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환(ㅍㅍㅅㅅ 대표, 이하 리): 어쩌다 또 나오게 된 겁니까?
이기중(관악구의원 후보): 저번 선거 떨어졌을 때부터 나와야겠다고 생각했어요.
리: 당선이 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나요? 사실 양당 체제라는 게 넘기가 힘든 벽이잖아요?
이기중: 첫 선거에선 430표 차이로 떨어졌지만 그동안 동네에서 활동한 것도 있고, 당도 진보신당에서 정의당으로 바뀌었으니 더 낫지 않을까 생각했죠. 구의원 선거는 중선거구제고, 관악이 기본적으로 젊은 사람들이 많이 사는 동네에요. 호남 출신 분들도 많다 보니 진보 표가 많이 나오죠. 새누리당은 득표력 있는 제3 후보가 나왔던 지난 보궐선거와 총선 정도 외엔 당선된 적이 별로 없어요.
리: 이번에 본인은 득표력 있는 제3 후보인 건가요?
이기중: 그렇죠. 사실 이 동네가 거의 서울의 호남이에요. 민주당 세가 워낙 강하다 보니까 민주당이 오히려 혁신을 못 하는 분위기가 있어요. 후보 연령대도 상당히 높고요. 이번에는 그래도 관악구에 민주당에서도 젊은 후보들이 많이 나왔어요.
리: 2010년에 한나라당이 후보를 두 명 냈어요. 민주당에 밀릴 텐데 무슨 배짱으로 두 명씩 냈대요?
이기중: 지역위원장이 공천을 주는데, 둘 중 하나를 적으로 만들면 자기 선거에 좋지 않으니까요. 그때 둘 다 떨어트릴 수 있었는데, 가번 후보가 저보다 430표를 더 받아서 2등으로 당선이 됐죠.
리: 그런데 이번에는 한 명만 나왔네요.
이기중: 두 번째 선거 때도 새누리당이 한 명 냈어요. 1:1:1로 붙으면, 단순 계산하면 33% 이상을 받았어야 하는 건데 28%로 떨어졌죠. 사실 선거에 계속 떨어지는 사람들의 특징이 ‘해놓은 게 있고 지난번 선거 표도 있으니까 조금만 더 열심히 하면 되겠지’라고 생각해요. 그래도 이번 선거는 바른미래당이 생기면서 좀 더 유리한 구도가 됐죠. 특히 이 동네에서는 새누리당으로 당선됐던 분이 바른미래당으로 재선에 도전하는데, 33%의 새누리당 표가 나뉘면 2등 당선권은 25% 전후가 된다고 봐요. 그 정도는 받을 수 있다고 보죠.
정치가 하고 싶어서 서울대를 두 번 간 사람
리: 초중고 다 강원도에서 나온 거예요? 어떤 학생이었어요?
이기중: 강원도 원주요. 공부를 잘하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딱히 모범생은 아니었어요.
리: 모범생이 아니어도 서울대를 갈 수 있군요… 음대 들어가셨었는데 음악 쪽을 하면 돈이 좀 필요하지 않나요? 부모님은 뭐하셨어요?
이기중: 부모님보다는 사실 할아버지가 원주에서 큰 한의원을 하셨어요. 아버지는 다른 병원에서 일하셨는데 의사는 아니셨고요. 작곡과는 다른 공부에 비해서 돈이 많이 들지는 않아요. 과외비가 들기는 하는데 기악 레슨보다는 싸고요.
리: 그래도 공부를 잘했는지 재수 안 하고 서울대에 갔어요. 음대 공부는 어떠셨어요?
이기중: 작곡과 실기가 화성악, 대위법 같은 건데요. 그냥 공식에 따라서 그리면 되는 거라 음악적 재능이 그렇게 필요가 없었어요. 제가 그리면서도 무슨 소리가 날지 몰랐으니까요. 좀 심각했죠. 사실 고등학교 1학년 때 그냥 갑자기 음악을 하고 싶다고 했어요. 그전까지 음악에 대해서 아무것도 해본 적이 없어요. 그런데 부모님이 심각하게 받아들이시더라고요.
