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년쯤 전에 지적했던 개발협력계의 우리말 오염 상황이 별로 나아지지 않았다. 아니 나아지기는커녕 요즘 들어 아주 창궐하는 모양새다. 전에 쓴 글에서는 실제 사례를 들지는 않았다. 특정 인물 몇 사람을 공격한다는 인상을 줄 수 있어 조심스러웠기 때문이다.
이번에는 그럴 수가 없게 되었다. 그러나 여전히 어떤 사람이나 기관을 모욕하거나 비방할 생각은 전혀 없다. 오로지 우리 개발협력계 구성원, 특히 청년들을 나쁜 영향으로부터 지키고, 바른 우리말 사용이 논리적으로 사고하고 합리적으로 행동하는 데 도움이 되길 마음뿐이다.
일단 이 글의 단초가 된 사진을 보자. 한 페친이 아래 사진을 게시하면서, “일반적인 감성팔이 중심이 아니라 고용의 양적, 질적 평가를 하는 데 자원을 썼다는 것을 높게 평가했다”고 전했다. 그런데 내 입장에서는 보고서 표지 제목이 더 먼저 눈에 들어왔다.
사진 사용에 동의를 구하자, 페친은 ‘자신의 원래 의도는 저자들의 노고를 칭찬하기 위한 것이므로, 비판적 글에 사진을 사용하도록 동의할 수 없다.’ 하였다. 따라서 인쇄본 표지 사진은 아래 pdf 본으로 대체한다. 내용은 똑같다. 다만 좋은 말만 하고 싶다는 페친의 인식이 이해는 가면서도 안쓰럽다. 치열한 논쟁 없이 어느 업계든 무슨 발전이 있겠는가?
이런 사진을 보면 무슨 생각이 먼저 떠올라야 보통 한국인인가? 나는 잘못된 우리말 사용을 언급하지 않은 채 “내용은 못 봐서 알 길이 없습니다만, 보고서 표지를 꼭 저렇게 써야만 했을까요? 거칠게 표현하면 마치 식민지에서 만든 문서 같습니다… 안타깝네요…” 라고 댓글을 달았다.
지나가던 한 분이 “식민지스러운 디자인이란 것도 있나요? 괴상한 사고관을 가지고 계신 사람이 쓰는 표현 같아서 안타깝네요…”라는 반응을 보였다. 일단 내가 시각디자인 문제를 언급하는 줄 알고 오해한 것 같기도 하고, ‘사고관’이라는 국어사전에도 없는 단어를 구사하는 분이라 대응할 필요를 느끼지 못해 그냥 넘어갔다. 내가 추가적으로 이유를 설명했다.
색감이나 용지 선택이 아니라, 사용한 언어 때문에 식민지에서 만든 문서 같다고 표현했습니다. ‘스마일투게더파트너십 임팩트 리포트’라는 제목을 보자니, 우리글이 없어서 한자를 빌려 이두 방식으로 쓰던 시절보다 나아진 것이 뭔지 모르겠습니다.
만약 일본에서 같은 보고서를 スマイルトゲザーパートナシップ インパクト レポート라고 썼다면 어땠을까요? 저 보고서를 쓴 사람은 우리말을 버려가면서까지 저런 식으로 써서 어떤 가치를 지키려 했을까요?
‘함께일하는재단’이라는 이름을 지은 분이 보면 뭐라 생각하실지…. 왜 그 분이 ‘워킹투게더파운데이션’이라 쓰지 않고 ‘함께일하는재단’이라 명명했을까요? 국적 불명의 언어 사용으로 사회적 가치를 추구하는 분들의 숭고한 뜻이 다 날아가는 느낌입니다.
원래 사진을 게시한 페친이 ‘본인에게 왜 그러냐’고 하기에, 그분에게는 시비를 걸 생각이 없으므로 대충 설명을 하고 그쯤에서 그만두었다.
대체 뭐가 문제인가?
문제의 보고서 본문을 찾아봤다. 충격적인 표지에 비하면 내용은 평이하고 별문제가 없다. 가끔 표지에서처럼 외래어라고 할 수 없는 영어 단어를 소리 나는 대로 적은 것을 빼면 그렇다. 문제는 표지에 집약되어 있다.
