도 한 달 반 정도를 정말 선거유세와 똑같이 다녔어요. 그런데 그러고 8개월 만에 원래 제 지역구였던 구의원 선거구에 보궐선거가 생겼어요.
그런데 그때 제 상황이, 시의원 떨어졌는데 구의원을 또 떨어지면 이건 정치생명이 사실상 끝나는 거잖아요.
리: 그렇죠.
김미경: 그런데 그때 선거가 어떤 선거였냐면, 2007년 12월 19일 대통령 선거와 보궐선거를 같이 했어요. 바로 이명박 대통령이 당선된 선거였죠.
리: 최악의 시기가 계속 이어졌네요…
김미경: 그렇죠. 그래서 그때도 후보가 없었어요. 그때 이미경 의원님이 은평갑 국회의원이셨는데, 3선 의원이 있는 지역구에서 후보를 못 낸다는 건 말이 안 된다고 어떻게든 후보를 찾았는데, 계속 사람들이 어차피 떨어질 거라는 생각에 안 한다는 거예요. 그런데 후보 등록 마감일을 하루 남겨놓고 수색초등학교 동문회장님께서 “미경아, 아무래도 니가 나가야 하겠다” 그런 말씀을 주신 거예요. 저는 그때 두 말도 안 하고 “그렇게 하겠습니다”라고 했어요. 어떻게 보면 제가 받아들여야 할 숙명이라고 생각했고, 당의 명령이라고 생각했던 거죠. 동문회장님이 말씀하셨지만, 그게 결국 당에서 이야기가 나온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렇게 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집이나 주변에서는 다 ‘나가면 안 된다’ ‘정치생명이 끝나는 일이다’ 그렇게 말렸는데도 출마를 결심했죠.
리: 그러면 그때는 만약 정치생명이 끝나더라도 상관없다고 생각했나요?
김미경: 아뇨, 저는 그때도 절대로 진다고 생각하지 않았어요. 결정하면서도 ‘이건 내 숙명이다. 나는 할 수 있다, 이길 수 있다’ 이런 생각을 가지고 절대로 진다고 생각하지 않고 선거에 임했죠. 그런데 이게 12월 선거니까 지역에서는 명함을 하나하나 돌려야 하는데 손이 다 얼어서 제대로 돌리기 힘든 거예요. 게다가 대선과 겹쳐서 유세 기간도 더 길었고요. 정말 하루하루 힘들게 버티는데, 어느 날은 아버지가 피가 멈추셨어요.
리: ??? 네????
김미경: 너무 추워서 이를 앙다물고 명함을 교부하시다 보니까 핏줄이 터지신 거예요. 그런 모습을 보니까 자식으로서 너무너무 죄송한 거예요. 그때 제가 ‘정말로 이 선거는 지지 말아야겠다’ 생각했죠. 또 어머니도, 보통 연세 있으신 분들은 다리가 아프셔서 언덕길 올라가기가 힘드시잖아요. 그런데 한 사람 한 사람 명함을 주다 보면 어느새 언덕을 다 올라가 있다고 하시는 거예요. 부모님이 그렇게 절절한 마음으로 같이 유세를 해주셨고, 그래서 승리를 거뒀죠. 2003년 재보궐 선거도 호남 빼고는 거의 저만 당선이 됐었는데, 2007년 재보궐선거에서는 아예 호남 빼고는 정말 저만 유일하게 당선이 됐어요. 게다가 득표율도 정동영 후보가 저희 지역에서 23% 정도 받았고, 이명박 대통령이 48%를 받았어요. 그런데 저는 56%를 받았죠.
리: 와아아, 뭐 때문일까요? 1달 반 동안 인사해서일까요?