리: 그때까지는 좌빨은 아니었나요?
이기중: 사회 문제에는 관심이 없었어요. 선생님에게 반항한 적은 많죠. 그러다 맞은 적도 있고요. 예를 들면… 학교에서 설문조사를 했는데 이런 형식적인 설문조사 하지 말라고 썼다가 단체기합 받고…
리: 그건 반항심이라기보다 중2병 같은데요. (웃음) 대학 들어갔더니 어떤 일이 펼쳐졌나요?
이기중: 사실 유희열, 신해철 같은 음악을 하고 싶었는데, 음대에서 하는 건 클래식이라… 망했다고 생각했어요. 부모님이 돈 들여서 했는데 다시 공부하고 싶다고 하기도 뭐하고… 대학 생활에 갖는 낭만이 있잖아요? 그런데 그게 없어요. 서울에서 곱게 자라서 예고 나온 애들이라. 그 와중에 제가 생각하는 대학생처럼 노는 게, 음대에 정말 한 줌 남았던 운동권이었어요.
리: 크으… 뭐라고 하면서 꼬시던가요?
이기중: 뭐 특별히 꼬시지도 않았어요. 그냥 새터 때부터 제가 저 사람들이랑 놀아야겠다고 했던 것 같아요. 그 선배들이랑 놀고, 데모도 가고, 화염병도 만들어보고. 그러다 보니 과방보다는 학생회관에 있는 시간이 길어지고, 수업은 다 쨌고, F가 쌓여갔죠. 그래서 여기서는 졸업 못 하겠다 싶어서, 수능 쳐서 인문대로 다시 들어간 거죠.
리: 왜 인문대로 갔어요? 또 데모하러 간 거예요?
이기중: 음대 있을 때 2000년에 민주노동당 가입하고, 창원에 가서 권영길 국회의원 후보 선거운동을 했어요. 그때부터 정치인이 되고 싶다고 생각했어요. 몸담았던 학생 정파가 인문대에 조직이 없어서, 가서 만들어볼까 했던 거죠. 그래도 인문대에선 나름 수업도 들어가고, 군대 갔다 와선 열심히 했어요.
리: 제대하고 다시 운동은 안 했어요?
이기중: 그냥 졸업 준비랑 노무사 공부했어요. 사실 진보정당에서 자기 생업 없이 전업활동가 하는 분들 보면 좀 막막해요. 요새는 중앙당직이 좀 늘어서 괜찮지만, 쥐꼬리만 한 월급 받거나, 배우자를 뜯어먹으면서 살거나죠. 아무래도 정치를 하려면 라이센스가 있는 게 좋죠.
리: 왜 그렇게 정치가 하고 싶었어요?
이기중: 선배들 말 듣고, 데모 나가보니까 정말 신기했죠. 그러다 2000년에 창원 가서 권영길 국회의원 선거를 했을 때 대단했어요. 대선후보였던 권영길이 후보고, 그리고 또 노조에서 정리해고된 노동자 300명이 선거운동에 합류해서 장난 아니었죠. 그런 거 보면서 나도 저런 거 하고 싶다는 뽕을 맞은 거죠.
리: 그런데 그때 권영길 의원은 낙선했잖아요? 그런데도 이렇게 되어야겠다는 생각이 든 건가요?
이기중: 아쉽게 떨어졌죠. 가끔은 그런 패배가 사람에게 더 감동을 주잖아요.
리: 민주노동당이라는 정당에는 왜 꽂힌 거예요?
이기중: 민주당이 많이 진보적으로 됐지만, 그때는 남북관계는 몰라도 노사관계는 한나라당이랑 별 차이가 없었어요. 그래서 노동자 정당, 진보정치가 필요했다고 생각해요.
리: 진보 정당이, 양당제 문제도 있지만 2004년 총선 때 급성장한 후에 맥없이 무너졌어요. 통합진보당도 그랬고요. 왜 그랬다고 생각하세요?
