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잇 포켓(8-Pocket)이라는 말을 아는가?
아이 한 명을 위해 엄마, 아빠, 양가 할머니와 할아버지, 고모, 삼촌의 지갑이 열린다는 말이다. 그런데 막상 조카가 생기니 틀린 말이었다. 에잇 포켓. 그것은 나의 저금통, 통장, 호주머니까지 8개의 돈 나올 구석을 탈탈 털어야 조카의 환심을 살 수 있다는 뜻이었다. 제발 한 번만 삼촌이라고 불러줘. 얼마면 되겠니?
나의 조카… 그 녀석은 타고난 건강 감별사다. 전복이 없으면 숟가락을 들지 않는 녀석이랄까? 녀석의 입맛은 어릴 때부터 청과를 하는 할머니 할아버지가 보내준 신선한 식재료 때문이다. 최근에는 다섯 살이나 먹었다며 자기 건강을 챙기기 시작했다. 맙소사.
이런 조카의 환심을 사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특히 5월은 어린이의 달이 아니던가. 조카 앞에서는 어린이날도 어버이날도 부처님 오신 날도 모두 어린이날이 되어 버린다. 그래서 준비했다. 음료수를. 가족들이 장난감이나 옷 같은 일시적인 조공을 준비할 때 나는 비장의 음료수로 조카와 마음을 빼앗으려 한다.
어린이 홍삼음료, 그것은 치열한 전쟁이다
내가 기억하는 어린이 음료는 블루맛, 핑크맛이 있는 ‘헬로 팬돌이’에 멈춰있었다. 기껏해야 캐릭터가 팬돌이에서 뽀로로로 바뀌었을 거라 생각했는데 시대가 변해도 너무 많이 변했다. 어린이용 보리차, 어린이 홍삼음료… 마트 매대의 한 칸을 채운 어린이 음료의 세계에 충격을 받았다.
어린이 음료 코너. 이곳은 일반 음료수들은 발도 못 들일 사기캐의 전쟁이다. 디자인이며 맛과 건강 그리고 가격까지 어느 하나 삐끗했다가는 눈 밖에 사라지는 음료계의 콜로세움이었다. 내가 구매하려 했던 어린이 홍삼음료 파트에서만도 15종이 넘는 녀석들이 싸우고 있었다.
과연 어린이 음료 중에 최고는 무엇일까? 나는 순수한 동심으로 마트에 있는 모든 어린이 홍삼음료를 장바구니에 담았다. 물론 지갑도 동심으로 돌아간 것은 함정. 오늘은 그중 가장 네임드인 어린이 홍삼음료를 소개한다.
퍼스트 무버, 아이키커
- 캐릭터: ★
- 홍삼력: ★★
- 밸런스: ★★★
어린이 음료시장의 패왕은 뽀로로였다. 하지만 ‘아이키커’가 등장한 이후 이곳에는 스펙이라는 새로운 기준이 생겼다. 어린이가 마시는 음료에 홍삼을 넣을 생각을 했다는 것만으로도 부모님의 사랑 독차지. 비록 중화요리 마스코트 같은 캐릭터가 눈에 걸리지만… 엄마가 사주면 일단 마시는 거다.
아이키커는 사과맛, 포도맛, 오렌지맛이 대중적으로 알려졌다. 거기에 감귤맛이나 망고맛 등 다양한 맛의 엔트리를 보유한 것이 특징. 맛 밸런스도 좋다. 첫 모금에 나는 과일주스의 느낌부터, 목에 넘기고 남는 홍삼의 쌉싸름함까지. 맛의 굴곡이 일정하다. 어떤 맛을 골라도 실패하지 않을 밸런스 캐릭터.
물론 단점은 있다. 일반 어린이 음료와 비교했을 때 능력이 사기인 것이지, 홍삼이 가득 든 보약은 아니라는 것이다. 게다가 어린이 홍삼음료 시장이 커지자 더욱 강화된 경쟁자들이 나타나고 있다. 그래서 홍이장군이라는 홍삼 특화 버전을 만들었다. 1단계에서 4단계까지 사춘기에 도달할 때까지 아이는 홍삼의 늪에서 빠져나올 수 없다. 사춘기가 지났다고? 그렇다면 고시생용 홍삼, 취준생용 홍삼부터 은퇴자용 홍삼까지 있다고…
리얼라이즈, 키크몬 홍삼
- 캐릭터: ★★
- 홍삼력: ★★★
- 재현력: ★★
그렇다. 어린이 홍삼음료 시장은 사실상 배틀그라운드다. 이 서바이벌 매치에서는 가장 나중에 나온 녀석이 가장 강할 확률이 크다. 그리고 가장 최근에 나온 녀석이 ‘키크몬 홍삼’이다. 이 녀석은 뭐랄까 에너지 음료수로 치자면 몬스터? 귀여운 도깨비 모양을 한 키크몬에게 방심한 사이에 넌 이미 건강해져 있다 조카여.
키크몬 홍삼을 마셔봤다. 어린이 홍삼음료를 나란히 마시다가 ‘오’하는 부분이 바로 이 녀석이다. 과일주스를 원했는데 과수원을 데려다 놓은 수준. 키크몬 홍삼은 사과, 포도, 배까지 3가지 종류의 맛이 있다. 각각의 과일맛 뒤에는 쌉쌀한 홍삼의 파도가 일렁인다.