김미경: 일개 구의원을, 대선에서는 다른 당 후보를 지지했던 사람의 30% 이상이 저를 지지해준 거잖아요. 말씀하신 것처럼 제가 낙선 후에도 1달 반 동안 돌아다니면서 김미경을 지켜보신 분들이 일을 열심히 했는데도 떨어졌다는 걸 알고 계셨고, 그래서 ‘아, 저 사람은 일을 하게끔 만들어줘야 하는데…’ 그런 마음이 아니었나 싶어요. 그렇게 제가 구의원이 됐고, 정말 많은 힘이 된 선거였어요.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다: 8,000여 명의 서명으로 되살아난 김미경
리: 그럼 세 번째는 언제인가요? 이번인가요? 이번에도 사실 정말 스펙타클했잖아요.
김미경: 그렇죠. 말씀드린 것처럼 제가 계속해서 롤러코스터를 타왔잖아요, 이번에도 비슷했죠. 작년 9월 20일에 지금 김우영 구청장님이 불출마를 선언하셨어요. 저는 그전부터 어렴풋이 알고 있었던 거고, 제가 그러면 구청장을 출마하겠다는 결심을 하고 당원을 열심히 모집했어요. 3,000명 이상의 당원을 모았고, 또 그것도 제가 은평갑 지역위원회 지역구다 보니까 은평을 지역위원회에 사람도 더 많고 해서 을에 더 집중해서 당원을 모으기도 했고.
그런데 작년 12월 정도부터 막 ‘김미경을 선거에 못 나오게 할 것이다’ 이런저런 소문이 돌았어요. 그래도 다 감내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하고 열심히 준비했죠. 그런데 막상 공천에 들어가니까 정말 말도 안 되는 일이 벌어진 게, 제가 하위 20%라고 공천 배제(컷오프) 대상이라는 거예요. 우선은 그런 규정에 대해서 기존에 아무런 설명 들은 바가 없었고, 또 하위 20%가 되려면 일을 못해야 하잖아요. 그런데 제가 서울시의회 최초의 여성 도시계획관리위원장이 됐고, 그러면서 SH공사나 산하기관을 정말 많이 업그레이드했다는 평가를 받고, 그래서 어느 위원장보다 잘했다는 평가를 받아왔는데 하위 20%라니 황당한 거죠.
그래도 하위 20%라고 하면 그건 점수에서 10%가 깎일 뿐이니까 충분히 극복할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것도 아니고 아예 배제하겠다는 거예요. 중앙당에서 그런 공천 룰이 나온 적이 없었는데, 유일하게 서울시당에서만 그렇게 하겠다는 거예요. 그래서 계속 말이 안 된다고 반발을 했고, 그 과정에서 이상하게 돌아가고 있다는 합리적 근거에 기초한 의심을 할 때도 많았죠. 그런데 결국 서울시당에서는 저를 배제하고 경선대상자 4인을 발표했죠. 그래서 중앙당에 재심 신청을 했고, 그때 지역주민들께서 서명을 해주신 것도 제출하고 그랬죠.
리: 서명은 몇 명 정도 받았어요?
김미경: 7,894명이 서명을 했어요. 또 동료 시의원들도 지금 당장 경선대상인 사람 말고는 다 서명을 해줬어요. ‘어떻게 김미경이 하위 20%냐, 말도 안 된다. 나도 서명하겠다’ 이러면서 다들 해주셨죠. 또 지역의 박주민 의원님, 이미경 전 의원님 등이 김미경이라는 사람을 10년 넘게 지켜봐 오면서 일을 절대로 못하는 사람이 아니라고 의견을 내주시기도 했고. 그래서 재심이 통과됐고, 최고위원회에서 그러면 김미경도 다시 경선의 기회를 주기로 해서 최종적으로는 6명이 경선을 치렀죠.
리: 사실 이번에 많은 사람이 재심신청을 했는데 거의 다 기각됐잖아요?
김미경: 그렇죠. 그런데 저는 적합도 조사에서도 압도적 1위였어요. 제가 30점을 받았고, 다른 후보들은 7점에서 14점이었어요. 상식적으로 의정활동을 못하는 사람이 그런 압도적 점수를 받는다는 게 말이 안 되잖아요. 그런 점에서 말이 안 되는 결정이라고 평가하셨던 것 같아요.