이기중: 사실 우리끼리 편하게 이야기할 때는 경기동부 때문이라고 하죠… 그런데 그것만은 아니고, 자리를 가지고, 특히 국회의원 비례대표 자리를 누가 가지느냐를 갖고 계속 극한의 대립이 있었던 거죠. 그러니까 2008년, 2012년의 극단적 상황이 있었던 거고.
두 번의 낙선, 하지만 모두 이기는 과정이었다
리: 노무사 일은 계속하신 건가요? 개인 사무소를 하신 거예요?
이기중: 첫 선거는 2010년 2월에 졸업하고 바로 나갔고요, 2012년에 세 명이서 같이 노무법인을 차렸어요.
리: 처음에 나올 때는 어땠어요? 선거 과정에서 느끼거나 한 게 있나요?
이기중: 선거를 많이 해본 사람들이 이야기하는 게, 사람들이 이념대로 찍지 않아요. 골수 한나라당 지지자라고 해도 젊은 친구가 열심히 하고, 똑똑해 보인다 싶으면 찍어줘요. 그런 게 아니었으면 민주당 지지자와 새누리당 지지자의 표를 받을 수가 없죠. 진보신당 지지자 표만 받아서 표가 얼마나 나오겠어요.
리: 그때는 서른하나였나요?
이기중: 네. 젊은 사람이 나왔다고 하니까 호기심 갖고 보시죠. 그러다 경력 보고 서울대 나왔다고 하니까 똑똑한가보다 그러죠. 예비선거가 90일인데, 선거 100일 전부터 아침저녁으로 명함 돌리는 걸 60대 후보들은 못 해요. 그때는 2월달이라 날도 춥고요. 민주당, 한나라당 후보분들은 선거 한 달 전부터 나와요. 그럼 두 달은 벌어놓은 거죠. 동네에서 저 혼자 하고 있으니까, 열심히 한다고 봐 주시죠. 그러면 적어도 인지도는 쌓여요.
리: 만나면 이거 어떻게 해달라거나 그런 이야기는 안 하나요?
이기중: 그런 건 될 것 같은 사람들한테만 해요. 안 될 것 같은 친구한테는 그냥 열심히 하라고 하죠. 그런데 이번 선거에는 뭘 어떻게 해달라는 이야기를 많이 듣고 있어요.
리: 선거에서 ‘뚝’ 떨어지니까 기분이 어떠셨어요?
이기중: 사실 처음 나왔으니 10% 넘기면 다행이다 했는데, 막상 까보니까 430표, 1.7% 차이였어요. 그러니 오만 생각이 다 들죠. 의지를 좀 더 가질 걸… 사실 그때 민주노동당 후보와 단일화 논의를 했다가 깨졌어요. 또 당시 국민참여당이 있었는데, 후보가 안 나왔어요. 노력했으면 진보신당-국민참여당 공동 지지후보 타이틀도 달 수 있었을 거예요. 그런 생각이 나중에야 들었죠.
리: 결혼은 언제 했어요?
이기중: 2012년이요. 인문대 들어가서 같은 학부로 만났어요. 정치적 성향은 비슷한데, 그렇다고 운동을 하진 않았어요.
리: 좋은 사람이네요. 노무사 생활은 돈 좀 만졌나요?
이기중: 아니요. 노무사 일을 일단 계속하지 못했어요. 제 선거도 있고 남의 선거도 많이 도와주러 갔고요. 노회찬 선거도 한 세 번 했어요. 그러느라 빚만 늘었죠.
리: 되게 슬픈데요? 라이센스를 왜 땄어요?
이기중: 라이센스를 안 땄으면 더 어려웠겠죠. 아, 그리고 노무사를 따면 마이너스 통장이 나와요. 그게 버팀목이 되어 주는 거죠.
리: 2010년에 떨어지고 나서, 4년 동안 지역에서 어떤 활동을 했어요?
