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고대문화 2010 여름호에 개제된 글입니다.
정치에 대해서 항상 심심할 때마다 들리는 이야기가 바로 야권은 비전을 보여주지 못하고 반대세력으로만 보여서 밀린다는 것이다.나름대로 여러 가지 세부 성향의 야권 가운데에서도 더욱 그런 이야기를 듣는 것은 바로 진보진영이다. 실제 정책개발을 하는 것이나 결국 이루고 싶은 사회상에 대해서는 늘 무언가 논의가 이루어진다고 쳐도, 문제는 그것을 얼마나 제대로 담론화시켜서 나머지 사회와 효과적으로 소통하는가의 문제가 남는다.
이런 상황에 대해서 민주화 담론이 유통기한이 지났다, 다시 서민의 생활 속으로, 보다 선명하고 과격한 좌파 정책 표방 등 여러 가지 이야기들이 진단 및 대책으로 거론되고 있다. 그런데 정론은 넘치지만 전략으로서의 노하우가 부족한 모습이 흔하고, 교조주의 먹물, 철없는 이상론자, 단순과격 빨갱이 등의 이미지를 형성시켜주곤 한다. 그 결과 한국에서는 진보에게 힘을 실어줄 수 없다는 고정관념만 강화된다. 단순히 진정성이니 우직함이니 하는 모호한 근본 가치에만 몰입할 것이 아니라, 설득이 가능한 방식으로 전략을 짜서 담론을 이끌어가는 것이 매우 중요한 이유다.
이런 류의 고민과 대처방안은 물론 이미 오랜 역사를 지니고 있다. 그 중 가장 널리 알려진 것은 바로 30년대 대공황시대부터 활약한 미국의 노동운동가 사울 알린스키의 “급진주의자를 위한 규칙”으로 한국에도 꽤 널리 알려져 있다. 그런데 그것은 담론싸움의 링 위에서 적을 어쨌든 때려눕히는 방식에 관한 것이었다. 하지만 상당 부분, 사람들이 당사자들의 담론싸움을 보고 승자의 담론을 같이 취해준다는 식의 합리적 사고를 가정하는 완전한 대의민주주의 모델을 전제하고 있다.
반면 오늘날(사실은 당시에도) 현실은 그것보다 복잡하다. 사람들은 링 위의 싸움을 구경할 뿐만 아니라, 직접 그 과정에 크고 작게 동참하고 싶어하며 그렇게 할 수 있는 다양한 미디어통로를 확보했다.
즉, 적과 싸우는 것 이상으로, 시민들과 직접 대화하고 토론을 유도하는 모습을 취하며 그들의 의식을 은근히 형성하는, 여러 대화방식과 미디어 통로를 총동원하는 좀 더 복잡한 전략이 필요하다. 적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라, 적 그리고 적인지 아닌지 애매한 이들과 ,구경꾼과 구경꾼보다는 더 적극적인 참여자들과 기타 등등 수많은 범주의 이들을 상대해야한다. 그렇기 때문에 역설적으로, 가장 합리적이고 상식적인 정공법이 필요하다. 크게 복잡하게 시작할 필요도 없다. 진보 담론을 효과적으로 유통시키기 위해서는 상대를 인정하고, 이슈의 판을 주도하고, 논의를 확장한다는 3가지 원칙 위에, 5가지 전략을 제안한다.
대화상대를 인정하기
담론은 단순히 정보만 쏟아 부어넣는 것이 아니라, 수많은 사회적 대화의 집합으로 형성된다. 당연히 말을 건네고 설득을 하는 과정이 포함된다. 그런데 상대를 계급의식도 없는 자본의 노예, 내가 나서서 진보 이상향으로 이끌어야할 양떼 같은 취급을 하면서 무려 대화를 꿈꾸는 것은 무척 야무진 목표다. 그렇다면 대화상대를 인정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두 개의 전제가 있다.
하나는 사람들은 자기 생각을 잘 바꾸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문학적 통찰이 아니라, 현상유지편향이라는 과학적으로 널리 증명되어온 인지기능이다(더 알고 싶으신 분에게는 ‘Kahneman’이라는 검색어를 추천드린다). 사람의 두뇌회로는 변화하는 쪽을 선택하면 주어질 이득이 매우 매력적이지 않은 한 변하지 않는 쪽을 택한다. 그 바탕 위에 심지어 자신에게 주어지는 모든 정보 가운데 자신의 현재 생각을 지지하는 정보 위주로 선별, 해석, 기억하는 확증편견이라는 것도 작동한다. 시쳇말로, 뭐 눈에는 뭐만 보인다는 것이다.