리: 정말 많이 힘든 과정이셨겠네요.
김미경: 제가 최근에 시장을 다니면서 말씀 들어보면 제가 ‘컷오프됐을 때 너무 가슴 아팠다. 그래서 말도 못 붙여보고, 가슴앓이를 많이 했다’는 분들이 많으세요. 그래도 저는 계속 담담하게 준비했어요. 많은 분이 저에게 믿음을 준다는 것에 확신을 가졌고, 캠프에서도 든든하게 지켜주었어요. 캠프에 오신 분들도 다들 ‘다른 캠프는 이상하게 왔다 갔다 하는 사람이 많고 그런데 김미경 캠프는 정말 안정적으로 후보가 컷오프되든 안 되든 자기 일을 열심히 하는 캠프여서 정말 감동했다’는 사람도 많았어요.
리: 처음에는 서명을 몇 명 정도 받을 생각이셨어요?
김미경: 목표치를 정하지는 않았었어요. 정말 닥치는 대로 많이 받아야 한다고 생각하고, 정말 많은 분이 나서셨어요. 제가 지금껏 의정활동을 하면서 도와드렸던 주민분들이 ‘김미경이 왜?’하면서 본인들이 직접 서명을 받아주셨죠.
통일로 가는 시작점, 은평구
리: 보통 구청장 후보는 정치인 출신이거나 관료 출신이 많은데, 후보님은 정말 구의원, 시의원 하면서 정말 밑에서부터 올라온 케이스잖아요. 그러면 구청장을 하겠다는 또 다른 이유가 있을까요?
김미경: 사실 제가 구의원, 시의원을 하면서 행정부하고, 특히 시의원 하면서는 박원순 시장과 많이 다퉜어요. 수색역세권 개발 문제 때문인데, 이게 15년 동안 진행이 안 되는 거예요. 분명 오래 걸릴 수도 있는 문제이기는 하지만, 박원순 시장이 지난 선거에서 공약도 했던 사안이거든요. 우리 지역의 먹거리로 만들 수 있는 게 진관동과 수색역세권 개발, 혁신파크 이런 것들인데 너무 안 해주시는 거예요.
시와 지금 문제가 생기고 있는 현안 중 하나가 롯데 개발 문제인데, 이걸 주변 시장 때문에 못 하겠다고 하는 거예요. 그런데 지금 1km 안에 사는 주민들은 개발을 좀 해달라, 그래야 지역이 살아난다 이러고 있거든요. 기반시설이 더 갖춰지니까요. 그런데 시장은 2km를 훨씬 넘어서 밖에 있거든요. 구민들이 시에서 발목을 잡고 있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죠. 그러다 보니 트러블이 좀 계속 있었죠.
리: 현 구청장님은 어떻게 하셨어요?
김미경: 현 구청장님도 계속 역할을 하려고 노력은 하셨는데 답답하게 잘 안 됐고, 그때 당시 이미경 의원님도 같이 많이 노력하셨어요. 그런데 또 을지로 위원회셨기 때문에 소상공인 문제에도 관심이 많으셨어요.
리: 아, 쉽지가 않고 상당히 복잡하네요.
김미경: 그래도 지역을 위해서 해야 한다고 하신 거죠. 게다가 지금 롯데가 들어와서 명품의류 같은 하이레벨의 상품을 팔겠다고 하기 때문에 지역 상권과 경쟁이 겹치지 않는 구조라고 생각하거든요. 지금 은평에 백화점이 없어요. 신촌이나, 종로로 나가야 해요. 대형마트도 이마트 하나밖에 없고, 최근에야 은평 롯데몰이 진관동에 들어왔죠.
리: 뉴타운만 깔아놓고 별다른 시설이 없었던 거네요.