이기중: 사실 초반에는 딱히 지역에서 활동하고 그런 게 없었어요. 그때는 통합, 독자 논쟁 때문에 중앙당에 더 신경을 썼었죠. 통합진보당 만들어질 때는 안 따라갔다가, 강기갑 대표가 당선되는 걸 보고 입당을 했어요. 그런데 입당한 지 3일 만에 의총에서 이석기 제명이 부결되고 난리가 났죠.
리: 거의 뭐 최악의 타이밍만 골랐네요?
이기중: 그래서 정의당으로 가면서 당 일을 주로 했고요. 지역 활동으로는 직능단체랑, 2014년부터 자율방범을 했었죠. 그러면서 동네 아저씨들이랑 술 먹고…
승리로 사람들에게 영감을 주고 싶다
리: 2010년에 아깝게 떨어졌으면, 2014년에는 어땠어요? 더 아깝게 떨어졌다는 느낌일 것 같은데.
이기중: 그때는 선거 막판에 제가 30% 못 넘겠다는 감이 왔어요. 그때 정의당 인지도가 2010년 진보신당보다 더 안 좋다 보니까 진짜 힘들었죠. 그래도 지난번에 아깝게 떨어진 걸 기억하는 사람들도 있었고, 또 젊은 사람들이 많이 사니까 젊은 후보를 좋아하는 것도 있었어요. 정책적으로도 조금 차별성이 있었고요.
리: 어떤 차별성이요?
이기중: 대학동 2/3가 1인가구에요. 서울에서 동 단위로는 제일 높은 데죠. 그래서 1인가구 임대주택 이런 이야기를 했는데 두 번 다 상당히 반향이 있었어요. SH나 LH가 그런 사업을 계속하려고 하니, 그걸 구에서 적극적으로 찾아서 연결해주는 거죠.
리: 사실 구의원 선거는 진짜 디테일 싸움이잖아요? 젊은 후보로서 제시한 게 있었나요?
이기중: 그렇죠, 초등학교 위쪽에 과속카메라를 설치하겠다거나. 저는 젊은 후보로서 이 동네를 문화적으로 살려보자는 이야기를 많이 했어요. 페스티벌을 하자거나 소규모 독립영화 상영관을 만들자거나 이야기를 했죠. 또 지난 선거부턴 사법고시가 폐지되면서 고시촌 상권이 몰락하고 사람이 주는 문제가 생겼어요. 그래서 캠퍼스 타운을 만드는 거죠. 한국은 대학들이 한정된 단지 안에 있는데 미국은 그냥 동네 안에 강의실, 연구실이 있어요. 서울대도 고시촌에 빈 건물로 들어오라는 거죠. 그러면 학생, 교수들이 더 머무르면서 상권이 다시 살아날 수 있으니까요.
리: 2010년, 2014년 연달아 아깝게 패했는데, 제가 보면 아깝게 지는 사람은 계속 아깝게 져요. 뭔가 극복 못 한 게 있거든요. 이번에는 임하는 생각이 달라진 게 있나요?
이기중: 그동안 동네 분들하고 술을 더 먹었죠. 동네에서 활동하는 분들과 얼굴 다 아는 사이가 됐어요. 지역에서 봉사활동하거나 동네 직능단체 임원이거나 그런 분들은 자기들끼리도 네트워크가 있고, 그분들이 말하는 게 영향을 많이 미쳐요. 잠만 자고 출퇴근만 하는 분들도 있고요. 이 표도 중요하고, 저 표도 중요하죠.
리: 하다 보면, 중앙에서 무슨 자리라도 잡고 싶은 욕심이 생기지 않나요?
이기중: 그런데 저는 임명직보다는 선출직, 당직보다는 공직이라고 생각해요. 아무리 작은 단위의 선출직도 좋은 자리의 임명직보다 좋다고 생각해요. 2인 선거구에서 진보정당 젊은 후보가 20%가 넘는 득표율을 얻었다는 건 나름 의미가 있고, 사람들한테 영감을 줄 수 있다고 생각해요. 진보정치를 하고 싶어 하는 후배들이 많은데 그 사람들한테도 모델이 되고 싶어요.
