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차피 바뀌는 계획을 왜 만드나
사원일 때 중장기 계획을 처음 수립하면서 매우 힘든 시간을 보냈습니다. 몇 일간은 집에도 못 가고 주말에도 출근하면서 경영진에게 보고할 문서를 만드느라 육체적으로 어려운 경험을 처음 했습니다.
더 힘든 것은 당장 몇 달 뒤도 알기 어려운 현실에서 10년 뒤 전략적 주제는 물론이며 그때까지의 매년 연간 재무제표를 시뮬레이션하는 것이었습니다. 작은 변수의 변화로 큰 결과들이 달라지는 이 숫자놀음은 대체 무슨 필요가 있나, 무슨 정확성이 있기에 집에도 안 가고 이 일을 하는가, 나는 앞으로 계속 이 일을 해야 하나 등에 대한 고민이 떠나질 않았습니다.
그 뒤 직장을 옮기고 저는 또 다른 형태의 중장기 계획을 수립하는 일을 했습니다. 중장기적인 관점 속에서 내년은 어떠해야 하는지 ‘소설’이라고 동종 업계 근무자들이 부르는 그것을 만들면서 여전한 고민이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았습니다. 다만 달라진 점이 있다면 중장기 계획을 짜면서 정리되는 부분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시장의 변화를 조망할 기회
첫 직장에서도 그러했듯 모든 중장기 계획에는 시장의 흐름을 예측하는 과정이 필요합니다. 보통 글로벌 선두 기업이 기술적으로 연구와 투자를 시작한 분야와 양산에 들어간 제품을 보며 국내의 수요 변화 추세와 우리가 언제까지 무엇을 할 수 있을 것이라는 추세를 정리하는 것이죠. 이것은 기획자 스스로에게도 많은 공부가 되지만 무엇보다도 회사 전체가 도태되지 않는 데 큰 기여를 합니다.
예를 들어 방위 사업에서 기존의 무기 체계는 미사일 중심의 요격을 중심으로 이뤄졌는데 미국의 동종 대형 기업이 새롭게 투자하는 기술이 레이저를 활용한 요격 방식을 미래 무기 체계의 중심으로 생각한다면 국내 기업도 이에 맞추어 연구할 기술을 정하고 관련 인력과 부품을 조달할 방안을 대강 짜는 것이죠. 현재 관련 부품 및 제조 시설의 현황을 보고 직접 만들 수 있도록 연구에 착수할 것인지 사다 쓸 것인지도 투자 계획에 포함되는 것입니다.
이런 과정에서 수주를 받는 기업이라면 추세를 고려해 예상 수주 매출을 정하고 투자와 기존 비용에서 일부 조정된 값으로 대강의 재무제표들을 만듭니다. 정성적인 전략적 주제로부터 정량적인 전망으로 이어지는 계획 프로세스죠. 산업 전문가로서의 기획자라면 중장기 계획을 수립하는 과정은 분명 더 깊이 있는 이해를 하는 데 도움이 되는 시간입니다.
물론 지나친 숫자놀음이나 보고서 예쁘게 만드는 것에 세세하게 신경 쓸 일이 없다는 전제하에서입니다. 중장기 계획에서 힘 빠지는 부분이 이것인데 보고하고 나면 다시 여러 버전의 시나리오를 주어 곤혹스럽게 만들기도 하죠. 현업에서 취합 받는 비용에 대한 대기와 조정의 수고로움도 일부 있습니다.
그럼에도 조직의 비전을 재정립할 기회
그런데 무엇보다도 중장기 계획이 필요한 이유는 ‘우리가 어떤 회사인가’를 다시 생각하기 위해서입니다. 앞서 예를 든 것처럼 시장의 트렌드를 안다고 해서 모두가 같은 제품을 만들지는 않습니다. 우리의 현재 재무상태와 역량, 시장의 인지 등에 따라 접근하는 시점과 방향이 다른 것이 전략이기 때문이니까요.