김미경: 그렇죠. 인구가 49만인데 예식장도 없어요. 변변한 호텔도 없어서, 목사님들과 조찬기도회를 한다거나 하면 그런 공간이 필요한데 없어서 마포나 홍은동으로 나가야 해요. 지금 은평이 정말 기반시설이 많이 부족해요. 현 구청장님이 쌓아놓으신 참여예산 같은 업적 위에서 개발할 것은 개발하고, 도시재생할 것은 재생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지금 도시재생의 롤모델로 꼽히는 산새마을을 처음부터 같이 계획하고 만들어간 사람이 저에요.
사실 그걸 시작하게 된 계기가 진짜 그때는 말 그대로 약 파는 사람들, 약장수들이 와서 공짜휴지 주면서 노인분들한테 약을 팔았어요. 그런데 그 산새마을 언덕 위에 사시는 분들이 휴지 얻으러 내려와서 다시 올라가실 때 한두 발짝 걷고 쉬고, 세 발짝 걷고 쉬시는 모습을 보면서, 내가 정치인으로서 뭘 할 수 있을까 생각했죠. 그래서 마을버스를 이 지역에 넣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러려면 버스가 다니기 위해서 주차 문제를 해결해야 하니까, 지하 공영주차장 106면짜리를 만들고 그 위에는 동네공원을 만들었어요.
이것도 힘들게 만들었어요. 처음에 서울시에서 여기는 너무 언덕이라서 마을버스가 안 된다는 거예요. 말이 안 되잖아요. 마을버스라는 건 버스가 닿지 않는 곳에 연결되어서 주민들이 사용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잖아요. 그래서 세 번이나 반려될 걸 진짜 멱살잡이하듯이 해서 통과시켰죠.
리: 그런 거 하나 통과시키는 데에도 정말 여러 가지가 얽혀있죠.
김미경: 그렇죠. 제가 마을버스를 꼭 넣어야 한다고 한 데에는 이런 이유도 있어요. 아무리 언덕 밑에 좋은 시설을 해놓으면 뭐해요, 이분들이 내려오기가 힘드신데. 그래서 좋은 시설을 만드는 것뿐만 아니라 그걸 연결할 수 있는 라인으로써 마을버스를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했던 거죠.
또 신사동 숭실고등학교 뒤쪽에 지금 ‘편백나무 치유의 숲’을 만들었어요. 지금 1만 그루가 심겨 있는데, 사실 편백이 따뜻한 곳에서 자라는 거라서 서울에서 잘 자라기가 힘들어요. 그런데 이걸 잘 키우는 전문가분들을 모시고 해서 1만 그루를 키우겠다고 서울시에서 예산을 끌어서 만들었죠. 3년 동안 1만 그루를 심으니까, 주위에 진짜로 아토피가 없어졌어요. 그래서 이걸 10년 정도 더 하면 정말 이 일대가 청정구역이 되고 은평구민의 먹거리가 될 수 있는 공간이라고 생각해요. 또 여기가 학교 뒤쪽이라서 학생들이 자기 나무를 갖고 관리하도록 하면 인성 함양에도 도움이 될 거고요. 또 한 가지 자랑하면,
리: 자랑을 많이 하시네요…
김미경: 신사동에 원래 공원이 있던 자리에 ‘내를 건너서 숲으로 도서관’을 만들었어요. 올해 6월에 개관하는데, 사실 서울시 공원심의위원회에서는 나무 하나 훼손하는 것도 어려워하는데 공원에 도서관을 지었으니 대단한 거죠. 다들 서울시 심의위원회에서 안 될 거라고 하는 걸 제가 6개월 만에 해냈어요. 그때 서울시의회에서 환경수자원위원회 수석전문위원으로 계시던 분은 제가 너무 열정을 가지고 설명하고 이야기하니까, 자기가 다른 사람을 설득하지 않으면 제 기에 눌려서 자기가 죽을 것 같았다면서 그래서 더 열정적으로 했다고 하시더라고요.