리: 사실 진보정치를 떠나서 청년정치 자체가 되게 어렵잖아요? 그런데 역으로, 한 바닥에 짱박혀서 10년 하면 구의원 정도는 할 수 있을 것 같은데요?
이기중: 저도 그럴 것 같아요. 문제는 10년 동안 짱박힐 수 있는 조건이 돼야죠. 일단 금전적으로 버티기가 힘드니까요. 가족의 지지도 필요해요. 저도, 와이프의 하해와 같은 인내가 있었죠. 동네 아저씨들이랑 맨날 술 먹고 안 들어오는데… 예전 운동권들도 사실 그랬죠. 당에서 버티는 선배들 보면 많은 경우 배우자들에게 의탁하더라고요.
리: (한숨) 그러게요. 당에서 좀 청년 정치인을 지원하고 키우는 게 맞을까요?
이기중: 당에서 청년을 지원, 육성한다는 게 쉽지 않아요. 청년 비례 나가보셨잖아요?
리: 아!!! 이걸 아시다니!!! 조용히 입 다물고 있었는데…
이기중: (웃음) 민주당처럼 20번 넘게 당선되면 청년 몫을 주는 게 가능한데, 정의당은 이번에 4번까지 됐어요. 그런데 이 중 하나를 내준다? 쉽지 않죠.
리: 진보정당이 사실 학벌을 보면 엘리트 집단이에요. 그래서 벽이 생기는 게 있는 것 같아요. 지역민 중 좀 거친 분들도 있을 텐데, 피곤하진 않나요?
이기중: 그분들이 거칠게 말할 때도 있지만 안 맞는다고 생각하진 않아요. 어차피 사람 사는 거, 생각하는 거 다 거기서 거기고요. 다 형님이라고 하고 지내죠. 저한테는 후보님, 의원님 이렇게 부르시다가 기중씨, 기중아, 하면서 편하게 부르는 분도 있고. 사실 제가 아들뻘이에요. 하는 이야기만 잘 들어줘도 예의 바르다, 싸가지 있다 이렇게 돼요.
리: 정책 보니까 되게 재밌어요. 몰카 안전 화장실, 생리대 학교 화장실 무료 배치. 성인지적 관점 반영. 훌륭한데요?
이기중: 몰카를 구청에서 단속은 못 해도, 점검은 할 수 있거든요. 생리대 비치도 재작년 깔창 생리대 보도 이후로 이야기가 조금씩 나오고 있어요.
리: ‘이기중이 말하면 현실이 됩니다’라고 되어 있는데, 지금까지 권한이 없었는데 뭐를 현실로 만들었던 거죠?
이기중: 2010년, 2014년에 했던 공약들이요. 다른 당선자들이 그걸 보고 공약 괜찮다고 받아들이는 거죠. 민주당 구의원 출신한테 직접 듣기도 했어요. 이기중 공약 보고 내가 했다고.
리: 이 공약은 꼭 됐으면 좋겠다 하는 게 있나요? 내가 안 돼도 다른 후보들이 했으면 좋겠다 하는.
이기중: 캠퍼스 타운과 1인 가구 임대주택이요. 그게 대학동 사람들이 가장 걱정하는 거거든요. 대학동 원룸 공실률이 꽤 높아요. 서울시도 사회주택 정책을 많이 하려고 하고 있고요. 예산은 서울시에서 따오는 거지만, 구의원이 쓸만한 건물을 발굴하고, 집주인에게 사업을 홍보해서 이를 연결해줘야 해요.
리: 4년 전의 이기중하고는 뭐가 달라진 것 같아요?