다른 하나의 전제는 사람들이 각자 셈을 하며 그것을 자각하고 있다는 것이다. 각자 자신에게 최선인 것이 무엇인지 계산하며 매사에 결정을 내리는 것이지, 아무 생각도 없이 단지 구조적 요인으로만 끌려다니는 것이 아니다. 다만 제한적 합리성이라는 개념에서 이야기하듯, 합리적 판단을 하려는 의도는 각자의 제한된 정보 입수 및 처리능력으로 제한될 따름이다.
그렇다면 두 가지 전제를 합쳐보자. 사람들은 자기 의지가 있고, 나름대로 계산을 한다. 그것은 나쁜 것도 좋은 것도 아니라, 그냥 당연한 것이다. 그것을 인정하고 대화를 시도하는 것이 바로 담론전략의 첫 번째 원칙이다.
전략1. 사람들은 자신이 그럭저럭 잘하고 있다고 믿기를 원한다
물론 모든 경우에 해당하는 건 아니라서 스스로 더 자신의 못남을 강화시키곤 하는 우울증 인구도 있지만, 상대적으로 소수에 불과하다. 충분히 많은 이들은 가급적이면 자신의 의견을 바꾸지 않을 준비를 하고 있고, 그렇게 생각하기 위한 전제는 지금도 그럭저럭 잘 하고 있다고 믿는 것이다. 자신이 초래한 긍정적인 결과에 대해서는 과대평가 하고 부정적인 결과에 대해서는 과소평가하는 인지 기제인 ‘자기고양 편향’이 작동하는 셈이다.
그렇기 때문에, 비판을 수용하는 것은 훈련이 필요한 엄청난 능력이다. 나쁜 이야기나 격한 이야기를 한다고 해서 싫어하고, 중립적이지 않아서 싫어하는 것이 아니다. “당신이 잘못했어”라고 누가 삿대질하는 것을 싫어하는 것이다. 인지적 에너지 소모가 크니까 말이다(비유적 의미 뿐만 아니라, 실제 뇌과학 차원에서도).
그러다 보니 성찰을 하게 만들되, 계속 가능성을 짚어줘야 겨우 통할까 어떨까 하는 정도다. 이런 맥락에서 최악의 전략은 “내가 그때 뭐랬어” 즉 “내가 그때 어쩌자고 했는데 따르지 않아서 당신들이 여전히 이모양이야” 라는 접근이다. 사람들을 설득하고 움직임을 만들고 싶은 것이 아니라 그냥 입바른 이야기로 자기 스트레스를 푸는 것에 불과하다. 이것이 바로 “분명히 맞는 말을 했는데 왜 상대를 설득할 수는 없는가” 자문해본 사람들에게 들려주는 대답이다. 따라서 정말로 그럭저럭 잘 하고 있는 부분들을 긍정해주면서, 아쉬운 점을 지목하고 더 나은 방향으로 갈 수 있도록 유도해야 한다.
X: “너희 골 빈 88세대들이 대통령을 그따위로 뽑으니까 이렇게 되버렸잖아, 이 국개들아. 다음엔 생각 좀 하고 잘 뽑아”
O: “곤란한 리더십이 선출되어 여러 문제를 일으키는 상황이 되어버렸어도 어떻게든 잘 살아나가려고 노력하고 있는 것이 우리 시민들의 저력이다. 다음에는 오늘의 문제점들을 거울 삼아 더 나은 선택도 할 수 있으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전략2. 그들의 욕망을 내 방향성에 이어붙여라
설명했듯, 원래 사람들은 변화에 저항하는 것이 기본설정이다. 그런데 진보는 뭘 변화시키는 것 그 자체다. 그렇다면 당연히, 그 변화가 사람들이 원하는 변화임을 알려줘야 한다. 즉 사람들이 자신들이 바라는 바를 내 방향성을 통해 충족할 수 있음을 보여주지 않으면 변화에 저항한다는 것이다.