리: 은평구가 또 여러 가지 현안이 얽혀있고 문제가 잔존하는 과도기 같은데요. 이러한 현안이 잘 해결되지 않는 근본적인 원인은 어떤 게 있을까요?
김미경: 사실 은평에 예전에 부랑아 시설, 고아원 같은 어려운 사람들이 사는 시설을 많이 넣어 놓았어요. 그런데 이에 상응하는 기반시설은 전혀 하지 않았으니 삶의 질이 떨어질 수밖에 없죠. 지금 은평이 자체적인 먹거리가 없고 베드타운 역할만 하고 있어요. 그러다 보니 재정자립도도 23위고, 여러 가지로 힘들 수밖에 없죠. 그래도 지금은 굉장히 기회가 많이 주어진 시기라고 생각해요.
리: 어떤 점에서요?
김미경: 남북문제가 잘 풀리고 있잖아요. 은평이 어떤 곳이냐면, 지금 수색역이 경의선의 시작점이 될 거고, 그러면 북으로 가는, 런던까지 가는 시작점이 되는 거죠. 또 녹번동에 양천리라는 곳이 있어요. 의주로 천 리, 부산으로 천 리라는 뜻의 지명인데 은평구로 또 통일로가 지나가죠. 육로로는 통일로, 철도로는 수색에서 출발하는 경의선, 그렇게 북한으로 가는 시작점이 되는 거죠.
또 제가 노사모 출신이에요. 2004년에 이미경 의원님 선거하실 때 도우러 온 노사모 친구들과 어울리면서 자연스레 노사모 활동을 하게 되고, 퇴임하시고도 가장 먼저 같이 봉하마을에 일하러 갔었어요. 그러다 보니 자연스레 문재인 대통령이 2012년 경선에 나설 때부터 계속 도왔어요. 최초의 여성 4인 중 한 명으로 꼽히죠. 그러면서 오영식 코레일 사장, 김현미 국토교통부 장관 등과도 다 소통하는 사이고요. 그래서 수색역세권 개발도 잘 해낼 수 있을 거라고 믿어요. 또 통일을 대비하는 차원에서 DMC, 수색역 일대를 모두 개발할 필요가 꼭 있고요.
또 은평에 800병상의 병원이 새로 들어올 예정이에요. 남북간 교류가 강화되면 북한 사람들이 찾아와서 의료혜택을 받기에도 좋은 지역이 은평이고요. 또 혁신파크도 젊은 청춘들의 중심지로서 역할을 할 수 있을 걸로 기대해요.
리: 10년간 지켜본 결과 사소하지만 이 문제는 꼭 해결해야겠다는 생활속 불편함은 어떤 게 있을까요?
김미경: 은평은 교통이 가장 문제죠. 저는 연장 선상에서 생각해본다면 남북문제가 풀릴수록 GTX-A 노선이라든가, 신분당선, 경전철 문제 같은 것들이 가장 먼저 해결될 수 있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교통 문제가 가장 큰 현안이고, 또 기반시설도 많이 부족하죠. 지금 수색역세권 개발에 레미콘으로 유명한 삼표 본사라든가 SPOTV를 운영하는 에이클라엔터테인먼트가 본사를 새로 짓기로 되어있어요. 은평 구민들의 일자리 창출과도 많이 연관되어서 기반 시설이 많이 필요하죠.
떠났을 때 박수받는 구청장이 되고 싶다
리: 이번에 당선되시면 4년 뒤에 은평은 어떻게 달라져 있을 것 같아요?
김미경: 좀 더 문화 콘텐츠가 있고 사람들이 더 밝아져 있을 것 같아요 저는 그걸 기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주민들이 지역사회에 더 관심을 갖고 많이 활동하는 구조가 갖춰진다면 은평구민들이 정말 정이 있는 사람이 되지 않을까 싶어요.