이기중: 지역 주민들을 더 잘 알죠. 더 편하게 대화하고. 자잘한 민원 해결이 구의원 업무의 상당수를 차지해요. 집 앞 도로가 패였으니 포장 다시 해달라, 화단이 엉망이니 꽃 다시 심어달라. 내가 사는 동네에 불편한 게 있으면 다산콜센터 같은 데 이야기할 수도 있겠지만 보통 구의원한테 말하는 게 직빵이에요. 구의원이 직접 구청 공무원을 압박하기 때문에. 그런데, 대학동 2/3가 1인가구인데 이 사람들은 지역정치라는 걸 경험해보지 못한 사람이 많아요. 사실상 버려져 왔던 거죠. 구의원이 사실 움직이는 콜센터고 1차적으로 민원을 받는 존재인데, 그런 구조를 대다수 주민이 활용 못 하고 있죠.
힘들 때 즐기는 자가 일류다
리: 아까 후배들한테 영감을 주고 싶다고 했는데, 정치인으로서의 삶을 추천할 만한 것 같나요?
이기중: 일반적인 경우라면 추천할 만한 것 같지는 않아요. 이걸 즐길 수 있어야 해요. 사람들이 누가 자기를 알아봐 주고, 인사해주면 좋아하는. 그러니 일단 관종이어야 하고요, 성취감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이어야 해요. 단번에 뜨기를 바라는 사람은 어려울 것 같고요. 꾸준히 해서 이루겠다는 목표가 있는 사람이어야겠죠. 생각이 다른 사람과도 대화를 할 수 있어야 해요. 저는 박사모 만나도 그냥 네, 네 하고 넘겨요.
리: 제일 그만두고 싶었던 시기는 언제였나요?
이기중: 진보신당과 민주노동당 통합이 부결됐을 때요. 그때는 진보정치가 다 망할 것 같았어요.
리: 망했잖아요.
이기중: 그 이후에 다른 일로 망하기는 했는데…
리: 이번에 떨어지면 정치 관둘 건가요?
이기중: 확정적으로 이야기할 수는 없는 건데, 가능성이 적진 않을 것 같아요. 더 이상 버틸 힘이 없습니다. 마이너스 통장도, 가족의 인내심도 다 되어가는 것 같고. 사실 구의원 세 번 떨어지고 나면 정치인으로서 미래도 잘 안 보이는 거죠.
리: 나중에 아들이 자라면 어떤 아빠라고 이야기해주고 싶어요?
이기중: 동네 사람들이 좋게 이야기해주는 사람이요. 아이가 좋아하든 아니든 이 동네에서는 이기중 아들이라는 게 입에 오르내릴 텐데, 그때 나에 대해서 좋게 이야기해주고 아들을 좋게 봐주는 게 좋겠죠. 안 그러면 애가 힘들 거 아니에요. 정치인 2세 중에 비뚤어지는 사람들 많잖아요.
리: 지금은 몇 명이 도와주세요?
이기중: 지금은 두 명이요. 디자인과 회계책임 맡고 있는 분이랑, 사무장 하는 분. 자원봉사자는 아직 없어요.
리: 친한 사람이라도 조금 더 짜낼 생각 없으셨어요? 붙을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하지만, 두 번 떨어졌으면 처절하게 싸워야 하는 것 아니에요?
이기중: 사실 예비선거 운동 기간에 운동하는 게 명함 돌리는 거잖아요. 그래서 사람이 별로 필요 없어요. 그리고 사실 제가 딱 필요한 것만 하면 된다는 주의기도 하고요.
리: 마음이 정말 훌륭하신 분이네요. 사실 저도 빡세게 사는 거 싫어해서 요새 인터뷰 도느라 열심히 일하는 제가 뿌듯한데.
이기중: 저는 열심히 하죠. 방금 이야기한 건 좀 다른 거예요. 선거하면서 무슨 아이디어 없냐, 이벤트 없냐, 이러는 걸 안 좋아해요. 선거는 그냥 기본적인 거를 잘 하면 돼요. 선거를 준비하는 건 후보 본인의 몫이죠. 막 쌈박한 거 만들려고 하면 정작 잘 안 되고 실무진만 힘든 거예요.