위 그림은 각각 보고서의 영문판(왼쪽)과 국문판(오른쪽) 표지이다. 영문판의 ‘SMILE TOGETHER PARTNERSHIP Impact Report’는 국문판에서 ‘스마일투게더파트너십 임팩트 리포트’로 표시된다. 이해할 수 없는 건 한글 표기 아래 다시 영문으로 써 놓은 ‘Smile Together Partnership Impact Report’다. 대체 누굴 보라고 써놓았단 말인가?
국문판에서 유일한 (한글 표기가 아니라) 우리말인 ‘함께일하는재단’은 영문판에서 Work Together Foundation으로 번역되었다. 왜 ‘Hamkke Ilhaneun Jaedan’으로 적지 않았나(실제로 재단의 웹사이트 주소는 hamkke.org다)? 외국인이 못 알아볼까 봐? 그럼 ‘스마일투게더파트너십 임팩트 리포트’는 한국인이면 누구나 당연히 알아봐야 정상인가?
일단 ‘스마일투게더파트너십’이라 띄어쓰기 없이 다닥다닥 붙여 쓰는 것을 보니 고유명사인 모양이다. 사업을 만드는 시작부터 우리말 이름을 포기하고 영어 이름를 한글 표기하는 방식을 선택했다. 할 말이 없다… 이 보고서를 공동으로 만든 ‘uGET’은 또 어떤 단체인가 봤더니, 연세대 경영대학의undergraduate Global Experience Team-project의 약자라고 한다. ‘해외경영현장 산학협력 프로젝트 활동으로 여름 계절학기 경영학 전공과목’이라는데, 그 이름이 uGET이라니 역시 할 말이 없다…
사업과 단체(?) 이름이야 고유명사라 우기면 외부자로서 딱히 할 말이 없지만, ‘임팩트 리포트’는 ‘영향평가 보고서’라는 확립된 이름을 그냥 쓰면 될 텐데 왜 그랬을까?
왜 보그매국노체를 계속 쓸까?
결론적으로 우리 개발협력계에 보그매국노체를 좋아하는 못된 버릇이 만연해서 그렇다. 많이 사용하는 보그매국노체 단어를 적어보자.
우선 임팩트투자, 공공섹터처럼 우리말과 섞어 쓰는(그러나 아직까지 외래어의 지위를 얻지 못한) 경우가 있고 소셜벤쳐, 소셜이노베이션(터), 체인지메이커, 디자인싱킹, 임팩트비즈니스 등 영어 두 단어를 붙여 우리말 한 단어처럼 쓰는 경우도 많다. 엑셀러레이팅(터), 무브먼트, 베네핏처럼 영어 단어를 달랑 가져다 쓴 진성(!) 보그병신체도 있으며, 소셜앙트레(?)처럼 쓰다만 것 같은 (그래서 왜색까지 물씬 묻어나는) 요상한 단어도 있다.
이런 보그매국노체를 구사하는 이유를 찾아봤다. 2015년에 한국경제 TV에서 보그매국노체를 다룬 카드뉴스에서 제시한 이유는 이렇다.
외국 것을 좋아하고 남 앞에서 튀고 싶어 하는 과시 심리 때문이란다. 그렇다. 대부분 보그매국노체 단어는 대체할 수 있는 우리말이 있다. 텔레비전이나 인터넷처럼 영어권에서 만들어낸 새로운 문물이라서 딱히 대응하는 우리말 표현이 없는 경우가 아니기 때문이다. 이런 경우 외래어로 분류해서 우리말 일부로 취급한다.
하기는 사회적기업을 소셜벤쳐라고 부르는 이면에 무슨 다른 이유가 있겠는가? 한경TV의 분석은 거칠어 보이지만 정확한 분석이다. 그 외에 달리 설명할 방법이 없다.
보그매국노체가 끼치는 해악
이쯤 되면, 아니 말이야 말하는 사람이 하고 싶은 대로 하는 거지, 당신이 무슨 상관이냐고 따지는 사람도 있을지 모른다. 어디 와서 꼰대질이냐고 따져도 할 말은 해야겠다. 언어는 공기나 물처럼 중요한 공유자산이다. 일기장처럼 혼자서 뇌까리는 말이 아닌 이상 대중을 향하여 발표하는 말은 전체 언어사용자의 정신건강에 직결된다. 그래서 모든 사람은 다른 사람의 대중적 언어 사용에 참견할 권리를 가진다.
