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폴 그레이엄의 「Keep Your Identity Small」을 번역한 글입니다.
내가 마침내 깨달았어! 정치나 종교 얘기 할 때 왜 사람들이 그렇게 왈왈 물어뜯나 했더니. 그렇잖아요? 종교 얘기만 나오면 항상 제대로 토론이 안 되고 결론은 막장이 돼요. 왜 그럴까요? 자바스크립트나 베이킹이나 뭐 또 다른 주제로 얘기할 땐 안 그런데, 꼭 종교 얘기만 하면 서로들 물어뜯어서 개판으로 종결된단 말이죠.
왜냐하면 종교는, 사람들이 그거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데 별다른 전문성이 필요하다고 생각을 안 하거든요. 강한 믿음(오예!)만 있으면 누구나 토론에 참여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말입니다? 자바스크립트를 주제로 한 스레는 절대로 그렇게 단시간에 확 안 커져요. 참여하려면 어느 정도의 전문성이 필요하다고들 생각하는 분야니까요. 하지만 종교라면 전국민이 전문가죠.
근데 충격적인 건 정치도 그렇다는 거예요. 정치나 종교나, 자기 의견을 표현함에 있어서 전문성 같은 건 필요 없다고들 생각하는 분야라는 거죠. 강한 확신!만 있으면 된다는 거예요. 종교와 정치에 어떤 공통점이 있길래 이런 유사성을 띄는 걸까? ‘정답이 없는 문제’라는 점을 하나의 가능한 대답으로 드릴 수 있겠네요. 똑 떨어지는 답이 없으니까, 사람들은 누구나 별 부담 없이 의견을 낼 수 있죠.
그 누구도 “이건 틀렸어!” 하고 증명할 수가 없고 모든 의견은 하나같이 유효하니까 다들 자기 생각들을 뱉어내는 겁니다. 하지만요, 사실은 그렇지 않아요. 정치 문제 중에서도 분명한 답이 있는 게 있죠. 어떤 공공 정책에 얼마의 예산이 투입되어야 하는가, 같은 거요. 하지만 이런 질문조차 쓸데없이 열 올리기 때문에 역시 개판 난장으로 끝난다는 거…
제 생각에 사람들은 종교와 정치를 자기 정체성의 일부라고 생각해서 그런 것 같습니다. 자기 정체성의 일부를 놓고 벌이는 토론이니 당연히 결실 있는 논쟁이 되지가 않죠. 당연히 편파적으로 되어 버려요. 종교나 정치 이야기를 할 때, 참여자가 토론에 자기 정체성을 끌어들이면 주제 자체가 아니라 소속에 의존해 이야기의 결론을 내려고 하게 돼요.
이를테면 몇 개 나라가 참여한 전쟁에 대해서 이야기한다고 쳐요. 이런 토론이야 정치 싸움으로 변질되기 쉽겠죠. 하지만 청동기 시대에 일어난 전쟁이라면 어떨까요? 편 들 사람이 없어! 보세요. 주제(이 예에서는 ‘전쟁’) 때문에 싸움이 나는 게 아니라, 정체성 때문에 싸움이 나는 겁니다. “이야기가 종교 싸움으로 변질됐다”는 소리는 뭐냐면, 이야기 자체가 사람들의 정체성 문제로 몰려가기 시작했다는 의미에요.
사람들이 종교라는 주제가 아니라 발화 집단에 초점을 맞추기 때문에 그런 건데, 사실 주제 자체 때문에 개판이 벌어지는 게 아니란 얘기죠. 애초에 이 문제에는 답이 없으니까요. 이를테면 프로그래밍 언어들의 상대적인 장점에 대한 질문도 때로는 아주 광신적인 언쟁으로 변질될 수 있긴 해요. 엄청난 수의 프로그래머들이 자기가 쓰는 프로그램에 의해 스스로를 규정하고 있으니까요.
하도 싸우다 보니까 사람들은 “야, 걍 이 문제는 노답이야! 모든 프로그래밍 언어는 다 장점이 있는 거임!” 하고 결론 내리기가 쉬운데요. 이건 명백하게 틀렸다고 봐요. 사람이 만든 거니까 좋을 수도 있고 나쁠 수도 있죠. 프로그래밍 언어라고 뭐 다르겠어요? 프로그래밍 언어의 장단점에 대해 논할 때 정체성을 꺼내 흔드는 사람은 배제하고 토론해야 결론이 날 거예요.
어떤 주제든 간에 토론을 통해 결실을 맺으려면 참여자 전원이 자기 정체성 문제를 끄집고 오지 말아야 합니다. 정치나 종교 분야의 토론이 왜 이렇게 지뢰밭이 되었겠어요? 너무 많은 사람이 자기 자아를 데리고 와서 토론에 참여하기 때문이죠. 흥미로운 대화를 하려면 원칙이 필요합니다. 안 그러면 포드 트럭이 좋냐 쉐비 트럭이 좋냐 하는 이야기 하면서도 다치게 돼요.
그렇다고 해서 논란의 여지가 있는 주제의 토론 자체를 피하시라는 건 아니고요. 어떤 게 자기 정체성의 일부라고 여겨버리면 명료하게 판단하는 능력을 잃게 마련이니까 정체성 끌고 들어오기를 최소한으로 하는 게 낫다는 얘기에요.
이걸 읽는 대부분 독자는 상당히 관용적인 분들일 거지만, 스스로를 x라고 여기면서 y라는 존재를 참아주는 것을 넘어서야 합니다. 스스로를 x라고 여기지도 말아야 해요. 스스로에게 더 많은 딱지를 붙일수록 사람은 더 멍청해지기 마련이죠.