리: 문재인 대통령은 10점 만점에 몇 점으로 보세요?
이기중: 같은 당이면 10점…
리: ㅋㅋㅋㅋㅋㅋㅋㅋㅋ
이기중: ㅎㅎㅎㅎㅎ 대형 이슈로 가려지는 게 있는데, 일자리나 노동은 좀 애매하죠. 일자리 문제는 노력한다고 되는 건 아니기는 하고, 노동은 대통령이 직접 신경 쓰기는 어려운 부분이기는 하지만요. 그래서 90점?
리: 촛불집회에는 나갔죠? 어떤 생각으로 나갔나요?
이기중: 처음에는 그냥 데모니까 나가야지 그런 거였죠(웃음). 그런데 처음부터 심상치 않다고 생각했어요. 탄핵까지는 예상을 못 했지만요. 그리고 커지니까 신나잖아요? 또 역사의 현장이고. 사람들 나가니까 한 번 가봐야 할 것 같고.
리: 2002년, 2004년, 2008년, 2017년 촛불 다 나가셨을 거 같은데.
이기중: 2004년에는 안 나갔죠(웃음). 그때는 약간 나중에 보니까 대중의 정서와 괴리가 있었던 것 같아요. 민주노동당은 대놓고 노무현 대통령이 탄핵을 유도했다고 평가했으니까요. 민주노동당이 성장하는 이 시점에, 양당제로 회귀하려는 움직임이라고 비판했으니까요.
리: 이번 촛불을 보고 무언가 바뀌었다는 걸 느꼈나요?
이기중: 일단 2008년과 비교해 운동권을 사람들이 어느 정도 냉정하게 보게 됐다는 거죠. 얘들의 능력은 여기까지고, 얘들의 쓸모는 여기까지고. 이걸 잘 알게 되면서, 서로에 대한 오해 없이, 그래도 잘 연대할 수 있게 된 것 같아요.
리: 굉장히 진부한 질문인데, 지금 한국에서 정의당의 가치는 무엇인가요?
이기중: 진부한 질문이니까 진부한 답을 할 수밖에 없을 것 같은데, 왼쪽 날개죠. 부연 설명을 하자면 지금 민주당이 지지율 고공행진을 하고, 대통령도 전반적으로 잘하고 있지만 그럼에도 더 근본적인 개혁을 말하고, 더 진보적 가치를 추구하는 정치 세력이 필요하다는 거죠.
리: 그러면 지금 관악구에 있어서 정의당은 어떤 가치가 있나요?
이기중: 이게 지역 정치 레벨로 내려오면 사실 다 심각해요. 여기는 민주당이 2006년 말고는 한 번도 구청장을 내준 적이 없고, 구의원들도 전반적으로 구태가 심해요. 관악구 의회에 진보세력 구의원이 없었던 게 지난번이 처음이었어요. 그렇게 되고 나니까 구의회 분위기가 확 바뀌었어요. 조례 발의건수, 의정 질의건수가 다 줄었고 전체적으로 의정평가도 낮아졌어요. 지역 시민단체를 대하는 태도도 적대적이고요. 그래서 이번 선거가 중요하다고 이야기하죠.
리: 진보정치가 여전히 소중하다고 생각하세요?
이기중: 네. 그리고 제가 정한 경로가 이거니까, 이거 외에 다른 코스로 성장하는 걸 상상해본 적이 없어요. 또 정의당이기 때문에 할 수 있는 게 있다고 생각해요. 이번에 관악구청장 경선을 했는데, 한 명이 유력했어요. 그러니 막판에 거의 모든 시·구의원 후보가 그 후보 지지 선언을 했어요. 거의 충성맹세죠. 그런 걸 보면서 생각한 게 일단 나는 저렇게 못 한다, 두 번째로 저분이 구청장이 되면 시·구의원이 아무 견제를 못 한다는 거였죠. 이런 게 여전히 진보정치가 소중한 이유 아닐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