첫 번째로 꼽는 보그매국노체의 해악은 빈곤층, 수혜자 그룹을 대상화하는 것이다. 빈곤타파와 사회혁신을 직업으로 삼는 사람이 가장 주의해야 할 일은 빈곤층을 자기와 분리해 생각하는 짓, 즉 대상화를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를 위한 첫걸음이 그들과 같은 언어를 사용하는 것이다. 옛사람은 이를 역지사지라 했는데, 마케팅에서는 ‘고객의 언어로 말하라’는 원칙이다.
미국에서 Social Venture라는 호칭은 문제가 없다. 한국에서 사회적 기업이라 부르는 것도 아무 문제가 없다. 그러나, 한국에서 ‘소셜벤쳐’라 부르는 것은 명백하게 사회적 기업 활동의 수혜자를 소외시킨다. 사회적 기업과 분리하여 영원히 수혜자로 낙인찍는 짓이다.
두 번째가 내용을 모르는 정체불명 언어 사용으로 지적 발전을 저해한다. 외국어 발음을 따라 하는 앵무새 짓으로는 깊이 있는 생각을 발전시킬 수 없다. ‘체인지메이커’로 스스로를 정의하는 한 진정한 변화와 혁신을 창조하지 못한다. 멋을 부리는 게 나쁘지 않지만, 실속이 없을 때 부리는 멋을 겉멋이라 한다. 사회 변화를 선도하겠다는 사람이 스스로를 체인지메이커라고 부를 때, 이것은 멋인가, 겉멋인가?
한국에서 1인기업을 원맨컴퍼니(One Man Company)나 미인코퍼레이티드(Me Inc.)로 불러서는 발전이 없다. 다행히 몇몇 선구자가 1인기업으로 용어를 정착시키고, 우리 환경에 맞는 고민과 노력으로 자체적인 발전을 이루고 있다. 1인기업의 한 사람으로서 감사하게 생각한다.
세 번째는 자기도 모르게 사대주의에 빠져 자기 논리 개발에 게을러지는 것이다. 남의 논리를 따르다 보니 자기만의 논리를 개발할 틈이 없다. 영어 표현을 발음만 따다가 사용하는 사람은 명백하게 문화 사대주의자다. 나는 사대주의를 따라 영어 단어를 소리만 따다 쓰는 것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사람은 스스로가 사대주의자라는 것도 모르는 사람이다.
사대주의자의 오류는 영원히 사대주의에서 빠져나오지 못한다는 점이다. 논리상 사대주의에서 벗어나는 유일한 방법은 스스로 대(大)가 되는 길뿐인데, 이것은 기존의 대(大)를 섬기는 자세가 아니므로 사대주의자는 끝내 종속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현실을 살펴보자. ‘소셜이노베이터’와 ‘체인지메이커’를 자임하는 사람들은 끝없이 외국 선진사례를 들먹이고, 해외에서 열리는 회의에 참석해서 유명인사와 찍은 사진을 돌린다. 그 유명인사가 하는 말을 발음만 한글로 적어와서 마치 자기 말인 양 자랑한다. 명백한 오류가 있어도 모르고 넘어간다. 우리 현실에 맞지 않아도 그건 우리 현실이 잘못된 것이라고 생각한다. 무슨 발전을 기대하겠는가?
그 연장선에서 어쭙잖은 외국 인증을 들여다가 팔기도 한다. 이건 그냥 ‘미제니까 좋아요’ 수준이다. 외국에서 명백한 사기를 쳐도 좋다고 퍼 나른다. 알고도 퍼 날랐다면 사기의 공범이고, 몰라서 퍼 날랐다면 무지한 과실범이라는 차이만 있다.
청년을 오염시키지 말라
내가 가장 우려하는 바는 보그매국노체가 다름 아닌 우리 청년을 주요 목표로 하는 점이다. 기성세대보다 영어에 친근하고 외국 문물에 거부감이 적은 점을 공략한다. 청년이 오염된 언어로 사대주의적 사고를 하면 우리 개발협력계는 희망이 없다. 평생 외국 유명인사의 뒤꽁무니나 쫓는 사람에게서 무슨 혁신과 진보를 바라겠는가?
앵무새는 장년이 되거나 늙어도 그냥 앵무새다. 새장에 갇혀 남 흉내로 재롱 피우고 먹이 얻어먹는 재미를 몸에 익히면, 나중에 자기 목소리를 잊는다. 남의 언어로는 내 논리를 발전시킬 수 없다는 평범한 진리를 청년들이 이해해 주길 간절히 바란다.