건강 감별사인 조카에게 확 끌리는 부분도 있다. 칼로리나 당류도 기존 음료의 반토막이라는 것. 어린이 홍삼 음료의 경우는 칼로리와 당에 대한 편차가 크다. 당류가 제품마다 적게는 5g부터 많게는 24g이나 된다고 한다. 그런데 키크몬 홍삼은 4g(포도맛은 5g)이다. 이 정도면 내가 먼저 마셔야 할 것 같다.
엄친아스러운 신입의 등장. 하지만 앞으로 제쳐야 할 경쟁자들이 너무 많다. 나이와 인지도가 중요한 이곳에서 아이키커 외에는 모두 햇병아리일테니. 그래서 건든 것이 바로 ‘키’다. 아이키커의 ‘키커’는 키가 크는 키커가 아닌 공을 차는 키커였다는 놀랍지만 슬픈 전설을 꼬집는다. 키크몬 홍삼에는 뼈의 성장을 돕는 폴리칸이 들었다고 한다. 하지만 나의 성장판은 굳게 닫혔는걸.
복수의 안경선배, 뽀로로 홍삼쏙쏙
- 뽀통령: ★★★
- 홍삼력: ★
- 맛콤보: ★★
어린이 음료의 절대자로 군림하던 뽀로로는 홍삼음료들에게 땅을 내줬다. 뽀통령의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는 일이다. 그들은 잃어버린 땅을 되찾기 위해 어린이 홍삼음료 코너에 ‘뽀로로 홍삼쏙쏙’을 파견했다. 심지어 맛의 종류별로 뽀로로와 함께 에디, 크롱까지 탑재했다. 엄마는 홍삼음료를 찾겠지만, 아이들은 뽀로로면 살 테니까.
하지만 홍삼의 성분만으로는 짬이 있는 아이키커(정관장)과 키크몬(한뿌리)의 상대가 될 수 없다. 그래서 준비한 것이 ‘과일맛’. 사과와 매실, 포도와 블루베리로 두 가지 과일을 섞어 맛의 콤보를 넣는다. 사과의 잔잔한 상큼함 속에서 매실의 시큼한 잽이라거나, 포도의 단맛 속에 블루베리의 돌발 출연이 즐겁다.
뽀로로 홍삼쏙쏙은 부모님과 아이. 둘이 있다면 지극히 아이 쪽에 집중한 녀석이 아닐까 싶다. 어떻게 보면 마시는 사람을 배려한 ‘어린이’스러운 홍삼음료. 하지만 알고 있는가. 돈은 엄마가 쥐고 있다는 것을.
홍삼콤보 하드캐리, 캐리 튼튼 홍삼
- 캐릭터: ★★★
- 홍삼력: ★★
- 맛콤보: ★
캐리 언니의 영향력은 뽀로로 못지않다. 유튜브 속 캐리 친구들이 그려진 ‘캐리 튼튼 홍삼’의 강점 역시 높은 인지도를 가진 캐릭터다. 어른들이야 1대 캐리가 어쩌고, 2대 캐리가 어쩌고 말하지만 아이들에게 캐리는 캐리일 뿐이니 함부로 태클을 걸지 말 것. 나 또한 조카 앞에서 함부로 ‘진짜 캐리’를 입에 담았다가 ‘가짜 삼촌’이 될 뻔했으니까.
캐리 튼튼 홍삼도 뽀로로 홍삼쏙쏙과 비슷한 길을 걷는다. 친숙한 캐릭터를 바탕으로 홍삼의 맛보다는 과일의 상큼함을 극대화시키기 위해 과일콤보를 넣는다. ‘딸기사과’와 ‘오렌지귤’이다. 딸기와 사과는 어울릴까 싶어서 놀랍고, 오렌지 귤은 왜 이렇게까지 섞어야 하나 싶어서 놀란 조합. 취향을 탈 것 같은 과일맛보다 홍삼의 쓴맛이 가장 안 느껴지는 게 장점이자 단점이지 않을까?
캐리튼튼홍삼은 여기에 유산균 추출 분말까지 넣었다고 한다. 어린이 홍삼음료 치고 기능과 맛의 연타를 많이 날린다. 하지만 타격감이 미미한 게 아쉬운 점으로 남는다…라고 말하면 삼촌 자리가 위험하겠지? 어딜 감히 캐리 언니에게! 이 가짜 삼촌이!
어른들은 모른다, 어린이 음료의 치열한 전쟁을
어른들이 보기에는 비슷한 캐릭터, 비슷한 맛처럼 보인다. 하지만 마셔보니 같은 과일맛이어도 우러나는 향과 맛이 달라서 골라야 하는 폭이 넓었다. 또한 마시다 보니까 묘하게 중독되었는데 삼촌은 15개를 마시고, 2개만 조카에게 줄 거라는 것은 한글을 깨친 우리만 아는 비밀이다.
무엇보다 마지막 결정은 아이의 몫이다. 나는 프로 건강러인 조카를 생각해서 아이키커와 키크몬 홍삼을 골랐다. 가장 표준적인 안전빵(?)과 함께 고스펙의 끝판왕을 골랐다고 할까? 자, 결승전은 시작되었다. 조카의 손은 과연 어떤 음료를 고를까?
원문: 마시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