당신의 욕망이 잘못되었으니 훌훌 털고 내 뒤를 따라와, 뭐 그런 식으로 대화를 시도하고도 욕먹지 않는 것은 매우 희귀한 일이다. 욕망을 부정한 것으로 취급하며 금욕을 요구하는 것은 자기희생적 지사정신에 빠진 활동가들이 빠질 수 있는 너무나 흔한 에러다. 사람들이 욕망이 있음을 인정하고, 연쇄살인충동 같은 것이 아닌 한 그 욕망을 가지는 것이 잘못된 것이 아님을 인정해야 한다. 그리고 그 욕망을 얼마나 어떻게 개인에게도 사회에게도 더 나은 방식으로 실현시킬 것인가 생각의 지평을 넓혀주며 내가 이야기하는 진보의 방향성과 공통 연결고리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비유하자면 야채를 싫어하지만 정크푸드를 좋아하는 이에게 시금치를 먹이기 위해서라면, 시금치피자, 시금치버거를 만드는 접근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X: “뉴타운은 환경파괴이자 탐욕의 상징이다. 사탕발림에 속지 마시오.”
O: “이왕 잘살아보자고 하는 뉴타운이라면, 단지 집 허물고 비싼 집 지어 주민 물갈이하는 수준에 머물러서야 되겠습니까. 단순히 부동산 재산 증식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지역공동체 활성화에 기반을 둔 사회적 생활환경 향상이 원래 우리들이 바라는 진정한 잘사는 ‘뉴’타운이죠. 친환경적 개발, 지역공동체 강화에 의한 복지편의와 합리적 상권관리가 갖춰진 우리들의 뉴타운을 만듭시다”
전략3. 이상향은 제시하되 혁명을 부르짖지 말아야 한다
무려 혁명을 해서 모든 것을 뒤집어야 꿈꿀 수 있는 세상이라면, 너무 거리감이 멀어서 좀처럼 공감을 살 수가 없다. 게다가 그런 주장을 하는 순간 이미 대결적 싸움꾼, 실행력 없는 바보로 낙인찍힐 뿐이다. 게다가 사람들이 같이 뛰어들기 위해 넘어야 할 진입장벽이 너무 높다. 무려 혁명을 감수해야 한다니 말이다.
주장하는 쪽에서는 역사적 필연이지만, 받아들이는 쪽에서는 전형적인 하이리스크 사업이다. 활동가들의 열정은 그 혁명의 과정과 결과가 잘 된다는 보장이 전혀 되어주지 않는데 힘을 실어줄 이유가 없다. 게다가 혁명을 부르짖기 위해, 온갖 현실의 문제점들을 선명한 느낌이지만 결국 나중에는 무엇을 이야기하는지조차 혼란스러워지는 어떤 추상적 개념으로 압축하는 경우도 흔하다. 그 쯤 되면 너무 논리적으로 공격당할 구석까지 늘어나버린다.
허구한 날 신자유주의 척결이나 사이비좌파 말고 진짜 좌파혁명으로 뒤집자고 해봐야 공감을 살 수 있는 것은 한 줌의 지지자 뿐이다. 적어도 오늘날 한국사회 정도로 안정적 사회에서라면, 진짜 혁명을 목표하더라도 담론을 혁명으로 포장하는 것은 실용성이 없다. 반면, 최종 목표로서 이상향을 제시하지 않으면 어딘가로 변화해 나아가야한다는 것 자체를 납득시키지 못한다. 그렇기 때문에 이상향은 저 방향으로 가면 있고, 그것을 위해 지금 내딛을 수 있는 작은 첫걸음을 강조해야 한다. 누구에게나 안정에 대한 지향은 있다. 그것을 흔들지 않으면서, 개선의 필요성을 이야기하고 하나씩 더 많은 개선을 제안하고 이끌어내는 ‘문 칸에 발 집어넣기’ 기법이 필요하다.
X: “뜨거운 민중연대로 신자유주의를 뒤엎고 노동천국을 이룩하자! 혁명만이 그것을 이룰 길이다. 타협은 그들의 음모에 말려드는 것이다.”
O: “사람이 존중받는 더 선진적인 사회는 얼마든지 가능합니다. 먼저, 최저임금제 강화와 사회임금 개념 본격화 같이 정책적으로 인간 노동의 금전적 가치를 좀 더 높게 쳐주는 것에서 시작할 수 있습니다.”