제가 처음 구의원이 되었을 때 만든 게 수색 물빛 축제에요. 수색이 한참 개발되고 있었는데, ‘수색만의 문화를 보전해보자’라는 생각으로 만들었어요. 그런 식으로 문화를 좀 더 접목하는 방향을 만든다면 주민들의 삶의 질이 더 높아지지 않을까 생각해요.
또 DMC에 방송국이 많은데, 여기에 찾아오는 관광객들이 그렇게까지 많이 즐길 게 없어요. 그래서 불광천 일대를 방송거리로 조성해서 이 관광객들이 즐길 수 있는 문화 콘텐츠 개발에도 많이 신경 쓰려고 하고요.
리: 16년 동안 정치만 하셨잖아요. 정치 말고 다른 걸 해보고 싶다 하시는 것 있으세요?
김미경: 부모님하고 시간을 보내고 싶어요. 제 꿈이 저희 부모님하고 세계 일주 하는 거예요. 제가 여행을 좋아하기도 하고, 부모님하고 많은 시간을 보내고 싶기도 하고요.
리: 애들은요?
김미경: 아, 전 결혼하지 않았어요.
리: 와, 멋지네요. 그러면 이제 은평과 결혼했다고 하시면…
김미경: (웃음) 그런 말은 별로 하고 싶지 않아요. 또 사실 노인정에 가면 박근혜 닮았다고 하시는 어르신들도 좀 있더라고요. 그래도 저는 기초부터 다져왔기 때문에 박근혜 전 대통령과는 다르다고 생각해요. 또 결혼 문제는 사실 일하는 여성들이 남편, 시댁, 아이 때문에 많이 힘들다고 하잖아요. 저는 그런 것들을 다 잘 해내기는 힘들다고 생각해서, 결혼하지 않고 일을 하겠다고 부모님께도 다 말씀드렸고 부모님도 흔쾌히 받아들이셨어요.
리: 페미니즘 이야기도 많이 나오고, 정치하는 여성들도 늘어나고 있는데 사실 올라서기가 쉽지 않잖아요. 정치하고 싶은 여성들에게 해주고 싶으신 이야기가 있나요?
김미경: 정치를 그냥 하려고 하면 안 되고, 훈련을 먼저 많이 했으면 좋겠어요. 기초부터 다지면서 지역을 많이 알아야 해요. 그래서 저도 지역을 다니면서 정말 좋은 여성, 정치적 역량이 있는 여성이 있다고 하면 주민자치위원회부터 시작해서 다양한 일을 해서 경험을 쌓은 후에 출마할 수 있도록 권유를 많이 하고 있어요. 제가 서울시 최초로 여성 도시계획관리위원장이 됐어요. 그때는 정말 복지위원장 같은 것 빼고는 아무도 여성에게 위원장을 시켜주지 않았고, 도시계획관리위원회는 아예 여성 의원이 아무도 없었어요. 하지만 제가 부위원장, 위원장 하면서 가장 잘한 위원장 중 한 명으로 평가받았죠. 저는 제가 그런 구조들을 바꾸면서 사람들에게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심어줬다고 생각해요. 저 스스로도 그런 책임감을 느끼고 어긋나지 않게 살려고 노력하고 있죠.
리: 당선이 되고 퇴임하실 때 구민들이 어떻게 기억해주셨으면 좋겠어요?
김미경: 저는 퇴임해도 이 지역에서 계속 살게 될 건데, 지역을 다니면서 만나는 분들이 “아, 김미경, 그때 수고했어. 그때 당신이 이거 해놔서 정말 좋았어’ 하면서 그분들이 차 한 잔 사 주시면 그게 보람이라고 생각해요. 그렇게 살고 싶어요. 지역주민들과 차 한잔 나누고 같이 걸어 다니면서 꿈 이야기도 하고, 옛날이야기도 하면서 그런 사람이 되고 싶어요. 그때를 지금도 계속 그리고 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