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간이 뭐길래
중학교 1학년 때 내 청소 구역은 2층 계단이었다. 청소 첫날, 깐깐하고 히스테릭한 성격의 담임선생님은 각 구역을 돌며 학생들에게 ‘제대로 청소하는 방법’을 지도했다. 이제 막 초등학교를 졸업한 아이들, 대부분은 집에서 자기 방조차도 제 손으로 치워보지 않았을 아이들에게 무턱대고 청소를 맡기기에 불안하셨겠지.
담임선생님의 청소 매뉴얼은 효율적이고 확실했다(후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그것은 흡사 군대식 청소 매뉴얼이었다). 그 시절의 나는 정해진 규칙을 꽤 잘 지키는 아이였다. 선생님이 알려주신 대로 계단 청소를 했고, 불과 몇 주 만에 나는 계단 청소의 달인이 되어 있었다. 복도를 지나가며 내가 청소하는 모습을 흡족한 표정으로 바라보시던 선생님의 그 표정이란.
그러던 어느 날, 여느 때처럼 청소하던 나는 계단 난간 손잡이에 붙은 껌딱지를 발견했다. 당시 선생님이 알려주신 청소 매뉴얼에는 계단 난간은 포함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에, 한 번도 따로 청소를 한 적이 없었는데 그날따라 시꺼멓게 눌어붙은 껌딱지가 거슬리는 거다. 청결한 계단 사수의 사명감으로, 쇠자와 커터 칼로 껌딱지를 긁어냈다. 나무 위에 페인트칠을 한 계단 난간이었는데 당연히 껌딱지와 함께 페인트칠도 조금 벗겨졌다. 그리고 여느 때처럼 청소 시찰을 돌던 선생님이 그 장면을 보자마자 나에게 외쳤던 말.
왜 시키지도 않은 걸 해가지고 멀쩡한 난간을 파먹고 난리야!
주입식 교육의 완성은 군대
시키는 대로, 시킨 일만 할 것. 시키지 않은 일을 혼자 결정해서 행하지 말 것. 바로 이것이 주입식 교육의 핵심이다. 내가 중학생 때 겪었던 사소한 일화는 오히려 너무 사소해서 당시의 학교가 얼마나 경직되어 있었는지 보여준다. 하지만 역시, 대한민국 대부분의 남성들에게 주입식 교육이 완성되는 곳은 바로 군대일 것이다. 상명하복을 전제로 하고, 선임으로부터 이어져 온 관행을 구체적 매뉴얼로 삼는 군대라는 조직은 창의성은 고사하고 어떤 변화 자체를 꺼리는 경향이 있다.
더 효율적인 방법이 분명히 있는데도 일단은 여태 해왔던 방식을 고수하려 한다. 그러다 보니 막 전입 온 신병이 사회에서는 아무리 뛰어난 인재였다 하더라도 군대식 매뉴얼을 몸에 익히는 데 시간이 걸릴 수밖에 없고, 그러는 동안에 스스로가 마치 바보가 되어버린 듯한 자괴감을 겪게 되는 것이다. 내가 생각하고 판단해서 행동하기 전에 선임의 지시나 늘 해오던 관행을 먼저 따라야 한다. 그야말로 대대로 주입되어온 행동 양식을 그대로 따라야만 하는 거다.
시킨 일만 하며 살다 보니까
중·고등학교와 군대를 거치며 주입식 교육에 찌들고 나면 자유로운 선택과 기회의 장이 열려도 수동적인 인간이 되기 십상이다. 당장 대학교 강의실만 봐도 그렇다. 강의 내내 열변을 토하느라 입이 말라 가는 교수와 달리 학생들은 질문 한 번 하는 모습을 보기가 어렵다. 왜? 질문하라고 시키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학생 한 명을 콕 집어 지목하면, 아무 생각 없다가도 무슨 질문이든 만들어낸다. 왜? 질문하라고 시켰으니까. 시킨 일은 해내야 하니까.
그렇게 시킨 일만 하며 살다 보니까, 자연스레 암묵적으로 이 사회가 시키는 삶의 경로를 따라야 할 것만 같다. 대학을 졸업하면 취업을 하고, 결혼을 하고, 아기를 낳고 등. 그러다 문득 ‘그 경로를 벗어나는 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면 막 긴장되고 불안하고 그렇다. 사회 부적응자가 된 것만 같고, 시킨 것만 잘하면 아무 탈 없는데 괜히 시키지도 않은 일을 벌이는 것만 같고. 그런데 사실 우리는 모두 ‘시키지 않은 일을 할 줄 아는’ 존재가 되어야만 한다.
그렇다고 막 일탈을 하라는 게 아니라
무슨 제도나 관습을 모조리 타파하고 거부하며 유아독존 해야 한다는 게 아니다. 우리 삶에서 스스로 결정하고, 판단하고, 책임지는 존재가 될 필요가 있다는 얘기다. 원래 그게 자연스러운 거니까. 누가 시키지 않았어도, 우리는 뭐든 할 수 있어야 한다. 그건 ‘하고 싶은 일’ 일 수도 있고, ‘해야 하는 일’ 일 수도 있다. 심지어는 ‘굳이 할 필요가 없는 일’이거나 ‘인생을 허비하는 것만 같은 일’이더라도, 그래서 모두가 하지 말라고 만류하더라도, 당신이 하기로 결정했으면 할 수 있어야 한다. 그 책임도 결국 당신이 지면 될 일이다.
요즘은 다양한 삶의 방식에 대해 인정하는 분위기이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가장 ‘일반적인’ 또는 ‘평범한’ 삶의 경로는 존재한다. 나이 서른에 취직도 하지 않고 글밥 먹어보겠다고 새벽엔 택배 일을 하고, 오후엔 칼럼을 쓰거나 라디오 작가 일을 하는 나 같은 인간은 일종의 경로 이탈 중인 셈이다. 그리고 그런 경로 이탈이 무슨 잘못인 것만 같아서 괴롭던 날들도 있었다. 지금은 ‘어디 소속’이라는 타이틀도 없이 온전히 나 혼자만의 힘으로 비록 적게나마 글로 돈을 벌 수 있다는 사실에 뿌듯하다.
어떤 사람들은 “그냥 시키는 대로, 순리대로 살면 될 텐데 뭣 하러 고생을 사서 하냐”며 타박할 수도 있겠다. 그러니까 순리를 역행한다는 타박인 셈인데, 따지고 보면 우리는 늘 그렇게 역행하고 저항하며 살고 있다. 태어난 모든 존재는 결국 죽음에 이르는 것이 삶의 순리인데, 그렇게 따지면 당장 죽는 것이 가장 순리에 맞는 셈이다. 하지만 우리는 매일 죽어가면서 매일 더 잘 살아보려고 노력한다. 이 얼마나 완벽한 역행인가.
이렇게 결국 우리의 일상도 매 순간이 역행의 연속이다. 아래로 짓누르는 중력에 저항하고, 그 반대 방향으로 역행하는 덕분에 두 발로 서고, 걷고, 뛰는 것 아닌가. 비행을 꿈꾸며 아무 대책 없이 허공에 몸을 날리는 무모함만이 중력에 저항하는 일은 아니다. 그저 조금 더 무거운 배낭을 메고, 조금 더 가파른 길을 걷는 중일 뿐이다. 아무도 시키지 않은 일이다. 하지만 그 덕분에 스스로에게 시키는 일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진짜 내가 원하는, 그런 일을.
원문: 김경빈의 브런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