전략4. 논의의 핵심을 개인화시켜야 한다
사람들이 상황을 판단하는 것은, 자신에게 주어질 득실을 셈하는 것이다. 그 자신이 개인일수도, 확장된 자아로서 가족일수도, 혹은 오지랖을 발휘해서 사회 전체일 수도 있지만 우선 자신에게서 시작한다. 어떻게 이야기하든, 사람들은 어떤 논의라 할지라도 결국 자신의 개인적 상황에 맞추어 수용하기 마련이다. 그렇기에 설득을 하려고 하는 사람 각 개인의 생활과 이해관계의 시각에서 논의를 설계해줄 때 비로소 의도한 바를 제대로 전달할 수 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사람들은 알아서 자기 마음대로 즉 전혀 예상하지 못한 방식으로 논의를 개인화시키거나, 아니면 그냥 무시한다. 전략적으로 담론을 끌어나갈 수가 없다. 특히 진보진영에서 흔히 다루는 크고 거시적인 방향성일수록, 개인의 교환 대가로 생각할 수 있도록 변환해주는 것이 좋다.
예를 들어 ‘연대’라는 것은 각종 아름다운 도덕적 의의를 벗겨놓고 말하자면 당신이 극빈층만 아니면 세금 더 내라는 소리이며, 그 이야기에 관심을 제대로 기울이는 각 개인은 그것을 이미 느끼고 있다. 사람들이 힘을 합쳐 세상을 바꾸는 상상을 하는 것 이전에 내가 들이는 비용, 내가 얻을 혜택을 본다. 그 부분에 직접 손을 뻗어서 대화를 시도할 것인가, 아니면 여전히 큰 개념만 터트릴 것인가.
그럴 때 국가가 무언가를 당신에게 빼앗아가는 것이 아니라, 당신이 사회라는 거대공공보험에 투자를 한다는 식으로 개념을 잡아놓는 것이 바로 그런 개인화에 대한 공략이다.
X: “누구나 공평한 아름다운 완전한 복지세상을 만들어 봅시다” (반응: “내 세금!”)
O: “예측하기 어려운 험한 세상, 혹시나 당신이 망했을 때 덜 고생하는 것이 좋습니다. 가족에게 의지하던 모델은 유감스럽게도 주먹구구 지난날의 이야기입니다. 그러니까 선진국형 사회안전망 확충을 위해 힘써야할 때입니다. 세금으로 참여해주십시오. 그 대신 확실한 조세정의를 확립하겠습니다.”
전략5. 당신들과 가까운데, 기득권에서 멀지 않음을 과시하라
특히 사회/정치적 세력의 설득력이라면, 이 세력에 대한 내 지지가 무언가 실질적 결과를, 그것도 그냥 내가 혼자 하는 것보다 더 나은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는 효능감에서 나온다. 그런 효능감을 실제 결과로서든 조만간 언제든지 그렇게 할 수 있다는 희망의 이미지로서든 제공해주지 못하면 이쪽을 지지해줄 이유가 없다. 그런 의미에서 설득력은 적당한 가까움, 적당한 거리감에서 나온다.
적당한 가까움이란 이들이 내 이해관계를 반영해줄 것이라는 친밀감이다. 반면 적당한 거리감이란, 이들이 나보다는 더 강력한 이들이라는 신뢰다. 이 두 가지 가운데 어느 쪽도 부족해서는 안 되고, 한 쪽으로 쏠려도 안 된다.
우리와 연관이 없다고 보여도 곤란하고, 우리와 어차피 별 다를 바도 없다고 여겨져도 끝이다. 실제로 큰일을 해낼 만큼 우리보다 유능한데, 우리와 가깝게 함께할 세력이라는 식으로 균형을 추구해야 한다. 그런 큰일을 해낼 수 있을 것 같은 능력이 시쳇말로 기득권 확보다.
그런데 한국사회에서 상대적으로 마이너한 진보진영이 이미 우리는 기득권에 가깝다고 주장하는 것은 누가 딱히 믿어줄 이유가 없다. 그렇기에 중요한 접근법은 전망보다 현실을 알리는 것이다. 더 작은 규모에서라도 괜찮다. 이미 기득권을 잡고 성공한 사례들을 잘 발굴해서 최대한 실감나게 알리는 것이 중요하다.
X: “저희 당은 열악한 상황 속에서도 오로지 순수한 진정성으로 기반을 다질 것입니다. 그리고 10년안에 집권여당이 되겠습니다.”
O: “저희 당은 **시 **구의 단체장을 배출했습니다. 그 동네는 임금수준이나 복지설비가 잘되어있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