보그매국노체는 법을 어기고 있다
우리나라 국어기본법은 제14조 1항에서 ‘공공기관 등은 공문서를 일반 국민이 알기 쉬운 용어와 문장으로 써야 하며, 어문규범에 맞추어 한글로 작성하여야 한다. 다만, 대통령령으로 정하는 경우에는 괄호 안에 한자 또는 다른 외국 글자를 쓸 수 있다.’고 규정한다.
이걸 ‘임팩트 리포트(Impact Report)’ 같은 방식을 허용하는 예외조항으로 해석한다면, 그건 중증 문맹이다. 혹시나 생길 수 있는 그런 오해를 피하기 위하여 그 시행령 제11조는 아래와 같이 밝히고 있기 때문이다.
법 제14조 제1항 단서에 따라 공공기관의 공문서를 작성할 때 괄호 안에 한자나 외국 글자를 쓸 수 있는 경우는 다음 각 호와 같다.
- 뜻을 정확하게 전달하기 위하여 필요한 경우
- 어렵거나 낯선 전문어 또는 신조어(新造語)를 사용하는 경우
즉 ‘영향평가 보고서’라는 확립된 우리말 표현이 이미 존재하면 외국어 병기가 문제가 아니라 원천적으로 ‘임팩트 리포트’라는 말을 쓰면 안 된다. 더구나 외국어를 발음만 그대로 적어놓고 괄호 안에 다시 그 원문을 적다니… 세상 창피한 짓이다.
이 법령은 공문서를 대상으로 하고 있으니 민간인들은 멋대로 써도 되는 것 아니냐고? 왜 법을 들먹이면서 남의 자유로운 언어생활을 비난하냐고? 얼핏 말이 될 것 같은 지적이다. 하지만 공적 지원을 받지 않는 개발협력 활동이 우리나라에 얼마나 있는가? 이 법을 공무원만 지켜야 할 법이라고 생각한다면 그것이야말로 ‘민간인’ 편의주의적 발상이다.
더 나아가 개발협력을 주된 업무로 하는 국가기관이, 스스로는 물론이고, 국적불명 용어를 남발하는 민간조직을 지원하면 자기도 모르게 법을 위반하는 것이다. 국어기본법 제17조는 ‘국가는 국민이 각 분야의 전문용어를 쉽고 편리하게 사용할 수 있도록 표준화하고 체계화하여 보급하여야 한다.’고 규정한다.
그러니 정부기관이 보그매국노체로 적힌 용역보고서를 받아서 출판, 보급, 이용하는 경우, 법을 어긴 것이다. 또 새로운 용어를 선도적으로 표준화하지 않아서 보그매국노체가 창궐하도록 놔두는 것도 이 법을 위반하는 직무유기다.
그럼 어떻게 보그매국노체를 추방할까?
앞에서 우리 개발협력계, 사회적 경제계가 오염된 언어에 무감각해 있는지, 그게 뭐가 잘못된 것인지 살펴봤다. 그럼 어떻게 해야 이 상황을 고칠 수 있을까? 앞에서 보그매국노체가 생긴 이유를 간단명료하게 설명했던 한경TV 카드뉴스는 그 해결책도 간단하게 제시한다.
그렇다. 소비자가 해결책이다! 보그매국노체 사용자는 목표 고객이 우호적인 반응을 보이니까 (최소한 그냥 받아주니까) 계속 사용한다. 그러니 그 목표 고객이 보그매국노체 언어를 무시하고 더 나아가 비판적 입장을 강화하면, 생각보다 쉽게 퇴출할 수 있다.
그 목표 고객이 바로 여러분이다. 이제부터 보그매국노체가 보일 때마다 지적하고, 글쓴이를 비난하자. 보그매국노체를 내버려 두는 매체에 적극적으로 항의하자.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것, 보그매국노체가 결코 멋지지 않다는 사실을 우리 모두 진심으로 이해하자. 보그매국노체는 단순한 겉멋 그 이상이다. 아주 저질이고 나쁜 것이다.
그런 차원에서 개발마케팅연구소는 페이스북 그룹 ‘국제개발협력과 ODA’와 공동으로 개발협력계에서 쓰이는 보그매국노체 신고 게시판을 운영하려고 한다. 여러분의 동참으로 우리 업계를 좀먹는 사악한 보그매국노체를 퇴출할 수 있다. 참여하시라!
원문: 개발마케팅연구소 DM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