그래서 중장기 계획을 매번 짜면서 다가올 시장에서 우리는 어떻게 접근할 것인지 기존의 회사 비전에 맞추어 새롭게 업데이트를 합니다. 이것은 흩어졌던 기업 철학을 구성원 모두가 새롭게 재정립하는 의식에 가깝습니다. 특히 단기 성과주의가 팽배한 현대 기업에서 브랜딩을 리마인딩 하는 시간을 만들어 줍니다. 이것만 해도 이것의 가치는 충분합니다.
따라서 가장 가치 없는 중장기 계획은 단순한 트렌드의 나열이나 양적 확산을 미래에 몇 단계에 걸쳐 하겠다는 식의 접근입니다. 마치 영혼이 없는 몸을 그리는 격이죠. 트렌드의 나열 속에서 우리는 어떻기 때문에 어떤 식으로 접근할 것인지 양적 확산을 하는데, 시장과 채널에서 선별적으로 볼 것은 무엇이고 확산에 걸맞은 재무 상태가 그 시점에 나오는지에 대한 시각이 배제된다면 누구나 그릴 수 있는 뉴스에 불과합니다.
‘이런 걸 하라고 중장기 계획을 만들지는 않겠지’라고 생각하겠지만 세상에는 생각보다 화학적 작용에 대한 의식 없이 기계적인 뇌를 가진 상사가 많기에 이런 보고서를 요구하기도 합니다. 단기 성과주의가 미래를, 브랜딩을, 가치를, 철학을 이야기하는 것을 비웃게 만들어 버렸죠. 사실 기업 구성원 입장에서도 몇 년 뒤 자리와 보상이 보장되지 않는 직장을 위해 중장기 계획을 열성으로 만들 생각은 누구도 않겠죠. 이것이 사실 비극의 시작입니다.
그럼에도 이해관계자들에게 설명할 기회
물론 작은 비극은 큰 비극으로 이어집니다. 사실상 없는 그림이나 다름없는 중장기 계획은 중요한 순간에 제 역할을 발휘하지 못합니다. 투자자들은 기업의 미래 성장 가능성에 관심이 많습니다. 지금의 사정도 중요하지만 몇 년 뒤 이 회사의 성장 전략과 구체적인 방안, 그때쯤 예상되는 실적과 재무상태, 근거를 알고 싶어 합니다.
투자 자금을 받으러 다니다가 몇 년 뒤 이 회사는 어떻게 되어 있을 것인지 설명해 달라는 질문을 받을 때 아무 할 말이 없이 더듬더듬 대답하는 기업의 재무팀이나 기획팀의 이야기를 적지 않게 들었습니다. 종일 회사 생각만 하고 야근까지 불사하는 직원들이 왜 회사의 몇 년 뒤를 대답하지 못했을까요? 아마도 시작된 작은 비극에서 비롯된 영혼 없는 중장기 계획, 혹은 닥치는 대로 임기응변으로 살자는 무전략의 결과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물론 많은 계획은 중간에 폐기되거나 제대로 지켜지지 않습니다. 그리고 계속 수정됩니다. 힘 빠지는 일이기는 하지만 그게 자연스러운 것이기도 합니다. 개인도 인생 계획을 세우지만 자주 바꾸기도 합니다. 나 하나의 인생 계획조차 매일 바뀌는데, 하물며 주주들이나 이해 관계자가 득실득실한 기업에서 시장 환경이 바뀌면서 얼마나 자주 수정되겠습니까?
‘어차피 바뀔 계획이니까 대충 만든다’는 사실 경영진이나 기획팀의 직무유기입니다. 그걸 고민하기 위해 있는 자리가 경영진이고 전략팀이니까 말이죠. 물론 무슨 일이든 혹사할 정도로 무리해서 하는 건 반대합니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지나친 숫자놀음이나 예쁜 보고서에 대한 외압을 후배들에게 절대 물려주고 싶지 않습니다.
원문: Peter의 브런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